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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Rhenus fluvius longus est
오랜 라틴어 격언이 말해주듯, 라인 강은 길다. 그것은 고전 작품 갈리아 전기의 서두를 장식하는 헬베티족과의 쟁투 이래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라인 지방의 오랜 역사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는 말이기도 하지만, 보다 단순히 받아들여도 충분히 의미 있는 말이다. 1300㎞에 이르는 길이와 15만㎢를 넘는 유역의 면적은 어째서 라인 지방은 중세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정치 연합으로 분열되어있었는가라는 의문에 대한 가장 현명한 대답일 것이다.
중세 이래 최초로 라인 좌우안 전체를 하나의 깃발로 아우르는데 성공한 인물은 나폴레옹이었다. 1794년 이래 라인 연안 전역은프랑스의 직접적 점령지, 혹은 그 영향 아래 있는 라인동맹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통치는 강 우안에서는 20년, 좌안에서는 그로부터 1년 후에 종식된다. 나폴레옹이 결성한 라인 동맹은 해체되었고 라인 지방은 빈 회의에서 승전국들의 전리품으로 분배되었다. 라인 강 좌안은 프로이센의 영지에 속하게 되었고, 그 동부는 나사우 대공국의 수중에 떨어졌다. 헤센-라인 지방은 헤센-다름슈타트 대공국에 편입되었으며 바이에른은 팔츠를 획득했다.
그렇게 나폴레옹의 야망은 허망하게 끝났으나 그가 유럽 각지에 뿌린 씨앗들은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특히 라인지방은 씨앗이 뿌려진 땅 중에서 가장 기름진 편이었다. 라인지방의 사람들은 법률 개혁이나 법원 개혁과 같은 물질적 유산은 물론, 정신적 유산도 충실히 계승하였으며 이는 그들을 폭압적으로 다스리던 강점자들과의 충돌로 나타났다. 칼스바드 협약과 함께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독일 국가들이 반동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라인 지방에서는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경향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렇듯 보수적인 지배자들과 상이한 방향으로 나아가던 라인지방에게 서유럽의 혁명은 그들이 품고 있던 열망을 분출할 계기였다. 파리에서 다시 혁명의 기운이 감돌던 1848년에는 트리어와 라인-헤센, 팔츠에서도 언론과 집회의 자유, 무상교육, 보통선거권, 입헌군주국 서립, 조세 감면 등의 자유주의 개혁이 요구되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분위기를 일방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곤란하다. 자유주의와 함께 유럽을 강타한 것은 민족주의였고, 라인지방은 이에 영향을 받은 독일 지역의 구성원이었다. 하나의 정체성으로서 형성되는 라인 지방이라는 감정의 기저에는 어디까지나 독일 민족의 땅이라는 의식이 잠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라인 지방이 다른 독일 지역, 특히 라인 지방을 지배하던 거대 세력과 스스로를 동일시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종교 문제에서 이러한 면은 두드러졌는데, 프로이센의 지배자들은 자신과는 다른 종교를 믿었으며 자신들 지역민이 배제된 관리의 자리는 항상 프로이센의 프로테스탄트였다. 뿐만 아니라 지역의 가톨릭 학교에 중앙정부는 무관용의 자세를 고집했다. 이러한 문제는 정치적 차이로 발전할 소지가 다분하였다.
2.1차대전과 분리주의의 성장
17세기 이래 유럽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의 팽창을 추구하였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독일의 경계를 이루었던라인 지방이 그 첫번째 표적이 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이때 이들의 팽창을 정당화해주는 기재가 바로 오랜 연원을 갖는 자연국경설이었다. 자연국경설 하에서 프랑스의 국경선은 알프스,피레네,대서양,라인강으로 확정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등장했고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정치 지도자들은 이를 진정으로 수용하여 따르고 있었다. 비록 나폴레옹 이래 유럽에서 프랑스가 갖는 지배적 위치는 꾸준히 도전받아 상실하기에 이르렀지만 이러한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고, 민족성을 국가귀속감과 동일시하던 프랑스의 민족 인식은 이를 더욱 강화시켜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1919년, 프랑스는 마침내 큰 희생을 치룬 대가로 호적수 독일을 완전히 꺾을 수 있었다.
1차대전에서 라인경계선의 획득은 실지 알자스-로렌의 회복과 함께 프랑스의 주된 전쟁 목표중 하나였다. 실제로 베르사유 조약 체결과 함께 알자스-로렌의 반환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러나 라인지방의 경우, 전후처리는 연합국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사안이었고, 프랑스와 함께 전쟁을 치룬 두 나라 영국과 미국은 프랑스의 세력 확대를 녹록하게 용인할 생각이 없었다. 프랑스로의 라인 지방의 할양은 당연히 기각되었으며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 완충지대로서 분리된 라인 공화국을 건국하려는 프랑스의 안 역시 거부되었다. 결국 베르사유 조약에서 라인지방에 대한 처우는 한시적인 점령으로 결정되었다.
한편, 독일 제국 시기에도 라인 지방의 독자적인 정체성은 이어져 왔으며, 오히려 독일 정부와 가톨릭의 갈등을 겪으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라인지방에서 가톨릭을 매개로 한 정치세력화 현상은 관찰되는 뚜렷한 상황이었는데, 라인지방에 할당된 제국의회 의석 35석 가운데 21석을 장악한 중앙당은 정계에 진출해 문화투쟁을 주도한 제국 재상 비스마르크와 대립하며 팽팽한 대립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1차대전이 독일의 패배로 끝나면서 제국이 해체되고 그와 함께 프로이센이 제국 내에서 갖는 헤게모니도 한시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 가운데, 라인 지방의 분리주의자들은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라인 지방의 분리주의 운동을 암묵적으로 지원한 것은 공식적으로 라인 지방을 완충지배로 만들고자 했던 의도가 영,미 연합국의 반발로 좌절된 프랑스였다. 전후 초기 라인 지방의 분리주의 운동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낸 것은 빈회의 이후 바이에른 왕국으로 편입되었던 팔츠 지방의 "자유팔츠운동'이었다. 팔츠 지방에서 1918년부터 감돌기 시작한 분리주의의 기운은 1919년 초부터 구체적인 활동으로 표출되었다. 1919년 프랑스 점령군의 제라르 장군 주재 하에 2월 22일 소위 저명인사모임이 이루어졌고, 남부 팔츠의 란다우 출신 화학자 에버하르트 하스의 주도 하에 일군의 인사들은 팔츠 자치공화국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40여명의 모임 참석자 중 27명이 서명한 이 제안은 전후 미국의 윌슨이 주장한 민족자결권에 입각하여 팔츠의 독립성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안은 친프랑스적 유명인사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서명자들 중에서도 후일 구체적인 안이 알려지면서 서명을 철회하는 이들도 나타났다. 결국 1919년 6월 1일 소수의 저명인사들은 중립적 독립공화국으로 팔츠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이는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명망가들의 구호성 요구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이와 반대로 프로이센령 라인 지방의 분리주의 운동은 보다 지역민의 정서에 부응하였고 따라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지방의 대표적인 분리주의 운동가 한스 아담 도르텐은 본 출신의 성공한 부르주아로서 1919년부터 라인공화국 건설을 주장하면서 분리주의자들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패전 후 독일이 맞은 위기가 라인 지방에까지 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했다. 그의 회고록은 1918년 12월 그가 "라인 좌안이 프랑스에 합병되고, 라인 우안은 스파르타쿠스단의 수중에 떨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적고 있다. 도르텐은 이러한 위기에서 라인 지방이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구상한 라인 지방의 독립국가는 프로이센령 라인지방뿐만 아니라 라인강 좌우안 일대의 라인-헤센, 라인-팔츠, 심지어는 올덴부르크, 하노버 왕가의 일부, 베스트 팔렌 일대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도르텐은 자신이 구상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성공시키기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을 기울였고, 지역의 분리주의 세력과 농민협회, 반베를린적 성향을 가지고 있던 성직자의 지원을 얻는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그는 라인지방 프랑스 점령군의 망젱 장군을 비롯한 인사와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그는 분명 프랑스가 원하던 라인 지방의 프랑스 합병이나 라인지방의 독립을 통한 독불 국경 간의 완충지대 확보에 부정적인 입장이었지만 현실 권력인 프랑스 점령군과의 접촉을 불가피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그가 다른 누구보다도 지지를 받고 싶어했던 지역의 중앙당 유력 정치 지도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하였다. 분명 콘라트 아데나워를 비롯한 지역의 중앙당 정치 지도자들은 제국 내에서 라인 지방이 독립적 위치를 확립해야한다는 점에서 도르텐과 의견을 같이했지만, 도르텐이 프랑스군과 접촉한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1919년 2월 이후로는 그와의 관계에 거리를 두기에 이른다. 결국 1919년 6월 1일 도르텐은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이끌고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이 시도는 성공적이지 못했다. 오히려 지역민의 호응이 크지 못한 상태에서 프랑스군이 동조하는 모습이 드러난 공화국 선포는 도르텐을 위시한 분리주의 세력에게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였다. 라인 지역민은 분명 라인 지방의 자결권을 요구했으나, 제국의 통일성을 훼손하는 반민족적 행위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3.운동의 급진화와 실패
1923년 프랑스에 의해 이루어진 루르 점령은 라인 지방 내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가지는 위치와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전후 배상금 지불 문제로 프랑스군과 벨기에군이 루르 지방을 점령하자 독일제국 중앙 정부는 소위 수동적 저항으로 알려진 방식으로 대응했다. 당시 독일의 슈트레제만 정부는 즉각 배상금 지급을 중단했고 지방정부 공무원들에게 점령군의 결정이 연합군의 라인란트 위원회 규정과 어긋나면 이행하지 말 것과 탄광, 공장, 철도의 운영 정지를 요구했다. 이는 지역 경제를 파괴하고 지역민을 궁핍의 상태로 내모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쾰른 시장 아데나워는 독자적인 화폐 발행과 은행 수립을 모색했고 도르텐을 중심으로 한 분리주의 세력은 의욕적으로 실업자들을 선동해 시위에 참여시키는 운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나 아데나워를 위시한 중앙당은 도르텐과의 연대를 금지한 결정을 계속 유지했고 1921년 11월 13일 제국 정부에서 라인지방에 특별한 직위를 부여하려는 시도조차 프로이센, 바이에른, 헤센, 올덴부르크의 거부에 의해 무산되었다. 결정적으로 그간 분리주의자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프랑스도 각국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루르 점령 이후 객관적인 상황은 점점 분리주의 운동에 어렵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미 1919년 6월18일에 베르사유 조약과 함께 발표된 라인란트 조례는 라인 지방의 비무장과 15년 간의 점령을 결정했을 뿐 분리 독립의 가능성은 완강히 부정하고 있었다. 독일제국은 8월 헌법을 채택하며 새로운 질서를 구성하기 시작했고, 라인지방의 분리를 지원하던 프랑스 역시 연합국의 시선에 분리주의 세력을 더 이상 이전처럼 지원할 수 없는 상태였다.
점점 불리해져가는 상황 속에서 분리주의 세력은 점점 운신의 폭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분리주의 세력 내부에서는 도르텐과 같은 온건파의 입지는 점점 좁아졌고, 대신 명확한 실천으로 분리주의의 가능성을 입증해 지역민의 지지를 얻어내고 프랑스의 태도를 바꿔야한다는 급진파들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러한 급진주의자 중에서는 프랑스의 손을 빌려서라도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해야한다는 이들이 전면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헨 지방 출신의 치기공사 요셉 슈미츠는 프로이센의 라인 지방 지배를 슬라브적 착취로 규정하는 등 반프로이센 의식을 명백히 드러내는 이였다. 그는 1923년 피격으로 정치활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고 1925년 사망하였으나 그의 지지세력은 1923년 10월 아헨에서의 라인공화국 선포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밖에도 아샤펜부르크 출신 급진적 분리주의자 요셉 마테스는 프랑스군과 긴밀하게 연결된 정치적 모험가였다. 뒤셀도르프에서 라인독립연맹을 결성한 그는 도르텐과 슈미츠의 세력을 규합하여 분리주의 세력의 연합을 추진하였다. 라인-팔츠 지역에서느 분리주의자들은 결연한 행동이 이루어졌다. 1923년 9월 5일 농민지도자 프란츠 요셉 하인츠의 지도 하에 수백의 팔츠 시민, 노동자, 농민은 무장봉기를 일으켰고 동년 11월 12일 스스로 독일 제국 밖의 '자치구 팔츠'를 선언했다.
그러나 분리주의 운동의 급진화, 과격화와 함께 지역민들의 반분리주의 의식도 고조되었다. 특히 독립 공화국의 건설과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을 공공연하게 외치는 급진 분리주의자들의 주장은 지역민들은 분리주의자들의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하게 했다. 그 결과 9월 31일 뒤셀도르프에서 분리주의 반대세력 1400명은 시위에 나섰고 프랑스군이 이에 개입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지기에 이른다.
결국 지역민들의 정서와 조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분리주의자들의 시도는 고립되어갔다. 독일민족의 범주를 넘지 않는 온건한 분리주의 운동은 분명 상당수 지역민의 광범위한 지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무력조직을 통한 국가전복을 외치는 "라인지방 수비대" 같은 무력조직은 분리주의에 대한 지역민의 여론을 악화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프랑스도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결국 1924년 2월 17일 연합국의 라인란트 위원회는 팔츠 자치구의 해산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는 운동을 결정짓는 최종 결정이 되었다.
본 글은 '박용희, 「라인 지역주의와 지역 정체성의 모색 : 1차 대전 후 라인지방 분리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독일연구』 제 30호'를 읽고 개인적으로 정리해본 것입니다.
세줄요약
1.라인지방 사람은 프로이센 촌놈을 싫어했습니다.
2.하지만 어찌 됐건 같은 독일인이라는 감정도 같이 있었죠.
3.전후 라인지방의 분리주의 운동은 이런 정서를 제대로 읽지 못한 운동가들의 실책과 여러 국제 정세가 맞물리면서 처참한 실패로 끝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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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 카페에서 보았던 글인데, 꽤나 흥미로운 관점이라 여기에 올려봅니다. (타사이트 언급이 규정상 위배된다는건 저도 알지만, 엄연히 제가 쓴글이 아닌 퍼온글이라 어쩔 수 없이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규정상 문제가 생기면 지우도록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상당히 흥미로운 관점이더군요.... 글을 쓴 분에 따르면, 1차 대전 전후 민족주의에 기반한 분리주의 관점에서, 독일에서 분리주의가 가장 성행할 수 있었다는건 바이에른 일대가 아닌, 라인란트 일대라는겁니다. 그 이유는 두지방에 정치적 성향차와,(바이에른은 대표적인 보수성향 지역. 라인란트는 해당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치당의 지지율이 상당히 낮을정도로 진보세가 강하던 지역.) 바이에른은 주변 지역(오스트리아, 바덴-뷔르뎀베르크, 프랑켄등....)이 전부 독일어권이었지만, 라인란트는 프랑스와 네덜란드등의 경계에 있는 차이때문이었던걸로 보입니다.
도시가 무너져 가는데,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1453, 콘스탄티노플에서. 유언.
https://en.wikipedia.org/wiki/Constantine_XI_Palaiologos-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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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마드리갈
2017-02-15 17:45:53
콘스탄티노스XI님께서 우려하신 부분에 대해서 운영진으로서 답변을 먼저 드려야겠어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어요.
이용규칙 금지사항 제4조에서는 "다른 커뮤니티의 분쟁을 유입시키거나 상황을 중계할 수 없으며, 대외공개를 원하지 않는 커뮤니티에 대한 언급도 금지됩니다." 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 조항에 대한 추가사항에서는 전재한 게시물의 출처를 표시하는 경우 출처의 명시만 할 수 있고 그 이외의 다른 사항이 금지된다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려는 전혀 필요없음을 알려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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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들여쓰기를 사용하실 경우에는 문단을 가급적 양쪽 정렬해 주시고,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왼쪽 정렬이나 양쪽 정렬에서 택일해 주시면 본문이 보다 미려하게 보일 수 있으니 참고하셨으면 해요.
콘스탄티노스XI
2017-02-15 22:05:01
일단 말씀하신대로 수정해봤습니다. 글에 대해선 하실 말씀이 없으신가요?
마드리갈
2017-08-01 19:39:55
수정된 것을 확인하였어요. 이렇게 하시면 좋아요.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코멘트할 예정이예요.
언급할 게 아무래도 많아질테니 따로 쓰는 편이 아무래도 더 나을 것 같으니까요.마드리갈
2017-02-19 13:28:03
독일어로 독일을 나타내는 용어인 Deutschland는 상당히 오랜기간 존재해 왔고 오늘날은 국가의 이름으로 쓰이지만, 사실 이 역사 자체가 길지는 않아요. Deutschland의 어원을 추적해 보면 민중(Deutsch)의 땅(Land)이라는 의미이고, 그래서 특정 국가조직을 지칭하기보다는 중부유럽 내에서 같은 말을 쓰는 사람들이 사는 지역이라는 의미가 더욱 강했다고 볼 수 있고, 이런 의식은 신성로마제국 체제에서 독일어를 쓰는 크고 작은 국가들이 300여개로 난립했지만 그 역사를 독일사로, 그리고 그 지역에서 등장하여 활동한 인물들을 독일인으로 여기는 풍토로 정착해 왔다고 볼 수 있어요. 이 점을 본다면 라인란트의 독립이 왜 제대로 될 수 없는지는 금방 이해될 거예요.
이에 기반하여 다르게 서술하자면 이렇게 볼 수 있어요.라인란트는 독일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독일어 사용자 다수인 지역이니 민중의 땅으로서의 Deutschland인데, 오랜 기간에 걸쳐서 확실하게 실체가 있는 오스트리아와는 달리 민중의 땅으로서의 Deutschland와 국가로서의 Deutschland의 구별 자체가 사실상 무의미한 상태에 있어요. 게다가 독일제국이 성립하면서 라인란트가 독일의 지역으로 편입되었으니 양자의 구분은 더욱 무의미하겠죠. 이런 상황에서 독립운동이 호응을 얻을 기반이 존재할까요? 게다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외부세력이 개입하면 본원적 반발감이 생기는 것이 당연할텐데, 프랑스가 노골적으로 간섭하니 그게 그 반발감을 키웠으면 키웠지 줄이지는 못할테니까요. 아무리 문화적인 배경이 다른 지역과 다르더라도 일단 독일어 사용자가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라인란트는 굳이 Deutschland의 개념을 민중의 땅이라는 역사적 배경과 실체있는 국가로 나누어야 할 필요가 없었는데, 필요없는 것을 작위적으로 만드려고 한 시도가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었는지 의문이 안 들 수밖에 없어요.
콘스탄티노스XI
2017-02-19 21:07:20
뭐...사실 오스트리아도 오스트리아가 신성로마제국의 멸망을 대비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위를 미리 만들어서 독립이 유지된거지, 그게 없었다면 독일로 묶였겠죠. 실제로 오스트리아내에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로 묶여야 된다는 여론도 없지는 않았고...(대독일주의라 하던가요?) 어찌보면 오스트리아처럼 독립세력으로의 역사가 상당수 있던 지방도 이랬으니 라인란트는 더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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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09 22:49:37
수백년동안 역사적으로 이루어진 지역 정체성은,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은, 자유주의, 민족주의, 공화주의 등의 백가쟁명에 의해 19세기에 들어서야 시작된 국민국가의 정체성보다 더 뿌리가 깊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소규모 지역단위로도 충분히 원하는 생활이 영위가능하고 통합을 해도 딱히 이득이 없다면 현상유지가 답이겠지요. 사실 소규모 지역들이 통합해서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만일 어느 지역의 구성원들이 통합된 사회 속에서 소수가 될 경우에는 통합 뒤에 주류에서 배제되거나 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서로를 신뢰해야 할 이유도 없지요. 그러니 물산이 풍부해서 유역의 각 지역이 각자도생가능한 라인란트에서 통합이 늦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차피 국민국가로서의 전통은 지역 정체성의 전통보다 약하니 억지로 합쳐놓은 상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상을 바꿔서 일어날 일이 과거보다 못하다면 역시 그 움직임 또한 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봅니다.
좋은 글을 소개해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