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절모, 챙이 달린 펠트 재질의 모자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대략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쯤으로 보는데 이것은 19세기 당시 남성들이 비오는 날 모발이나 체온을 보호하기 위해 쓰던 실크햇(Silk Hat, 아시아권에선 대개 이 명칭이나 비단모 등으로 알려져 있고 탑 햇(Top Hat)으로 불리기도 합니다.)이나 중산모(中山帽, 일본어로는 山高帽(산고모, 야마타카보우), 영어로는 Bowler hat) 등을 비롯한 모자들의 양식이 재조합되어 탄생한 모자지요.
그리고 세계에서 이 모자를 가리키는 명칭도 달라지는데 한국이나 일본 같은 곳에선 대개 중절모로 통하고 영미권이나 독일어권, 러시아어권 외 다수의 국가에서는 페도라(Fedora)로 통하며(물론 아시아권에서도 중절모와 함께 통용되기도 합니다.) 프랑스어권이나 이탈리아권에선 보르살리노(Borsalino)로 통하기도 하죠.
명칭들에 관해서 그 뜻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 조사하다 보면 굉장히 흥미로운데 우선 한일 양국에서 통하는 중절모(中折帽)는 한자 그대로 가운데(中)의 꺾인(또는 우묵한)(折) 크라운 부위 때문에 이런 명칭이 붙었는데 더 정확히는 일본을 통해서 중절모를 접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드신 분들 중 이것을 '나까오리'라고 부르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는 일본에서 중절모를 줄여서 나카오레(中折れ)라고 부른 것에 영향을 받으신 것이겠지요. 사족이지만 같은 한자권인 중국에선 중절모가 아니라 예모(?帽, 리마오)라고 부르는데 이는 대개 이 모자를 정장을 비롯한 단정한 차림으로 입을 때 주로 쓰기 때문에 이런 명칭으로 굳은 것으로 추측됩니다.
대부분의 언어권에서 통하는 페도라의 유래는 빅토리안 사두르(Victorien Sardou)의 연극 페도라(움베르토 조르다노의 오페라는 이걸 재구성한 것), 더 정확히는 페도라의 여주인공인 페도라 로마조프에게서 유래한 것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1882년 초연을 한 페도라에서 페도라 역을 맡은 사라 베르나르(Sarah Bernhardt)가 극중에서 쓴 모자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인데 사라가 남성적인 의상을 선호해서 극중에서 이런 모자를 자주 착용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중절모의 명칭이 페도라로 굳어지게 된 것이죠.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통하는 보르살리노라는 명칭의 유래는 이탈리아의 모자 제조업체인 보르살리노. 보르살리노는 1857년에 주세페 보르살리노에 의해 세워진 업체인데 여러가지 모자를 생산하고 있지만 그 중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중절모 소비가 늘어나자 1900년에는 75만개가 생산되고 그 중 절반이상이 해외로 수출될 정도였다고 하니 당연히 이탈리아에선 자국의 대표업체인 보르살리노가 중절모의 대명사가 되었고 또한 생산공장이 프랑스와 가까워 이걸 자주 접할 수 있던 프랑스도 똑같이 영향을 받아 보르살리노란 명칭이 통하게 되었지요.
명칭에 대해선 이러하고 본격적인 중절모의 특징으로 넘어가자면 그 특유의 외형부터 짚고 넘어가야 할 텐데요, 위에서 살짝 언급했던, 모자 가운데의 살짝 패인 크라운이란 부분이 특징이지요. 이렇게 움푹 들어간 부위가 있어 위에서 보면 완전히 둥근 형태가 아닌 앞이 뾰족한 원형으로 되어 있지요. 또 그로그랭(Grosgrain, 비단이나 인조견 등의 면으로 짠 리본 비슷한 띠)이나 가는 가죽끈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도 특징이고요.(물론 이건 중절모 뿐만이 아니라 비단모나 중산모 등의 펠트 재질 모자들의 공통 특징이지만)
그리고 챙달린 펠트 재질의 모자를 싸잡아 중절모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지만 깐깐하게 따져보면 이것도 종류가 꽤 많은 편이지요.
이런 펠트모자들의 경우 모양에 따라서 명칭이 갈리는데 패인 곳이 없이 낮고 불룩한 탑모양에 챙이 짧을 경우엔 트릴비(Trilby), 위로 좁아지는 형태의 모자는 티롤리언 햇(Tyrolean hat), 중절모와 비슷하나 패인 곳이 없고 위가 파이처럼 테두리 안쪽으로 들어가 있을 경우 포크파이 햇(Pork pie hat)이라고 구분하지요.
위에서 과거에 주로 사용되던 용도처럼 우천시 방수 및 보온용으로 좋은 것이 사실인데 양모나 비버털을 압축해서 만든 부직포이기에 그 특성상 구조가 굉장히 촘촘하게 되어있어 웬만해선 물이 잘 들어오지도 않고 열도 잘 빠지지 않는다는 점이죠. 다만 그렇기 때문에 대개 우산을 쓰고 다니는 현대에는 이 점은 별로 체감하기 어렵고 오히려 불편할 수도 있겠습니다만.......그래도 패션 소품 정도로 생각하고 자주 쓰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은 없을지도.
뭐, 그렇다곤 해도 20세기 중반까진 정장의 필수품이었고 그래서 이 당시엔 동서양 막론하고 거리의 남성들 대부분이 정장에 중절모를 함께 착용하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죠. 그래서 중절모는 20세기의 초중반의 중후한 이미지를 지니게 되었고요. ……문제는 마피아들도 너도나도 양복에 중절모 쓰고 난리치며 대부를 비롯한 갱스터 영화들에서도 마찬가지로 나왔기 때문에 마피아의 이미지까지 지니게 됐단 건 넘어가고 말이죠.
그리고 중절모는 그 품질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란 것도 특징이라 할 수 있겠는데 싼 건 만 원 대에서 구입할 수 있지만 정말 고급품은 20~30만원을 호가하기도 하죠. 더 비쌀 수도 있고.
여기부터 사적인 이야기를 해 보자면 현대에서의 실용성은 비록 20세기 초에 비하면 많이 빛이 바랬고 나이든 사람의 모자, 마피아의 모자라고 해도 저는 오히려 그 중후한 느낌이 좋아서 이걸 찾게 된 것이었죠. 모자를 씀으로서 패션이 완성된다는 개인적인 지론까지 더해진 것도 있지만 말이죠.
그리고 그런 이유로 제대로 차려입었건 세미정장 형태로 입었건 정장을 입게 되면 이 모자는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비록 사회 진출해서 양복은 입을 수 있어도 모자를 쓸 수 없다면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다 그 때 되면 계속 쓰고 다닐 생각까지 하고 있지만 말이죠.
별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구세기 문화에 푹 빠져버리니 헤어나오기 어려워서 말이죠. 아아, 그래요. 제 취향도 낡았다면 낡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20대와 중절모의 조합이라니......
어쨌든 중절모를 소재로 잡아 오랜만에 긴 글 써 봤습니다. 이상입니다.
ps. 그렇다곤 해도 부모님도 이런 고급 펠트모자를 덜컥 사주시다니……원래 고급 모자일수록 오랜 세월이 지나도 잘 안닳습니다만 이거 되돌아보니 꽤나 미안해지네요. 늙어죽을때까지 쓴다면 이건 누구에게 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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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14-05-28 03:37:07
중절모의 세계는 참 깊은 면이 있어요!!
하긴 현대의 의복에서 모자의 위상이 상당히 낮아져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니까요.
남성복의 경우는 특정 제복의 일부로 정착한 경우가 있고, 여성복의 경우에도 모자의 출현빈도 자체가 상당히 낮아져 있어서 이브닝드레스 등을 입을 때는 모자보다도 헤어스타일 연출과 장신구 착용 등에 무게가 더욱 많이 실리니까요.
그러고 보니 남성복의 경우는 한 세기 전의 패션을 추구하려면 중절모와 회중시계로 간단히 되는군요? 생각해 보니 한 세기 전의 여성복 패션은 구사하려면 완전히 난리나네요. 그 긴 드레스와 크고 화려한 모자는 어디서 구할 것이며, 설령 입는다 하더라도 그걸 입고 외출이라니, 아예 엄두가 나질 않겠네요.
SiteOwner
2014-05-29 20:57:17
중절모에 대해 좋은 글을 써 주셔서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모자를 가장 많이 썼던 나날이 군복무 때입니다. 그 이후로는, 안전상 필요해서 헬멧을 써야 할 상황이 아니면 머리 위에 무엇인가를 얹는 일 자체가 없습니다. 모자가 잘 어울리는 스타일도 더더욱 아닌 터라 중절모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는데, 중후한 감각을 연출하려면 저것도 있으면 괜찮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감각은 남성패션만이 가능한 것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이전에 올려 주셨던 스팀펑크 아트전 사진 덕분에, 구세기의 문물 중 현대에도 멋지게 연출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생과 이야기해 보니 여성복은 좀 아닌 듯 합니다. 동생 왈, 일단 옷과 모자는 구할 수 있더라도 화장실에 간다든지 할 때는 어쩔 거냐고 하길래, 여성복의 경우는 힘들 거라는 것을 금방 납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