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전근대 왕조시대를 다룬 사극을 보면 산적과 행인 관련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산적은 고개길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행인을 급습해서 재물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고, 행인은 목숨만 살려달라고 가진 것을 다 내놓습니다만, 산적이 그 행인을 살려 줄까요? 대부분의 경우 행인을 살해합니다.
저런 장면을 보고 느끼는 게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재물욕을 위해서 손바닥 뒤집기만큼 손쉽게 사람을 죽이는 산적의 무자비함에 떨게 되고, 현재가 저렇게 산적이 횡행하는 시대가 아닌 점에 감사해 하는 감정도 들겠지요. 그게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그럼, 이 장면을 약간 이성적으로 되짚어 보기로 하죠.
산적과 행인 각각의 목표, 그 목표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한 수단, 그리고 각자에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열거해 볼까요?
우선은 산적의 입장에서 정리해 보겠습니다.
- 목표 - 행인의 재물을 뺏는다
- 효과적인 달성수단 - 행인이 저항하기 전에 신속하게 죽여 재물을 뺏은 후 증거를 인멸한다
- 최악의 결과 - 상대를 잘못 보고 덤비다가 반격당하여 죽는다 / 행인이 도망쳐 관아에 토벌을 요청한다 / 행인에게 훔칠 재물이 없다
그리고 행인의 입장에서 같은 방식으로.
- 목표 - 고개길을 무사히 통과한다
- 효과적인 달성수단 - 산적을 만나지 않는다 / 여럿이 다닌다
- 최악의 결과 - 산적에게 살해당한다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산적은 산중에 숨어 살면서 고개길을 지나는 사람들의 재물을 뺏아야 생계유지가 되는데 행인들이 순순히 뺏겨줄 리가 없으니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즉 행인을 죽이는 것이죠. 그가 재물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일 행인이 빈털터리라고 하더라도 산적은 반드시 행인을 죽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혹시 상대를 잘못 보고 덤볐다가 반격당해 죽든지, 아니면 도망친 행인이 관아에 산적의 피해를 알려 토벌을 요청하는 식으로 일이 커져 버릴 수 있습니다. 즉 산적에게는 효과적인 달성수단은 하나밖에 없고, 최악의 결과는 셋 중의 하나입니다.
반면 행인의 경우는 효과적인 달성수단이 사실상 전무합니다. 산적을 만나지 않는 것은 완전히 요행에 맡겨야 하는 것이고, 여럿이 다니는 것은 좋긴 하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일단 행인이 왕이나 고관대작같은 신분이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그렇지 않은 평민의 경우라면 여럿이 다녀야 하는 게 상책인데 그게 언제나 가능하지만도 않습니다. 게다가 그 일행보다 산적의 무리가 압도적으로 많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문제가 되기 마련입니다. 여기에서 최악의 결과는 오로지 하나로 귀결되는 것입니다. 재물이 있건 없건, 행인에게는 죽음이 예약되어 있습니다.
더욱 간단하게 요약을 해 볼까요? 왕이나 권력자의 행차같이 건드리면 산적이 죽는 경우나 여러 사람들이 뭉쳐 다녀서 강도짓의 성공확률이 크게 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산적은 행인을 죽여야 재물을 뺏든지 말든지를 결정하는 것이고, 행인은 그 산적에게 아무리 애걸복걸해봤자 죽음을 당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구조, 어디에서 본 것같지 않나요?
그렇습니다. 사실 이것이 요즘 종말단계 고고도지역방어체제, 약칭 THAAD(사드)를 둘러싼 국제관계 및 논란의 핵심구조와 일치합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남북분단이 되어 있는 원인이 무엇일까요?
소련과 중국의 지원하에 북한이 일으킨 6.25 전쟁은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붉게 물들였으나 국제연합군이 참전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되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수괴인 김일성이 중공으로 피신하는 등, 북한의 멸망은 거의 확정적이었지요. 그러나 중국이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미명하에 불법개입하여 전황을 바꿔 버리는 바람에 북진통일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결국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국제연합 대표로서의 미국과 교전단체 대표로서의 중국과의 사이에 체결되어 지금까지 이 체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 체제가 남북분단의 현실이라는 것은 재론의 가치도 없이 명백합니다.
그리고 중국의 입장은 지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6.25 전쟁에서의 중공군의 불법개입을 중국에서는 항미원조전쟁(抗美援朝戦争)이라고 부릅니다. 글자 그대로,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북한)을 도운 전쟁이라는 것이지요. 이 명칭에는 공산권의 적화전략에 따른 잘 준비된 침략전쟁의 의미는 없고, 위기에 빠진 북한을 돕기 위해 미국에 맞설 수밖에 없었다는 기만에 찬 왜곡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교전단체 대표로 휴전협정에 조인한데다 중국은 북한과의 동맹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어떠한 입장의 변화도 없었음은 지극히 명백합니다. 즉 중국은 우리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해 북한이 일으킨 침략전쟁을 긍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패인 것입니다. 이것은 개전 66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이 형국에서 행위자는 6.25 전쟁에서 국제연합의 대표인 미국과 교전단체의 대표인 중국이 있다 보니 둘 중 최소 어느 하나의 적극적인 의지만 있으면 전쟁의 속행은 시간문제가 됩니다. 우리나라는 선택권이 없이, 휴전중인 전쟁이 재개된다면 국제연합의 일원으로서 맞서 싸우는 것밖에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중국이 위에서 언급한 산적의, 한국이 예의 행인의 입장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집니다.
다시 정리해 보겠습니다.
중국은 어떻게든지 침략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지도부의 실각, 내부결속의 붕괴, 외교적 고립 등이 맞물려서 최악의 결과를 맞이해야 합니다. 하지만 최소한 중국은 손해를 안 보는 선택지를 고를 수는 있습니다. 상대가 왕이나 권력자 일행같이 건드리면 반격당해 죽거나, 설령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니지는 못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이 같이 다녀서 제압하기 버겁다면 산적은 나서지 못하게 됩니다. 게다가 일단은 교전단체의 대표니까 개전을 하느냐 마느냐의 열쇠는 중국의 손에도 쥐어져 있습니다.
고개길을 건너야 하는 행인의 입장에 놓인 우리나라는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왕이나 권력자 등이거나 그들과 아주 가까운 관계라서 행차에 동행이 가능하다면 최상이고, 최소한 여러 사람들과 같이 다니는 것만으로도 산적이 습격을 단념할 확률은 비약적으로 높아집니다. 이것을 외교 용어로 바꿔 쓰면, 동맹에 의한 억지력 확보로 표현가능하겠지요.
이렇게 구도가 잡혀 있는 상황에서 THAAD에 대한 찬반을 따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각종 위조상품을 취급하는 시장, 또는 가짜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산채(山寨, 중국발음 산자이)라는 말이 있는데, 과연 위조대국 중국은 산적다운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겠군요. 결코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P.S. 후속 시리즈가 기획되어 있어서 제목에 넘버링을 추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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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카멜
2016-08-05 00:30:22
자신들은 한반도 전체 감시가 가능한 레이더와 미사일을 운용하고 있으면서도, 중국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말은 하지만 사실 저도 그럴것 같진 않은)는 사드를 자주국방용으로 들여온대도 그런 태도를 보이는 중국이 새삼 달리보이기 시작했어요.
SiteOwner
2016-08-06 14:51:32
사실 중국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처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F-15K 전폭기를 도입하기로 결정했을 때도, 북경과 천진 등 중국 정치의 중심이 사정권에 든다고 있는 욕 없는 욕을 다 퍼붓는 등 온갖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북한의 각종 도발 때에도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신중할 것" 을 요구했습니다. 이 "신중할 것" 은 철저히 외교적인 수사로, 실제로는 "한국은 아무 것도 하지 마라. 북한이 때린다면 맞아라. 반격하면 죽이겠으니 알아서 엎드려라." 를 의미합니다.
카멜님처럼 중국이 새삼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많아도 이상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얼마 전까지도 중국은 실체를 잘 안 드러내고 조용히 처신해 왔으니까요. 그리고 이제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본색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실 6.25 전쟁에 대한 중국의 입장만 다시 봐도 중국의 조용했던 행보가 기만전술이었다는 것은 간파가능합니다.
파스큘라
2016-08-05 11:31:33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중국이 아직도 주변 국가들을 자기 부하로 보고있다는 걸로밖엔 안보입니다. 소위 중국이 잘나가던 시절에 맺어진, 그리고 지금은 파기된지 오래인 알량한 주종관계 따위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혼자 착각하고 그때처럼 또 자기가 큰소리 치면 다들 들어줄거라고 생각하는거죠.
SiteOwner
2016-08-06 15:03:31
지난달에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이 국제사회로부터 공식적으로 부정당하게 되었고, 중국이 외교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기사번역 참조). 이것의 후폭풍은 아무리 보수적으로 평가해도 1989년 천안문 민주화운동 때 중국 정부가 벌인 대학살만큼 엄청납니다. 만일 중국이 외교전에서 또 패배한다면 그때는 국제적 고립 정도가 아니라 공산당의 국내정치의 정당성을 위협당하여 국가붕괴로 이어질 수 있기에 중국은 사드 논란에서 한국을 꺾기 위하여 무슨 흉계라도 꾸밀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파스큘라님께서 말씀하신 "주변 국가를 자기 부하로 보고 있는" 중국의 중화적 인식은 확실히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서 드러났습니다. 그 바다는 중국인들이 발견해서 활동했으니 중국의 것이라는데, 현지 원주민들을 바보로 보는 오만함이 그대로 묻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대한 중국의 시각은, 유감스럽게도, 그것보다도 더욱 안 좋습니다. 중국은 우리나라를 부하 정도가 아니라 먹이로 보고 있습니다. 사드 배치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거칠게 풀어쓰자면 "먹이감이면 그냥 얌전하게 잡아먹히지, 먹이 주제에 건방지다!!" 라는 것에 가깝습니다.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서는 다른 이해관계국들을 공격하자고까지는 안했지만, 사드 관련으로는 한국을 무력으로 굴복시키고, 한국이 무역에서 손해를 보게 만들고, 사드 배치지역 주민들의 중국 입국을 방해하자고 구체적으로 괴롭힐 계책까지 공연화하고 있는 점에서 중국의 태도가 엿보입니다.
게다가 국내에 그런 중국의 대외전략을 추종하는 자들이 정치인 중에도 꽤 있으니 그게 문제입니다. 중국의 언론에 사드 반대론을 기고하거나, 중국 공산당을 찾아가서 그들의 대외전략에 찬동하겠다고 나서는 정치인들이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