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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여기는 참 재미있는 동네라니까.”
해가 지고 막 어둑어둑해지려는 해변을 누군가가 어슬렁거리며 걷고 있다.
“큰 도시에 이렇게 해수욕장하고 빌딩숲하고 어우러진 데가 얼마나 있겠어?”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묶지도 않고, 민소매 셔츠를 입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되어 보이는 한 남자.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다니니 상대적으로 더 돋보인다.
그의 이름은 노아. 보통의 인간은 아닌, 흡혈귀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가 여기 온 게 사람들의 피를 대량으로 빨아서 혼란을 가져온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단지 놀러 왔을 뿐. 거기에다가 여태 그런 건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주위에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자기도 모르게 아무나 하나 잡아서 피를 빨고 싶다는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여태까지 그는 그걸 매우 잘 참아 왔다. 낮 시간대에는 밖에 잘 다니지 못하지만, 모자를 쓰거나 선크림을 바르면 그만이다. 수영복이나 간편한 옷을 입고 해변에서 노는 수많은 사람들의 광경은 그로 하여금 흡혈 충동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저녁에는 좀 괜찮나 싶으면 그건 또 아니다. 평소에도 저녁에는 길거리마다 나와서 술판을 벌인다든가 고기를 구워먹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며칠에 한 번씩은 페스티벌이라든가 콘서트 같은 것도 있다. 그럴 때마다 그는 흡혈 충동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저녁이면 집 안에 들어가 있곤 했다. 그렇게 한 그의 행동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어서, 피를 빨거나 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다.
적어도 오늘 저녁까지는 말이다.
“오늘도 무슨 행사 하려나?”
노아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다음 순간, 노아는 길거리에 붙어 있는 전단을 본다.
[2XXX 해변의 페스타]
[물총놀이, 버블파티, 초청가수 공연까지!]
설마, 그 행사를 지금 여기서 한다는 건가? 어쩐지, 저녁이 다 되어 가는데도 해수욕장의 출입이 통제되지 않고, 오히려 사람들이 더 늘어가는 게 좀 이상하다 싶었다.
순간적으로, 어떠한 열기 같은 것이 올라오는 것 같다. 마치 많은 물이 순간적으로 종이나 천 같은 데에 스며들 듯이 말이다.
그것은, 이제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그를 강하게 압박한다. 꽁꽁 숨겨 온 흡혈에 대한 본능적인 충동을 억누를 수 없게 된 것은, 해변에 앉아 있는 비키니 차림의 한 여자를 보고 나서다. 유독 창백한 피부와 피부보다 더욱더 흰 머리카락이 더욱 돋보인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그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듯, 먼 바다만 바라보고 사람들이 있는 쪽을 돌아보지도 않는다.
“이, 이런... 피를... 피를...”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고, 호흡도 불규칙해진다. 안 그래도 붉었던 눈동자는 붉어지다 못해 자주색으로 바뀌어 가고, 치아도 두드러져 보인다. 이제 그 비키니 입은 여자는, 노아에게 피를 빨아먹을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피, 피, 피가...!”
노아가 막 그렇게 부르짖으며, 여자를 향해 달려들려는데...
“이제 정신이 들어?”
“어...?”
노아가 눈을 떴을 때는, 해는 이미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다. 해수욕장 서쪽에 보이는 호텔과 섬 같은 곳에 걸려 있다. 하지만 주위는 아까 막 여기 왔을 때보다 훨씬 밝아졌다. 거기에다가, 어디엔가 정신이 팔린 사람들의 환호성은 덤이다.
“내가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머리를 흔들며 고개를 일으켜 보니, 그가 있는 곳은 해변에 있는 카페의 야외 좌석. 거기에다가, 왜인지 모르게 차갑다. 아니, 춥다는 느낌이다.
“뭐야, 너는... 누군데!”
노아의 눈에 맨 처음 보이는 건, 다름아닌 그 비키니 입은 흰 머리의 창백한 여자.
“거기에다가, 내 몸은 또 왜 이렇게 차갑냐고!”
“아, 그거?”
그 여자가 바로 대답한다.
“당신이 이성을 잃을 것 같길래, 내가 좀 잠잠하게 한 거야. 고맙다고 해.”
“에...?”
노아의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묘한 여자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아직은 알쏭달쏭하다.
“뭘 고맙다고 하라는 거야. 나를 멋대로 여기로 옮겨 놓고서.”
“그럼, 그 흡혈 본능을 아무데서나 드러내는 게 정상적인 상황이야?”
“어... 어?”
이 여자, 노아가 흡혈귀라는 걸 어떻게 안 걸까? 거기에다가 아까 그 상황은, 많은 사람들이 본 상황도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조금만 늦었어도 당신 큰일 날 뻔했어. 그랬으면 당신 목숨도 남아나지 못했을 거고!”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아, 당신이? 당신, 뭐야?”
“아직도 눈치 못 챘냐.”
그 여자가, 노아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콕 찌른다. 순간 뺨에 전해지는, 온몸의 피가 얼어버릴 듯한 느낌. 알겠다.
“설녀 ‘효가인 후유’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후유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 설녀의 태도는 확 누그러져서 제법 호의적으로 다가온다.
“어... 그래. 나는 ‘노아 폰 슈바르첸슈트라세’라고 해. 아는 인간들에게는 독일 혼혈이라고 둘러대고 있고.”
“여기서 인간 코스프레하며 사느라 고생했지?”
“어...”
노아는 어색하게 말하지만, 그건 결코 빈말은 아니다. 인간들 틈에 섞여 사는 게 참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 같았다. 비록 사는 데에 부족함은 없기는 했고, 흡혈 본능을 꽤나 잘 숨기고 다니기는 했지만, 한동안 혼자서 살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나눌 만한 상대가 별로 없었다.?
“나도 얼마나 고생했는데.”
“어...? 당신 같은 설녀가 왜 고생해?”
노아는 믿을 수 없다. 인간들 기준으로도 후유는 충분히 인기를 얻을 만한 외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가 슬쩍 보니, SNS의 팔로워 수는 몇십만 단위다.
“아무리 SNS 스타여도 결국은 인간들과는 다르잖아.”
“아...”
후유의 표정을 보니 알겠다. 노아와는 다른 방식이지만 어찌 됐건 간에 고생을 한 건 맞는 듯하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든다. ‘동지’를 하나 만났다는 안도감 말이다.
“자, 먹을 거 나왔으니까 먹자고.”
“어...?”
어느새 종업원이 와서 커피 2잔과 브런치 샐러드 2개씩을 놓고 간다. 아보카도와 파프리카, 사과, 방울토마토, 양배추, 육즙이 흐르는 고기 등이 어우러진, 꽤 먹음직스럽게 생긴 샐러드, 그리고 얼음이 가득 든 콜드브루 커피다.
“이런 건 어떻게 고른 거야?”
“우리 모두한테 잘 맞을 것 같아서.”
그러고 보니 샐러드와 커피에는 딱히 ‘흡혈귀’와 ‘설녀’와는 연관성이 없어 보이면서도, 은근히 둘과 관련있는 요소가 하나씩은 있다.
“꽤 잘 골랐네.”
노아는 웃으며 샐러드를 한 입 먹는다. 기운이 다시 솟는 것 같다. 그리고서 앞을 보니, 수영복을 입은 사람들이 한참 물총놀이에 열중하고 있다.
“후유, 당신 저기 끼어 있어야 하지 않아? 복장이 그런데...”
“아니. 갔다가는 얼음 축제가 되어 버릴 거야.”
“아, 그런가...”
노아는 잠시 스마트폰을 들여보다가 앱을 하나 보여준다.
“요즘은 이런 것도 있잖아.”
“‘딸기장터’ 말이지?”
딸기장터라고 하면, 안 들어본 게 오히려 신기한 앱이다. 직거래로 시작해서 친구 만들기까지 하는, 그런 앱 말이다.
“그러니까,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만나자고. 동지가 하나 생겼잖아.”
노아가 그렇게 말하자, 후유는 가볍게 웃더니,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입을 연다.
“뭐, 좋아. 대신 하나만 약속하자고.”
“뭔데?”
“연애하자고는 하지 마. 그런 거 관심 없으니까.”
“그래도 좋아!”
뭐, 연애에는 노아도 애초에 관심은 없으니, 그냥 친구 하나 사귀면 그걸로 성공인 것이다. 오늘따라, 이 도시가 더욱 활기차게 느껴진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SiteOwner
2022-08-15 23:28:31
흡혈귀와 설녀의 만남입니까. 이런 것도 가능한데다 인간 코스프레를 하면서 인간사회에 잘 살고 있는 게 신기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보통의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친구도 사귀고, 역시 이런 게 가능하면 재미있겠습니다.
혹시 정말로 인간사회에 저런 존재가 섞여 사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만나면 과연 어떻게 할지...
데미는 이야기하고 싶어, 이웃집 흡혈귀 씨, 철야의 노래 같은 애니가 같이 생각나기도 합니다.시어하트어택
2022-08-21 21:15:14
뭔가 크게 어울릴 것 같지는 않은 조합입니다만, 찾아보면 또 의외로 좀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에 창작물의 수는 무궁무진하고 조합(?)의 수 또한 그러할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인외의 존재들이 서로의 고충(?)이나 생활 등을 이야기하는 커뮤니티 같은 게 있으면 그것도 재미있겠네요.
마드리갈
2022-08-17 22:27:46
역시 특정 속성을 가지면 저렇게 끌리는 걸까요. 노아는 흡혈귀, 그리고 후유는 설녀. 모두 인간의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실상은 설화 속에 언급될 뿐 실체가 확인된 적이 없는 존재..
누군가를 만나는 것도 어떻게 보면 인연이라는 이름의 알 수 없는 접점들의 연속같기도 하고...
이걸 읽으니까, 후일담이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같이 들고 있어요.
시어하트어택
2022-08-21 21:17:38
마드리갈님의 댓글을 보니, 정말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 하나 정도는 써도 좋을 듯합니다. 아니면, 중편으로 에피소드를 좀 더 만들어도 될지도 모르죠. 어느 쪽이든 해 보는 건 재미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