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국내 경제사정에 관한 소문 중에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 이야기가 유독 많아서, 이번주인 2019년 5월 20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은 아예 검토한 적도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발표했습니다(이주열 "리디노미네이션 검토한 적도, 추진할 계획도 없어" 2019년 5월 20일 매일경제 기사).
리디노미네이션. 발음하기 좀 어려운 긴 영단어이긴 한데, 간단히 말해서 화폐가치를 변경하는 것입니다. 특히 작은 수를 방향으로 줄이는 것이라고 보면 정확합니다. 이를테면 구 1000원을 신 1원으로 구 10원은 신 1전으로, 1원=100전이 되는 식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을 거치면 신화폐단위는 구화폐단위의 1/1000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이 완성됩니다.
지나친 인플레이션 등이 발생했다든지 하는 경우에는 리디노미네이션을 단행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그렇게 소문이 돌아야 할만큼 급박한 상황하에 있는 것일까요?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리디노미네이션 찬성파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합니다.
화폐가치가 너무 낮아서 현재의 원화가 국격에 맞지 않다느니, 단지 0을 몇 개 떼는 것에 불과하다고 의미를 애써 축소한다든지 하는데, 이 2계통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격 운운하는 것부터 논파해 보겠습니다.
원화보다 가치가 월등하게 높은 세계주요각국의 통화는 많이 있습니다만 가치의 크기가 어디서 어떻게 국격을 말하는 건지 어떠한 객관적인 근거도 보이지 않습니다.
네이버 환율 페이지를 보겠습니다. 이 페이지에서는 몽골의 투그릭을 제외하면 원화보다 가치가 높은데,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인 우리나라가 화폐가치를 이유로 이 위상을 부정당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오만, 바레인, 쿠웨이트같이 화폐가치가 월등하게 높은 나라에 대해서 열등감이나 사대주의적인 시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지, 어느 쪽이라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국격 운운은 해봤자 소용없습니다.
그 다음에는 0을 몇 개 떼는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축소.
이미 이 논리 자체가 주장 자체의 정당성을 허물고 있는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런 정책을 해서 얻는 것도 없는데 무리한다는 평가도, 얻는 게 많다면 그렇게 의미를 축소하고 시작해야 할 필요 자체가 없다는 평가도 가능합니다.
경제규모가 상당히 커져 있으면 시스템 개편을 위해서 손봐야 할 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당장 온라인 시스템도 개편해야 하고, 현금지급기, 지폐/동전계수기, 자동판매기 등 손봐야 할 분야가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실무적인 영역으로 들어가자면 0을 몇 개 떼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기자재 교체를 위한 비용의 지출은 불가피합니다. 여기에서 0을 몇 개 떼는 데에 불과하다는 말 자체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설령 기자재 교체 등의 문제가 아주 간편하게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쉽게 바뀌지 않고 그래서 이것에 기인한 문제는 얼마든지 양산될 수 있어서입니다.
당장 해외여행에서도 이런 것이 보입니다. 화폐가치가 10배 남짓 넘는 일본에서 여행을 하는 경우 돈을 쉽게 써서 여행의 후반부가 시작될 경우 경비부족으로 곤란을 겪은 사례도 목격했다 보니 여행인솔자 일을 할 때는 여행자들에게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도록 당부해 오고 그랬습니다. 요즘에는 모 여행사의 판촉상품에서도 100엔=1000원 문구를 인쇄해 두고 있기도 하지요.
또한, 제도의 변화보다 그 제도가 각 개인에게 체화되는 속도가 훨씬 느리기에 이런 참사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1/1000으로 리디노미네이션이 된 상황을 상기시켜 보도록 하겠습니다.
자칫 구 1000만원에 해당되는 신 1만원을 생각없이 송금했다면? 사람의 심리라는 것은 의외로 상당히 작은 것에 영향받기 쉬워서 금세 판단력이 흐려지거나 잘못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정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확증도 없습니다.
그래서, 리디노미네이션을 정당화할 만한 이유는 현 시점에서는 없습니다.
게다가, 가진 자산이라든지 누리고 있는 경제질서 등이 수익은 별로 없고 지출은 확실히 많아질 것이 예상되는 실험대상으로 전락해도 된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게 실험해서 쓸 비용이 있다면 다른 분야에 더욱 가치있게 쓰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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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매리
2019-05-23 17:56:19
길이나 무게 단위 등을 변경하면 그 바뀐 단위에 적응하느라 꽤 긴 시간이 걸리는데, 화폐 가치를 변경하는 것 역시 두말하면 입이 아프겠죠. 화폐 가치를 바꿨다. 이겼다 끝! 이 정도로 간단하게 끝나는 일도 아니고... 굉장히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일인 만큼 심사숙고하고 또 해도 모자랄 텐데 너무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네요.
SiteOwner
2019-05-23 21:12:48
규격을 바꾸면 여러 상황이 개선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 믿음 중 상당부분 사실인 것도 있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이런 사례에는 일본의 1067mm 궤간, 미국, 캐나다, 일본 등지의 100-120V 범위의 가정용 교류전력 전압, 세계적으로는 소수파인 60Hz 교류주파수, 루이지애나주 이외의 미국의 관습단위 등 얼마든지 있고, 그래서 주의를 요합니다.
에어캐나다 143편 불시착같은 경우가, 그냥 단위를 바꾸기만 한건데 하는 안일한 사고에서 기인했습니다.
캐나다가 법정도량형을 미국 관습단위에서 미터법으로 바꾼 것까지는 그러려니 하지만, 캐나다에서 그렇게 결정한 것과는 별개로 항공분야에서는 항공분야에서 따라야 하는 도량형이 있습니다. 단일시장으로 세계 최대의 항공산업 시장인 미국의 국내기관인 연방항공청(FAA)의 인증이 있어야 미국 시장에의 진출이 가능해지니까 사실상 FAA 인증이 세계표준인 것이고, 따라서 에어캐나다는 당연히 FAA 규정에 따라서 계속 미국 관습단위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까 문제가 생긴 것이었지요. 항공분야같이 철저히 상호교차검증을 하는 데에서도 이런 문제는 생길 수 있는데, 이 정도로 주의하지 않는다면 후회할 상황만 잔뜩 생깁니다.
마키
2019-05-23 23:05:32
미국의 화성 기후 궤도선은 단위 환산 실수로 엔진에 상정 이상의 과출력이 입력되는 바람에 프로젝트에 3억 달러가 넘게 들어간 화성 기후 궤도선 프로젝트는 궤도선이 화성 대기에 뛰어들어서 산화하는 걸로 끝이 났죠.
SiteOwner
2019-05-24 18:38:55
그렇습니다. 단위환산이라는 게 그냥 몇 자리 줄이고 늘리고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는 것이 말씀하신 사례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게 이런 거대프로젝트에서도 문제점을 노정하는데, 과연 이것보다 주의수준이 낮은 일상생활의 금융거래에서만큼은 다르다고 자신할 근거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리디노미네이션은 좋은 선택지가 아니며, 현재의 경제상황이 좋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이것이 리디노미네이션의 정당화를 달성하지도 못합니다.
Lester
2019-05-25 13:24:23
뉴스에서 봤던 게 이거였군요. 그래서 의견을 교환하다가 '화폐란 것은 경제가 발전하고 세계 시장에서 널리 사용되어야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지 화폐개혁을 한다고 해서 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을 편 적이 있는데... 제가 맞는 소리를 한 걸까요?;;;
SiteOwner
2019-05-26 19:51:45
그렇습니다. 결국 화폐의 진정한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적인 액면가가 아니라 그 화폐의 발권주체가 되는 국가의 경제력과 위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일본 엔화는 일종의 좋은 참고가 됩니다. 일본 엔은 미국 달러는 물론이고 유로화, 영국 파운드, 스위스 프랑 등보다도 단위가치가 현겨히 낮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세계경제에 별 볼일없거나 빈국인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 리디노미네이션이 국격 상승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주장은 주객전도이며 무가치합니다.
제대로 핵심을 정확히 말씀해 주신 것이니까 걱정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마키
2019-05-25 13:31:19
조선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대왕조차도 무리하게 밀어붙이다가 결국 본인의 실책을 인정하고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게 화폐 개혁이었죠.
언급해주신 야드-파운드법 같은 경우도 미터법과 단위 환산을 실수하기라도 하면?사소하게는 입력된 결과물이 좀 달라지지만, 심각하게는 대형 참사가 일어날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러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이제와서 뭘 바꾸려고 하기엔 국가적으로 너무 정착화되버렸구요.?
SiteOwner
2019-05-26 20:00:09
개혁이라는 것이 양날의 칼이기도 합니다. 성공하면 정말 좋은데, 실패하면 아예 안한 것만도 못하게 되는데다, 제대로 성공한 개혁은 많지 않기에 결정은 신중히, 그리고 실행은 과감히 해야 하는데, 이렇게 결정하기가 결코 순탄치 못하다는 것은 역사의 숱한 사례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화폐개혁 또한 그렇습니다. 지금이 기존의 경제질서로는 도저히 버티지 못할 정도의 대혼란상에 있지 않는 한, 역효과가 더 많습니다.
어차피 모든 도량형을 단일 단위계로 통합할 수는 없어서 다른 단위계로 변환할 때에는 일관된 변환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분야에 따라서는, 이를테면 항공기의 가스터빈엔진의 연료소모량을 나타내는 Specific Fuel Consumption의 산식같은 경우에는 아예 처음부터 SI단위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쓸 수 있거나 변환과정에서 산식 작성이 번거로워지는 경우가 많이 있고 미국이 항공우주산업의 세계최대시장이라서 사실상 표준으로 정착되어 있는 터라 이 경우는 미국 단위계를 따라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