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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읽었던 소설에서 느꼈던 악마의 편집

SiteOwner, 2019-06-09 17:24:18

조회 수
188

어제 일본의 드라마 집단좌천(集団左遷!)을 보고 생각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그 집단좌천에는, 작중 배경인 미츠토모은행 카마타지점이 활발하게 가두 프로모션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의 취재를 위해 주간지 발행사의 기자가 방문하기도 하고, 또한 "일하는 미녀" 라는 화보 또한 포함되다 보니 여직원들이 미모를 뽐내며 사진작가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것도 나왔습니다. 모두 멋지게 소개될 직장을, 그리고 아름답게 소개될 여직원들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주의 주간지에 나온 기사는, "폐점위기에 내몰린 미츠토모은행 카마타지점" 제하로 쓰여지고, 직원들이 집단좌천된 신세라고 악의적으로 서술되는가 하면 가두 프로모션 장면 또한 지역은행지점의 파산을 막아달라는 읍소로 보이게끔 주석이 달려 있었습니다. 은행 사람들은 모두 분노했고 지점장이 전화를 했지만 기자는 "내용이 바뀐 건 죄송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면피성 발언만 되풀이할 뿐...

이런 식으로 왜곡하는 것을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지요.
요즘 온갖 분야에서 취사선택과 왜곡이 날뛰는데, 그것을 처음 느낀 것은 어릴 때 읽었던 소설의 한 대목.

영국의 소설가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08)의 1957년작 소설 바다순찰대(The Deep Range)에는 주요 등장인물로서 돈(Don)과 월터(Walter)가 나옵니다. 잠수정을 타고 바다 속의 고래를 관리하는 베테랑 순찰대원 돈과 아직 여러가지가 서투른 월터의 활동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돈은 도중에 해저지진에 조난을 당해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월터는 충격에 빠지고, 모든 것을 잃었다는 생각에 순찰근무도 내팽겨치고 말아 폐인이 되고 말아 버립니다. 이 대목에서 당시에 읽었던 소설의 문구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소중한 돈을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냥 이 문장만 보면, 작중의 인물이 얼마나 구두쇠이길래 돈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길래 저렇까지 된 건지,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텐데 하는 오해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장의 "돈" 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명인 Don이지 금전을 뜻하는 게 아니니까 맥락을 모르고 저것만 보고 판단하면 결론은 반드시 잘못되는 방향으로 나오게 됩니다.

다시 처음의 집단좌천 이야기로.
문제의 주간지 기사가 나오자, 해당 지점을 구조조정 대상으로 찍어놓은 본부의 요코야마 상무는 이 기사에 아주 만족해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역효과를 내고 말았습니다. 은행이 위치한 지역주민들이 지역은행을 살리자고 의기투합해서 도리어 실적이 대거 높아지게 되고, 6개월 안에 100억엔의 실적을 내면 폐점안을 철회하겠다고 말했던 요코야마 상무는 오히려 자신의 말의 무게에 자신이 눌리는 중압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악마의 편집이 훌륭하게 카운터펀치를 먹이는 경우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습니다.
악마의 편집은 많은 경우 수정되지 않거나 설령 수정되더라도 당사자들이 이미 큰 피해를 받거나 세상에 없는 뒤인 경우가 많습니다. 1993년 3월 26일, 남아프리카의 사진작가 케빈 카터(Kevin Carter, 1960-1994)가 촬영한 굶주린 한 아이와 그 뒤에 선 대머리독수리를 촬영한 사진이 뉴욕타임즈에 실렸고, 이 사진이 큰 반향을 일으켜 그가 1994년 4월에 퓰리처상을 수상하지만, 사진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결국 3개월 후인 7월 24일에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 그가 세상을 뜬 지 올해로 4반세기를 맞습니다만 악마의 편집 논란은 현실이든 창작물이든 가리지를 않고 계속됩니다.

악마의 편집이라는 게 의외로 가까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게 30여년 전에 읽은 소설에서 처음 인식된 이래 어제 본 드라마를 통해 다시금 생각나고 대학 교양수업 때 들었던 사례마저 같이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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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마키

2019-06-09 17:45:15

악마의 편집 하니 소설 쪽에서는 서술 트릭이라고 해서 독자가 소설의 장치나 등장인물의 행동을 오해하도록 짜맞추는 기법이 있는데 학교 다닐때 읽었던 "벽장속의 치요"라는 일본 쪽 공포 단편 모음집이 생각나네요.


수록된 단편 중에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 라고 러시아를 배경으로 쌍둥이 자매가 나오는 편이 있는데, 얼핏 보면 그냥 숲 속에서 엄마랑 같이 사는 쌍둥이 자매의 이야기로만 보이죠. 헌데, 글을 자세히 읽다보면 이 쌍둥이 자매는 집 밖에 나가는 일이 없고, 남들에게 얼굴을 보이는 일도 없고, 항상 같이 붙어 다니고, 아버지가 참전 군인이라 고엽제의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죠. 그리고 이 발랄한 쌍둥이 이야기를 호러로 뒤집어 엎어버리는 마지막 결말의 문장은 "우리한 몸을 반듯이 펴고 두 머리를 끄덕였답니다.".

SiteOwner

2019-06-09 18:06:26

말씀하신 것을 생각해 보면, 창작물의 집필에서는 이게 고도의 기법인 서술트릭으로 작용할 수도 있고, 현실에서는 오해를 낳거나 생사여탈을 쥐고 흔들 수도 있고, 이것 또한 양날의 칼이라는 게 드러나는군요. 역시 악마의 편집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

현 시점으로서는 더 이상 말을 못하겠군요. 섬찟해져서 식은땀이 나고 있습니다...

Lester

2019-06-09 22:37:07

속칭 '찌라시'도 그렇고, 계책 이간계나 유언비어도 그렇고...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혹시나'하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만으로도 성공이라는 점이죠. 마키님이 소설 이야기를 했으니 저는 마술 이야기를 해볼까요. 마술에 나오는 테크닉의 대부분을 이루는 개념 중 하나가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인데, 거짓 정보를 주어 관객이 방심하는 동안 진짜 테크닉을 준비한다고 하더군요. 땀을 닦거나 마술에 실패하거나 하는 등의 틈을 마련한 뒤에 진짜 마술도구를 꺼내는 거죠. 이렇게 위의 서술 트릭과 마찬가지로 좋은 쪽에 쓰면 기술이건만, 나쁜 쪽에 써서 '기만'이 되어버리니 정말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론 인간이 정말 무서운 존재란 생각이 듭니다.

SiteOwner

2019-06-10 21:33:07

그렇습니다. 미래는 불확실하고 선택지는 제한된 것 자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동일합니다. 오늘날같이 각종 학문과 기술이 발달해도 예측의 가능성만 높아졌을 뿐 예측 자체가 정확히 된다는 보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보니, 혹시나 하는 생각을 심는 것만으로도 목적은 이미 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정보화사회이지만 역설적으로 가짜뉴스가 횡행해서 여러모로 역기능을 양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판단이 서고 있습니다.


여러 창작물에서 그렇게 말하지요. 괴물 이런 건 원래 인간이었다고. 그것을 떠올리니 더욱 무서워집니다.

앨매리

2019-06-10 09:24:48

악마의 편집이라고 하기에는 좀 미묘한 경우도 있지만, 어렸을 때 어린이나 청소년을 위해 요약된 세계명작 시리즈 또는 위인전을 읽고 나서 원본을 읽거나 실제 인물이 어땠는지를 알고 충격을 받은 적이 꽤 있었죠. '이게 이렇게 어두운 이야기였어?' 하고 놀라거나, '이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저질렀어?' 같은 식으로요.

SiteOwner

2019-06-10 21:45:52

실체를 알고 나면 꽤 놀랄만한 것들이 있지요.


몇 가지 생각나는 게 있는데,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 1840-1897)의 소설 마지막 수업이라든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피난생활을 하던 유태인 소녀 안네 프랑크(Anne Frank, 1929-1945)가 남긴 안네의 일기 등의 사례가 떠오릅니다.

마지막 수업의 경우는,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전해서 알자스-로렌(독일명 엘자스-로트링엔)이 독일령으로 편입되면서, 프랑스어 수업이 오늘로서 마지막이 되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은,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통제당한 우리나라의 역사적 경험도 있다 보니, 실화였던 러시아 지배하 폴란드에서의 결혼 전의 퀴리 부인의 학생시대의 일화와 같이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고 상당히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만, 정작 이 소설은 프랑스 중심주의 비판에서 썩 자유롭지가 못한 문제가 있습니다.

안네의 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생존자인 아버지가 안네의 유품 중 일기에서 몇몇 민감한 부분을 빼고 출간했습니다. 이후 무삭제본이 나오면서 그 실체가 보다 확실히 드러났습니다. 물론 안네의 일기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불구대천의 원수 취급을 받고 살던 나라를 등져 피난길에 올라야 했던 부조리한 상황을 보여주는 수기라는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만, 필자인 안네가 그 당시 평범한 여자아이로서 세계를 보는 눈을 가졌다는 것은 첫 출간본에서는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민감한, 특히 성에 눈뜨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것들이 삭제되어 첫 출간본만으로는 인간 안네 프랑크의 이해에는 부족했다는 것이 이후의 무삭제본을 통해서 다시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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