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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학의 사조(思潮)에 구성주의 또는 사회구성주의(社会構成主義, Social Constructivism)라고 불리는 것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런 것입니다. 구성주의적 세계관은 기존의 현실주의 및 신현실주의와도 다르게, 또한 자유주의 및 신자유주의와도 다르게, 국제질서와 관계는 이미 사회적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그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사회구조에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고, 그러니 미국을 대표로 하는 서구문명이야말로 세계의 알파와 오메가이고 그 미국이 만든 사회구조야말로 인간을 종속시키는 악의 축일 수밖에 없으니 미국의 각종 인적 및 물적요소에의 적대시가 당연해집니다. 그러니 미국인, 특히 개신교를 믿는 영국계 백인남성인 와스프(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야말로 악의 정점에 있는 계층인데다가 월스트리트(Wall Street)로 대표되는 동부의 금융이라든지 모타운(Motown)으로 대표되는 북부의 자동차공업단지라든지 프레리(Prairie)에 펼쳐진 중부의 대농장이라든지 헐리우드(Hollywood)로 대표되는 서부의 문화거점이야말로 만악의 발원지인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코카콜라(Coca-Cola)와 맥도날드(McDonald's)는 미국 자본주의의 선봉장이고 커피는 "미제똥물" 로 경멸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리고 그런 질서와 문물을 만든 미국이 하면 무엇이든 악입니다. 이런 구조를 깨는 것이야말로 정의이고, 따라서 진보세력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반미(反美)와의 인연은 필연적으로 지닙니다.
이런 구성주의가 매우 일관적으로 특정대상을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긴 하지만, 사실 이중성에서 전혀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은 어디에서 온 것도 아닌 구성주의 그 자체에 배태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서두로 돌아가서, "미국이 하면 무엇이든 악" 담론에 주목해 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미국이 하면 무조건 악이니까 구성주의를 신봉하는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에 대한 입장을 아주 쉽게 잘 뒤집습니다.
이런 블랙유머가 있습니다.
어떤 반미운동가가 "미국은 가난한 나라에 대해 전혀 원조하지 않는 자본주의 악마다!!" 라고 외쳤습니다. 누군가가 자료를 들고 와서는 미국이 세계에서 대외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임을 보여주며 반박했더니 그 운동가는 바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미국은 막대한 자본으로 약소국을 종속시키는 자본주의 악마다!!" 라고.
이것은 반미를 위해서 이주 쉽게 말을 뒤집는 그들의 이중성을 보여주는 블랙유머인 동시에 특히 중요한 함의가 있습니다. 왜 그들은 그렇게 머뭇거리지도 않고 그렇게 논파되어도 바로 뒤집을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것이 구성주의의 가정의 결함에 있습니다.
구성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사회구조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사회구조에 종속된 수동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전제가 있는 한 이 사회는 정적(静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이 전제는 결국 꿈도 희망도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지고 반미란 비난의 대상이 되지만 극복할 수는 없게 됩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예외적인 인간을 상정해서 그야말로 새로운 질서를 주도해 나갈 사람이 된다고 영웅화하면 당장에는 모순이 생기지만 일단 그렇게 사회구조가 재조직되는 다음에는 모순이 생기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 이고, 따라서 반미를 외치며 본인이나 가족은 미국에 유학하고 청렴을 외치면서 위법을 반복하는 이중성은 숨길 거리도 못됩니다. 예외적인 인간이니까요. 그리고 거기에 의문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국내의 진보세력은 일본을 증오하지만 그 일본을 전쟁에서 이겨 항복시킨 미국도 증오합니다.
즉 미국이 수립한 그 질서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까. 그리고 그것을 깨기 위해서 자신들은 그 구질서의 예외가 되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을 추종하게 만들어서 신질서의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즉 그 목표를 위해서는 그 세계관 따위는 무시했다가 재인용했다가를 아주 쉽게 반복할 수 있는 것이 그 이중성의 본질이자 영원한 속성입니다. 그리고 그 이중성은 지금은 숨겨져 있지만 앞으로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변용되어 태어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다음에는 진보주의 이념이 직접 지지받지 못하더라도 사실상 지지를 받고 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이유를 다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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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Lester
2024-05-12 22:41:48
그렇게 혁명이니 개혁으로 만들어낸 사회가 고착화되면, 결국 그렇게 욕하던 미국 제국주의가 판치던 세상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것만 생각해봐도 내로남불이구나 싶더라고요.
최근 작품(정확히는 2021년작)인 게임이자 중남미계 가상국가에서의 독재가 주제인 "파 크라이 6"에서는 푸에르토리코의 정치가였던 페드로 알비수 캄포스의 명언인 "독재가 법인 세상에선, 혁명이 질서가 된다. (When tyranny is law, Revolution is order.)"가 인용된 것도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검색해보니 '통치자가 독재자로 변모하면 피지배자들은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정도의 의미더군요. 운동권에서는 내로남불적인 태도로 무시하겠지만...
SiteOwner
2024-05-13 13:43:26
사실 정확히는 미국 제국주의 운운하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로 역사상의 열강 중에 미국만큼 양심적인 나라도 없었습니다. 중국의 역대왕조 및 현재의 중공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의 국민국가든 일본이든 일단 20세기에도 꾸준히 영토적 야욕을 투사해 왔고 중국과 러시아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그러한 야욕을 전혀 숨기지도 않습니만 미국의 경우는 영토적 야욕 자체가 19세기의 유물로 끝났고 오히려 태평양의 군소도서국가인 팔라우와 미크로네시아의 경우는 경우는 자유연합(Free Associated State)의 형태로 독립시키까지 했습니다. 사실 카리브해의 경우도 과거의 멕시코처럼 다 휘어잡을 수도 있었습니다만 미국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미국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딱히 그럴 이유가 없어서라고 보는 게 합리적입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결국 그런 것입니다. 진보의 반미성향은 미국이 잘못해서 비판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차지해야 할 몫을 미국이 강탈했다고 생각해서 미국을 악마화하는 그런 것입니다.
이전에 문제의 세이카 선배가 그런 게 있었습니다. 미국이 뭐가 아름다운 나라냐 하면서 중국에서는 꼬리 미(尾)를 가차로 쓴다고. 꼬리가 별로 가치없다고 그렇게 여긴 것 같은데 그 세이카 선배에게 꼬리가 있다면 바로 잘라주고 싶었습니다.
예의 그 말은 자신들이 약자나 소수의 입장일 때 아주 훌륭한 레토릭일 수 있습니다. 비슷한 것으로 사상이나 표현의 자유, 다양성 등. 그런데 그들이 다수가 되면 절대 그러지 않습니다. 그때는 상식과 비상식 또는 선과 악 구도로 태세전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