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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주판과 시네마현, 그리고 그 후일담

SiteOwner, 2015-02-21 21:10:17

조회 수
386

국민학생 때, 그러니까 1980년대 후반에 잠깐 주산을 배운 적이 있었습니다.

기억나는 것으로는, 당시 살았던 동네가 면소재지라 그리 크지는 않은데도 주산교습소가 있었던 것. 은행이나 농협, 신협 등의 금융기관에서 일하려면 부기, 타자 등과 더불어 주산을 할 수 있어야 했기에 주산은 기본 스킬이었고 수요도 많았습니다. 게다가 당시 소년잡지에서는 컴퓨터와 주산에 대한 논쟁도 꽤 있었습니다. 그 잡지가 소년중앙인지 학생과학인지는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컴퓨터를 쓰면 바보가 된다니, 따라서 주산을 배워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는데, 지금 컴퓨터와 인터넷이 보급되어 있고 스마트폰이 거의 생필품 수준으로까지 정착해 있는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그냥 먼 옛날 이야기일 따름입니다.


저는 주산학원을 다니지는 않았습니다만, 당시 다니던 국민학교에서 정규수업 이후 한 시간을 특별활동에 할당해서 주산을 가르친 적이 있다 보니, 주산교본과 주판을 구입해야 했고, 그래서 9급 교재 및 주판을 하나 샀습니다. 그런데 주판의 포장에 운주주판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운주라는 업체에서 만들었을 것이고 아니라면 상품명이겠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업체명도 상품명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른 제조업체에서도 운주주판이라는 말을 사용했으니까요. 그 어휘가 궁금해서 주변에 물어 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지 못했습니다. 단지 좀 특별한 게 있었다면, 반에서 저와, 저의 라이벌로 불렸던 한 여학생만이 똑같이 긴 주판을 구입했고 다른 학생들의 것은 조금 짧은 터라 그것으로 인해 저와 그 여학생이 겉으로는 서먹서먹하지만 실제로는 사귄다, 그 똑같이 긴 주판이 그 증거이다 하는 소문이 돌았던 것 정도일까요. 하여간 그렇게 주산을 조금 배웠고 그때 사용했던 주판은 지금도 집에 있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주산학원은 어느 새 거의 대부분 폐업해 갔고 컴퓨터학원이나 보습학원 등이 그 자리를 메꾸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도 중학생 및 고등학생 시기를 지나서 대학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지만, 1990년대 후반의 대학가는 그냥 정치운동의 장이나 마찬가지였고, 언제나 정치담론이 대자보를 메우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전시회가 있었는데 일본의 독도에 야욕을 규탄한다는 전시회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県)의 일부라고 주장하는데 그 시마네현을 시네마현으로 쓴 게 보여서 전시장을 지키는 학생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시네마가 아니고 시마네라고, 영화 찍는 현이 아니라 섬 도에 뿌리 근이라서 시마네라고. 그 학생이 당황하면서 고치겠다고 했고 다음날부터는 그 전시물의 일부가 고쳐진 것이 보였습니다.


이 전혀 관련 없는 두 에피소드의 접점은 나중에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매우 허탈한 방식으로.

NHK를 보다가 시마네현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을 가리키는 옛 용어 중에 운슈(雲州)라는 것이 있는데 군마현을 죠슈(上州), 나가노현을 신슈(信州), 야마구치현을 쵸슈(長州)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방식의 용어입니다. 정확히는 시마네현 동부를 이즈모노쿠니(出雲国)라고 하는데 그 지역의 별칭이 운슈입니다. 그리고 그 지역은 주판 생산으로 유명한 곳으로 효고현 오노시와 더불어 일본의 양대 주판 생산지입니다. 그 중 시마네현에서 생산된 것이 운슈소로반, 즉 한국어로 읽으면 운주주판이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운주주판은 시마네현 주판이라는 말인데...이것을 알고 나니 시마네현이라는 지역이 저 두 별개의 일화를 하나로 엮는 매개체가 되었다는 것이 기묘하게 느껴지고 있습니다.


살다 보면 별개의 사안에 의외의 공통점이 엮여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저에게는 이것이 대표적이었습니다.

SiteOwner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4 댓글

대왕고래

2015-02-22 00:11:30

운주주판과 "시네마"현 이야기가 다큐멘터리에서의 정보로 엮이게 된 것이군요.

어렸을 때의 일화와 대학때의 일화가 다큐멘터리 하나로 간단하고도 기이하게 엮이는 게 왠지 묘하네요.

어렸을 때 누구랑 누구랑 좋아한다 같은 소문이 나는 건 언제나 똑같고, 대체 어쩌다가 시마네 현을 시네마 현으로 오타를 냈는지가 궁금해지기도 했어요.

SiteOwner

2015-02-22 01:18:13

정말 이런 식으로 엮일 거라고는 전혀 상상도 못했다 보니 생각할수록 기묘했습니다.


갖고 있는 주판의 길이로 사귀는 사이니 운운하는 것, 상당히 웃깁니다. 예전에 동생에게 그 주판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는데, 주판의 길이로 커플링을 엮는다는 것이 웃기다면서, 그러면 다른 짧은 주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집단 커플링 관계냐고 웃으면서 반응했습니다. 그리고 그 여학생과 저는 학과성적으로 교내에서 주목받는 위치였다 보니 접점이 많았는데 그것이 발단이 되어서 별별 희한한 이야기가 난무했습니다. 역시 없는 말 만들어내는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나 봅니다.

게다가 그렇게 잘못 쓰는 것은, 일본의 문물을 틀어막기만 하는 정책이나, 일본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미덕으로 인정되는 듯한 당시 한국 지식인 사회의 병폐 탓이 큽니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어도 수정이 잘 안 되었던 것이지요.

TheRomangOrc

2015-02-27 23:24:44

확실히 매우 절묘하게 연결이 되었네요.

들어보니 한국의 주판은 대부분 중국이 아닌 일본의 주판을 사용했었다고 하니 학원에서 그러한 일본주판을 접하는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을거에요.

근데 정작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말씀해주신 대로 일본문물을 그냥 눈만 가리고 틀어막으려 들었으니 한편으론 좀 사회의 병폐가 느껴지기도 하네요.


그로 인해 생겨난 안 좋은 일도 많으니까요.

표절 및 무단 도용 문제라던지 혹은 그러한 일본미디어를 접하는걸 특권의식으로 여기고 거만을 떤다던지...

참 골치가 많았어요.

SiteOwner

2015-03-01 19:36:18

진짜 일부러 엮으려고 해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이했습니다.

운주주판의 의미를, 한참 뒤에 알고 나니 허탈하기도 했고, 게다가 지금 갖고 있는 그 주판의 제조업체 이름도 운주주판이 아니라는 데에서 정말 기이하기 그지없습니다. 역시 그냥 일본 것이라고 틀어막으면 된다는 단순한 반일주의의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나지요.

말씀해 주신 것처럼, 일본의 문화컨텐츠 무단도용문제는 심각합니다. 일본문화가 개방된 지금조차도 방송용 배경음악을 들어보면 실소를 자아낼만한 것들 투성이입니다.


주판에 대해서 조금 언급을 붙이겠습니다.

보통 중국식 주판은 한 줄에 주판알이 상단 2개 하단 5개의 구조로, 10진법 및 16진법 계산이 모두 가능합니다. 일본식 주판은 상단 1개 하단 4개로 줄어 있는 형태이며, 10진법 계산에만 대응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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