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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니 퍼스트가 원래 콘라트가 맡기로 되어 있었던 현애 일행의 가이드를 하기 바로 전에 일어난 일이다. 시점으로 치면 오후 5시 반쯤, 저녁식사를 하던 때였고, 콘라트가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가브리엘이 일을 마치고 돌아와서, 식사를 하다가, 문득 미켈을 불렀다.
“미켈, 이거 한번 봐봐.”
가브리엘은 미켈이 돌아보자, 웬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뭔데, 가브리엘?”
가브리엘이 내민 쪽지에는 점괘가 적혀 있었다.
“지금부터 며칠 동안은 처소에서 꼼짝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행복하다고? 이런 점괘도 있어? 아니, 너 이런 점 치는 건 안 하지 않냐?”
“우리 거래처 직원이 꼬셔서 간 거야. 그냥 재미 삼아서 가 본 거라고.”
하지만 그때, 미켈은 가브리엘의 표정이 영 밝지 않은 것을 읽은 모양이었다.
“야, 왜 그래? 뭐라도 잘못 먹었어? 표정이 왜 그렇게 어두워?”
“아, 아니야. 나 어두운 표정 한 적 없어.”
“아니, 너 평소에 짓던 표정 아니야. 아주 어두워 보여.”
가브리엘이 정말 그렇냐며 다른 크루들에게 묻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중 도레이는 근심이 가득하다고 이른바 확인사살까지 했다.
“너 입맛도 없어 보이네. 그 점괘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평소보다 조금 먹잖아.”
“맞아...”
“봐봐, 맞지?”
“사실은 거래처 직원이 그런 말을 했거든.”
“무슨 말?”
“그걸 찢으면 점괘를 받은 사람이 며칠 내로 시름시름 앓거나, 사고를 당해서 죽게 된다는 거야. 그 점쟁이가 워낙 용한 점쟁이인데, 자기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 점괘를 찢어 버린 사람들은 예외없이 그렇게 됐다더라고!”
“가브리엘, 너 그 점괘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다? 안 믿는다면서.”
미켈은 대뜸 그렇게 말했다. 당연히 가브리엘은 손을 휘휘 저으며 고개도 가로저었다.
“믿고 있는 게 맞아. 말로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의식중에는 거기에 휘둘리는 거지.”
그러고서 미켈은 다시 그 점괘가 적힌 쪽지를 크루들 앞에 들어 보이고서 말했다.
“너희들도 봐. 이런 것에 휘둘리지 마. 고작 이런 쪽지에 우리 운명이 결정되지는 않아. 만약 악운이 이런 걸 찢어서 받게 된다면, 내가 기꺼이 받아 주지. 해 보라고 해.”
그러더니 미켈은 그 쪽지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찢어서, 한가운데 있는 촛불에 넣고 다 태워 버렸다.
“해 보기 전까지는 몰라. 뭐든지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지. 지금 콘라트에게 우리 업계가 다 쥐여 지내는 판이지만, 기회는 올 거야. 너희 중 누구 하나라도 움츠러들거나 소극적인 모습을 내 앞에서 보인다면 가차 없이 내칠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그 덕분인지 가브리엘은 그 점괘의 내용은 마음에 크게 두지 않고, 입맛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식사를 다 마치자마자, 콘라트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너, 그 점괘 내용 정말 믿었던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잖아.”
“응, 믿거나 말거나지만.”
가브리엘은 담담하게 말한다.
“나도 그게 진짜로 미켈하고 내 운명이라고는 생각 안 해. 중요한 건 거기에 속박당해서 안절부절못한다든가 했다면 지금과 같은 행운도, 불행도 우리에게 오지 않았을 거라는 거지.”
“미켈이 죽었는데, 지금 우리가 이런 걸 얻어 봤자 다 무슨 소용이야.”
“확실한 건, 그때 우리가 안주했다면 지금처럼 한 걸음 나아가지는 못했겠지.”
비앙카가 울먹이자, 바리오가 얼굴을 비비며 입을 연다.
“그리고 저 손님들도 좋은 가이드를 만나지 못했을 거고.”
한편, 발레리오는 누군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고 있다.
“형님, 발레리오 형님, 괜찮으세요?”
“피오 아니냐? 거기는 별다른 일 없지?”
전화 너머의 피오의 목소리는 안도감에 벅차오른 듯하다. 거기에다가 울먹이는 것같이 들리기도 하다.
“정말 다행이에요. 비토리오 형도 거기 있는 거죠?”
“너 왜 그래? 우리는 다 무사한데.”
“사실은 좀 전에 깜박 졸았는데, 꿈에 프리모 형이 나온 거예요. 반갑게 인사하니까, 발레리오 형과 비토리오 형도 옆에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신 거기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프리모 형이 아무도 여기 오면 안 된다고 쫓아 보냈어요. 깨고 나서도 그 꿈이 자꾸 생각나서 전화해 본 거예요.”
“그래, 고맙다.”
“조심히 오세요.”
전화를 끊고서 발레리오가 비토리오를 돌아본다. 어느새 비토리오도 옆에서 통화 내용을 듣고 있었다.
“맞아요...”
옆에서 비토리오가 말한다.
“저도 잠깐 정신을 잃었을 때 프리모가 보이더라고요. 프리모가 ‘형은 여기 오면 안 된다’고 필사적으로 밀어내는 것 같았는데...”
“그래.”
발레리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 온 목적 중 하나가 사라지니까 허전하기도 한 건 사실이야.”
“에이, 발레리오 씨! 그게 무슨 말이에요!”
발레리오가 돌아보니 현애가 무릎에 냉찜질을 다 하고서 일어서고 있다.
“적어도 살지 못할 이유보다 살아갈 이유는 훨씬 더 많다고요.”
“그래, 네 말이 맞는다.”
발레리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태양석을 둘러싸고 있는 조나와 가브리엘, 자라 등을 돌아보며 말한다.
“한 가지 처리할 절차가 남았죠.”?
발레리오가 말하자 조나가 먼저 발레리오를 돌아본다.
“누구십니까, 당신은?”
“이 보석을 사기로 했던 사람입니다.”
발레리오가 그렇게 말하자 일순간 조나가 의심스럽다는 듯 발레리오를 몇 번 훑어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당신이 이걸 살 사람이라고요? 저는 믿기지 않는데요.”
“웃기지 말라고, 당신.”
조나를 밀치고, 비앙카와 도레이가 발레리오의 앞에 선다.
“저희가 계약했어요. 미켈이 계약했던 발레리오라면 당신이잖아요?”
“말도 안 된다고!”
조나도 지지 않겠다는 듯 다시 앞에 선다.
“분명히 저 파디샤라는 녀석이 사라지기 전까지 이 태양석에는 내가 가장 가까웠어!”
“무슨 소리야, 조나 피츠조지! 태양석을 날로 먹으려고?”
근처에서 보고 있던 가브리엘도 말다툼에 끼어든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수작은 접어 두는 게 좋겠어. 보는 눈이 좀 많아서 말이야!”
“손대지 말라고, 파울리. 내게 무슨 수작이라도 했다가는...”
그렇게 테르미니 퍼스트와 조나의 신경전이 잠시 이어지다가, 이윽고 잠잠해진 것을 확인한 발레리오가 입을 연다.
“예, 두 쪽의 입장은 잘 들었습니다. 일단은 계약한 대로 제게 양도하는 걸로 하죠. 그런데, 좀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그게... 뭐죠?”
테르미니 퍼스트 크루들과 조나가 한 목소리로 묻자 발레리오는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제게 그것을 양도하기 전, 어느 쪽에 소유권이 있었는지를 확인하겠습니다.”
“그야... 당연히 저희죠!”
조나가 먼저 말한다.
“그 망할 녀석하고 싸워서 제가 쓰러뜨린 거라니까요!”
“아니지!”
곧장 자라가 조나의 말을 가로막고 말한다.
“여기 증거도 있습니다. 처음에 발굴 현장에 저희가 있었죠. 저희가 며칠 보관하다가 이리로 가져온 것이고요. 쭉 저희하고 연락하지 않으셨습니까?”
물론 발레리오도 알고 있다. 테르미니 퍼스트와는 그동안 연락을 해 왔고, 성공적인 태양석 운반을 위해 요원들도 파견한 적 있다. 하지만 자신의 몫을 주장하며 우길 것이 분명한 조나를 잘 달래서 돌려보내야 한다...
“좋습니다. 그러면 여기 있는 분들이 공동소유했다가 제게 양도한 것으로 하죠. 대금은 그만큼 드리겠습니다.”
“자... 잠시만요.”
자라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한다.
“지금 저희의 몫을 떼서... 여기 이 털보 녀석에게 주겠다는 건가요?”
“뭐? 털보? 말 똑바로 해! 다리 좀 절뚝거리지 말고.”
“말 다 했냐?”
자라와 조나가 또 싸우려고 하자, 발레리오는 급히 제지한다.
“자, 자, 싸우지 마시고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제가 지급할 금액은 당초 테르미니 퍼스트에 약속한 금액의 3배이며, 여기 모인 여러분께 균등하게 배분될 것입니다. 문제는 없죠?”
모두 말이 없다. 조금 떼이는 기분이기는 해도 3배나 지급해 준다니 그건 그것대로 만족이다. 가브리엘이 한 마디 한다.
“여기까지 왔지만 이 현장에 함께하지 못한 미켈 파울리 씨도... 포함해서 말이죠.”
“물론입니다.”
발레리오는 흔쾌히 동의한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태양석을 양도하는 일. 하지만 아무도 그것을 들어올리지 못하고 있다. 아까 태양석의 가공할 위력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이야... 나는 저거 손 못 대겠는데.”
바리오가 입을 열자 옆에 있는 도레이가 한 마디 한다.
“야, 바리오, 벌레들 좀 나오라고 해 봐. 그러면 저 태양석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거 아니야?”
“상자라면 몰라도 저 태양석을 직접 만지는 건 무리가 크지.”
바로 그때.
지켜보고 있던 현애가 앞으로 나서서, 허리를 굽히더니 태양석을 간단히 들어올린다. 자세히 보니, 두 손에는 얼음의 막이 씌워져 있고, 태양석 역시 두꺼운 얼음으로 코팅되었다. 철제 상자에 담으니 그제서야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다들 보라고요. 이제 발레리오 씨한테 전달해야죠.”
우여곡절 끝에 태양석이 든 철제상자는 발레리오가 받는다.
“이제 태양석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형님?”
비토리오가 묻자 발레리오는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답을 내놓는다.
“태양석은 파괴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요?”
“우리 재단이 보관할 거야. 필요할 때는 언제든, 인류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지만 아주 깊숙한 데에 숨겨놓아야지. 누군가 다른 마음을 먹고 함부로 빼냈다가는, 또 지금과 같은 불행한 사태가 생길 수 있으니까.”
“형님다운 생각이군요.”
“그래. 이제 요원들을 불러야 할 때야.”
한편 현애는 세훈과 함께 객실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야.”
“너도 그렇지?”
“그러게. 웬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기는 했지만.”
“너희들!”
누군가가 현애와 세훈을 불러세운다. 돌아보니 가브리엘이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그래도... 여행은 계속해야겠죠? 남은 시간도 있으니까.”
세훈이 그렇게 말하자, 가브리엘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그래. 너희들 말고는 내 존재를 모르니까, 남은 기간은 내가 미켈 행세를 하면 될 거야.”
“그래요? 미묘하게 다를 것 같은데...”
“너희들이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우리 형제를 아는 사람들도 다들 구분을 힘들어했어.”
그렇게 말하고서, 가브리엘은 촉촉이 젖은 얼굴로 아케이드 쪽을 돌아보며 말한다.
“미켈은... 아주 용기 있는 사람이었지. 너희들도 알 거야.”
“네...”
“결코 잊지 말아 줘.”
“물론이죠.”
그로부터 며칠 후.
미린역 카페거리의 한 카페에는 중학생~고등학생 정도 되는 일행이 큰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다. 다들 가운데쯤에 앉은 붉은 베레모를 쓴 여학생에게 관심이 쏠려 있다.
“이야, 며칠 못 본 사이에 많이 바뀐 것 같은데?”
가운데에 앉은 현애를 보고서 왼쪽에 앉은 알렉스가 말한다.
“정말 많이 바뀐 것 같다고.”
“에이, 무슨. 평소 그대로인데.”
“아니, 진짜 많이 바뀌었다니까.”
주리도 현애를 흘끗흘끗 보며 알렉스를 거든다.
“며칠 새에 어른이 된 것 같기도 하다고.”
“나 아직 그럴 준비 안 됐어.”
그렇게 말해도, 확실히 돌아오니 기쁘기도 하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지만, 돌아보니 어떻게 이 모든 위기를 넘어왔나 하는 생각도 들고 한다.
“야, 여행 갔다 온 이야기 좀 해 주라. 어땠어?”
“맞아. 우리도 듣고 싶다고!”
“좋아. 그럼 시작해 줄게. 놓치지 말고 잘 들어야 한다?”
그렇게 현애가 친구들을 구슬리며, 입을 연다. 다들 귀를 쫑긋 세운다.
- <초능력자 H> 完 -
---------------------------
완결입니다. 그동안 읽어 주시고 사랑해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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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2-02-28 13:18:55
여행이 시작되기 전에 파울리 형제에게 저런 일이 있었군요. 그리고 그 점괘대로...
삼국지연의에서 전국옥새에 대해 손견이 했던 말이 생각나고 있어요. 낙양의 우물 속에서 죽은 채로 발견된 궁녀가 지니고 있던 그 옥새에 대해서 손견이 그렇게 말했죠. 그 옥새를 확보해 있었던 손견은 제후들이 모인 가운데에서 자신이 그걸 갖고 있다면 대명천지에 머리가 깨져 죽을 것이라고. 그리고 결국 이후 황조의 복병에 당해 자신의 말처럼 그렇게 전사해 버렸어요. 그것도 같이 떠오르면서 역시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있기도 하고...
이제는 가브리엘이 미켈의 몫까지 같이 살아가겠네요.
역시 문제의 태양석은 다시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겠네요. 태양석이라는 이름을 지녔지만 태양이라기보다는 돌이라야 하는...
그리고, 적어도 살지 못할 이유보다 살아갈 이유는 훨씬 더 많다는 말이 정말 인상적이고 멋있어요. 사실 처음 읽었을 때 눈물이 많이 나왔는데 지금 다시 읽으며 코멘트할 때도 역시...
마지막까지 흥미롭게 잘 읽었어요. 연재에 감사드려요!!시어하트어택
2022-03-06 23:27:46
저 점괘를 믿었다면 일행은 아마도 무탈한 여행을 할 수 있었겠지만, 파디샤가 세상을 자기 멋대로 바꿔버리는 건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조그만 데에서 출발하지만 결과는 아주 많이 달라졌죠.
그간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차기작도 기대해 주십시오.
SiteOwner
2022-04-11 23:16:30
불길한 예감은 잘 맞는다는 것도 확인되고, 게다가 이런 생각까지 듭니다. 산 사람에게는 이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렇다 보니 피오가 발레리오에게 전화상으로 이야기한 꿈 이야기가 더욱 가슴아프군요. 이미 고인이 된 프리모가 피오를 쫓아보낸...
우여곡절이 많았고 미켈 파울리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는 불상사까지 일어났지만, 그래도 여행에 함께한 사람은 야욕에 불타는 자를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들이 바로 그들의 사명이겠지요.
이런 험난한 여행이 저의 실제상황이라면 과연 어떻게 대처했을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차기작도 기대됩니다.시어하트어택
2022-04-17 23:10:56
물론 그 점괘 때문에 미켈이 죽은 건 아니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느낌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죠. 그리고 아쉬움과 안타까움에서 나오는 여운까지도 말이죠.
작중의 시간 기준으로 불과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그 사이에 엄청난 일이 많이 일어났죠. 스케일은 그렇게 크지는 않을지라도 정말 엄청난 일을 해낸 겁니다.
차기작은 아마 여름쯤 공개될 듯합니다. 스케일은 좀 작아지겠지만요... 기대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