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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이 그 사람이 누군지 아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복장은 다르더라도 연청색의 머리와 얼굴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틀림없는 윤진이다.
“윤진이 형, 맞지?”
“......”
윤진은 민이 앞에 서 있는 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듯, 그냥 짐 옮기기에만 신경 쓰고 있다. 그 뒤를 따라서 짐을 옮기는 토니와 줄리안 역시 마찬가지로 민은 보는 척도 하지 않고 짐만 옮기고 있다.
“모르는 척하지 말고, 지금 행사 준비하는 거야?”“......”
토니와 줄리안 모두 말이 없다. 다시 한번 민이 물어보려는데...
“보면 모르니? 다음 주 행사 준비하잖아.”
윤진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무미건조하게 들린다. 아니, 다분히 퉁명스럽게 들리기까지 한다. 그런 윤진의 기분을 어떻게 알았는지 토니가 은근슬쩍 민의 앞으로 다가온다.
“......”
토니는 말은 없지만, 은근히 민에게 눈치를 준다. 토니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지 모를 리는 없다. 다른 만화부원들과 마찬가지로, 토니도 민의 능력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더 노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아니,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알잖아? 우리는 보다시피 짐이 좀 많은데.”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거야!”
민의 목소리가 막 커질 무렵, 앞서 가던 윤진이 뒤돌아보더니, 토니를 보며 말한다.
“그렇게 할 필요는 없어. 사람이 충분한데 더 오면 짐만 된다고.”
“어, 그래도, 선배님...”
“네가 여기 왜 오게 된 건지나 좀 알고 말해!”
“......”
토니는 풀이 죽은 표정을 하며 옆으로 비켜선다. 윤진이 다시 민을 돌아보며 말한다.
“너 옆에 대회 보러 온 거잖아. 가서 즐거운 시간 보내.”
“어... 어? 뭐라고?”
민이 되묻자마자 윤진은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한다.
“내 말 못 들었어? 즐거운 시간 보내라고.”
“어... 그래.”
민은 그렇게 더듬거리며 대답하고는 다시 대회장으로 들어간다. 그걸 지켜보던 토니가 투덜거린다.
“아니, 선배님! 이건 기회라고요! 왜 그냥 보내 줘요?”
“그런 생각이나 하니까 후배들이나 동급생들이나 널 피하지.”
“네...?”
그런데, 신기하다. 지금 토니가 양손에 들고 있는 가방이, 마치 스티로폼만 넣은 것처럼 가볍다. 분명히 이것저것 소품들을 넣어서 가방 하나에 최소 3kg 정도는 족히 될 텐데 말이다.
“다음 주에 민이 만나면 고맙다고 해.”
“네...”
머리를 긁적이며, 토니는 윤진을 따라간다.
자리로 돌아온 민은 슬금슬금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자리에 앉는다. 마침 경기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다.
“오늘의 경기는 앞으로가 기대되는 두 선수의 경기죠!”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대회장 안을 가득 메운다. 동시에 대회장 내부의 스크린에 나타난 두 선수, ‘콘도’와 ‘BBT’를 응원하는 관중들의 환호성이,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메워 버리기라도 하듯 대회장 안을 꽉꽉 채운다. 물론 민과 일행은 샌드위치를 먹느라 소리는 내지 못한다.
“미래의 레전드를 볼 수도 있는 자리니까, 모두 끝까지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곧 시작합니다.”
곧바로 스크린에 영상이 하나 뜬다. 콘도와 BBT가 게임 대기실에 접속하고, 콘도가 화면 한쪽에 있는 시작 버튼을 누르자 카운트다운 표시가 뜨더니, 10초가 지나자 경기가 시작된다.
그런데...
두 선수 중 콘도가 키보드를 조작하다 말고 머리를 한번 손으로 쓸어 본다. 머리를 갸우뚱하면서도 계속 게임을 속행한다.
“무슨 일일까요? 콘도 선수, 갑자기 머리를 쓸다니...”
아나운서의 그 말도 오래 가지 않는다. 어느새, 아나운서도 머리를 쓸어서 만져 본다. 위를 한번 올려다보더니, 머리를 한번 흔들고는 다시 마이크를 잡고 말한다.
“죄송합니다, 여러분. 잠시 장내에 혼선이 좀 있었습니다.”
그러고서 아나운서는 대회를 속행하지만, 불안하게 천장을 가끔 보는 게 신경 쓰인다. 민과 친구들도 그렇다.
“천장에 뭐라도 있는 건가?”
친구들 중 한 명이 위를 올려다보자, 민도 따라서 올려다본다. 특별한 건 보이지 않는다. 그냥 대회장의 천장만 보일 뿐이다.
“어, 잠깐...”
민은 문득 옷 안을 만져 본다. 땀이 찬다든가 하는 건 느껴지지 않는다. 막상 습기가 느껴지지 않으니까 좀 이상하다. 최근에 몇 번 당하다 보니 오히려 익숙해지는 기분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희들, 혹시 땀 같은 거 안 나냐?”
민이 조심스럽게 묻자, 다른 친구들은 모두 고개를 흔든다.
“야, 무슨 땀이 난다고 그래? 여기 에어컨도 잘 나오고 그런데.”
“뭐야, 땀 안 나?”
민이 거듭 그렇게 묻지만, 다들 반응은 시큰둥하다. ‘땀이 날 일이 어디 있냐’는 표정이다. 심지어는 어제 그렇게 시달렸던 유도 마찬가지다.
“그럼 뭐지... 분명히 누가 초능력을 쓰는 것 같기는 한데...”
민은 그렇게 직감하지만, 심증만 있을 뿐, 과연 이게 초능력 때문에 일어나는 일인 건지도 확신을 하지 못하는 중이다. 그저 눈앞에 보이는 건 경기를 하는 콘도와 BBT, 그리고 그 경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수많은 관중들. 아까 전의 아나운서가 머리를 만진 상황은 그냥 잊어버렸을 것이다. 벌써 경기는 점점 무르익고 있다. 콘도의 유닛 하나가 BBT의 유닛들이 있는 진지로 기습해서 BBT의 허를 찌르는 장면이 연출되자, 간간이 환호성이 나오던 대회장 안은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진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고 있다.
“BBT 선수, 이대로 패배하게 되는 걸까요? ‘방어의 일인자’로 불리던 예전의 명성은 이제 사그라드는 걸까요?”
아나운서의 해설이 점점 장내의 분위기를 무르익게 한다. 민과 친구들 역시 그 장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콘도의 유닛들이 하나둘씩 BBT의 진지로 향하는 장면을 지켜본다. 어느 한쪽을 응원하는 것보다도, 이 경기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가게 될지, 그것조차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 숨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이목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야, 화면에 노이즈 끼는 것 같은데?”
민의 하나 건너 옆에 앉은 친구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화면을 가리킨다.
“야, 라이토, 어디에 노이즈가 껴?”
“저기...”
라이토는 한참 잠입 작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화면의 정중앙을 가리킨다.
“저기 좀 보라고.”
“어, 잠깐...”
라이토의 말대로다. 콘도의 유닛들이 움직이는 그 장면에 노이즈가 번쩍하고 끼는 게 보인다. 처음 한번만 그런 거라면 그냥 방송에 문제가 있겠거니 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노이즈가 낀다. 이번에는 BBT의 유닛들이 반격을 준비하는 장면 한가운데, 또다시 아까처럼 노이즈가 낀다. 마치 의도적으로 보면 안 된다고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진지와 그 출입구에만 지직거리는 게 보인다.
“이건... 의도적인 것 같은데.”
민이 중얼거린다. 사실 그것 말고도, 누군가가 대회장 안에서 초능력을 쓰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기 때문이다. 단지 느낌 뿐이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근처에서 누군가가 초능력을 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 그게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너희들 혹시...”
민은 친구들에게 귓속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지금 이거하고 비슷한 능력 혹시 아는 거 있어?”
“어, 글쎄...”
친구들은 다들 머리를 굴려 보는데, 쉽게 연상이 되지 않는 듯하다. 잠시 후, 라이토가 손뼉을 치며 말한다.
“아, 들은 적 있는 것 같아!”
“뭔데?”
라이토는 주위를 한번 보더니,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경기에 정신이 팔린 것을 확인하자 소리를 더 낮추고 말한다.
“지역 방송국에서 새벽 시간대에 이상한 문구를 넣는다든가 하는 일이 목격되곤 했는데, 잡고 보니까 초능력자가 심심해서 한 거였다더라고!”
“정말?”
민은 그 말을 넘겨듣지 않는다. 다시 한번 대회장 가운데의 스크린을 보니, 또다시 노이즈가 끼고 있다. 이번에는 실시간으로 대회를 중계하고 있는 아나운서의 얼굴 위로. 그리고 조금씩 주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대회가 무르익고 있는 판에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니, 아무리 스크린의 상황에 관심이 없더라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뭔가 빨리 손을 써야겠는데. 안 그러면 이 대회가 망쳐지고 말잖아.”
다른 친구 한 명이 초조하게 말한다.
“그런데... 어떻게 손을 쓸지는 모르겠네. 여기서 그런 초능력자를 어떻게 찾아?”
민은 가만히 듣다가,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여기서 능력을 사용한다는 건 귀찮지만, 그렇다고 전자기기를 활용하자니 위치가 드러날 것 같고...
“아마 이 능력을 쓰는 사람이 전선이나 실 같은 것을 사용하든지 한다면, 찾는 건 좀 더 쉬워지겠지.”
“야, 뭘 하게?”
친구들이 놀란 표정을 하고 묻자, 민은 곧바로 입을 연다.
“그렇다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해야겠는데.”
“야, 어떻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하게?”
“그러니까. 네 능력으로 그런 게 돼? 금방 다들 알아챌 텐데!”“한, 0.5cm 정도만.”
“어, 어어?”
민의 말에 다른 친구들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의 몸을 띄우면 네가 하는 걸 모를 것 같아?”
유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민에게 따지듯 말하지만, 민은 오히려 여유로운 표정이다.
“아, 그거? 벌써 했어. 다들 알아채지도 못하더라.”
“어... 어?”
놀란 표정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지면에 발이 떠 있는 친구들을 보며 민은 발 바로 아래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미 누가 그러는 건지 찾아냈어. 그것도 가까이서.”
민의 말대로, 전선 두 가닥이 민과 친구들의 발밑 0.5cm 정도 떠 있다. 민은 바로 유를 돌아본다.
“아... 알았어.”
곧바로 전선에 좀 많이 따끔한 전류를 흘려 넣자, 바로 다음 순간.
“끄아앗!”
몇 칸 뒤에서,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들려온다. 관중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리로 쏠린다. 민이 거기로 가 보니, 선글라스를 쓴 여자 한 명이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다.
“뭐야, 너...”
민이 그 문제의 여자를 보더니, 곧바로 일그러지려던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린다. 민에게 익숙한, 만화부에서 본 얼굴이다.
“잠깐, 너..,가 아니고 예리 누나잖아.”
“뭐야,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당해 놓고도 몰라?”
민이 예리의 선글라스를 벗기더니,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예리 누나, 왜 그런 거야?”
“아니, 그러니까, 나는...”
예리는 급히 일어나더니, 전선을 치우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자리에 다시 앉는다.
“뭐, 좋아. 나중에 생각나면 이야기하자!”
예리는 모른 척하고 경기를 보고, 민은 자기 자리로 가는데, 누군가가 민의 어깨를 잡는다.
“뭐야.”
민의 눈에 보이는 건 다름 아닌 서언. 서언은 그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더니, 조그맣게 한마디 한다.
“잘 했어!”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2-09-14 22:19:13
분명히 큰 사건이 일어난 건 아닌데 무섭네요, 이런 분위기...
윤진의 태도가 영 이상하고, 묵직해야 할 가방은 가볍기 짝이 없고, 게이머의 행동은 상궤를 벗어나고, 날씨감각은 왜곡된 것 같고, 화면에 노이즈가 끼는. 그리고 예리가 감전되어 있고...
서언은 왜 저렇게 말했을까요.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네요.
이번 회차를 읽으면서 눈을 감은 채로 안개 속의 고르지 못한 길 위를 걷는 느낌이 났어요.
시어하트어택
2022-09-18 22:20:00
원래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기획했습니다만, 작품의 분위기를 고려해서 전개를 지금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원래 생각했던 방향은 조금 더 어두웠죠...
실제 저런 일이 일어난다면 혼란은 이만저만 아니겠죠. 그나마 빨리 수습해서 이 정도로 끝난 거죠...
SiteOwner
2022-09-25 19:07:22
직전 회차에 무거운 물건을 옮기던 복수의 인원 중 한 사람은 부장 윤진이군요.
그런데 이번에는 확실히 태도가 다른 게 걱정됩니다. 아무리 인성이 좋다고 평가받는 사람이라도 저런 모습을 보일 수도 있는 거니 딱히 실망했다든가 하는 건 아니고 충분히 이해되기는 하지만...
또 엄습하는 눅눅함에 화면은 노이즈가 섞이고, 계속 이상한 일이 끊이지 않는군요. 게다가 전파납치 같은 일도 벌어진다면 이건 역시 그냥 넘어갈 수 없겠습니다. 변호사 메이링이 이럴 때 필요할 것 같은데 이번 회차에는 메이링은 언급되지도 않고 말이지요.
전선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전선을 역추적하면 그 끝은 그 사람과 이어져 있을 것이고...
역시 좋은 판단이군요. 그리고 멋지게 적중했습니다. 예리가 문제의...시어하트어택
2022-10-03 23:35:52
아무래도 윤진은 자기 일에 충실한 것이고, 다른 부원들도 챙겨야 하다 보니 저런 반응이 나온 듯합니다. 특정 부원만 챙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화면에 노이즈가 끼게 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통해 관심을 끌 수야 있었겠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그건 옳은 행동은 아니죠. 그것도 걸려 버렸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