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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자라고?”
남자의 조롱 가득 섞인 말을 듣자마자 일순간 조나의 눈동자가 불타는 듯 이글거리고, 조나의 목소리가 낮게 깔린다. 조나를 알던 사람이라면 이 정도로까지 조나의 목에 힘이 들어간 적이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말이다.?
“말 똑바로 하라고, 탈라스... 네 녀석에게 애걸을 한다든가 하는 게 아니야.”
“이게 애걸이 아니면 뭐란 말이냐?”
“너는 나를 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지. 그래서 나에 대해서 이렇게 함부로 평가할 수 있는 거고. 하지만 끝날 때까지는, 끝난 건 결코 아니야. 운명? 그래, 좋아. 그런데 그게 네 녀석만의 전유물은 아니지. 안 그래?”
“하, 하하하하!”
남자는 어이가 없었는지 크게 소리 내어 웃는다.
“너 같은 녀석이 그런 말을 하니 설득력이 떨어지는군. 좋은 말할 때 떨어져라. 여기 앞에 있는 녀석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면.”
조나는 급히 남자의 앞에 쓰러져 있는 현애를 돌아본다. 며칠 전을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리기는 하지만, 지금 다시 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정확한 전말은 모르겠지만, 나름 앞에 있는 남자에게도 온갖 저항을 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네게 굴욕을 줬던 녀석으로 아는데, 네 녀석도 원하는 최후 아닌가?”
“적어도 이런 결말은 아니지..”
여전히 조나는 남자를 잡고 놔 주지 않는다.
“비켜라, 패배자.”
남자의 손에 들린 태양석이 다시 하얀 빛을 발한다.
“그렇지 않으면 너도 이 녀석처럼 될 것이다.”
“뭐,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이라면...”
조나는 그렇게 한마디 하고는, 남자의 허리춤을 더욱 억세게 끌어 잡는다. 그리고서는, 어깨를 물어뜯기 시작한다.
“조... 좋아... 그렇다면...”
남자는 태양석을 든 오른손을 자신을 꽉 끌어안고 있는 조나에게 향한다. 우선 조나의 존재부터 지워 줄 것이다. 조나가 끝까지 그의 방해를 하겠다면.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남자의 등 뒤에 느껴지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다 못해 물어뜯고 있는 조나의 초능력이 점점 선명해지는 것이.
“좋은 말 할 때 내놔라. 태양석을 내놓으란 말이다.”
“하, 무슨 짓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부질없는 짓일 뿐인데...”
남자는 태양석을 더 세게 쥐어 잡는다. 그 강력한 빛에 태양석이 아예 보이지도 않을 정도가 된다. 때마침, 그 강렬한 빛 때문인지 남자의 앞에 있는 현애가 눈을 뜨더니 고개를 든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현애의 눈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남자와 조나가 눈에 들어온다.
“자, 보라. 조금 네 운명이 늦추어졌을 뿐이지만. 금방 너도 이렇게 될 것이다!”
“절대 안 되지...”
현애는 성하지 않은 몸 상태에도 금세 다시 일어나서 남자에게 달려든다.
“네 뜻대로 되게 놔두지는 않을 거라고!”
“야! 너는 여기서 떨어져!”
남자에게 달려드는 현애를 보고 조나가 소리지른다.
“너는 애초에 아무 상관도 없는 녀석이라고!”
“딱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애초에 이 녀석은 나를 딱 집어서 없애겠다고 했어. 그러니까 내가 뭐라도 좀 해 줘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현애가 말을 마치자마자, 바닥에 아직 남아 있던 물이 얼어서 남자의 두 다리를 사로잡는다. 조나에게 온통 쏠려 있던 남자의 신경이, 일순간 현애에게로 다시 쏠린다.
“이 자식...”
하지만, 남자의 현애에게로 향한 신경은 오래 가지 않는다. 금세, 조나가 다시 남자의 신경을 흐려 놓기 시작한다. 등 뒤에서 끌어안고 흔드는 것도 모자라, 머리를 쥐어뜯고 귀를 잡아당기기까지 한다. 아무리 남자의 결심이 서지 않았다고 해도, 이건 말 그대로 참을 수가 없다. 마침내 그의 결심이 선다.
“사라져라, 조나 피츠조지. 역사에서 사라져라!”
남자가 그렇게 선언하자마자, 그의 온몸으로부터 강대한 기운이 퍼져나오기 시작한다. 금세 시커먼 기운이 그의 온몸을 덮는다. 그리고 그 기운이 뒤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조나에게 순식간에 향한다...
그런데.
“이봐, 당신 혹시 바보는 아니겠지?”
남자의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조나가 태연히 말한다. 분명히 존재가 삭제되어야 할 조나는 사라지지도 않았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분명히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이다. 태양석을 사용하는 자가 쓰는 가장 기본적인 권능은 존재를 새로 만들어내거나 지워 버리는 것. 몇 번이고 확인한 내용이다. 태양석을 직접 사용해 본 이레시아인들이 기록해 놓은 내용이니 틀렸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그의 말만으로 조나의 존재는 지금 여기서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조나는 왜 삭제되지 않고, 여전히 그의 속을 긁어놓고 있는 것인가?
그리고 그 시간, 발레리오가 몸을 일으킨다.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허리를 펴고 서자마자 그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남자가 막 조나에게 사라지라고 외치는 그 순간.
“비... 비토리오! 저기... 저기 좀 봐라... 저 녀석이...”
“일어... 일어나셨군요... 형님.”
비토리오 역시 몸이 성치 않음에도 애써 몸을 일으키려 한다.
“지금...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 거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는데...”
“잠깐, 저기를 좀 봐라.”
남자의 귀에, 조나가 조그맣게 속삭인다.
“설마 내 능력을 모르고 그걸 쓴 건 아니지?”
순간 그 말이 남자의 머리를 강하게 때린다. 그때에야 다시금 떠오른다. 조나의 능력이 피드백 능력이었다는 사실을.
그렇다면... 그렇다면...
남자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깨닫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이... 이런...”
무언가가 남자의 온몸을 강하게 휘어잡은 듯한 이 느낌. 그것은 그조차 거부하기 힘들 정도의 강한 힘이다. 그는 모든 운명을 틀어쥐고 세계의 법칙조차 바꿀 수 있는 신이라고 자부하였지만, 그런 그조차 어찌하기 힘들 정도의 강력한 힘이 있었다. 남자의 머릿속이 온통 공포감에 휩싸인다. 지금껏 겪어 본 적이 없을 정도의 공포다.
“젠장, 떨어져, 조나 피츠조지, 떨어지라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는 남자의 온몸에서, 점점 흰 연기 같은 것이 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그의 온몸에서 점점 힘이 빠지고 있다. 지금까지 수백 년을 살아오며 쌓아올렸던 것들이 일순간에 모두 사라지게 될 판이다. 신의 권능으로 명령한 완전한 존재의 소멸이, 조나의 피드백 때문에 지금 그에게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다급해진 남자는 이리저리 돌아보다가 현애와 눈이 마주친다.
“빨리 나를 도와라! 내가 지금 여기서 사라질 수는 없단 말이다!”
“흥, 내가 왜 너를 도와?”
당연하지만 현애는 시큰둥하다 못해 차가운 반응이다. 마치 남자의 온몸이 빙하지대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다. 그 얼굴만 보고 있자면.
“그 말에는 진정성이 없는데. 모든 우주의 법칙을 관장하는 신이라면서 왜 신성모독자에게 이 정도로까지 애걸복걸하는 거지?”
“지금... 지금 여기서 저 털보 녀석을 죽이고 나를 구해 준다면... 그 말은 취소하지. 그리고 너를... 내 옆자리에 올릴 것이다!”
“너는 신도 악마도 아니야. 그냥 남들보다 좀 셀 뿐인,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 재료로 삼은, 한 줌도 안 되는 비루한 녀석일 뿐이라고.”
남자는 마치 송곳으로 여기저기 찔러대는 듯하는 현애의 말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신의 권능을 다시 사용해 자신의 앞에서 감히 신성모독을 하는 현애를 없애 버리고 싶었지만, 힘이 다 빠져나가 버리는 몸으로는 그런 권능을 사용하기 힘들다.
점차 남자의 몸이 붕괴되어 가고, 온몸에서 균열이 일어나더니, 처음에 피어나기 시작하던 흰 연기가 점점 더 격하게 피어나고 있다. 이윽고 서 있기도 힘든지, 그 자리에 무릎을 굽히더니, 풀썩 하고 넘어진다.
“이런...”
덩달아 엉덩방아를 찧은 조나는 엉겁결에 넘어지지만, 이내 일어서서 현애 옆에 서서 몸부림치는 남자를 지켜본다. 어느새 발레리오와 비토리오도 와 있다.
“파디샤, 이런 최후가 네게 올 줄 알았나? 프리모가 이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발레리오... 비토리오... 뭐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를 구해라. 그렇다면....”
“안돼.”
남자의 말에 비토리오는 단칼에 거절한다. 다급해진 그는 무엇이든 해 보려고 하다가, 현애를 다시 본다.
“이봐... 제발... 제발 나를...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라고 했잖나...”
손을 뻗지만, 얼어 버린다. 그것도 두 손을 모두 쓸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의 형상이 이제 점점 사라져 간다. 마치 요약 영상을 보여주듯, 수백 개의 장면이 마치 한순간에 지나가는데...
마침 눈에 겹쳐 보인다. 아케이드의 천장에 장식된 그림이다. 사막에 불어닥친 폭풍에 모든 것이 흩날려 날아가는 그림. 그래서 이곳의 이름이 ‘카사 데 토르나도’일 것이다. 그저 이 호텔의 상징이기에 걸려 있는 그림이겠지만, 남자는 그 그림을 보고 중얼거린다.
“그래... 운명이었군... 이곳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는 것이... 내 운명...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건가...”
“운명? 끝날 때까지 끝난 건 아니야.”
점점 형태를 잃고 사라져 가는 남자에게 현애가 말한다. 남자는 뭐라고 더 말해 보려다가, 눈빛을 잃어버리고, 온몸이 푸석푸석거리며 갈라지더니, 마침내는 온몸이 먼지처럼 되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내 여행을 망친 녀석에게는 이런 최후가 딱 어울려.”
남자가 있던 자리. 그 자리에 태양석이 떨어져 있다. 그걸 보자마자 조나가 다시 태양석을 향해 몸을 날리려 하지만, 발레리오가 제지한다.
때마침 자라를 부축하고 들어오는 가브리엘과 바리오가 아케이드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다. 세훈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미켈은 어디 갔어?”
“파울리 씨 여기 온 거 아닌가?”
발레리오와 비토리오, 조나는 지금 여기 온 가브리엘을 미켈로 착각한 건지,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제가 잠깐 쓰러졌을 때 환상 같은 걸 봤는데...”
세훈이 입을 연다.
“그러는 거예요. 끝까지 약속을 못 지켜 줘서 미안하다고요. 그러고서 뒤는 가브리엘 씨에게 맡긴다고 하고 하늘로 올라가더라고요. 그래서 일어난 거죠.”
“뭐? 그럼 미켈은 설마, 우리가 생각하기도 싫은...”
바리오를 비롯한 다른 크루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한다. 특히 쌍둥이 형제인 가브리엘은 눈시울이 붉어져 있다. 조금 지나고, 가브리엘이 붉어진 얼굴을 하고서 입을 연다.
“그러고 보니까 미켈이 며칠 전에 말한 게 있었어.”
“며칠 전에 뭘 말해?”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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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2-02-28 13:03:21
상황이 자신의 설계대로 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멘탈이 박살나기 마련이죠. 그러니 비상사태를 위해서라도 플랜B는 있어야 하겠지만, 신을 자처하는 그 남자는 그런 것 따위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했겠죠. 그리고 그는 그 대가를 자신의 목숨으로 치루었어요. 그것도 굉장히 추한 방법으로. 현애에게, 그리고 비토리오에게 저렇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저렇게 사라지다니...
호텔의 이름 카사 데 토르나도(Casa de Tornado), 즉 돌풍의 집이 그의 최후의 장소...역시 운명은 운명인가 보네요.
미켈은 결국 사망이 확정되었군요. 여행에서 일행을 이끌었지만 그렇게 최후에는 함께하지 못한...
지금 명복을 빌고 있어요.
시어하트어택
2022-03-06 23:23:45
모든 것을 그의 손 아래 두려고 했습니다만, 가장 추한 모습으로 목숨을 구걸하다가,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 버렸죠. 그에게 꼭 걸맞는 최후입니다.
그에 비해 미켈은 죽었어도 일행을 무사히 돌려보내겠다는 목표는 달성했습니다. 여한은 없겠죠.
SiteOwner
2022-04-11 23:08:17
물의 표면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만질 때와 손바닥으로 세게 칠 때는 상황이 완전 달라지지요.
결국 파디샤가 조나의 존재를 삭제하겠다면서 온 힘을 다 쓴 게 자신의 존재를 삭제...
잘못된 결정이었지만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그리고 적에게 목숨을 구걸하다니, 정말 볼썽사납군요. 그 자신을 위해서라도 사라져 주는 게 답이었을 듯합니다.
미켈 파울리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시어하트어택
2022-04-17 23:00:53
파디샤가 신의 힘을 사용할 수 있다는 데에 정신이 팔린 결과, 조나에 대해서는 새까맣게 잊었고 그 결과가 바로 그가 소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추락은 한순간이었죠. 신에서, 먼지만도 못한 것으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