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신문을 보다가 두 가지의 어이없는 뉴스를 접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는 국내의 기묘한 논리, 다른 하나는 국외에서 일어난 18년 전 국내상황의 반복.
일단 이것부터 보겠습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13/2015071302693.html
군사기밀을 중국에 유출한 기무사 장교에 대해서 간첩 혐의를 적용해야 한다는 국회의원의 발언에 대해 국방부장관이 적용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형법상 간첩행위의 대상이 적국으로 한정되어 있으니 제3국에 국가기밀을 누출한 경우에는 간첩혐의를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인데...
이거, 요즘 정부가 친중이니 이렇게라도 면죄부를 주고 싶어 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중국이 적국이 아니라는 말, 한번 곱씹어 봅시다.
6.25 전쟁에 의용군이라는 얄팍한 속임수를 써가며 개입하여 전황을 악화시켰고, 북한의 기습남침을 격퇴해가던 국군 및 국제연합군을 다수 살상한데다 휴전협정의 일방당사자로서 나서서 국제질서를 교란한 중국이 이래도 적국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까? 안보에 위협이 될만한 국가는 잠재적인 적국이고, 게다가 이미 중국처럼 전과가 있는 국가는 잠재적인 적국이 아니라 실질적인 적국인데. 게다가 북한은 현행법상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참칭하여 국토의 북반부를 지배한 반국가단체이자 교전단체의 지위를 가지는데, 법을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중국이 적국이 아닌 제3국이라는 말이 성립한다면, 이것도 맞다고 봐야 할까요?
일본은 대한민국을 침략한 적이 없으니 과거사에 어떤 의무도 없다고.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중일전쟁, 그리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태평양전쟁 기간 중에 대한민국은 없었고, 건국된 것은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3년 뒤였으니 그럼 일본이 대한민국을 침략했다는 사실 자체가 전혀 성립하지 않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여기에 찬성하시겠습니까?
그리고 외신 하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7/13/2015071302672.html
결국 그리스가 재협상은커녕 오히려 더욱 엄격한 구제금융안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광경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1997년말, 한국도 이랬습니다. 당시 재협상을 주장하던 세력이 있었고, 결국 집권에 성공했는데, 그 결과 재협상은커녕 국제통화기금(IMF)의 요구를 무조건 이행해야 했습니다. 밑도 끝도 없이 재협상을 주장해서 표는 얻고, 그리고 나중에 약속을 못지키면 그냥 IMF를 탓하면 되는 것이고...18년 뒤의 그리스에서 이러한 현상이 똑같이 나타날 줄이야...그리고 재협상은 협상력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는데, 그리스의 산업상황을 보면 그냥 웃고 말지요.
그러고 보니 1997년 당시에, 재협상 주장에 대해 역시 민족주의자이다, 한국인의 자존심을 살리고 있다 하면서 지지한 젊은이들이 많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그때의 자신들의 선택이 지금도 합리적이라고 주장할지가 궁금합니다. 이걸 생각해 보니까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에서, 결국 정쟁에서 이긴 척화파들은 목숨도 잃고 임금을 그 "오랑캐" 두목에게 무릎꿇리게 만든 결과적인 매국도 같이 생각나서 씁쓸해지고 있습니다.
역시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게 드러납니다.
1637년의 조선, 1997년의 대한민국, 그리고 2015년의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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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안샤르베인
2015-07-14 00:30:08
씁쓸하기 그지없네요. 어디에든 국가기밀을 팔아넘긴 이상 중죄인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데 적용이 어렵다니, 무슨 법이 엿가락 휘듯 적용되는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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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5 17:46:19
정말 이런 기교사법을 언제까지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렇게 국방장관이 헛소리를 하는 것은 군형법 제80조만 봐도 간단히 논파됩니다. 군형법은 형법의 특별법이라서 특별법을 우선하는 원칙에 따라 먼저 적용해야 하는데, 해당 조문의 제1항은 "군사상 기밀을 누설한 사람은 10년 이하의 징역에나 금고에 처한다." 라고 정의되어 있으니 그 기무사 장교의 처벌을 피할 수 없는 것이 명백합니다.
어설프게 변명하려다 자충수를 두는 국방장관이라고밖에 볼 수 없겠습니다.
조커
2015-07-14 09:52:54
그리스의 경우엔 뭐..데자뷰가 느껴진다지만 꼴좋다 라고밖에 생각이 안들어요.
저 양반들이 아직도 올림포스의 신들이 존재하여 자기들을 지켜줄거라 믿고 저렇게 뻔뻔스럽게 굴었다 라는 농담이 농담같지가 않았는데...이젠 보불전쟁에서 대패하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패전국입장으로 꼼짝없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프랑스 입장이 되었군요...참깨도 안먹었는데 입에서 고소한 맛이 나네요 껄껄껄.
아이러니하게도 제가 프랑스 비유를 들었는데 그나마 저 그리스를 간접적으로나마 옹호한 나라가 프랑스가 유일했다죠? 그 양반들도 꼼짝없이 거부할 수 없는 요구가 담긴 문서에 서명 좀 해봤다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그리스를 동병상련이라고 동정했나봅니다 낄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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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5 18:01:24
이번 사태는 그리스의 모럴 해저드와 민족주의식 선동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불러일으켰는지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그리스에 대해서 유로존에 잔류할 수 있도록 정상참작을 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이것을 일축하고 그리스가 자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어림없다고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역시 합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리스는 산업구조도 산업구조지만 그 이전에 국가지도층의 부패한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을 일신하지 않는 한은 가망이 없습니다.
Lester
2015-07-14 22:18:14
1. 이유야 어쨌건 모든 외국은 잠재적 동맹국이자 잠재적 적국이죠. 현대에 영원한 우방은 없으니까요. 그런데 가만 보면 우리나라 외교는 마치 '한 번 마음을 줬으니까 당연히 나에게도 마음을 주겠지' 하고 안도해 버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제가 한때 그런 성격으로 살아봐서 잘 압니다). 어떻게 보면 순진하거나 안일한 거죠. 더구나 인간관계가 아닌 국가간의 여러 이해가 걸린 관계인데 저렇게 단순히 동맹국 운운하면서 넘어가는 걸 보면 너무 안일해 보입니다.
2. 음, 이 쪽에 대해선 잘 모르는지라 어디에 초점을 맞춰야 되는지 모르겠네요(그리스와 한국 모두의 재협상이 무시당한 정황을 알면 좋겠군요). 그래도 협상력이 있어야 협상할 수 있다는 말에는 동감합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사례(?)를 들자면 스위스의 무장 중립을 들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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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5 18:11:37
맞습니다. 영원한 우방도 적도 없다는 것을 한국 외교계는 너무도 잘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로버트 김 사건처럼, 미국은 그 대상이 동맹국이라고 하더라도 정보를 누설한 경우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올드리치 에임스 사건처럼, 정보기관의 인물이 타국에 정보를 팔아넘긴 사건의 파급력은 무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만 보더라도 국방장관의 태도는 안일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스위스의 무장중립은 말의 무게를 제대로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한국의 경우 당시 미셸 캉드쉬 IMF 총재가 유력 대선후보들에게 이행각서를 받아둔 상태여서 누가 당선되어도 정리해고같은 초강경 조치를 이행해야 했습니다. 이러니 재협상 어쩌고는 그냥 민족주의 감정으로 선동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의 경우 재협상 요구는 독일이 내세운 긴축재정 집행 등의 신뢰회복 이행조치 요구에 떠밀려 즉각 일축당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