쨍그랑-!
갑작스럽게 조여오는 악력을 견디지 못한 것일까? 로즈마리의 손에 들려있던 접시가 그대로 깨어져 나갔다.
주르륵-.
이윽고 손아귀에서 흘러나오는 붉디붉은 핏물. 서둘러 손을 펼쳐야 하건만, 경악 때문에 조여오는 손아귀는 펼쳐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여차하면 손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이 영구적인 기능 손상을 일으킬지도 모르는 상황. 무인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로즈마리는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쓸 수 없었다.
지금 그녀의 눈은 결투를, 더 정확하게는 그 그곳에서 소멸한 에스텔의 흔적을 쫓고 있었다.
‘거짓말이지……?’
죽었다.
재가 되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이 흩어졌다.
그 흉수는 자신이 조력을 요청한 남자.
가문을 배신하고, 그와 아가씨가 다시 만날 수 있도록 도왔건만 상대는 그녀의 눈앞에서 아가씨를 살해했다.
‘빌어먹을.’
멍청한 판단을 내린 자신을 향한 분노로 온몸이 떨려왔다.
그가 패배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승리하더라도 소여 백작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도 염두에 뒀다.
하지만 이런 건 그녀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미래였다.
“어째서?”
왜 배신을 했는가?
의문이 꼬리를 물고, 자신의 머리와 목을 조여오건만 해답은 누구에게서도 나오지 않았다.
짝-!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
덧없는 꿈에 일말의 희망을 기대 자신의 뺨을 후려쳐본다. 하지만 볼이 빨갛게 물들 때까지 반복해봐도 현실은 비정할 뿐.
“아아.”
에스텔. 로즈마리가 아끼던, 자신의 딸이나 다름없는 아가씨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저 빌어먹을 놈이 죽여버렸다.
“하하하하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기 위함일까? 아니면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일까?
로즈마리 자신도 모르게 입에서 쉴 새 없이 웃음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로즈마리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면서 그녀의 주변이 얼어붙는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마력 침식.
강력한 마법사의 마력에 주변의 환경이 호응해 변화하는 현상.
본래의 로즈마리가 억지로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던 일이 지금 이 자리에 발생했다.
원인은 극한의 분노.
평범한 감정을 넘어선 그것은 일종의 촉매가 되어 그녀를 새로운 경지에 올려놓았다.
“하아아아.”
잠시 후 그녀가 호흡을 가다듬는 것과 함께 차갑던 냉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윽고 남은 것은 그 형체조차 느껴지지 않는 공허. 그 공허에 몸을 맡기는 것이야말로 암살자로서 그녀가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죽여버리겠다.”
그렇게 공허 그 자체가 된 로즈마리가 그레고르를 세상에서 지워버리기 위해 움직이려던 순간.
“스테파니.”
노인의 평온한 목소리가 울리며, 무수히 많은 빛의 실이 로즈마리의 육신을 구속했다.
쿠엔틴 회장.
그레고르가 결투를 할 수 있게 도운 노인이 꺼낸 말 한마디에 로즈마리는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놓으시죠!”
올무에 잡힌 짐승이 그러하듯, 살을 도려낼 것처럼 날카로운 살기를 쿠엔틴 회장에게 뿜어대는 그녀.
범인이라면 견디지 못하고 기절했을 정도의 압박감이 느껴질 터. 하지만 쿠엔틴 회장은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어넘기고 있었다.
‘분명 전투력은 없다고 들었는데?’
잘못된 정보였던 것일까?
“젊은 아가씨가 성질이 급하기도 하지.”
쿠엔틴 회장은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로즈마리에게 다가섰다.
“자네가 이러는 게 신부, 그러니까 에스텔이라는 아가씨 때문인가?”
“……당신에게 말해드릴 필요는 없습니다.”
마치 그녀의 마음쯤이야 이해한다는 듯한 어투. 하지만 로즈마리는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위화감에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나온 건 그녀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언.
“역시 그런가. 그렇다면 더욱 막아야겠구먼.”
“그게 무슨……?!”
“그 아가씨, 죽은 게 아닐세.”
“…….”
지나치게 어처구니없는 말을 들으면 오히려 말문이 막힌다고 했던가? 쿠엔틴 회장의 말을 들은 로즈마리는 한순간 정신에 멍해졌다.
‘말도 안 돼.’
분명 에스텔은 심장을 꿰뚫리고 전신이 소멸했다. 그것은 로즈마리가 눈으로 직접 확인한 사실.
‘그런데 죽지 않았다고?’
헛소리, 그게 아니면 그녀를 기만하기 위한 속임수다.
그렇게 생각하며 로즈마리가 분노에 찬 소리를 지르려는 순간.
“KAAAAAAA-!”
천지를 뒤흔드는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토해낸 것은 짐승으로 전락한 보어헤스 백작.
그의 가슴팍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피는 주변의 투지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GRRRRR-!”
예상치 못한 강력한 공격이었는지 으르렁거리며 거리를 벌리는 보어헤스 백작.
‘어떻게 된 거지?’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로즈마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레고르가 금강 갑주를 부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그녀도 안다. 그렇기에 보어헤스 백작이 상처 정도는 입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상처의 형태.
마치 뛰어난 화백이 그은 붉은 선처럼, 보어헤스 백작의 가슴팍 상처는 또렷한 사선이었다.
짐승은 물론 평범한 검사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참격의 흔적.
로즈마리는 시선을 돌려 그레고르를 바라보았다.
사도의 갑주를 입은 그레고르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우선 달라진 것은 오른손에 들린 한 자루의 검.
푸른빛의 반투명한 불꽃으로 빚어낸 그 검은 평소 에스텔이 들고 다니는 것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저게 무슨?’
로즈마리가 경악하는 것도 잠시.
화르르르륵.
검에서 시작된 푸른 화염은 넝쿨처럼 사도의 갑주를 타고 오른다.
그와 동시에 변하기 시작하는 갑옷의 형태.
기존의 이드라의 것과는 다른 푸른 환염은 그레고르의 갑주를 전혀 다른 형태로 변화시켰다.
“소여 기사단의 갑옷…….”
그녀가 속한 은밀기동부대와는 다른, 양지에서 소여 가를 지키는 기사단.
‘어째서 그들의 갑주를?’
로즈마리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검을 든 그레고르가 여태까지와는 다른 자세를 취했다.
자연체에 가까운 중단세.
소여 가문 비전 검술의 기본형.
그리고 에스텔이 결투에 임하기 전에 항상 취하던 자세.
그 자세를 취한 그레고르의 입에서,
““자, 끝낼 시간이다!””
남과 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 ***
?
‘전 혼자서 싸울 수 없거든요.’
일전에 나는 에스텔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전사가 아니다.
에스텔처럼 구도의 길을 걷는 무인으로 살 수는 없다.
보어헤스 백작처럼 최강에 집착하는 투사 또한 될 수 없다.
나에게 무란 결국 수단.
나 자신과 타인을 지키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
그렇기 때문일까?
망가진 육체를 고치 안에서 재구성하는 동안,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가 나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홀로 싸울 수 없다면.
‘함께 싸운다.’
그것이 나의 고유 권능.
““고유 권능 발동. 융합 변이.””
나를 믿는, 나와 함께 싸우는 동료와 물리적으로 ‘하나’가 되는 능력.
그 능력을 활용해 나는, 아니 ‘우리’는 그렇게 보어헤스 백작 앞에 섰다.
‘묘한 감각이네.’
하나의 육체를 남과 공유한다는 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감각이었다.
단순히 두 사람의 기억이 뒤섞인 수준이 아니다.
감각, 판단, 감정, 그 외 모든 것들.
나의 것이 아닌 모든 것이 내 뇌를 향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온다.
마법으로 비슷한 것을 구현하고자 했다면 미쳐버렸겠지.
어쩌면 내가 에스텔인지 에스텔이 나인지 인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신의 권능. 다행히도 그런 부작용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쪽도 괜찮나요, 에스텔?’
『음. 처음에는 좀 어지러웠지만, 이제는 괜찮다.』
‘다행히네요.’
『그래도 다음에 이런 일이 있다면 미리 말을 해다오.』
‘네, 그럴게요.’
확실히 당황스럽긴 하겠지.
심장을 찔렸는데 죽지 않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눈을 떠보니 자신을 찌른 사람과 육체를 공유하고 있다.
웬 삼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일. 그것이 지금 나와 에스텔이 겪고 있는 일이다.
『후훗.』
내 생각이 흘러 들어갔는지, 에스텔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어쩌면 쓸데없는 생각도 흘러 들어가는 건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자 차갑게 식는 등골.
‘괜히 이상한 생각이라도 떠올리면 안 되는데 말이지.’
『이상한 생각?』
‘아무것도 아닙니다!’
가능하면 전투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괜히 잘못했다간 이기더라도 사회적으로 매장당할지도 모르겠다고 판단한 나는, 서둘러 온 신경을 보어헤스 백작에게 집중시켰다.
“GRRRRRRR-!”
여전히 참격이 두려운 것인지, 보어헤스 백작은 거리를 벌린 채 우리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법 큰 상처를 입은 것이 신경 쓰이는 것이겠지.
수왕 강림과는 달리 평범한 공격에 당한 것인 만큼 눈에 띌 정도로 소극적으로 변한 게 느껴졌다.
물론 그렇다고 우리가 승기를 잡았다고 볼 수도 없지만.
‘이미 회복한 지는 오래인가?’
단순히 출혈이 멈춘 것을 넘어, 갑주 역시 멀쩡한 상태로 회복한 것이 보인다.
이런 식이라면 아마 일격으로 제압해야만 할 터.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았지만, 에스텔은 자신감에 찬 태도로 내게 대답했다. 서로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인 이상 이것은 진심일 터.
‘아니, 단순한 진심과는 다른가.’
의념이라고 했던가?
내게 상형권을 가르쳐주며 에스텔이 설명했던 개념.
마도기사가 자신의 기술에 담는 마음가짐 그 자체. 에스텔은 이를 이용해 전투 중 자기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벨 수 있는가?’가 아니다.
벤다.
같은 몸을 쓰고 있기에 느낄 수 있는 확고한 의지가 심령을 통해 내게로 흘러 들어왔다.
‘역시 대단하네, 에스텔은.’
나 같은 가짜 무인과는 전혀 다른 진짜 무인의 기세.
그것에 감탄하면서도 나는 그녀를 위해 최상의 육체를 준비한다.
나는 둔갑술사.
무인이 무인으로서의 일을 한다면, 둔갑술사는 둔갑술사의 일을 할 뿐.
으드드드득-!
에스텔이 원하는 기능을 최대한 구현할 수 있도록 육체를 재구성한다. 필요한 동물의 기능을 구현하고, 필요 없는 기능을 제거한다.
“GRRRRRRR.”
이대로면 위험하다고 느낀 것일까?
우리가 초식을 펼치기 위해 준비하자, 보어헤스 백작 역시 자세를 고쳐 잡는다.
그가 취한 것은 인간이 아닌, 고양이과 짐승과도 같은 사족 보행의 자세.
‘얄궂군.’
본래라면 짐승을 흉내 내던 것은 나였을 텐데. 어째 마지막 일격을 먹일 때는 정반대가 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제 곧 결판이 날 터.
영원 같은 찰나의 시간이 흐르고.
먼저 움직인 것은,
“KAAAAAAAAAAAAAA-!”
보어헤스 백작이었다.
쿠웅-!
그의 발이 대지를 박차자, 보어헤스 백작의 거구가 질풍처럼 빠른 속도로 다가온다.
저 공격에 직격당한다면 전신의 뼈가 으스러질 터.
사도의 재생력을 고려한다고 해도 목숨을 걸어야만 한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피하거나 반격하고 싶지만.
『아직이다.』
에스텔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차분한 태도를 보며, 나는 그녀의 감각과 내 감각을 서서히 일체화시킨다.
지금 그녀가 느끼고 있는 것은 일순을 찰나로 다시 쪼갤 정도로 느려진 일종의 순간의 세계.
무인으로서 극에 도달해야만 볼 수 있는 그 영역은 나에게는 미지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아마도 어떤 거름망 없이 그녀와 융합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없겠지.
그렇게 판단한 순간.
후웅-!
어느새 보어헤스 백작의 거대한 주먹이 내 얼굴 한 치 앞까지 다가왔다.
이대로라면 직격을 피할 수 없을 테지.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에스텔이 노리던 순간이다.
『지금이다!』
에스텔의 마음속 선언과 함께 그녀에게 지배권을 넘긴 육체가 움직였다.
손에 들린 검이 그리는 것은 단 하나의 선.
후발이지만 먼저 제압하는 초고속의 일격.
신기(神技). 세계 가르기.
초대 소여 백작이 신의 힘을 빌려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검술이 세상에 재림한다.
그것은 그야말로 작은 검 한 자루로 세계 자체를 베는 힘.
에스텔의 감각이 구현한 느리기 그지없는 세계에서, 나는 참격이 보어헤스 백작의 몸을 훑고 지나는 것을 보았다.
이윽고 다시 정상으로 흐리는 시간.
우리를 박살 낼 것처럼 달려오던 보어헤스 백작은, 종이 한 장 정도를 남겨둔 상태로 눈앞에서 정지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떠한 타격도 입지 않는 것 같은 모습.
하지만.
파스스스슥-.
한 줄기 바람이 불어오는 것과 동시에, 보어헤스 백작을 감싸고 있던 사도의 갑주가 재가 되어 흩어진다.
“대단……하군요.”
마지막에야 이성을 되찾았는지, 그는 웃는 얼굴로 우리에게 말한 보어헤스 백작의 거구가 바닥으로 쓰러진다.
이어진 것은 정적.
“승자가 정해진 것 같군.”
어느새 결계를 해제했는지, 우리들 근처에 온 쿠엔틴 회장의 발언과 함께.
“수고했네. 훌륭한 고유 권능이군.”
결투는 끝을 고했다.
?
*** ***
?
결투가 끝남과 동시에 보어헤스 백작과 에스텔의 결혼식은 없던 일이 되었다.
물론 소여 백작은 결투 중 에스텔이 끼어든 것을 얘기하며 결과를 뒤엎으려고 했지만, 이는 쿠엔틴 회장의 협박으로 간단히 해결되었다.
“내 비서와 이 청년을 함께 상대할 셈인가?”
그레고르와 스테파니, 두 사람의 사도를 한 번에 상대할 것이냐는 노골적인 협박.
평소의 소여 백작이라면 이에 맞서 끝장을 보려고 했을지도 모르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그에게는 남은 패가 없었다.
보어헤스 백작은 더는 사도가 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이드라의 신기는 그레고르의 것이 되었다.
크루거와 마이어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는 있겠지만, 인제 와서 그들이 대신 나선다고 해도 줄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야말로 외통수.
“알겠소.”
결국, 분노를 터뜨리면서도 소여 백작은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나고 텅 빈 결혼식장에서 스테파니와 쿠엔틴 회장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인제 그만 나오시게.”
허공을 바라보며 쿠엔틴 회장은 입을 열었다.
누가 보면 노망이 아닌가 의심되는 태도. 하지만 지금 쿠엔틴의 눈에는 오히려 총기가 가득했다.
지금 그가 기다리는 것은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한 사람의 친구.
잠시 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
눈앞의 존재는 그 단어를 제외하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윤곽은 분명 인간의 것을 취하고 있지만, 이목구비도 그 구체적인 형상도 식별할 수 없다. 그야말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형태를 이룬 것 같은 존재.
“그래서 보고 싶은 건 충분히 보았나, 옛 친구여?”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향해 쿠엔틴 회장은 너무나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
“끌끌끌. 여전히 재미없는 친구로군.”
대답이 없는 상대를 향해 시시콜콜하게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쿠엔틴 회장. 녀석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자리를 파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언제부터 알았지?]
그림자가 결국 입을 열었다.
“언제부터라. 처음부터라고 할 수 있겠군.”
[처음부터?]
“저 그레고르라는 청년. 자네가 키운 괴물을 쓰러뜨린 존재가 아닌가? 그걸 알면 자네가 이곳에 올 거란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지.”
[나 때문에 여기에 온 건가?]
“당연한 얘기 아닌가? 자네가 오지 않는다면 소여 그 답답한 친구를 만나러 오지도 않을 걸세.”
[…….]
넌더리 난다는 듯 몸을 떠는 쿠엔틴 회장. 소여 백작이 듣는다면 분노하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 그는 없었다.
“그래서 감상은 어떻던가? 그 그레고르라는 친구.”
[글쎄.]
“그 아가씨를 결계 안으로 들여보내 준 거 알고 있다네. 그런 식으로 개입까지 했으니 분명 뭔가 생각이 있을 터인데?”
에스텔이 결계를 통과시켜준 것을 꼬집는 쿠엔틴 회장의 말에 그림자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길지 않은 침묵의 시간.
이는 주변이 일렁이는 그림자에 침식되기 시작하면서 끝을 고했다.
[후보에 넣을 정도는 되더군. 네 방해 없이 계속 지켜보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서는 숨길 수 없는 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호오? 날 죽이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필요하다면. 내가 아는 한 너만큼 위험한 녀석은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동시에 서서히 회장을 노리고 다가오는 그림자.
콰직-!
하지만 그것은 한 존재의 손길에 가볍게 분쇄되었다.
“감히!”
스테파니. 쿠엔틴 회장의 비서는 어느새 사도의 형태로 변해 그림자의 앞에 섰다.
그와 함께 녹아내리기 시작하는 주변의 그림자.
거미여제, 아틀락나차의 사도가 뿜어내는 유형화된 살기와 독에 그림자의 주변이 공간째로 녹아내린다.
[그쪽도 제법이군.]
“과거의 나나 자네만큼은 아니지만, 스테파니는 상당히 강하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그림자는 이내 소멸한 것처럼 두 사람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어지는 정적.
“놓쳤습니다.”
잠시 모든 감각을 동원해 주변을 뒤지던 스테파니는 고개를 숙여 쿠엔틴 회장에게 사죄의 뜻을 전했다.
“괜찮아, 이리될 줄은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사과를 물린 쿠엔틴 회장은 조용히 그림자가 사라진 장소를 응시했다.
그저 묵묵한 시선으로. 한때나마 자신의 친구였던 존재를 떠올리며…….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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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1-01-10 22:40:10
낮에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 그리고 예상 밖의 전개에의 놀람에 코멘트를 못 하고 있었다가 이제야 하게 되네요. 이제는 마음이 좀 진정되었으니까요.
에스텔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아니었군요.
고유권능인 융합변이, 그리고 에스텔과 그레고르는 둘이서 하나가 되어서 신기인 세계 가르기를 발휘했고, 보어헤스 백작을 쓰러트렸네요. 정말 엄청난 일이 일어났군요. 이해가 바로 되지 않더라도 이상하지 않을...Papillon
2021-01-11 00:57:05
융합변이는 처음부터 그레고르의 고유 권능으로 설정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임팩트 있게 처음으로 선보이려고 했는데 예상보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군요.
SiteOwner
2021-02-20 20:49:48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종잡을 수 없는 상황이 이렇게 이어졌군요.
에스텔은 죽은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고, 그레고르와 융합변이하여 이렇게 완전히 다른 차원의 존재가 되어 그 보어헤스 백작을 쓰러트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정말 저 세계의 사람들이 보고도 놀라지 못할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스타크래프트의 프로토스의 아콘은 두 하이템플러의, 다크아콘은 두 다크템플러의 희생에 따른 융합으로 형성되니까 그레고르와 에스텔의 융합변이와도 또 다르고, 이런 융합변이라는 게 참 독특하면서도 또한 멋있다고 느끼고 있습니다.Papillon
2021-02-26 03:39:28
융합변이는 사실 이름과 함께 그레고르에 대한 설정 중 가장 먼저 정립된 내용입니다. 다만, 처음부터 등장시키기에는 미묘한 점이 있어서 액트 2에나 등장하게 되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