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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일요일로 돌아간다.
미린역 남쪽 카페거리에 있는 한 카페. 일요일 오후답게 자리마다 사람들로 차 있는 카페는 복작거렸다. 창가에 있는 1인석도, 벽면에 있는 2인석과 4인석도, 그리고 단체석도 말이다.
그중 한 단체석에는 고등학생을 보이는 남자와 여자 각 3명씩, 총 6명이 마주보고 앉아 있었는데, 양갈래로 묶은 머리의 여자에게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 양갈래로 묶은 머리의 여자 옆에 있는 남자는, 만화부장 윤진. 윤진은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 말대로 하자고. 알았지?”
윤진이 옆에 앉아 있는 양갈래로 묶은 머리의 여자를 말리기에 바빴다. 이 여자는 방송부 매니저 아멜리. 미린학원 동아리 총연합회장을 겸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만화부원들이 대하기 어려워하는 윤진조차도, 아멜리는 범접하기조차 힘들어할 정도다.
“아니, 선배님, 그러니까, 그럼 저희는 일정을 다 취소해야 한다고요! 지금까지 해 오던 것도 그렇고...”
“야, 이런 행사를 하루만 하고 끝낸다는 건 낭비라고! 적어도 일주일, 아니 그 이상은 해야 하지 않겠어? 어떻게 생각해, 도서부에 리하르트하고 영화부에 레지나! 말 좀 해봐. 거기 밴드 동아리하고, 요리연구모임, 의견 없어?”
윤진 말고도, 다른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역시, 복잡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크고 작은 의견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멜리의 말에 반대할 명분은 딱히 생각은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걸 보고는, 가운데에 앉은 아멜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상은 다들 못 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장담한다? 이거, 다들 우리 학교를 부러워하게 될 거야.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너희도 우리 집안 잘 알잖아?”
아멜리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거기 모인 윤진, 리하르트, 레지나 모두 무슨 생각을 했던 건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두 명 역시, 대세를 따라가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간이 없어서 모든 동아리를 부르지는 못했는데, 이렇게 다들 이해해 주니 고맙다. 그럼, 다음 주는 기대해도 좋아!”
아멜리가 그렇게 말하자, 다들 박수를 치고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잔씩 마신다. 그러는 중에도, 윤진은 급히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울상을 지을 뻔하던 걸 겨우 참아 가면서 말이다.
[사장님, 다음주에 북카페에서 하려던 건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다시 월요일, 시간은 지나 점심시간.
하늘에는 구름이 몇 점 떠 있기는 하지만 맑고, 평소처럼 운동장 안과 밖은 운동하는 사람들과 구경꾼들, 그리고 산책하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물론 민도 예외는 아니다. 오랜만까지는 아니더라도 간만에 평온한 하늘을 보니 마음이 놓인다. 물론 그게 완전히 평온하게 돌아온 것임을 의미하는 건 또 아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난주와는 많이 다르다.
“이야- 오랜만에 이런 모습 보니까 기분이 좋잖아.”
준비해 온 과자를 꺼내고, 콜라 캔을 따서 막 마시려는데...
“찾았다-”
갑자기 누군가의 조그만 목소리가 민의 뒤쪽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민이 아는 목소리는 아닌 듯하다. 그렇게까지 굵은 목소리는 아니지만, 초등학생들이 낼 법한 목소리는 아니다. 거기에다가 음산하고, 무엇인지 모를 질퍽함까지 전해져 오는 목소리다.
“에이, 또 뭐야? 무슨 귀신 같은 건 아닐 테고...”
그렇게 중얼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는 과자를 집어 먹으려는데, 어딘지 모르게 습하다. 분명, 토마는 친구에게 ‘맡겨져서’ 잘 감시당하고 있을 터인데, 그 눈길을 피해서 남들 모르게 또 몰래 초능력을 썼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토마는 정말 용서할 수 없을 터다. 하지만, 이건 다르다. 토마하고는 또 다른 능력이다.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니, 또 누구야. 뭘 할 거면 좀 당당하게 나와서...”
민이 막 그렇게 입을 열려는 바로 그 찰나...
“슬레인, 너! 잘 걸렸다!”
갑자기 또 다른 남학생의 목소리가 민의 뒤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퍽’ 하는 소리, 곧이어 민이 앉은 벤치의 옆에 한 남학생이 쓰러지는 게 보인다. 보라색 컬러를 보니 미린고 학생이고, 머리는 검은색인데 민이 몇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는 하다. 이름은 모른다. 아까 들은 슬레인이라는 이름도 뒤에서 들어서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뒤에서 나온다. 노란색 후드티를 교복 위에 걸친 미린고 남학생이다. 그런데 어딘가에서 본 적 있는 얼굴이다. 그건 바로 그저께 토요일. 그냥 지나가면서 본 것밖에는 없긴 하지만, 꽤 눈에 띄는 패션은 머릿속에 남았다. 분명, 그 남학생일 터다.
“어엇...”
그 후드를 걸친 남학생은 잠시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이내 다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발걸음을 슬레인이라고 불린 남학생 쪽으로 옮겨 슬레인이 못 움직이게 한 다음, 민을 보고 말한다.
“저 녀석이 너한테 이상한 짓을 하려고 했길래, 내가 먼저 조치했지. 원래 빌런 같은 녀석들은 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남들이 다 볼 때 당당하게 자기 목적 밝히면서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는다든가 이런 경우는 정말 드물지. 오히려 저 녀석처럼 묻지마 식으로 빈틈을 노릴 때가 많지...”
그렇게 열변을 토하는 그 남학생이 잠시 신경을 쓰지 않은 사이, 슬레인이라는 이름의 남학생이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다음 순간, 후드티를 입은 남학생이 균형을 잡지 못하더니 자꾸 넘어지려고 한다. 슬레인이라는 남학생은 그렇게 버둥거리는 후드티를 입은 남학생을 잠시 보더니, 한마디 한다.
“저기, 선배님? 저는 다 사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라고요. 영웅이 되고 싶다든가 하는 건 알겠는데, 좀 이리저리 설치지 좀 말아 주세요.”
그러고서는 다시 민을 보고서 입을 연다. 그 이상할 정도의 습함은 그대로지만, 그게 민에게 향하지는 않는 것 같다.
“네가 그 애를 좀 아는 것 같아서 말하는 거야. 좀 전해 줄래? 언제 한번 나하고 정정당당하게 맞붙자고.”
의외인지 아니면 처음부터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슬레인은 의외로 민에게 적대적으로 대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민의 능력을 의식하기라도 한 건지, 그 후드티를 입은 남학생에게 한 것보다도 온화한 목소리로 민에게 말한다. 그런데 그럴 거면 왜 뒤에서 음침한 소리를 내며 접근했는지는, 민도 모르겠지만.
“아니...”
민은 어이가 없었는지, 슬레인에게 되묻는 말투로 말한다.
“그럼 선배님이 직접 갈래요? 그렇게 당당하면 직접 만나면 될 것이지.”
“지금 네가 전후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다 이유가 있다고! 그리고 이건 억지로 하라는 게 아니라 단지 부탁이야!”
“저한테는 그렇게 안 들리는데요.”
“나 원 참...”
슬레인은 뭐라고 말을 더하려다가 얼굴을 한번 흔들고는, 다시 입을 연다.
“아무튼, 그러니까, 좀 부탁하니까...”
하지만, 슬레인이 말을 미처 다 하기도 전...
“오오!”
갑자기 한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진다. 민과 슬레인, 그리고 쓰러져 있는 남학생을 향하고 있다.
“야! 여기야, 여기!”
후드티를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 몇 명이 슬레인이 있는 곳으로 달려온다. 슬레인은 뭐라고 몇 마디 하려는 듯하더니, 그대로 꽁무니를 빼서 달아나 버린다. 곧이어 민의 앞에 다다른 그 색색의 후드를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들은, 우선 땅바닥에 엎드려진 자기 선배를 일으켜 세운 다음, 그중 한 명의 남학생은 민에게 다가가려고 하는데...
“엇?”
눈이 마주친다. 민이 본 적이 있는 얼굴이다. 그것도 바로 그저께, 마리나 센터에서다. 그 어색함은, 민과 마주 보고 있는 올리버 역시 마찬가지다.
“어, 어어...”
잠시 서로를 멀뚱멀뚱 보더니, 이윽고 올리버는 뒤에 있는 후드티 입은 남학생과 여학생들을 돌아보며 말한다.
“얘들아, 가자! 지금은 슬레인을 쫓아야 해!”
“네? 네...”
그렇게 후드를 입은 학생들은 민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민은 잠시 멀뚱멀뚱 눈을 껌벅거리며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대체 뭐야... 이런 시간은 다들 편하게 보내고 싶지 않은 건가...”
과자와 음료수를 아직 여기서 다 먹지 않은 게 신경이 쓰이기는 하지만, 어디든 좀 돌아다녀야지 기분 전환이 될 것 같다. 그런데 좀 돌아다니려고 하기도 전, 누군가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인다. 민보다는 조금 체격이 작은 남자아이, 여자아이 총 4명이다. 다행히, 아는 얼굴들이고, 상황이 급하다든가 아니면 무슨 일이 벌어졌다든가 하는 건 또 아니다.?
“오, 민이 형이네? 왜 혼자 있어?”
“혼자 있다니.”
민에게 먼저 불쑥 말을 걸어온, 은발에 가까운 머리의 남자아이는 민과 꽤 친하다.?
“뭐야, 너 노아잖아? 너희는 또 무슨 일인데?”
“어, 구경거리가 있길래 가려는 건데요?”
그 중 남자라고 해도 믿을 만큼 짧은 머리를 한 여자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민이 오빠도 같이 갈래요?”
“어... 어, 지나, 나는...”
민은 급히 다른 데로 화제를 돌리려는 것처럼 말을 얼버무리지만, 사실은 벤치에 놔뒀던 과자와 음료수가 신경 쓰인다. 갔다 오는 동안 저걸 누가 먹어 버리면 안 되는데...
“민이 형, 저 과자하고 음료수 신경 쓰이지?”
“어... 딱히...”
민은 그렇게 얼버무리려 하지만, 이미 얼굴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다 방법이 있다니까? 걱정하지 말고 한번 갔다 오자.”
그렇게 말을 들어도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가 없기는 하지만, 민도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어느 정도의 구경거리길래 다들 한 번씩 가 보자고 하는 건가... 그렇게 4학년 동생들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그리고 얼마 후, 미린중학교 운동장.
“뭐야, 운동장에서 왜 저런 걸 하는 거지?”
평소라면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는 축구나 농구 같은 걸 하고 있을 텐데,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게 신기하다.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것 자체는 민도 많이 보아 온 것이기는 하지만, 전혀 다른 장소에서 보니 더 그렇다.
그리고 아는 얼굴도 좀 보인다.
“뭐야, 나디아 누나하고... 하야토 형?”
얼른 그곳으로 가 보니, 다들 열심히 구경하는 중이다. 거의 선수 수준으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사람들도 보이지만, 야트막한 경사도 제대로 넘지 못해 쩔쩔매는 사람들도 보인다. 선수 수준으로 타는 사람들이 이 이벤트 내지는 모임을 주최했을 터다. 민과 4학년생들이 그쪽으로 다가오자, 공중회전을 하던 사람 한 명이 땅바닥에 착지하고는, 헬멧을 벗고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 여기까지 와 준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희는 스케이트보드 동아리 ‘스케이팅’입니다. 저는 이 동아리의 총무를 맡은, 고등학교 3학년 ‘오스카’라고 합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3-02-15 15:49:02
교내에 윤진이 버거워하는 인물이 있네요? 아멜리라는 여학생, 굉장해요.
전작의 슬레인 콘리가 재등장했네요. 빈센트 클라인의 패거리에 있었던 점성 능력의 그가...
그리고 존재감이 참 대단해요. 여러 의미로. 그때 그렇게 난리를 치고 나서도 아직 뭔가 정신차린 게 없는 것인지는 알다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행각은 새로운 위험요소로 작용할 것 같네요.
스케이트보드 동아리의 총무 오스카는 굉장하군요.
시어하트어택
2023-02-19 22:03:30
아멜리는 학생회장이기도 하니 더 대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겠죠. 비록 그 위에는 선생님들과 이사회가 있기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학생회장이면 그런 높은 분들과 연락을 취할 수 있는 위치일 테니까요.
슬레인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는 건지는, 조금 시간이 더 지나 봐야 알 수 있을 듯합니다.
SiteOwner
2023-03-08 21:30:09
역시 이렇게 학내자치활동이 있는 게 보기 좋습니다. 이러면서 배우는 것도 느끼는 것도 많고 한데, 저의 고등학교 때까지의 학창시절은 저런 것만큼은 유독 없었습니다. 대학생 때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긴 했는데 뭐랄까 사상적으로 경도된다든지 지역감정이나 편견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든지 하는 폐해가 있어서 과연 안 한 게 나았나 싶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정신 못 차리는 자가 있군요. 슬레인 콘리. 또 무슨 흉계를 꾸미는지는 몰라도...
오스카의 실력은 굉장하군요. 역시 저렇게 현란한 기량을 보여주는 사람이라면 눈이 안 갈 수가 없습니다.
예전에 일본 와세다대학에 견학갔을 때 곡예를 하던 대학생들이 생각납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03-12 20:43:11
오너님도 반가운(?) 캐릭터를 보셨다니 다행(?)입니다. 역시 슬레인 같은 캐릭터는 없으면 안되는 소악당 속성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슬레인 같은 부류가 모여 있으면 또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게 사람 사는 일인지라...
오스카 같은 경우는 TV프로그램 <세상에 이런일이> 같은 곳에 나오는 출연자들을 모티브로 만들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