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중학교 3학년 때까지 같은 학교를 다닌 두 남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K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그리고 키가 꽤 작은 편이어서 키 순서로 번호를 매기면 보통 5-6번 정도가 됩니다. 저는 4학년 때에는 전학생이라서 당시에는 여학생만 받을 수 있는 번호였던 38번을 받았고(해당 게시물 참조), 5, 6학년 때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5-6번 정도를 배정받았습니다. 그리고 K군의 번호도 저와 인접했습니다. 키는 제가 조금 작았습니다.
4학년 때에는 이름 대신 전학온 아이로만 불리고, 5, 6학년 때에는 외모에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는 저와는 달리, 그 K군은 잘생기고 성격이 밝아서 여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번호가 가까운 K군은 저에게도 친절해서 좋은 친구가 될 것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K군이 반장선거 및 학생회장선거에 나오게 되었습니다.
반장선거에서 하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역사적인 위인 중에서 키가 작은 사람이 많았다면서, 작아도 능력은 좋다는 점을 상당히 크게 어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예로 나폴레옹을 들고, 작은 고추가 맵다는 속담도 인용하였습니다. 아무튼 반에서 전반적으로 인망이 두텁다 보니 어렵지 않게 K군은 반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학생회장선거에서도 나폴레옹을 위시한 단신의 위인 이야기, 작은 고추가 맵다는 등의 말을 연설에 포함시켰습니다. 일단 당선되기는 했습니다만, 조숙한 남학생들끼리는 작은 고추가 맵다는 그 속담을 성적으로 해석하면서 뒤에서 조롱하기 일쑤였습니다. 저도 성지식에 대해서 알아가는 단계라서 걱정되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입밖에 내지는 않았습니다.
K군과 저는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역시 같은 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친교도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1학년까지였지요.
2학년 1학기가 시작할 무렵에는 저는 키가 많이 자랐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같은 반이 된 K군의 키는 거의 변함이 없었습니다. 입학 당시 K군의 키가 저보다 2-3cm 정도 컸지만 학년이 바뀌자 키가 커진 쪽은 저였고, K군과의 격차는 10cm를 쉽게 넘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그 중학교도 역시 키 순서로 번호를 붙였는데 K군의 번호는 보다 앞으로 당겨지고, 저는 남학생 중 가장 뒤의 번호를 부여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변해 버린 것이 있었습니다. K군이 저를 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키가 큰 사람들을 비하하는 모습도 자주 보였습니다. 반장선거에 나온 K군은 출마의 변에서 또 국민학생 때에 했던 단신의 위인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키가 큰 사람은 싱겁다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저를 공개적으로 비난했습니다.
느닷없이 반장선거에서 공개비난을 당한 저는 K군에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반장으로서 뭘 하겠다는 건데?"
결국 K군은 반장선거에서 낙선했고, 저와의 친교도 끊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더 이상 K군과 재회할 일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K군을 키에 사로잡히게 했던 것인지, 그리고 그것이 저와의 친교를 공개비난으로 끝장내야 할만큼 중요하고 절박했던 것인지, 지금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씁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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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
대왕고래
2015-05-19 22:13:17
어렸을 땐 어째선지 저보다 잘난 게 보이면 괜히 시비걸고 싶고 그랬죠.
초등학교 5학년 때였나, 저보다 쎈 녀석한텐 한 1주일 정도 싸움을 걸었었어요. 그리고 죄다 제가 졌죠.
생각해보니 그 때의 제가 저 K군과 같은 경우가 아니었나 싶어요. 괜히 나보다 잘난 거 같으니까, 어떻게든 이기고 싶다는 거죠. 그거 진짜 헛짓거리인데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 K군이라는 분도, 저처럼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후회하고 살고 계셨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SiteOwner
2015-05-19 23:54:21
대왕고래님의 경험담,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그러는 심리가 확실히 남자들 사이의 경쟁의식일까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 K군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만, 말씀하신 것처럼 과거의 실수에서 자유롭게 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키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은 생각할 필요도 없지 않겠습니까. 자신의 단점을 극복하려다 오히려 중론의 덫에 빠진 것이 불행하기 짝이 없습니다.
좋은 의견을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루유키
2015-05-20 12:54:10
타인을 싫어하는데 여러 이유는 있겠지만 피부색이 다르다 따위를 이유로 붙여선 안된다고 질타했던 야구선수 피 위 리즈 처럼 타인이 선택할 수 없는 신체적인 특성같은걸 화젯거리로 삼는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가까이 하고싶지도 않네요. 개인적으로 전 딱히 키에 대해 불편하거나 그런건 없어서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
반대로 그게 이상한 쪽으로 열등감을 품긴 하는건지 소설 쓰고 한다고 만드는 캐릭마다 160cm대를 넘는 캐릭터가 드물더라구요. 주인공들은 대체로 140 중반 정도. 자기보다 장신인 캐릭터는 만들지 않겠다는 창조주의 폭정일지도요(...).
SiteOwner
2015-05-20 18:47:28
되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 K군은 저라는 사람 자체를 좋아한 것이 아니라, 저보다 키가 근소하게 컸을 당시에는 저보다 우위에 있을 수 있어서, 그리고 키가 역전된 이후로는 그 우위가 깨져서 그렇게 친소를 결정한 것 같습니다. 결국 그렇게 단신 위인을 언급했지만 결국 키로 사람을 판단하는 중론의 덫에 완벽하게 휘말린 것이지요.
창작물의 캐릭터의 키 설정이야 창작자의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안샤르베인
2015-05-20 13:32:01
씁쓸한 결말이네요. 키 하나만으로도 사이가 저렇게 틀어질 수 있다는 게 미묘했고...
SiteOwner
2015-05-20 20:15:27
말씀하신대로, 씁쓸한 결말 그 자체입니다.
20여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도 그 기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키로 인간관계를 재단하고 이러는 것이 비뚤어진 경쟁심리로 보여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물론이고, 상당히 불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지금은 완전히 인연이 끊어져서 뭐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 K군이 지금도 그 틀에 사로잡혀 있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스타플래티나
2015-05-21 00:03:54
대체 그 키가 뭐기에... 그렇게까지 틀어져야 했던 걸까요.
저도 어린 시절에는 저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었던 적이 많았는데, 지금 와서 보니 참...
SiteOwner
2015-05-21 00:14:11
제가 하고 싶던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스타플래티나님 말씀대로 그 키가 뭐길래...
정말 어이없었던 어린 날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때는, K군에게 이런 말도 하려 했지만 너무 심한 공격이 될 것같아서 참았습니다.
"최소한 너는 위인이 아닌데?"
중론의 덫에 빠져서, 극복을 한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잘못된 중론에 휘둘려서 저렇게 행동하면 안된다는 게 다시 생각나서 씁쓸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