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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에, 눈뜨다] 14화 - 토요일 저녁, 그날

시어하트어택, 2019-04-09 23:16:12

조회 수
136

“그러니까... 그러니까 박사님...”
캠핑장 근처에 있는 산책길. 세훈과 엘더 박사가 나란히 걷고 있고, 뒤에 메이링과 앨런이 뒤따라 걷고 있다. 세훈은 조금은 말을 더듬거리면서 말을 꺼낸다.
“클라인에 대해서 말인데요...”
“말해 보게, 세훈 군.”
“혹시, 지금까지 클라인의 능력에 대해서 취합한 정보가 있나요?”
“아니... 나도 유의미한 정보가 있으면 좋겠지만, 클라인 군의 데이터는 아직 많이 모이지 않았다네. 오늘 클라인 군이 왔다면 그의 데이터를 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는데 말이지.”
“데이터가... 많이 모이지 않았다니요?”
“클라인 군은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보아 우리가 찾던 ‘강력한 초능력자’로 보이지만... 그는 자기 능력을 웬만해서는 보여 주려 하지 않았네. 미린재단 안의 우리 조사원들도 그의 능력을 좀처럼 알 수가 없었지. 기껏해야 자네처럼 ‘손으로 뭔가를 가까이 끌어온다’는 정도만 알 수 있었을 뿐...”
“하지만 메이링 씨는 그게 별 능력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메이링 양이 교내에서 활동하지 않아서, 자세히는 모르는 거지.”
어느새, 두 사람은 도심이 보이는 전망 데크 위에 선다. 두 사람의 눈 앞으로 세라토 도심의 불빛이 환하게 비친다. 엘더 박사는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참... 그래서 하는 말인데, 내일 클라인 군이 자네를 만나자고 했다며?”
“클라인은 내일 저한테 미린 중앙공원에서 만나자고 했어요. 전에 제 친구를 불러냈던 곳도 거기였고요. 제 친구는... 거기서 클라인의 능력에 무자비하게 당했고, 지금도 병원 신세를 지고 있어요.”
“그 앤드루 카슨이라는 친구 말이지?”
“네... 맞아요.”
세훈의 머리가 지끈거린다. 앤드루라는 말을 들으니, 괴롭다. 죄책감이 자꾸 든다... 엘더 박사는 그런 세훈을 잠시 걱정스럽게 바라보다가, 입을 연다.
“앤드루 카슨은 매우 용기있는 행동을 했지.”
“네... 그렇죠.”
엘더 박사가 앤드루를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세훈은 머리를 끄덕인다. 잠시 후, 세훈은 머리를 흔들고는 다시 엘더 박사에게 묻는다.
“클라인이,,, 자꾸 저를 노리는 이유는 뭘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서 말이죠...”
“표면적으로는 자네를 굴복시키기 위해서라고 했나? 내 생각에는... 다른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네. 클라인 군의 진짜 목적이 궁금해지는군.”
“네? 진짜 목적이라니요.”
“자네를 굴복시키려면 클라인 군이 직접 처음에 자기 능력을 보여 주기만 해도 해결될 텐데, 왜 굳이 자기 부하들을 그렇게 보내 가면서 그렇게까지 하는지... 분명 다른 이유가 있을 걸세.”
“그 다른 이유라는 건 뭘까요, 도대체...”
“우리가 그걸 먼저 알아내면 좋겠지. 하지만 그 이유를 밝혀내는 건, 자네의 몫이어야 하네. 우리는 어디까지나 도와 주는 입장이지,”
“네, 알고 있죠.”
세훈은 굳은 표정으로 말한다. 엘더 박사는 세훈의 얼굴을 옆에서 유심히 바라본다. 옆얼굴도 보고, 위로도, 아래로도 훑어본다. 잠시 후, 엘더 박사가 말을 꺼낸다.
“자네, 얼굴이 굳어 있군.”
“아... 아니오.”
“아니, 굳어 있어. 하지만, 그 굳어 있다는 건 두려움이나 절망 같은 데에서 나왔다는 게 아니야.”
엘더 박사는 마치 아들을 바라보는 부모처럼, 온화한 목소리로 말한다.
“자네는, 각오하고 있지?”
“네? 각오라니...”
“나는 잘 알고 있지.”
“하긴... 박사님은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으시죠.”
엘더 박사는 껄껄 웃는다. 세훈은 박사가 왜 웃는지를, 그 웃음이 무슨 뜻인지는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왜 엘더 박사가 지금껏 VP재단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알 것 같다. 초능력자는 아니지만, 확실히 뭔가 있는 것 같다. 초능력에 다가가기 위한 재능이라든가, 아니면 그게 아니라도 그에 필적할 만한 통찰력이라든가... 아마도 그런 거겠지. 그런 게 있으니 내 말을 이렇게 이해해 주는 거겠지... 세훈은 그렇게 생각한다.

다음날 오전, 캠핑장 입구. 사람들이 하나둘씩 캠핑장을 나서고 있다. 그 가운데, 세훈과 주리, 나타샤도 끼어 있다. 주리는 오토바이를 타고 있고, 세훈과 나타샤는 걸어가고 있다.
“너... 오늘, 어떻게 할 거야?”
나타샤의 질문에 세훈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안 도와줘도 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주리가 떨리는 목소리로 세훈에게 묻는다.
“내가 말했잖아.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지 말라고. 그런데도... 그 녀석을 혼자 상대하겠다고?”
세훈의 눈은 주리의 말에 잠시 흔들린다. 그러나 이내 세훈은 입을 연다.?
“내가 혼자서 그 녀석을 상대하겠다는 건, 나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단코 그런 의미는 아니야.”
세훈도 모르는 사이, 세훈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조금 무거워져 있다.
“아니, 내가 볼 때는 맞는데. 내가 하는 말에 정말 아니라고 할 수 있어?”
“음... 그건...”
세훈은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한다.
“맞아. 나 혼자 짊어지겠다고 한 건 맞지. 하지만,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한 거야. 몇 번이고 말했지만, 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정말 싫어. 설령 그게 너라도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 저녁에는 공원에 오지 마. 알았어?”
주리는 말없이 조용히 세훈의 얼굴을 본다. 2주쯤 전에 예준을 만나러 갔을 때의 그 얼굴이다. 주리가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도 허락을 해 줄 얼굴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2주 전과는 상황이 다르다. 거기에다가, 앤드루의 일도 있다. 어떻게든 말이라도 해 봐야 할 것 같다.
“세훈아, 내가 다시 한 번 말하는데...”
“내가 말했잖아? 네가 말려들게 하기는 싫다고.”
세훈의 어조는 한층 더 단호해졌다.
“나하고 상관없는 사람이라도, 그 누구도. 나 때문에 피해를 보게 하기는 싫어. 그러니까, 안 왔으면 좋겠어. 알겠지?”
세훈은 소리를 높여 가며 말한다. 주리는 크게 한숨을 쉰다. 고개를 돌리려다가 문득 세훈의 왼팔을 스쳐 지나가듯 본다. 세훈의 AI시계가 깜박거리고 있다. 세훈이 딱히 뭔가 조작을 한 게 아닌데도.
한편 바로 그때, 세훈과 주리의 뒤에서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다름 아닌 첼시. 첼시는 불안한 눈빛으로 세훈, 주리와 다른 사람들을 번갈아 본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려다, 입을 가린다.

그날 오후 7시쯤, RZ백화점 지하 식당가. 세훈은 빵집 ‘쇼콜라’의 한쪽에 혼자 앉아 있다. 테이블에는 아메리카노 커피가 놓여 있고, 옆에는 쇼핑백 하나가 놓여 있다. 세훈은 AI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화면에 NURI의 메시지가 뜬다.

너무 무모하지 않아요? 혼자서 그 사람에게 맞서겠다는 건.

NURI의 메시지를 본 세훈은 잠깐 망설이는 눈빛으로 화면을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떨리는 손으로 메시지를 입력한다.

말했잖아?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싫다고 말이야.

세훈의 메시지가 끝나기가 무섭게, NURI의 메시지가 다시 나타난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지금은 그렇게 말씀하실 상황이 아니에요.

세훈은 크게 한숨을 내쉰다. 앞에 놓인 커피잔을,? 가만히 응시한다. 손에 쥐고 있는 AI폰의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을 끈다. NURI에게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답변이 충분치 못하다거나 화난다거나 해서 그런 게 아니다. NURI는 최선의 답변을 했다. 분명 그랬을 거라고 세훈은 믿는다. 다만, 세훈은 NURI의 말대로 도망가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온몸이 점점 무거워져 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마치 등에 1톤짜리 쇳덩이를 짊어진 듯하다. 분명, 주리는 혼자서 모든 것을 짊어지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떨쳐내고 싶지는 않다. 남에게 이 고통을 주고 싶지는 않다...
세훈이 가만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바로 그때. 세훈의 테이블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온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듯하다. 뒤를 돌아본다. 야구모자를 쓰고 빨간 점퍼, 핫팬츠를 입은 사람이 세훈의 바로 앞에 서 있다. 얼굴을 훑어보니... 메이링이 아닌가? 어째서 여기에??
“어... 메이링 씨, 여기는 왜...”
“어? 메이링 씨라고? 우리 누나 친구? 여기 안 왔는데?”
어? 메이링 씨가 아니야? 잠깐... 맞아. 아침까지도 봤었는데... 메이링 씨와 아주 닮은 사람... 그래, 민이었지. 그리고 그 옆에 있는 긴 머리를 뒤로 묶은 민의 친구는 유였고.
“너희 그런데 여기는 웬일이야?”
“아... 우리는 그냥 저녁 식사하고 놀러 온 건데.”
“놀러 왔는데 왜 여기로 와? 위에 테마파크나 워터파크 같은 데 가지.”
“거기는 언제든 갈 수 있잖아.”
“오늘은 후식이나 좀 실컷 먹어 보려고.”
‘언제든’이라고? 참, 여기 RZ타워는 유네 집안의 소유였지.
“그건 그렇고 세훈이 형.”
민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저녁에 중앙공원에 누구 만나러 간다며?”
“응... 맞아.”
“주리 누나가 그러더라. 세훈이 형을 누구라도 도와야 한다고 말이야.”
이번에는 유가 말한다.
“언제? 너희들하고 만나기라도 했어?”
“어... 그러니까, 메시지를 좀 주고받았는데...”
세훈은 민과 유를 잠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번갈아 보다가, 이내 단호한 표정으로 말한다.
“너희의 도움은 필요 없어.”
“왜? 그 형도 내 능력은 무서워할 텐데.”
“물론 그건 알아. 하지만, 부탁이야. 오지 않았으면 해. 오늘과 같은 상황에 말려들기에 너희들은 아직 어려. 그리고 나는 원래 아무도 나 때문에 고통받는 건 원하지 않아. 그러니까...”
“고통받는다니?”
“물론 아닐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요즘 내게 자꾸 벌어지고 있는 일들 때문에, 괜히 내 주변에 있다가는 나 때문에 또 누군가가 애꿎은 피해를 보게 될까 두려워.”
“......”
세훈은 잠시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리를 나서는 세훈의 등 뒤로, 민이 말한다.
“잘 갔다 와.”
세훈은 뒤돌아보며 손을 흔들고는, 그대로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다. 세훈이 사람들 속으로 사라진 걸 확인한 민과 유는, 쟁반을 들고 빵을 고르러 간다.

저녁 8시, 미린중앙공원. 세훈은 호숫가에서 아모르 숲을 향해 걷고 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본다. 주위는 초고층 아파트, 그리고 RZ타워를 위시한 초고층 빌딩들의 조명으로 환하다. 하지만 세훈이 있는 공원은 가로등만 길가를 은은히 비출 뿐이다. 호숫가는 그래도 낫다. 빌딩과 아파트의 조명이 호숫가에 비치니까. 하지만 세훈의 눈에 보이는 숲은, 뭐가 나올지 모르는, 그야말로 판타지 소설이나 다큐멘터리 같은 데 나올 법한, 아무것도 안 보이는 어둠만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문득, 전에 병원에서 만났던 앤드루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앤드루가 클라인에게 당했던 아모르 숲은... 낮에는 연인들의 사랑 약속 장소로 유명하지만... 밤에는 그런 게 생각나지도 않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어둠만이 가득한 장소였다고 했다. 지금 세훈 역시 거기로 향하고 있다. 친구가 두려움 속에서 처절하게 당해야만 했던, 바로 그 장소로.
문득, 전화벨이 울린다. 세훈의 주머니 속에서.?
“어... 여보세요? 엄마?”
“세훈아, 너 너무 늦는 거 아니지?”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이진의 목소리에, 세훈은 아무 일 없다는 듯한, 그러면서도 조금씩은 떠는 목소리로 말한다.
“아, 걱정 마요. 모처럼 나가는 건데, 제가 어디 엄마 속을 썩인 적 있나요.”
“그래... 네가 걱정을 말라니까 다행이네.”
그렇게는 말하지만, 이진의 목소리는 아직 마음이 안 놓이는 듯하다.
“너무 늦지 말고.”
“네... 알았어요.”
세훈은 전화를 끊는다. 잠시 뒤를 돌아본다. 길가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지금 세훈이 가는 아모르 숲이 공원에서도 조금 외진 곳이어서 그럴까. 주말이라 공원에 놀러 나온 사람도 많을 텐데...?
바로 그때, 세훈은 오른쪽 어깨가 살짝 무거워지는 것을 느낀다. 뭐지... 방금 그 이상한 느낌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돌아본다. 아무것도 없다. 이상하다. 뭔가 이상한데...
또다시, 어깨가 무거워진다. 이번에는 왼쪽 어깨. 어깨에 느껴지는 건 책 하나 정도의 무게. 확실하다. 이건 누군가의 습격. 그러나, 클라인은 아니다! 눈을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실루엣이 보인다. 사람 한 명. 그런데 하늘 높이 떠 있다!
“알아채는 게 빠르군.”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세훈의 머리 위에서!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 분명, 며칠 전에 들었던 그 목소리다. 기분 좋게 등교하던 세훈의 뒤에 나타나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던 그 목소리. 알 것 같다. 이 목소리는...
“앤서니 탤리!”
“흐흐흐... 그래, 맞아. 분명, 너는 빈센트 선배님의 호출을 받고 여기에 온 거지.”
“너... 원하는 게 뭐냐?”
“너는 빈센트 선배님께 갈 수 없다. 네가 선배님께 가기 전, 너는 내게 쓰러진다.”
탤리는 한껏 호기롭게 말한다. 말을 마침과 동시에, 세훈의 두 어깨에 책 3권의 무게가 전해져 온다. 세훈의 다리가 잠시 흔들린다. 세훈이 하늘 위를 올려다보려는 때, 탤리는 금세 또다시 높이 뛰어오른다.
“왜 그렇게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하나? 잡아 볼 수 있으면 잡아 보라고.”
“이게 네 능력이냐?”
“맞아. 나는 수십 미터든 수백 미터든 높이 뛰어오를 수 있고, 발을 내디딜 때도 거기에 가해지는 무게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지. 그래, 이게 바로 내 능력이다!”
“허... 대단하신 능력이로군.”
세훈은 비꼬듯 말한다.
“너 이 자식!”
탤리의 목소리가 올라간다. 동시에 세훈의 어깨에 10kg짜리 아령 두 개가 떨어지는 듯한 무게가 전해져 온다. 세훈의 다리가 순간 휘청거린다. 몸이 균형을 잃고 기우뚱거린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찰나, 손으로 땅을 짚는다. 세훈이 머리 위를 올려다본 순간, 탤리는 어느새 약 수십 미터 정도로 높이 뛰어올랐다.
“흔들리고 있군. 안 그래?”
세훈의 머리 위에서, 탤리는 한껏 비웃음을 섞어 가며 말한다.
“왜 그렇게 일어서려고 하는 거지? 무릎을 꿇으면 편할 텐데!”
어디선가 ‘탁’ 하는 소리가 들린다. 세훈의 어깨 위는 아니다... 돌아본다. 분명 나무 위쪽... 그러나 어두운 탓에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나뭇잎이 무성한 나무 위이기에, 실루엣 같은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너는 말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나무 위에서 탤리의 목소리가 들려 온다.
“나는 빈센트 선배님을 처음 본 그 순간부터, 선배님의 능력을 알고 난 그 순간부터, 존경심과 복종심이 저절로 들었는데 말이야... 너는 그 반대라니...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다고도 할 수 있군.”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이지?”
“역시나 머리가 안 돌아가는군.”
탤리는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선배님의 능력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지. 과연 선배님이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자기 능력을 다 보여 주었을 거라고 생각하나?”
“......”
탤리는 한심하다는 듯, 나무 아래 길에 서 있는 세훈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까, 나한테 무릎을 꿇으라고. 선배님은 말 잘 듣는 사람을 좋아하시니까.”
“하하하하하하...”
세훈은 탤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웃기 시작한다.
“머리가 돌았나. 왜 웃어?”
“머리가 안 돌아가는 건 바로 너로군.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데, 설마 무릎을 꿇으려고? 착각은 자유라지만.”
“너 이 자식...”
세훈의 옆에 있는 나무가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한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니...”
바로 그 순간, 세훈 옆으로 나뭇가지 하나가 턱 하고, 힘없이 떨어진다. 그 위로, 나뭇잎들이 이불 덮듯 나뭇가지 위에 덮인다. 세훈은 서둘러 하늘 위를 올려다본다. 조그맣게, 사람의 그림자가 하늘 위에 보인다. 조금씩, 그 그림자가 점점 커진다. 세훈 쪽으로, 빠르게 다가온다!
“그 썩어빠진 머리, 지금 폐기처분해 주겠다!”
탤리의 악에 받친 목소리가 들려온 그 순간, 세훈은 확실히 본다. 탤리의 두 발이 세훈을 바로 향하고 있는 것을. 탤리가 운동에너지를 한데 끌어모아 세훈에게 바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세훈과 격돌하기까지 채 3초도 안 남았다는 것을!
바로 그 순간, 세훈은 본능적으로 몸을 어딘가로 날린다. 그리고 약 2초 후... 동시에 두 곳에서 ‘펑’ 하는 충격음이 들린다.
잠시 후, 한 사람이 나무 밑에서 몸을 비틀며 일어선다. 거친 숨을 내쉬며 길가로 조심스럽게 걸어간다. 또 한 사람이 거기 쓰러져 있다. 쓰러진 사람은 입에서 앓는 소리를 내고 있다.?
“이봐.”
쓰러진 사람의 앞으로, 나무 밑에서 일어선 사람이 다가가며 말한다.
“내 머리가 썩어빠졌다더니, 썩은 건 네 머리였군 그래.”
“이... 이 자식...”
“왜 그래? 어디 잡을 수 있으면 잡아 보라고.”
세훈의 말에 발끈한 탤리는 몸이 쑤셔 오고 다리가 욱신거림에도 일어서려 한다. 그런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다! 다리를 움직이려 하는 순간, 다리의 욱신거림은 극심한 고통으로 바뀐다!
“으... 윽... 너... 이 자식...”
“아, 정정하지. 어디 한 번 잡아 봐.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진 네 다리로 일어설 수 있다면 말이야.”
세훈은 일어서지 못하는 탤리를 뒤로 한 채 계속 아모르 숲을 향해 걸어간다.
걷는 중에도, 세훈의 머릿속에 탤리가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선배님의 능력은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다’라... 도대체 그게 무슨 말인가? 세훈이 겪은 클라인의 능력은, 분명 메이링의 말에 따르면 그냥 그렇고 그런 능력이었다. 하지만 앤드루가 그렇게 잔인하게 당한 걸 생각해 보면 또 그런 것 같지도 않다... 도대체, 무엇이 있기에 탤리는 그런 말을 한 걸까...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또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은 주위를 돌아본다.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아모르 숲에 이제 막 발을 들여놨기는 하지만, 아직은 길가에서 멀지 않다. 가로등의 불빛도 아직은 세훈이 서 있는 곳까지는 닿는다.
“너, 분명히 조세훈 맞지.”

세훈은 입속의 침을 꿀꺽하고 삼킨다. 입안이 말라 온다. 설마, 클라인이 여기까지 직접 나온 것인가... 전에 없이 몸이 떨려 온다. 이마에는 식은땀마저 흐르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 사람이 세훈의 앞으로 다가오며, 천천히 입을 연다.
“하하하, 이렇게 긴장을 타서야... 목소리도 구별 못 하나.”
“너는 누구지?”
“어제 저녁, 나는 네 친구를 먼저 만났지. 혹시 네 친구한테 이야기 못 들었나?”
“댁에 대한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좋아, 그러면 이야기해 주지. 내 이름은 고한영이다. 빈센트는 내 친구지. 여기까지 용케 잘도 왔군. 그건 칭찬해 주도록 하지.”
어느새 세훈의 바로 앞에 선 한영은 한껏 비웃는 소리로 말한다.
“흐흐흐... 하지만 유감이군.”
“뭐가 유감이라는 거지?”
“지금까지 질기게 이어 왔던 너의 행운도 여기에서 끝나게 되어 있으니까. 왜냐고? 너는... 나한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으니까.”
“그게 무슨 개뼈다귀 같은 논리야.”
세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영은 손으로 세훈의 왼팔을 꽉 하고 움켜쥔다. 순간, 세훈의 머리가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뜨거움은 머리에만 느껴지는 게 아니다. 팔다리가 다 뜨거워져 오고, 무엇보다도 가슴이 점점 답답해져 온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흐흐흐... 네놈의 피는 지금 역류하고 있지. 이대로 조금만 있으면 심장이 죄다 망가지고 말겠지.”
“......”
“자, 시간은 얼마 없다! 현명하게 생각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미래는 없다!”
세훈의 눈이 잠시 한영의 눈과 마주친다. 한영은 그 힘없어 보이는 눈빛에 자기도 모르게 크게 웃음을 터뜨린다.
“흐흐흐흐... 그렇게 정신력이 약해서야! 이제껏 온갖 역경을 뚫은 게, 지금 나한테 이렇게 속절없이 당하기 위해서냐? 흐흐흐흐흐...”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착각 마.”
“뭐... 뭐? 정신이 나가니 헛소리를... 헉?”
바로 그때, 둔탁한, 그러나 아주 작은 충격음이 숲 한가운데 울린다. 한영에게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형언할 수 없는 어떤 감각이 전해져 온다. 순식간에, 온몸에 그 감각이 전해져 온다. 그 ‘통증’을 뛰어넘는 감각이! 한영은 몸의 균형을 잃는다. 동시에 손에도 힘이 빠진다. 세훈의 팔에서, 한영의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내려간다. 온몸의 힘이 빠진 한영은, 그대로 땅바닥에 풀썩 쓰러진다.
“으... 이 자식... 비겁한... 자식... 어... 어떻게... 공격을 해도... 어떻게...”
세훈은 무심한 듯 아모르 숲으로 걸어 들어가려다, 고통스럽게 겨우 말하는 한영을 보고 말한다.
“아, 썩은 머리의 소유자에게는 딱 어울리는 결말이지. 안 그래?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군.”
세훈은 고통스럽게 땅바닥에 엎드려 신음하는 한영을 뒤로 한 채, 아모르 숲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그렇게 한 얼마쯤 걸었을까. 그 동안 AI폰이나 AI시계를 안 봐서 잘은 모르겠지만, 한 5분 정도는 걸은 것 같다. 문득 주위를 돌아본다. 온통, 검은색으로 가득하다. 갑자기 세훈의 눈이 멀어 버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주변은 온통 암흑뿐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밟히는 나뭇잎, 그리고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만 아니라면, 검은 밀실에 가두어졌다고 해도 믿을 정도다.?
세훈은 침을 삼킨다. 입안이 마른다. 몇 주 전 앤드루를 만났을 때, 그때가 다시 떠오른다. 약 5분여를 암흑 속에서 서 있었다고 했는데... 설마, 지금이 바로 그때인 걸까. 심호흡을 한 번 한다. 숨을 다시 들이마신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엇?”
그 느낌, 주변이 뒤틀어진 듯한, 이 위화감! 그 사람, 그 사람을 만날 때면, 확실히 느끼는, 그 기분 나쁜 느낌! 그렇다... 그 사람, 그 사람의 능력이다! 어디지? 도대체 어디서... 어디서 이러는 거지? 세훈은 주위를 돌아본다. 하지만...
“왜 그렇게 헤매는 거지?”
세훈의 바로 앞에서, 그 목소리가 들린다. 세훈의 눈에, 그 사람이 보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
그런데, 세훈의 앞에 선 클라인의 목소리는, 의외로 부드럽다. 마치 자상한 아버지의 목소리 같고, 지금껏 세훈이 생각했던 클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여기까지 잘 왔군.”
“너... 도대체 내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야?”
“오늘, 내게 답을 줄 때가 됐지?”
“그렇고말고.”
“아, 나는 네가 현명한 답을 하기를 바라는 차원에서, 이렇게 여기로 부른 거야.”
클라인은 한층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한다. 세훈은 전에 본 적 없는, 클라인의 그런 가식적으로 보이는 모습에 혐오감마저 느낀다.
“말해 봐. 너의 그 수작을.”
“웬만하면 험하게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지금 진정으로 너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니까 말이야.”
“뭔지나 한번 들어 보자고.”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 봐. 너는 초능력에 대한 엄청난 잠재력을 가지고 있어. 마치 얼음판 밑의 거대한 호수처럼 말이지.”
“그건 또 무슨 헛소리지?”
“아니, 아니. 헛소리가 아니야.”
클라인은 오른손 검지를 까딱거린다.
“내게는 내 본래의 능력 말고도 또 하나의 능력이 있지. 그건 바로 어떤 사람의 잠재된 초능력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야. 지금의 너는, 분명 아무 능력도 없지. 하지만 조금만 더 하면, 너는, 초능력에 각성할 수 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시절부터, 내 주변에는 초능력자나 초능력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이 끼게 되더군.”
클라인의 말투는, 세훈이 전에 들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차분하고, 진지해진다.
“나는 두려움을 느꼈지. 내 주변에 모여드는 초능력자나, 초능력의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언제든 나를 공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그래서 내린 결론은, 위험한 사람들은, 나의 편으로 끌어들이거나, 그 재능에 눈뜨기 전에 처리하는 것, 이 두 가지였다.”
“그렇다면 앤드루도 혹시...”
“맞아. 앤드루 카슨 역시, 재능이 있었지. 그래서, 적당히 명분을 붙여서 내 앞으로 데려왔지. 애석하게도, 그 녀석의 판단은 현명하지 못했어. 초능력도 발현하지 못했고, 또 자신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지.”
“네놈...”
세훈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게, 그러나 지금까지 나온 적 없는 깊은 곳에서부터 나온다. 눈빛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뜨거운 열기가, 세훈의 온몸을 강하게 사로잡는다.
“앤드루와 비교해 보면 말이지, 지금 너는 확실히 내가 바라는 방향으로 된 것 같군. 투쟁심, 그리고 역경의 극복은 초능력의 발현에 있어 중요한 요소 중 하나지. 바로 지금, 여러 관문을 넘어 여기까지 온 네게, 나는 강한 동질감, 그리고 한편으로는 경외감까지 느끼고 있다.”
조용히 분노에 휩싸인 세훈과는 정반대로, 클라인은 점점 더 어조가 부드러워진다. 세훈은 황당해하면서도, 클라인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다.
“하지만 너는 아직 부족하다. 갈고 닦이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라는 것들이 느껴진다. 내 밑으로 와라. 내 밑으로 오면, 네 재능은 최고의 상태로 단련될 수 있을 것이고, 또 내 바로 밑에서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자, 선택은 네 몫이다. 현명한 선택을 바란다.”
“답을 할 때가 됐나 보군.”
세훈은 천천히 입을 연다. 주위를 천천히 둘러본다. 칠흑 같은 깊은 숲속. 보이는 건 바로 앞에 선 클라인과, 시야를 꽉 메워 버린 나무들뿐. 그나마도 칠흑같은 어둠 때문에 실루엣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나무들 뒤에 클라인의 패거리가 숨어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 그걸 빼면, 주변은 완전한 암흑뿐이다...
세훈은 양손의 주먹을 꽉 쥐고, 한 마디 한 마디, 또박또박 말한다.?
“나의 답은 하나다. 네가 내게 뭘 바라고 있든, 나는 결코 네게 무릎을 꿇지 않아. 네 밑으로 들어가는 일도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나도 답은 하나다. 지금, 여기서 너를 처리할 수밖에 없다!“
클라인은 단호한 어조로 말하고는, 팔을 뻗어 오른손을 어깨높이까지 든다. 세훈은 꿀꺽하고 침을 삼키고는, 숨을 들이쉬었다 내쉰다. 저건 분명... 뭔가를 하려고 하는 자세인데... 하지만 클라인은 능력을 보여 줄 때, 동작을 취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그 순간, 탤리의 말이 떠오른다. 설마... 저게, 저게 바로 그 클라인이 보여 준 적 없는 능력이라는 건가? 이상한 느낌이 세훈의 뺨을 스친다. 위험하다... 세훈은 직감한다. 아니, 세훈의 본능적인 감각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다! 세훈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날린다.
바로 그 다음 순간!
텅-
날카롭게 공기를 가르는 음이 들린다. 세훈의 약 5m 옆에서! 땅바닥에 엎드린 세훈의 옆에, 공기 중에, 뭔가 보인다. 희미하게, 뭔가가 공기를 날카롭게 칼로 자른 듯한, 푸르스름한 연기 같은 것이.
”잘 피했군... 이걸 피할 수 있다니, 역시 재능이 있어.“
클라인의 목소리가, 푸르스름한 연기가 난 곳에서 들려 온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너의 그 질긴 운도, 여기서 끝나게 된다!“
클라인의 말이 끝난 순간, 어느새, 세훈은 클라인의 바로 앞에 와 있다. 그리고 세훈이 고개를 들려는 바로 그 때...
텅-
시어하트어택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19-04-10 21:35:39

절체절명의 상황이군요. 게다가 세훈은 어떻게든지 클라인과의 결전을 치루어야 하는 것이고...

궁지에 몰리면 초인적인 힘이 생기는 법이죠. 그래서 손자병법에서도 궁지에 몰린 적을 완전히 포위하여 섬멸하려 들다가는 오히려 역습으로 큰 피해를 입을 수 있다고 경계하기도 하고, 죽을 위기에 못할 것도 없는 게 인지상정인 법인 터라 세훈은 자신도 몰랐던 그 "능력" 을 이 기회에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형태로 활성화시킬지도 모르겠어요.


세훈의 분노에서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의 쿠죠 죠타로가 디오와의 일전에서 한 말이 생각나고 있어요.

"넌 나를 화나게 했다."

SiteOwner

2019-04-13 23:54:45

그러고 보니 지금 또한 토요일 오후입니다.

사실 10분 미만 남았고 곧 일요일로 바뀌어 갈테지만...


참 험악한 상황이군요.

학생 생활 때 발생가능성이 높은 폭력도 충분히 위험하고 그 후유증이 큰데, 미지의 초능력이 개입한다면 그 결과는 더욱 끔찍할 게 뻔합니다. 그리고 상대를 얕보게 되면 그 결과는 배드엔딩 확정이겠지요.

어떻게 될지가 궁금해집니다. 다음 회차가 기다려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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