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지널 창작물 또는 전재허가를 받은 기존의 작품을 게재할 수 있습니다.
윤진이 보는 건, 실시간으로 인터넷상에 올라오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미린역 주변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장소도 아까의 즉석사진방, 지하 아케이드, 카페거리 등 다양하다. 그런데 사진마다 거의 예외없이 누군가 후드를 쓰고 눈을 드러내지 않은 게 같이 찍혀 있다.
“누군지 보이지가 않는데...”
윤진도 얼른 봐서는 그 문제의 인물이 누군지 잘 알아보지 못하겠다. 하지만 몇 장을 모아서 보다 보니, 보이는 게 있다. 사진 속에 나오는 인물은 공통점이 있다. 입술 오른쪽 아래의 조그만 점 말이다.
“그래, 알기는 알았는데... 우리 학교에 이렇게 생긴 애가 있었나...? 아무리 봐도 지금 여기 있는 사진들만 가지고는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여기서 지금 가지고 있는 자료만 가지고는 더 알아낼 수는 없다. 기껏해야, 어두운 사진을 좀 밝게 보정하면 나오는, 입술의 여러 가지 모양 정도다. 어쩔 수 없이, 내일 다시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은 내일 있을 교류 행사를 준비하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까, 아까의 그 동아리 추첨 때의 분위기가 다시 생각난다. 윤진이 그 동아리를 뽑자마자, 다들 한 번씩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저께와 어제도 그 동아리를 뽑은 상대 동아리 매니저들은 예외없이 한숨을 푹 내쉰다든가 머리를 싸매는 게 보였다. 그 동아리는 그렇게 기피할 만한 동아리는 아니기에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내일은 스케이터라든지 아니면 격투기 동아리 같은, 조금 활동적인 동아리들과의 모임을 기대했다. 그런데 오늘 한 선택은, 좀 아닌 것 같다. 동아리 자체가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유에서다.
윤진은 잠시 그 동아리의 자료를 들여보다가, 이윽고 한숨을 내쉰다.
“이상한 것... 정도가 아니라, 이건 무슨, ‘어나더 월드’잖아!”
그래도 교류 행사를 해야 하니, 그 동아리 구성원에 대한 정보를 보기는 해야겠고, 그래서 차근차근 본다. 그런데. 보면 볼수록 그 상대 동아리 구성원들의 이모저모는 윤진에게 더욱 압박을 가하기에 충분하다. 한명 한명 볼 때마다, 윤진의 입에서는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얘네들하고는 어떻게 교류 행사를 해야 되지? 뭘 해야 하는 거야?”
그리고 그 시간, 준후의 집.
준후는 슬레인으로부터 받은 메시지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인다. 대략적인 내용은 이렇다.
‘뭐든 생각이 났으면 어디에다 적어놔. 그게 종이이든, 메시지 창이든 좋아. 단, 어디서 네 생각을 아무 데서나 하고 다니지 마. 그러면 오늘처럼 곤혹스러운 일은 겪지 않을 테니. 대신, 그걸 나한테 알려주면, 내가 적절하게 무언가를 해 줄 거야.’
그걸 보니, 준후는 얼핏 이해가 가기도 하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다.
“아니, 이런 걸 생각날 때마다 일일이 어떻게 다 써?”
그렇게 말하기는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다 보니, 준후에게도 나름 뭔가 생각나는 게 있기는 한 모양이다. 얼른 옆에 있는 메모지 하나를 떼어서는, 무언가를 적어 내려간다.
“그래... 그래. 이렇게라면 될 것 같기는 한데...”
하지만, 준후가 미처 그걸 다 적기도 전...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어...?”
어느새, 준후의 옆에는 연한 옥색 잠옷을 입은 한 여자가 서서 준후가 뭔가를 적는 걸 옆에서 보고 있다. 준후 자신도 눈치채지 못했을 만큼, 그 등장은 갑작스럽다. 수건을 머리에 쓰고 말리고 있는 이 여자의 이름은 박은우. 중학교 2학년으로, 준후의 여동생이다.
“역시나,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야. 맨날 이상한 생각이나 하고 있더니만, 이젠 하다하다 못해 이런 쓰잘데기없는 것까지 적고 있는 거야?”
은우가 그렇게 말하자 준후는 급히 그 메모를 숨기려고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은우가 지금 이러고 있다는 건, 이미 준후의 생각이 읽혔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라는 말은 할 필요가 없을 테니.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지금 내가 적고 있는 게 뭐냐면, 내 기억력을 향상시켜 주기 위해서 일부러 적고 있는 그런 건데...”
하지만 그런 준후의 기대를, 은우는 단번에 저버린다.
“거짓말 하지 마. 어제까지만 해도 이런 메모는 없었어.”
“그런 게 아니고...”
준후는 뭐라고 더 말해 보려고 하지만, 은우는 아랑곳하지도 않고 오히려 준후를 똑바로 보더니 한마디 더 한다.
“아니, 오빠, 이제는 철 좀 들어야지. 언제까지 그렇게 이상한 생각만 할래? 마치 내 귀에다 읽어주는 것 같다고!”
그러더니 은우는 그대로 돌아서 준후의 방을 나간다.
“야, 박은우! 너...”
하지만 그렇게 말해 보려고 해도, 아까 전에 슬레인이 말한 걸 떠올리자, 곧바로 다시 적어내려간다. 어느 정도 다 써지자, 준후는 한숨을 푹 쉰다. 하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는다. 곧바로, 은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기 때문이다.
“오빠, 또 시작이지!”
한편 그 시간, 메이링은 막 집에 들어가려는 길이다. 막 문을 열기 위해 전화에 있는 ‘도어락 코드’를 스캔하려다 보니, 메시지가 수십 개 도착해 있는 게 보인다. 얼른 열어 본다. 거의 대부분이 제보 메시지다. 그중에는 미린고등학교 학생도 있고, 회사원도 있고, 가정주부도 있고, 의사나 부동산업자도 있다. 사진 몇 장에는 그 정체 모를 후드 쓴 사람의 사진이 보인다. 그 어둑어둑해 보이는 사진들을 막 확인하려는데, 때마침 전화까지 온다.
♩♪♬♩♪♬♩♪♬
“여보세요?”
“아, 변호사님, 저 회계사 ‘아이젠베르크’입니다. 제가 보내 드린 사진은 잘 확인하셨는지...”
전화 너머의 목소리는 제보자 중 한 명인 듯하다. 조금 전에 실명으로 사진을 올렸는데, 가족사진 뒤에 그 후드 쓴 사람이 찍혀 있는 게 희미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에만 신경을 쓸 수는 없다. 메이링은 그 제보자의 말을 자르고는 바로 말한다.
“네, 네. 잘 받았습니다. 지금 퇴근 중이니, 집에 돌아가는 대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전화를 끊는다. 자못 사무적인 말투이기는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얼른 들어가기 위해, 다시 도어락 코드를 켜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메이링의 뒤에서 들린다.
“오, 메이링 씨, 아직 안 들어가셨나요?”
“네... 저... 저는...”
메이링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피오다. 이 근처에 집이 있는데, 산책을 하러 나온 건지, 아니면 일부러 걸어서 퇴근하는 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제보가 꽤 들어오나 보죠? 오늘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그렇게는 말하지만, 피오도 다른 경로를 통해 제보를 받고는 있다. 다만 그 사진이 모두 화질이 좋지 않아 금방 식별이 어려울 뿐이다.
“네, 다 그 사진 제보인데요. 사진에 이상한 누군가가 찍혀 있고 그런 거 있잖아요.”
“아, 그래요. 저기, 메이링 씨, 그 사진들을 저한테도 보내 주시죠.”
“음...”
“금방 그 사람이 잡히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실마리를 잡는다든지, 아니면 이 사람의 능력을 분석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될 테니까요.”
“네, 그러죠...”
그러고서 들어가려는데, 피오가 메이링을 불러세운다.
“혹시 이번 주말에 저희 형님이 오래간만에 재단 본부에서 ‘초능력자 연구회’ 모임을 하려고 하는데, 시간 나면 한번 와 보시겠어요? 일정이 바쁘면, 굳이 오시지 않아도 상관은 없습니다만.”
“아, 죄송합니다만 이번 주말은 바쁠 것 같아요. 하필 주말에 법원에 갈 일이 있어서요.”
“그러면 어쩔 수 없군요... 다음에 뵙죠.”
피오가 메이링의 시선에서 사라지자, 메이링은 ‘후’ 하며 숨을 크게 내쉬고는, 집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그런데 또...
♩♪♬♩♪♬♩♪♬
“여보세요?”
“예, 여보세요? 플록 대표입니다. 변호사님, 제가 보내 드린 사진은...”
“예, 예. 알겠으니, 제가 들어가서 보겠습니다.”
그렇게 몇 초 만에 전화를 끊고는, 메이링은 다시 한숨을 ‘후’ 하고 내쉬며, 마침내 코드를 찍고는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지온은 아침식사를 하면서 옆에 있는 홀로그램으로 표시된 메신저 창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거기에 나오는 건 어제 아멜리도 겪었고, 민과 윤진 역시 본 바 있는, 그 사진에 나타난 이상한 후드를 쓴 사람의 사진 몇 장이다.
“호오, 이게 어제 꽤 화제였던 모양이네.”
지온은 그렇게 말하는데, 마주 앉은 유온과 부모님은 거기에는 크게 관심도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런 지온을 한심하다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식사하는데 뭐 하는 거냐’는 듯 바라보며, 손짓을 한다. 그럼에도 지온이 홀로그램 속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자, 마주 앉아 있던 아버지가 그 홀로그램을 끄며 말한다.
“얼른 먹자. 그런 사진이나 영상 감상은 좀 나중에 하고. 알겠지?”
“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서도 지온의 머릿속에는 그 사진들이 떠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사진들이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식사하는 데 방해까지 될 정도로 말이다.
밥을 다 먹자마자, 지온은 화장실에 가서 세면대 앞의 영상 송출 기능을 켜고는 다시 아까 전의 그 사진들을 차근차근 본다. 그렇게 SNS에 올라간 사진들을 공통점을 발견하기는 했는데, 누군지는 모르겠다. 교복까지는 확인했는데...
“대체 누구냐... 누구길래 이런 짓을...”
지온의 생각이 막 가지를 쳐 가려고 할 그 무렵. 지온을 누군가가 밖에서 부른다.
“형, 빨리 안 나올래? 형 들어가고 시간이 5분이나 지났다고! 이제 1분 늦을 때마다 내가 형 방에 숨겨 놓은 ‘보물’ 하나씩 가져갈 테니까 그렇게 알아!”
유온이 그런 식으로 나오자, 화장실에 조금 더 있으려던 지온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짜증은 좀 나기는 해도, 이럴 때는 짐짓 져 주는 척하는 게 상책이다.
“알았어, 알았다고! 빨리 나올게!”
한편 그 시간, 아멜리는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일찍 학교로 향하고 있다. 동아리 교류 행사를 총괄하는 미린학원 동아리 총연합회장으로서, 그리고 미린고 총학생회장으로서 할 일은 늘 많지만, 오늘은 그것 말고도 할 게 좀 더 있다. 오늘 아침 일찍 ‘그 누군가’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바로 5분 뒤, 학교 정문 앞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아멜리는 미린고 정문 앞에 다다른다. 학교 안으로는 몇 명의 학생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아직 아멜리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차논’은 아직 안 왔나 보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어제 찍은 그 사진들을 다시 꺼내서는 차근차근 본다. 보고 또 다시 본다. 그러면 좀 나올 것 같기는 한데,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3-03-10 23:30:59
섬찟하네요. 찍은 사진마다 저런 지경이니...
어나더 월드라는 건 무슨 개념인가요? 작중 배경 속의 특정 창작물 이름이 아니라 뭔가 실체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부정은 할 수 없는 이세계 같은 것인가요? 만일 후자라면 이건 동아리 부장 레벨에서 해결가능한 문제가 아닌데...
준후는 여동생에게조차 바보 취급을 당하네요. 게다가 자신의 생각이 타인에게 흘러나가는 것인지, 있어서 도움이 안되는 능력이네요.
메이링도 아멜리도 각자의 입장에서 움직이는데, 혹시 범인이 의외로 가까운 데에 있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요.
시어하트어택
2023-03-18 09:59:28
어나더 월드라는 건 딱히 거창한 개념은 아니고, 그 동아리의 부원들의 지위와 관련된 표현이죠. 이를테면, 재벌 후계자를 보고 '황태자'라고 비유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죠.
준후에 관해서는... 저런 것도 도움이 되는 능력인가 하는 사람들, 분명히 있을 겁니다.
SiteOwner
2023-03-26 17:01:18
준후의 저 능력은 여러 사람을 감화시키는 데에 쓴다면 매우 좋겠지만 타인이 함부로 알아서는 안되는 정보를 관리해야 하는 입장에 있으면 아예 없는 것보다 못한 최악의 상황으로 빠지기에 참 좋습니다. 큰 뿔을 가진 사슴이 그 큰 뿔을 노리는 사람에게 목숨을 잃는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메이링도 정보를 많이 입수하고 있군요. 그런데 할 것도 많아지니 여러모로 고민입니다.
은우는 준후를 한심하게 보고 유온은 지온의 약점을 이용하려 들고...형제자매간이 저래서야 가족이 소중한 기분이 들지 의문입니다. 서로가 소중하고 좋은 저희집의 상황이 역시 천혜의 축복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3-03-26 22:30:43
그렇죠. 분명 좋은 데 쓰면 활용도가 높겠으나, 문제는 능력의 보유자가 그렇고 그런 사람이라(...) 활용을 잘 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다 보니 준후가 은우에게 좋은 취급 못 받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