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터법이 널리 보급되면서 영미단위계(Imperial/US Customary Units)를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꽤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별별 일이 다 있습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 단위들은 비법정단위라고 분류되어서 아예 간접적인 표시도 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없지 않습니다.
일단 여기에서는 미터법 일원화론에 대한 비판 대신에, 제목에서 열거된 단위들의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조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인치는 미터법으로는 2.54cm로 정의되고 있고, 이것의 12배를 1피트(=30.48cm)라고 합니다. 그리고 1피트의 3배는 1야드(=91.44cm), 5280배는 1마일(=1609.344m)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바로 보이는 것이 피트가 12인치, 야드가 3피트=36인치, 마일이 1760야드=5280피트=63360인치라는 것인데, 미터법에서처럼 10의 배수로 하면 좋았을 것이 왜 하필이면 3의 배수로 되어 있을까 하는 문제도 충분히 제기가능하겠죠?
여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3으로 나누어 보아라!! 그리고 4로 나누어 보아라!!"
10진법의 가장 큰 결점이 바로 2나 5로는 정확히 나누어 떨어지지만, 실제로 많이 쓰이는 3등분이나 4등분에는 약한 것입니다. 그나마 10을 4로 나누면 정수는 되지 않더라도 2.5라는 유한소수값이 나오지만, 3으로 나눌 때는 그렇지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라서 근사값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1피트가 12인치로 정의된 경우에는 1피트를 2등분해도 3등분해도 4등분해도 정확히 나누어 떨어집니다. 이 경우는 5로 나누어 떨어지지 않지만 그래도 2.4라는 유한소수값이 나오니 최소한 10진법보다는 선택지가 넓기 마련입니다. 12진법을 확대한 60진법의 경우는 5로 나누어도 정수의 해가 되니까, 2, 3, 4, 5, 6등분이 모두 이루어진다는 장점이 생깁니다. 그렇다 보니 10진법을 기준으로 한 미터법이 세계의 보편단위로 정착해 가는 지금도 시간 및 공간의 계측에는 여전히 12진법이 이용되는 법입니다.
또한, 미터법으로 상당히 애매한 것이 인치, 피트, 야드, 마일을 이용하면 꽤 쉽게 풀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보통 장신의 기준이 성별에 따라 좀 다르긴 한데, 대체로 여성의 경우 167-168cm 선을 넘으면 장신이라고 분류할 수 있습니다. 저 수치를 영미단위계로 바꿔쓰면 어떨까요? 5피트 6인치(=167.64cm)가 됩니다. 남성의 경우는 보통 180cm를 넘으면 장신이라고 하는데, 이에 가장 가까운 영미단위계의 수치는 5피트 11인치(=180.34cm)입니다. 이 수치는 6피트에서 1인치 모자라고, 따라서 키가 아주 큰 사람을 뜻하는 동양의 오랜 표현인 6척장신이라는 말이 확실히 실감나게 됩니다. 반대로,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을 5척단구라고 표현하는데, 5피트가 152.4cm니까 꽤 잘 맞습니다. 게다가 위에서 드러난 장신 기준의 성별차는 5인치로, 이것은 미터법으로는 12.7cm가 되고 성별 평균키의 차이와도 대략 일치하고 있습니다.
마일의 경우 현재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것은 위에서 언급한 미국 관습단위로서의 마일(=1609.344m) 및 선박 및 항공기의 운항에 사용되는 노티컬 마일(=1852m, 해리)의 두 종류가 있습니다.
미국 마일의 경우, 보통 사람이 편도 30분간 이동하는 거리로 보면 대체로 무방하며, 이 말은 집을 나와서 1시간 내에 간단한 용무를 보고 돌아올만큼의 여유라는 의미로도 치환가능합니다.
그리고 노티컬 마일은 자오선의 지도상 1분, 즉 자오선 전체 길이의 1/21600에 해당하는 거리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지도상에서의 표시가 용이하기에 아예 국제적인 단위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파운드는 미터법으로 정의될 경우 정확하게 453.59237g이지만 통상적으로는 453.6g입니다. 또한 1파운드는 16온스이므로 1온스의 통용 근사값이 28.35g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스테이크 1인분 고기의 적정 서빙량은 과연 얼마가 될까요? 1/2파운드면 대략 여러 패밀리레스토랑에서 판매하는 스테이크 메뉴의 제공량에 근접합니다. 또한 하루에 마시는 물의 적정량을 미국에서는 8온스 컵으로 8잔으로 표시하는데, 하루에 고기 1파운드와 물 4파운드면 권장량이 딱 나오는 법입니다. 꽤 직관적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체중을 보겠습니다. 사실 미터법으로 100kg이면 확실히 많은 체중이지만 50kg이 확실히 적은 체중인지는 약간 애매하지요. 여성의 경우는 키가 작은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런데 파운드로 체중을 보면 상당히 효과적으로 판단가능합니다. 200파운드는 90.72kg로, 키가 큰 근육질의 남성이 아니라면 대체로 이 정도의 체중은 건강을 우려해야 하는 레벨이 됩니다. 100파운드는 45.36kg로, 미성년자가 아닌 이상 성인이 저 수준의 체중을 기록하면 저체중으로 건강이 위험한 레벨이라는 것도 파악이 됩니다.
항공기의 최대이륙중량을 보면, 100만 파운드는 453.6톤. 역시 크다는 것이 느껴지는가요? 저 수치를 넘는 것은 안토노프 An-225 수송기와 에어버스 A380 여객기가 있습니다. 한때 세계에서 가장 컸던 민항기인 보잉 747 여객기의 최신기종인 747-8의 최대이륙중량이 98만 7000파운드인데, 어떻습니까? 파운드로 환산하면 아예 자리수 자체가 달라진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것을 보면 왜 A380을 수퍼점보라고 칭하는지가 직관적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끝으로 화씨온도.
화씨온도는 물의 어는점을 32도로, 물의 끓는점을 212도로 정의해 둔 것인데, 이것이 의외로 직관적인 점이 있습니다.
그럼 섭씨 -20도부터 40도까지를 화씨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 섭씨 -20도 → 화씨 -4도
- 섭씨 -15도 → 화씨 5도
- 섭씨 -10도 → 화씨 14도
- 섭씨 -5도 → 화씨 23도
- 섭씨 0도 → 화씨 32도
- 섭씨 5도 → 화씨 41도
- 섭씨 10도 → 화씨 50도
- 섭씨 15도 → 화씨 59도
- 섭씨 20도 → 화씨 68도
- 섭씨 25도 → 화씨 77도
- 섭씨 30도 → 화씨 86도
- 섭씨 35도 → 화씨 95도
- 섭씨 40도 → 화씨 104도
어떻습니까? 체온에 근접하거나 아예 넘는 경우, 화씨눈금의 자리수가 바뀌려 하듯이 활동의욕도 한계에 부딪치지 않습니까? 그리고 반대로 추운 날씨의 혹독함과 100점 만점의 점수에서 몇 점을 맞은지의 기분이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의외로 이런 점에서 꽤 유용합니다. 이 점을 응용한다면 불쾌지수의 개략적인 산출 및 미국에서의 기상예보 해독, 공조설비의 조작 등도 한결 쉽게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다음에 이 주제로 글을 쓸 때에는 미터법 강제의 문제와 논리적 흠결에 대해서 다루어 보겠습니다.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7 댓글
파스큘라
2016-04-08 02:58:11
글 재밌게 읽었습니다.
개인적인 일상 생활에서는 쓸 일이 거의 없지만, 인치 단위는 나름대로 친숙합니다. 제 취향이자 관심사가 2차 대전기의 각종 병기류나 보병 화기류이기 때문에 이들 병기가 가진 주포나 부포 같은 주무장, 보병의 화기 류는 대체로 인치 단위(대표적으로 아이오와급 같은 초 드레드노트급 전함의 주포는 보통 406mm/40.6cm 급인데 인치 단위로는 16인치로 깔끔하게 떨어지죠.)로 따지기 때문에 자료를 찾다보면 화기의 구경을 따지는 인치나, 항속거리를 따지는 해리는 자주 접하게 되더라구요.
그와는 별개로 예전에는 일일히 표를 찾아 대조해보고 해야했을 각종 단위나 부피, 무게, 계량 등의 환산도 요새는 서로 변환시키고 싶은걸 고르고 필요한 수치값을 입력하면 자동적으로 계산해주기 때문에 참 편하게 느껴지네요.
파스큘라
2016-04-09 00:55:00
해당 차량은 일단 셔먼 파이어플라이로 취급되는데 설정에 의하면 선더스 대학 부속 고교가 17파운더 포를 별도로 입수하고 셔먼에 장착해서 파이어플라이에 준하는 사양으로 자체 개조한 차량이라는듯 합니다. 언급하신 파이어플라이나 프라우다 전에서 등장한 152mm 포 장착 KV-2 라던가 쿠로모리미네 전에서 중간보스로 등장한 128mm 포 장착의 초중전차 마우스는 대구경포이기 때문인지 포의 발사음 자체가 다른 차량보다 훨씬 더 육중하고 위압감있게 들리죠.
극장판에서는 무려 구경 600mm의 자주박격포(...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공성포 라는듯합니다.) 칼이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직 극장판을 관람하지 못한지라 국내에 개봉하면 보러 가볼 생각입니다.
SiteOwner
2016-04-08 21:36:48
수학적인 내용이 많은 긴 글인데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니까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쓰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각종 무기류에는 인치 단위는 물론 파운드 단위도 많이 나옵니다. 총기류의 7.62mm, 12.7mm, 함포류의 76mm, 102mm, 127mm, 254mm, 381mm, 406mm 같은 것들이 인치 단위로는 그 자체로 깔끔히 변환되거나, 소수점 이하 단위를 반올림해서 인치의 정수값이 나오거나 하고 있습니다. 17파운더, 20파운더같이 발사체의 중량으로 분류되는 포가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걸즈 운트 판처에도 17파운더를 장착한 셔먼 전차가 등장하는데, 다른 셔먼과는 포의 발사음 자체가 차원이 다르게 크다 보니 시청 도중에 깜짝 놀라버렸습니다.
요즘의 단위변환, 참 편리하지요. 말씀하신 것처럼.
마시멜로군
2016-04-09 00:19:39
인치 관련해서 의문인데요. 왜 함포(지금도 많이 쓰이니.)를 제외한 포는 mm단위(120mm등)를 사용하는데 왜 총은 인치단위를 사용할까요?
SiteOwner
2016-04-09 18:19:50
맞습니다. 미국의 90mm에 대해 소련의 100mm가 나오고, 이에 대응하여 미국, 영국 및 서독에서 105mm가 나왔습니다. 그 중 자유진영의 전차포로 가장 성공적이었던 것이 영국의 L7이었지요. 이에 소련은 115mm 활강포를 탑재한 T-62로 전차포의 새 시대를 열고, 다시 자유진영은 120mm를 내어 놓습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것으로 활강포는 서독의 라인메탈 제품 및 프랑스의 GIAT의 제품이 있고, 영국은 120mm에도 여전히 강선포인 L11 및 L30을 고집합니다. 그리고 소련이 125mm를 내놓지만, 더 이상의 주포 구경 경쟁은 일어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변화의 추이가 작게는 5mm, 크게는 10mm 단위로 움직이는 것이 보입니다.
마시멜로군
2016-04-09 13:55:11
그런데 전차포의 경우는 105mm의 위력이 소련쪽의 전차에 대응하기 충분하지 않다고 판단해서 120mm로 넘어간거 아닌가요?
SiteOwner
2016-04-09 11:47:36
근대의 초강대국이 영국이었고, 현재의 초강대국이 미국인 것을 감안하면 추론이 가능합니다. 즉 초강대국이 정한 것이 표준. 이런 셈이지요. 영미 양국이 1895년부터 지금까지 경제적, 군사적으로 계속 협력해 왔다 보니 영미의 표준을 간과할 수는 없는 법입니다. 게다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등 양국이 주도하는 집단안보체제는 당연히 영미의 표준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양국의 미터법 도입은 상당히 늦은 편으로 영국은 1965년에 미터법을 법정단위로 지정하였고, 미국은 1975년부터 미터법을 도입하여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총기의 경우는 미국이 최대의 시장이다 보니 미국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유리합니다.
포의 경우는 아무래도 영미 양국이 완전히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서 그런가 봅니다. 실제로 전차포의 경우는 자유진영의 경우 과거 영국 로얄 오드넌스 L7 105mm 강선포를 채택하였지만, 이후 서독-독일의 라인메탈 120mm가 주종이 되어 있습니다. 그보다 구경이 작은 포의 경우는 스웨덴 보포스의 40mm, 57mm 등이 주종입니다. 미국에서 개발된 경우도 20mm 발칸포, 25mm 이퀄라이저, 25/30/35/40mm 부쉬마스터 시리즈 등으로 미터법을 따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