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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카디널 호텔 1212호실. 카르토는 막 문을 열고 자기 방 안에 들어간 참이다. 호텔 키를 꽂자, 어두웠던 방 안에 은은한 조명이 깔린다. 침실은 완전히 그의 취향이다. 잘 펴진 흰 이불에, 추상적인 무늬의 벽지로 장식된 벽, 그리고 베란다를 통해 내려다보이는 야경까지... 그냥 호텔에서 보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매력적인 풍경이지만, 이동식 주택과 우주선에서만 자다가 오랜만에 호텔에서 자게 된 카르토에게는 더욱더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없다.
파자마를 입고 침대에 앉으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난다. 벌써 30년은 된 일이지만, 카르토는 그 사건이 마치 바로 어젯밤에 일어난 일인 듯, 뚜렷이 기억하고 있다. 카르토의 기억 한편에 트라우마로 남아 있고, 카르토가 이후 발현한 공간 능력에까지 영향을 주었던, 바로 그 일이다. 밤이었다. 그것도 한밤중이었다. 그때는 아직 본격적으로 밀무역에 손대기 전이었지만, 귀금속이나 사치품 운반을 주로 했기 때문에 조금조금씩 밀무역의 간을 보고 있던 때였다. 그날은 한 호텔에 묵었는데, 날따라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날은 장사하러 이곳저곳 다녀서 그런지 매우 피곤했는데도 그랬다. 잠자리에 든 지 3시간이 넘었는데도, 잠은 마치 손을 뻗어도 닿지 않는 저 너머에 있는 것처럼, 도무지 오지를 않았다. 방의 불을 완전히 껐지만, 어딘가에서 들어오는 빛처럼 말이다.
밤의 한가운데서, 그는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 그가 이제껏 본 것 중 가장 공포스러운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가, 그의 방 한구석에서 칼을 빼 들고 서 있었다! 방문은 모조리 잠겨 있었고, 빠져나갈 곳도 없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입으로 나오려는 비명을 틀어쥔 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생각만 하고 있자면, 카르토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보며 한참 웃고 떠들 때라도 바로 식은땀이 흐를 정도로, 그것은 깊은 곳에 새겨져 있는 기억이다. 카르토는 고개를 젓는다. 그런 일은 없겠지... 그때는 그때일 뿐이다. 애써 머리에서 그 기억을 떨쳐낸 후, 흐뭇한 표정으로 침대에 눕는다.
“음?”
이상한 직감이 든다. 누우니까 갑자기 따뜻해진다. 김 같은 것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듯하다. 도대체, 이 불길한 느낌은 무엇이란 말인가? 카르토는 문득 침대 오른쪽을 돌아본다. 순간, 숨이 탁 막힌다. 비명을 지르고 싶다. 하지만 입에서 그것이 나오지 않는다!
“으... 으...”
“용케도 알아냈군.”
침대 옆 바닥에, 얼굴을 복면으로 가린 누군가가, 마치 바닥의 일부인 것처럼, 밀착해서 숨어 있다. 카르토를 보자, 그는 또다시 침대 밑으로 숨어 버린다.
“카르토 라겐 라스, 맞지?”
카르토는 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다. 어디로 간 것인가, 그 복면의 남자는? 그나저나, 또 복면이라니!
“베라네가 어디 있는지를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놈이 이 방에서 빠져나갈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그...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지?”
카르토는 공포로 인해 목소리가 잘 안 나오는 와중에도, 애써 목소리를 높여 보려 한다. 그건 그렇고, 베라네를 운반하고 있는 걸 알고 있다니? 카르토의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나머지 3명의 이름도 알고 있다는 말인데...
“네... 네놈, 도대체 정체가 뭐냐! 내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를... 모를 텐데!”
카르토는 벽에 오른손을 댄다. 곧 빛줄기가 나오기 시작하더니, 암청색의 공간이 입을 벌리기 시작한다...
바로 다음 순간, 카르토의 시야가 갑자기 흔들린다. 천장이 보이고, 몸이 붕 뜬다는 느낌을 받는다. 곧이어 쿵- 하는 소리, 그리고 등으로부터 퍼지는 통증.
“네놈이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든 상관없어. 더 고통이 밀려오기 전에 빨리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이 방에서 절대 살아서 나갈 수 없다.”?
그 남자가, 카르토의 앞에 선다. 그림자가 카르토 앞으로 덮쳐오자, 카르토는 몸이 쑤셔오는 것도 잊은 채, 재빨리 일어선다. 그런데... 복면의 남자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에도!
“어디 있는 거냐, 네 녀석! 무슨 수작을 쓴 거냐! 이것이... 이것이 네 능력이냐!”
“아니, 이건 내 슈트의 효과일 뿐이다.”
남자의 말과 동시에, 그 남자의 윤곽이 잠시 바람에 스치듯, 나타났다가 다시 바람에 불려 가듯 사라진다.
“네놈이 내 얼굴을 볼 일은, 아마 없겠지!”
카르토는 다시 주위를 돌아본다. 안 보인다... 아무데도. 남자의 모습은 다시, 방 안의 풍경에 동화되어 사라진 것이다. 어디인가? 어디에서 오는 건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저 눈을 있는 대로 부릅뜨고, 귀를 세우고, 피부에 닿는 공기의 흐름을 살필 뿐이다. 잠시 후, 공기가 어디서 갈라지는 것 같은데...
퍽-
뒤통수다... 뒤통수에 강렬한 충격이 전해져 온다. 카르토의 몸이 균형을 잃고 앞으로 넘어진다. 겨우 바닥에 손을 짚는다. 남자의 기척이 온다. 하지만 어디서 오는지는 아직 감을 못 잡겠다.
“어느 종족이건, 그 공포의 정도가 크든 작든,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아. 평온함 한쪽에 마치 도둑처럼 넙죽 엎드리고 숨은 공포에 대한 두려움은 말이야. 지금 네 녀석도 그렇겠지? 카르토 라겐 라스.”
그 남자의 목소리가 가까워진다.
“자, 내 칼에 죽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무릎을 꿇고, 모든 것을 말하는 게 좋을 거다. 자, 어떻게 할 건가?”
“카... 칼이라고?”
“그렇다. 못 믿겠는 건가?”
어디선가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다! 진짜 칼이다. 그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카르토의 바로 앞에서 들린다. 하지만, 이건 기회다! 카르토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소리가 들린 곳... 그곳이다!
퍽-
카르토가 땅바닥에 넘어진 상태에서 내지른 발차기... 뭔가가 닿았다. 그리고 뒤로 밀려났다. 그건 확실하다! 동시에, 침대 맞은편의 서랍장에 뭔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거기 있었군.”
카르토는 몸을 일으켜서 서랍장 쪽을 보고 말한다.
“네놈이 그 슈트로 몸을 숨기든 말든, 상관없다. 시각을 이용하지 못하면, 다른 감각을 이용하면 된다. 그건 그렇고, 이제 ‘게임 체인지’가 되겠군. 이제는 네놈이 모조리 말할 차례다. 네놈이 어디서 왔는지, 그리고 목적은 무엇인지를!”
“흐흐흐... 그걸 순순히 말해 주면 쓰나?”
남자는 오히려 카르토를 협박하는 듯, 실실 웃으며 말한다.
“네가 정 말하지 못하겠다면, 내 동료들에게 연락하는 방법도 있지.”
“흐흐흐, 그건 안 된다. 이 안에서 외부와의 통신은, 불가능하다.”
레드 카디널 호텔 2817호실. 수민은 화장실에 들어가 있고, 밖이 내려다보이는 침실에는 아이샤 혼자 있다. 아이샤는 TV를 틀어 놓은 채로, 호텔에서 내려다보이는 야경에 넋을 놓고 있다.?
♬♪♩♬♪♩♬♪♩
호텔 전화다. 찍혀 있는 번호를 보니, 2203호실이다. 호렌이 묵고 있는 방인데... 아이샤는 얼른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메스키타지.”
“어... 맞는데.”
“김수민 좀 바꿔 줘.”
“지금 샤워하고 있는데.”
“하... 너하고는 이야기하지 않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네.”
호렌은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숨을 섞어 가며 말한다.
“용건이 뭔데.”
“아, 본론만 이야기할게. 지금, 카르토의 방이 연락이 안 돼.”
호렌의 목소리는 가라앉는다. 아이샤는 순간, 자신에게 그렇게 성질을 부렸던 호렌이 맞나 싶어 고개를 갸우뚱한다.
“연락이 안 된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내일 어디 갈까 물어보려고, 우선 카르토한테 전화해 봤는데, 통화 연결음만 들리고 안 받아. 호텔 전화도 해 보고, AI폰으로도 연락해 봤는데, 모두 연결이 안 돼.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런 거지?”
“글쎄... 어쩌면 내가 연결을 해 보면 될지도 모르겠는데...”
아이샤는 자기 가방 안에서 태블릿을 하나 꺼낸다.
“잠깐만 기다려 봐.”
“뭘 하려고?”
“호텔 보안 시스템에 들어가 볼 거야.”
아이샤는 태블릿을 켜고, 호텔 전화기 옆에 연결한 다음, 이것저것 뭔가를 조작한다. 화면에 호텔의 전개도가 나타나고, 붉은 선과 푸른 선으로 내부 통신망 연결도가 나타난다. 그렇게 약 1분 정도가 지난 후.
“누군가가 1212호실의 연결을 끊어 놨어.”
“그게 무슨 말이야?”
호렌의 목소리에 또다시 의심이 섞여 들어가기 시작한다.
“마치 1212호실만 원래부터 전화나 인터넷 같은 망이 설치가 안 된 것처럼, 그렇게 단절되어 있다고.”
“못 믿겠는데. 네가 하는 말은 항상 어딘가가 좀 숨기는 것 같단 말이지.”
그때, 수민이 문을 열고 가운 차림으로 화장실에서 나온다.
“아이샤, 이제 들어가도...”
아이샤가 수민을 보고 오라는 손짓을 한다.
“무슨 일이야? 누군데?”
수민은 아이샤에게서 전화를 받아든다.
“아, 호렌. 무슨 일이야?”
“카르토가 연락이 안 돼.”
“도대체 그게 무슨...”
“내가 확인해 봤는데, 1212호실만 연결이 끊겨 있어. 호텔 전화도, AI폰도, 다!”
아이샤가 수민의 말을 끊고 말한다.
“내가 호텔 보안망까지 뒤져서 확인해 봤다고. 확실한데 왜 호렌은 내 말을 안 믿고...”
“아니, 호텔 전화는 그렇다 쳐도, AI폰까지 연결이 안 된다니?”
“내 사적인 생각이지만, 아마 우리 모두 타겟이 된 것 같아.”
“타겟? 어제 블랙 워크스처럼?”
“카르토가 그 첫 번째가 된 거고.”
아이샤의 말을 듣자 수민은 다시 전화를 들고 말한다.
“호렌.”
“왜?”
“우리 모두 12층에 가 보자. 카르토의 신변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아.”
한편, 1212호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외부와의 통신이 안 된다니?”
“그 말대로다. 외부의 전화나 통신은 여기로 들어올 수 없고, 여기서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을 연결하려 해도 접속은 불가능하지.”
“이것이 네 능력이냐! 좋다, 깨부수어 주지!”
카르토는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말한다. 그것은 확신이 담긴 목소리다. 수수께끼가 이렇게 쉽게 풀릴 줄은...
“아니.”
남자는 비웃음이 강하게 배어 나오는 목소리로, 딱 잘라 말한다.
“사실, 내게는 초능력은 없다. 그런 고로, 나를 쓰러트렸다고 해도 통신 불능을 해제하는 건 불가능하다. 네놈은 여기에 꼼짝없이 고립되었다.”
“무슨 소리냐? 네놈을 쓰러뜨리고, 문을 열고 나가면 그만이란 말이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녀석이군.”
그의 목소리가 다시 카르토의 머리 높이에서 들린다. 방 안의 정경으로 위장하고 있어 보이지는 않지만, 일어선 것이 분명하다. 카르토는 주먹을 꽉 쥔다.
“이 방의 문은 밖에서 잠갔다. 어떤 도움조차도 요청할 수 없다. 또, 네놈이 능력을 쓸 때조차도, 내가 다 잡아낼 수 있다!”
카르토의 배에 충격이 가해지더니, 몸이 또다시 붕 뜬다. 다음 순간, 침대와 테이블 사이에, 카르토가 처박혀 있다. 카르토의 등과 허리가 쑤셔온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19-09-23 17:01:24
예전에 언급했던 야곱이 신으로부터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받게 된 계기인 야곱과 알 수 없는 존재와의 싸움, 이에 더해 죠죠의 기묘한 모험 3부에서 쟝 피에르 폴나레프가 호텔 객실에서 저주의 데보로부터 습격받은 사건이 같이 생각나서 다시금 무서워지고 있어요. 지금 따뜻한 음료를 마시고는 있지만 몸이 그다지 따뜻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있고...
절대적으로 안락해야 할 공간이 싸움판이 된 것도 무서운데, 카르토의 객실만 모든 유무선 통신이 차단된 격리된 공간이 된 것은 역시 현실이 아니라서 다행이예요.
아무리 주변 경관과 동화된 듯 위장했다 해도 적이 자신의 몸까지는 숨긴 것은 아니니까, 다른 감각을 이용해서 그의 위치를 측정하면 되는 것이죠. 카르토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 줬어요.
SiteOwner
2019-09-24 23:11:29
12년 전에 꿈에서 비슷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꿈이라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데 저게 현실로 일어난다면 정말 싫겠습니다. 문제는 저 상황이 카르토에게는 현실이라는 것이고, 어떻게든 싸워서 이겨야 상황을 해소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생면부지의 상대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섬뜩합니다. 수년 전에 가끔 오던 스팸전화에서, 육성이든 합성음이든 저의 이름을 말하는 것 자체가 싫었는데 그 느낌이 되살아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