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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9시 5분. 그러니까 체베르 행성 볼루의 시간으로는 오후 1시 5분쯤. 길이 20m 정도 되는 우주선 한 대가 볼루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다. 새벽의 빛을 받아 빛나는 그 우주선은 마치 지상에 강림한 신이라도 되는 듯, 얇게 낀 구름을 뚫고, 천천히 에다드 델 오로 컴퍼니의 착륙장에 내려앉는다. 햇빛을 받은 우주선의 옆면에는, ‘CUSTOMS’라는 글씨가 드러난다.
“분명 여기에 있단 말이지...”
“이곳 말인가요?”
“맞아, 발레리. 여기에 우리가 쫓는 밀수 혐의자가 왔는데...”
우주선에서 내리는 세 사람 중 가장 앞에 선 사람은 바로 미터마이어. 그 뒤로 그의 후배 직원 두 명이 따라 내린다.
“저기 보이네요. 얼리버드 호였죠?”
“맞아. 등록되어 있기로는 연구선으로 되어 있는데, 실상은 밀수선이야.”
“어? 잠깐만...”
“왜 그래?”
“얼리버드 호는 저기 있는 다른 우주선으로 나오는데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미터마이어는 AI폰으로 후배가 지목한 우주선을 스캔한 다음 우주선 등록 정보를 본다. 과연, 아무리 봐도 다른 우주선이 얼리버드 호로 되어 있다. 분명히, 얼리버드 호는 바로 앞에 마주보고 있는 우주선일 텐데...
“이상하다. 분명 저 우주선하고는 미묘하게 다르게 생겼는데.”
“주임님. 분명 저게 얼리버드 호 아니었나요?”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얼리버드 호는 우리의 눈앞에 있단 말이야. 내가 직접 저 안에 들어가서 확인까지 하고 나왔다니까?”
“그렇다면, 직접 들어가 보죠.”
후배 중 한 명이 앞장서서 마주보고 서 있는 얼리버드 호로 가까이 다가간다.
“어... 잠깐만요.”
“왜?”
“이거... 뭔가 잘못됐는데요.”
그는 계단을 오르려다 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는 미터마이어를 보고 말한다.
“뭐가?”
“우주선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환각을 보고 있었다고요.”
“뭐... 뭐야?”
미터마이어는 그 후배를 따라 ‘얼리버드 호’의 계단으로 올라가려 한다. 과연, 발은 공중에서 헛돈다. 그 환영의 안으로 들어가 본다. 우주선이 있어야 할 곳에는 형형색색의 연기가 피어 올라오고 있다. 그 색색의 연기 너머로 새벽 태양이 훤히 비춘다.
“하, 또 놓쳤군. 이런 수를 쓸 거라는 건 어느 정도 예상은 했는데 말이야...”
한편, 얼리버드 호는 체베르 행성 바깥 소행성대에서 한 소행성의 궤도를 정지 운항 중이다.?
“하... 수리 비용은 또 얼마나 나오려나...”
수민은 호렌, 아이샤와 함께 화물칸의 녹아내린 부위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손상이 많이 심한데. 네가 그 밀러라는 녀석을 빨리 발견하기를 잘 했어.”
“당연히 내 할 일을 한 거지. 그것보다도, 네 능력 덕분에 미터마이어를 따돌릴 수 있었어. 네가 아무리 하찮은 능력이라고 해도, 다 쓸모가 있는 법이야.”
수민은 호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다.
”그런데 말이야... 이 정도면 목적지까지 잘 갈 수 있으려나...”
“아무래도 한 번 어디 들러서 수리하고 가야 할 것 같은데.”
“계획에 좀 차질이 생기겠네. 좀 빨리 끝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수민은 한숨을 푹 내쉬며 다시 조종석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호렌과 아이샤가 수민을 뒤따라 올라간다. 복도를 걷던 중, 수민은 호렌과 아이샤를 뒤돌아보며 말한다.
“그런데, 아까 홀로그램에 왜 에러가 뜬 거지? 여태껏 우주선 전체 보기 홀로그램에 에러가 뜬 적이 없었는데.”
“아, 그건 내가 잠깐 바꾼 거야.”
아이샤가 태연스럽게 말한다.
“아니, 뭐라고? 바꿨다니?”
“이카로스 호하고 다이달로스 호를 해킹했지. 얼리버드 호는 다이달로스 호로, 다이달로스 호는 이카로스 호로, 이카로스 호는 얼리버드 호로 정보를 바꿨어. 아마 오늘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과연... 메스키타 너는 정말이지 뭐라도 큰일을 낼 것 같다.”
호렌은 처음에 비해서는 많이 풀린 얼굴이지만, 여전히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아이샤를 보며 빈정거린다.
“아마도 엄청난 걸 훔치겠지. 안 그래?”
“그건 네가 어떻게 생각하든 자유지.”
호렌과 아이샤는 또다시 서로를 잡아먹을 듯, 잠시 서로를 노려본다. 보다 못한 수민이 둘의 가운데에 서서 걷는다. 둘 사이를 걷는 수민은, 마치 한쪽은 냉탕에, 한쪽은 온탕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가 복잡해지고, 한숨이 절로 나온다. 베라네 하나 거래한다고, 하루도 안 되었는데 마치 일주일 내내 롤러코스터를 탄 듯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이런 일들을 겪어야 할지... 하지만 수민 자신이 돈 좀 벌자고 선택한 일이기에 누구한테 뭐라고 할 수도 없고... 머리 안을 펜으로 마구 긁어 버리는 듯하다. 일단은 화제를 조금 다른 데로 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건 그렇고, 중간에 어디라도 들러야 할 것 같은데...”
수민은 호렌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가,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온몸이 돌이 되어 버린 듯하고, 이마의 땀은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민의 눈앞에, 매우 흐릿흐릿하고 희멀건, 보기만 해도 기분 나쁜 점액 덩어리가 보인다. 호렌은 온데간데 없고, 그가 있던 자리 근처의 벽에 그 덩어리가 붙어 있는 것이다. 수민은 그 점액 덩어리 앞으로 가까이 간다. 한 발 한 발 옮길 때마다 기분 나쁜, 목 안에서부터의 구역질이 자꾸만 밀려온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알아야만 한다. 점액 덩어리 앞에 선 수민은 자세히 살펴본다. 덩어리 위쪽에 뭔가 보인다. 얼굴이다! 익숙한 얼굴이다. 호렌의 얼굴이다! 눈, 코, 입, 그리고 머리의 형태까지 그가 확실하다. 하지만 호렌은 형태만 남긴 채 희멀건 덩어리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덩어리는 꾸물거리고 있다. 끊임없이 몸부림치고 있다!?
“호렌! 괜찮아?”
“......”
호렌은 뭔가 말을 해 보려 하지만, 그의 입에서는 말 대신 희멀건 젤리 같은 것만 계속해서 나올 뿐이다. 흐느적거리는 그의 손과 발은 말하고 있다. 이곳은 위험하다! 어서 여기를 피해라! 수민은 그것을 이해하지만, 쉽게 발을 떼지는 못한다. 그래도 구해야 하는데...
수민의 손을 누군가 잡아끈다. 분명 아이샤일 것이다. 잡아끄는 손이 꽤 억세다. 안 그렇게 생겼는데...?
“벽에서 떨어져!”
“하... 깜짝 놀랐잖아. 그런데... 넌 무사하네?”
“당연하지. 방금 전에 당할 뻔했으니까.”
“뭐...? 어떻게?”
“내가 네 옆에 걸으면서 잠깐 벽에 닿을 뻔했는데, 순간 뭔가 이상한 감촉이 오더라.”
“이상한 감촉?”
“뭔가 물컹해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 있지. 뭔가 이상해서 재빨리 벽에서 몸을 피했는데, 어느 샌가 내 신발 끝이 흐물흐물해져 있더라. 조금만 방심했어도, 저렇게 호렌처럼 될 뻔했다고.”
“하... 그래?”
수민은 잠시 주변을 돌아보고 말한다.
“일단 이 능력을 쓰는 녀석이 어디 있는지부터 알아야겠어. 이 녀석을 잡아야 해! 잘못하면 우리 모두 우주 미아가 되어 버려!”
“무... 무슨 말인지 알았어.”
“빨리 카르토한테도 이 사실을 알려야 해!”
수민은 조종석 쪽으로 달려간다. 아이샤도 뒤쫓아 달린다.
“벽에 붙지 마! 좌우 잘 살피고!”
조종석까지는 의외로 순조롭다. 이제 문만 열면 되는데...
“엇!”
수민의 손에, ‘그 감각’이 느껴진다. 마치 손이 통째로 녹아내리는 듯한, 아니면 손이 젤리 통 안에 움푹 들어가 버린 듯한, 이상한 감촉! 황급히 손을 뗀다. 하지만 이미 늦은 것 같다.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이 흐물거린다... 마치 수민의 손이 아닌 다른 것이 수민의 손에 붙어 있는 듯이.
“이... 이게 도대체 무슨...”
“흐흐흐, 궁금한가 보군.”
복도 어딘가에서 기분 나쁘게 웃는, 저음의 남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의문은 머지않아 너희들이 겪으면서 저절로 풀리게 될 것이라고, 내가 장담하지.”
“너! 블랙 워크스의 잔당이냐!”
“아니, 나는 블랙 워크스가 뭔지도 모른다.”
남성의 목소리는 딱 잘라 말한다. 동시에, 수민의 앞에서 물컹거리는 뭔가가 솟아오르기 시작한다. 잠시 후 그 물컹거리는 것은 성인 남성의 크기로 커지더니,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마침내, 투박한 조끼, 청바지, 워커화 차림에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산발한, 어두운 피부에 근육질의 성인 남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건 말할 수 있지. 너희들은 저 베라네라는 물질을 내게 넘겨 주어야만 할 거다.”
이 남자... ‘베라네’를 알고 있다! 위험하다...
“이 자식, 도대체 얼마나 얼리버드 호 안에 있었던 거냐!”
“꼬박 하루였지. 어제 저녁부터 시작해서 쭉.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인내심을 품고 기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기다림은 결실을 보게 되었지.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대박’으로 가는 길이 열렸군.”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웃는다. 하루? 하루를 꼬박 기다렸단 말인가? 그렇다면 더 위험하다... 어떻게든 이 남자를 처리해야만 한다! 얼리버드 호가 어딘가에 착륙하기 전에!
“네 머릿속은 아마 이렇게 말하고 있겠지.”
남자는 수민을 보고 웃으며 말한다.
“‘이 사람, 위험하다. 빨리 없애야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유감이군. 그럴 수는 없다. 나는 이미 이 우주선의 구조를 다 파악하고 있단 말이다.”
수민은 애써 주먹을 쥐려 한다. 하지만 오른손은 주먹이 쥐어지지 않는다. 어렵게 쥔다고 해도, 반쪽이 흐물흐물하게 된 손으로는 어림도 없다... 할 수 없이 왼손으로 주먹을 쥐어 날리려는데... 수민의 주먹은 허공을 맴돈다. 남자는 이미 몸을 다시 흐물흐물하게 만든 뒤다.
“이 싸움에서 너희들의 승산은 없다. 발버둥치는 건 무의미하다!”
남자는 흐물흐물해진 채로 수민의 앞을 벗어나더니, 수민과 아이샤의 가운데로 와서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 한다.
“무의미한 짓은 그만두고...”
“과연 그럴까?”
아이샤가 남자 쪽으로 달려온다. 그녀의 그림자가, 아이샤보다 먼저 남자에게 달려온다. 흐물흐물해진 남자가 아이샤를 향해 몸을 돌리지만, 그것도 잠시, 아이샤의 그림자가 남자에게 닿는다.
“이... 이런!”
흐물흐물해진 남자가 미처 원래대로 돌아가기도 전, 남자는 순식간에 아이샤의 그림자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 한숨 돌렸군. 고마워.”
수민은 왼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아이샤를 보고 고마움을 표한다. 하지만 그 안도도 잠시, 수민의 오른손은 여전히 흐물거린다. 게다가, 얼핏 보기에, 아이샤의 다리도 흐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수민은 눈을 비빈다. 설마, 내가 잘못 본 것인가?
“너... 그런데... 다리가...”
“응? 다리가 왜?”
“아... 아니야. 잘못 본 건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19-09-11 12:35:24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더라도, 작정하고 위조해 놓은 데이터로는 절대로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죠. 현실세계의 선박의 편의치적, 즉 파나마, 라이베리아, 온두라스 등의 제3국에 선박을 등록하여 절세를 노리는 합법적인 방법조차도 여러모로 비판을 많이 받고 해난사고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재판관할권 문제가 발생하는데 저렇게 대놓고 우주선의 등록사항과 실제가 다른 건 절대 좋은 목적으로 쓰일 리가 없죠.
삽화에 나온 상황은 진짜 끔찍하네요. 분명 지금 더운 날씨가 맞는데 한기가 느껴져요.
정말 산 너머 산이네요.
SiteOwner
2019-09-12 14:49:42
밖에 비가 와서 살짝 추운데, 이것을 읽고 있으니까 한기가 확 밀려드는 것 같습니다.
특히 호렌이 당한 끔찍한 몰골의 묘사와 삽화는 할 말을 잃어버리게 만들 지경입니다. 사실 입술과 눈꺼풀 주변이 격하게 떨릴 정도로 징그럽습니다.
게다가 수민의 오른손도, 아이샤의 다리도 흐물거린다니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군요.
그나저나 전회에 열로 손상된 부분이 벌크헤드(Bulkhead), 즉 선체의 세로격벽 부분이라면 정말 골치아프게 됩니다. 여기가 깨지면 압력유지를 못해서 기압이 다른 곳을 출입하다가 선체가 확 뜯어져 나가 버립니다. 중정비를 안 받으면 안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