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not see this page without javascript.

Skip to content
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어떤 예쁜 남학생으로부터 느꼈던 공포

SiteOwner, 2018-12-06 19:24:41

조회 수
174

대학생 때, 활동하던 동아리에 신입부원이 들어오고 나서 생긴 한 에피소드가 문득 생각나서 써 봅니다.
가입지원서 중에 글씨를 예쁘게 쓰는 여고생의 필체로 쓰여진, 여성스러운 이름 명의로 된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게다가 지원서 하단의 코멘트에 "이름이랑 글씨체 보고 오해마세요. 저 남자예요." 라는 문장이 부가된 것도 선명히 기억났습니다.

나중에 만나게 되었는데, 그 지원서의 주인공은 예쁘다는 탄성이 나올법한 약간 작은 체구의 남학생 S군. 창작물의 캐릭터로 치자면, 현시연 2대째의 하토 켄지로(波戸賢二郎) 정도의 그런 인상이었습니다. 그리고 의외로 저와 관심사도 많이 겹쳐서, 만나서 항공, 철도, 군사, 국제정세 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저는 그 S군을 남동생같이 여기고, 그 S군은 저를 친형처럼 여기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 S군이 저에게 종교 관련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종교와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저의 정신세계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면 타인의 사정에 대해서는 대체로 이해하고 듣는 편. 그것을 알고 있던 S군은 "형에게라면 이런 건 이야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라면서 이야기를 열었습니다.
자세한 건 밝힐 수는 없지만, S군의 종교는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은 모 소수파 교단. 저는 그 교단에 대해서는 알고는 있지만 그리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어머니께서 결혼 전에, S군과는 다른, 그렇지만 역시 대외적인 이미지가 안 좋은 모 소수파 교단의 신도였다 보니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정을 이야기하니, S군은 역시 이야기를 꺼내기를 잘 했다면서 계속 같은 주제로 말을 이어나갔습니다.
그런데, 모 종교문제 연구가의 피살사건 이야기가 나오자 약간 묘하게 다른 분위기가 풍겨졌습니다.
예쁜 얼굴, 중성적인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하는 것은 변함없었지만,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은 죽을 만해서 죽은 것이고, 반드시 누구의 손에 죽었어야 할 운명이었어요. 만일 그때 그 사람들이 안 죽였다면, 저라도 그를 죽였을 거니까요. 형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저라면."

계속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그 이후로부터는 S군이 뭔가 섬뜩하게만 느껴졌습니다.
화난 얼굴과 거친 어조라면 그냥 단발성으로 공포를 느꼈겠지만, 그런 것 하나 없이 예쁘고 차분한 태도를 일관적으로 유지하며 그렇게 누군가의 피살을 당연히 여긴다고 말하는 데에서는 지속적으로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후 군입대를 위해 휴학계를 내고 서울 생활을 정리해서 고향집으로 돌아간 이후로는 완전히 연락이 끊겨 오늘날에 이르고 있어서 S군의 근황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만, 간혹 생각이 나고 있습니다. 무엇이 사람을 그렇게 잔인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의 진짜 모습은 대체 어느 쪽인가, 그리고 특정인의 잔인한 점을 이해하는 전제로 장점을 수용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장점이 있더라도 그 잔인한 점을 이유로 내치는 게 좋은가 등의 답은 여전히 내리기 어렵습니다만.
SiteOwner

Founder and Owner of Polyphonic World

2 댓글

대왕고래

2018-12-08 22:40:28

종교라는 이름의 조용한 집단 광기. 그 무엇보다도 두렵네요.

제 주변에는 없었던 일인지라, 겪게 되면 좀 무서울 거 같네요.

대학때 수업 같이 듣던 형님이 무슨 특강 같이 듣자고 한 걸 수상하다고 여겨서 거절한 후에 소식이 끊어진 일은 있었지만...

SiteOwner

2018-12-10 20:12:32

사람에게는 누구나 개인의 사정이 있고, 또 그 사정 중에 말하기 힘들거나 아예 불가능한 것도 있습니다. 저 또한 예외는 아니다 보니 그것까지는 이해합니다. 그 남학생 또한 그러했을 거라고 봅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신전속적인 사정이 있는 것과, 그 사정이 무슨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는 별개의 이야기. 그 남학생이 그 이야기를 해서 기대한 것을 무엇이었을까요. 그래서 더욱 무서워집니다.


대왕고래님이 겪으신 사례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그리고 잘 결정하셨다고 보고 있습니다. 타케미야 유유코(竹宮ゆゆこ, 1978년생)의 라이트노벨 및 동명의 애니 골든타임에 그런 사이비 종교단체가 나오는 게 생각났습니다.

Board Menu

목록

Page 117 / 292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단시간의 게시물 연속등록은 권장되지 않습니다

  • new
SiteOwner 2024-09-06 55
공지

[사정변경] 보안서버 도입은 일단 보류합니다

  • update
SiteOwner 2024-03-28 147
공지

타 커뮤니티 언급에 대한 규제안내

SiteOwner 2024-03-05 159
공지

2023년 국내외 주요 사건을 돌아볼까요? 작성중

10
마드리갈 2023-12-30 348
공지

코로나19 관련사항 요약안내

612
  • update
마드리갈 2020-02-20 3835
공지

설문조사를 추가하는 방법 해설

2
  • file
마드리갈 2018-07-02 970
공지

각종 공지 및 가입안내사항 (2016년 10월 갱신)

2
SiteOwner 2013-08-14 5942
공지

문체, 어휘 등에 관한 권장사항

하네카와츠바사 2013-07-08 6554
공지

오류보고 접수창구

107
마드리갈 2013-02-25 11060
3511

비올라 다모레(Viola d'amore) - 사랑의 비올

  • file
마드리갈 2018-12-09 179
3510

[황금의 바람] 암살팀, 에어로스미스

3
  • file
시어하트어택 2018-12-08 168
3509

책상 위의 우주전쟁

7
  • file
마키 2018-12-07 223
3508

어떤 예쁜 남학생으로부터 느꼈던 공포

2
SiteOwner 2018-12-06 174
3507

일본의 기묘한 은행사정

2
마드리갈 2018-12-05 196
3506

카타르, 석유수출국기구(OPEC) 탈퇴

10
마드리갈 2018-12-04 326
3505

여러 현안의 의외의 접점 - 7. 1965년 대정전과 2018년 통신마비

2
SiteOwner 2018-12-03 258
3504

노후 헬리콥터라서 사고가 났다는 시각은 위험합니다

5
SiteOwner 2018-12-02 183
3503

[황금의 바람] 암살팀 등장

2
  • file
시어하트어택 2018-12-01 141
3502

2018년의 황혼기에서

4
  • file
마키 2018-12-01 176
3501

오늘 또한 철도관련의 기념일이 되겠지만...

2
마드리갈 2018-11-30 152
3500

핸드폰 교체와 요금으로 만들어진 우월감을 칭찬하다

2
SiteOwner 2018-11-29 158
3499

글로벌한 주방

2
마드리갈 2018-11-28 157
3498

화성탐사선 인사이트, 화성착륙에 성공

2
마드리갈 2018-11-27 160
3497

어린이합창단 입단이 유행이었던 때

2
SiteOwner 2018-11-26 148
3496

외출없는 주말의 일상

2
마드리갈 2018-11-25 146
3495

지금까지 이정도로 격렬한 분노를 느낀적은 없었어.

3
  • file
조커 2018-11-24 158
3494

[황금의 바람] 총알 1발 장전!

2
  • file
시어하트어택 2018-11-24 135
3493

이제는 명실상부한 겨울

4
SiteOwner 2018-11-23 161
3492

세 영단어의 안쪽 이야기 - 스웩, 사이폰, 그루브

4
SiteOwner 2018-11-22 188

Polyphonic World Forum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