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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은 기가 차서 주리에게 따지듯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제 알겠냐’니.”
“나는 저번에 벌써 짐작했는데.”
“저번이라니? 언제?”
“너 저번에도 물컵 손으로 쳐서 떨어트릴 뻔한 적 있지?”
그러고 보니, 세훈은 생각났다. 처음 이 식당에 왔던 때를. 학원 오리엔테이션 다음 첫 번째 수업이 끝나고 주리, 미셸, 디아나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때도, 세훈은 실수로 책상 가장자리에 놓인 물컵을 손으로 건드려 떨어트리려고 했다. 그때도 그 종업원이...
“아... 알겠다!”
세훈은 오래된 수수께끼가 풀린 듯 손뼉을 친다. 자신이 왜 이리도 둔감한지 한심할 따름이다.
“나도 그거 딱 보고 짐작이 갔는데.”
가만히 듣고 있던 서언도 주리에게 맞장구를 쳐 준다.
“아니, 형은 또 어떻게 알았어?”
“말했잖아? 가족 중에 초능력자 있다고. 이런 건 아주는 아니어도 좀 쉽게 짐작이 가더라.”
하긴, 같이 살지는 않아도 초능력자가 가족이면 좀 더 쉽게 알 수 있겠지... 그런데, 주리는 초능력자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초능력과는 메이링 말고는 그 어떤 연관점도 없을 텐데, 왜 그렇게도 쉽게 알아냈는가는 별론으로 치더라도.
식사를 다 하고, 어느덧 시간을 보니 6시 30분이 다 되어 가고 있다. 세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한 다음 식당을 나선다. 밖은 이제 꽤 어둑어둑해졌다. 세 사람은 지하철역 쪽으로 향한다. 역시 이 시간쯤 되면 거리에 사람들이 많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강의실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선 학생들... 한창 가고 있는데, 세훈의 옆에서 가던 주리가 보이지 않는다.
“어? 주리 어디 갔어?”
“주리? 1분쯤 전에 옆 골목길 쪽으로 가던데.”
“골목길이라고? 형 확실히 본 거야?”
서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왜 나만 못 본 거지? 주리는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세훈은 서언에게 따지지만, 서언은 말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다. 뭐지? 이 웃음의 의미는? 설마 자기도 모른다는 건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는데 세훈에게는 안 가르쳐 주겠다는 뜻인가? 의미를 알 수 없는 서언의 웃음에 서언은 한동안 고개를 갸웃거린다.
부웅- 부웅-
오토바이의 엔진 소리가 뒤에서 울린다. 뒤돌아보니, 검은색과 은색 위주의 오토바이에 한 여학생이 헬멧을 쓰고 있는데, 짙은 보라색 교복을 입고 있다. 다름 아닌, 미린고 교복이다. 설마...? 아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잠시 후, 여학생이 헬멧을 벗는다. 헬멧을 벗자 드러난 얼굴은, 다름 아닌 주리다.
“어? 너... 너 오토바이도 타냐?”
서언과 세훈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한목소리로 말한다. 세훈은 오토바이를 탄 주리의 모습이 신기한지 위아래로 시선을 옮겨가면서도 오토바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한 3개월쯤 된 것 같네...”
주리가 입을 뗀다.
“자전거 타는 것처럼 타더니 금방 늘더라.”
“너... 너 이런 거 타고 다니는데...”
세훈은 충격이 상당했는지 더듬거리며 말한다.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셔?”
“걱정은 무슨. 안전장비 확실히 하고, 법 잘 지켜 가면서 타고 있으니까 걱정은 붙들어 매.”
“그... 그래. 스스로 조심해서 타고 있다니 다... 다행이네.”
세훈은 아직도 더듬거리며 말한다.
“그런...데 이제 집으로 가?”
“응. 여기서 멀지 않으니까 금방 가겠지.”
“그...그래? 그러면 내일 보자고.”
주리도 세훈에게 인사를 하고 떠나려는데...
“어? 잠깐만.”
“왜 그래? 또.”
세훈이 전방을 가리키자 주리와 서언은 세훈이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돌린다.
“어... 저 사람은 누구야?”
서언이 앞에 걸어오는 세 사람 중 왼쪽 사람을 보며 묻는다.
“메이링 씨잖아. 서언이 형 고모 친구, 변호사, 몰라?”
“저... 정말? 그런데 왜 정장을 안 입고 저렇게 티셔츠하고 조끼하고 핫팬츠를 입고 있는 거야?”
“법정에 나갈 때 말고는 늘 저렇게 다닌다나.”
“그건 그렇고 옆에 걸어오는 사람들 말이야....”
서언은 메이링 옆에서 걸어오는 두 사람을 보며 말한다. 모두 여자인데, 한 명은 중학생 정도로 보이고, 또 한 명은 메이링보다 좀 더 큰 키다.
“키 작은 애는, 메이링 씨 조카인가?”
“조카? 아닌데. 메이링 씨 조카들은 커봤자 아직 유치원생이던데. 잠깐만...”
주리가 메이링 옆에 있는 여학생을 자세히 보니 푸른빛 긴 생머리를 하고 있다. 잠깐... 저 머리는?
“어? 메이링 씨, 레아하고 아는 사이인가?”
“레아? 레아는 또 누구인데?”
“아... 서언이 형은 모르겠구나. 며칠 전에 알게 된 우리 학교 후배인데...”
“일단 소개는 좀 있다가 하고, 인사부터 하자.”
서언은 메이링을 보고는 큰 소리로 인사한다.
“아, 안녕하세요!”
“누... 누구니? 아... 너 서언이 맞지. 그래, 오랜만이다. 너희 고모, 요즘 많이 바쁘지?”
“아, 그렇죠. 지금은 논문 쓰고, 또 학회도 참석하고 하느라고 말도 아니에요.”
“응? 논문? 형네 고모는 무슨 논문을 써?”
“아, 우리 고모는 지금 대학원생이거든. 그것도 경제학 석사과정이라서 할 게 산더미지.”
“저, 메이링 씨...”
주리가 끼어든다.
“저... 혹시... 레아하고는 아는 사이인가요?”
“아, 레아? 전부터 아는 사이였는데...”
세훈과 주리는 혹시나 해서 레아에게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아, 저는 미레이 씨와 볼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해요,”
레아가 재빨리 대답한다.
“미레이 씨라니?”
레아는 뭔지 모를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메이링을 가리킨다.
“메이링 씨, 방금 레아의 웃음은 무슨 뜻이죠?”
“아, 자세한 건 차차 알려 줄게.”
세훈은 메이링과 레아를 번갈아 보다가, 갈색 머리의 흰 캐주얼복을 입은 여성에게 눈길이 간다. 처음 보는 사람 같은데, 누구란 말인가?
“참, 그런데 이 분은...”
“차차 알게 될 거야. 그럼 또 보자!”
메이링은 인사를 하자마자, 레아, 그리고 이름 모를 여성과 함께 갈 길을 간다. 서언이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건 몰랐는데. 메이링 씨, 미레이라는 이름도 썼나?”
주리는 다시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나 그럼 이제 가 볼 게. 그럼 내일 또...”
“잠깐.”
세훈이 어딘가를 가리킨다. 세훈과 주리의 눈에 낯익은 남학생이, 의기양양하게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것도 남녀 학생들을 양옆에 여러 명 끼고. 갈색 머리에 약간은 험상궂게 보이는 얼굴. 알았다. 누군지.
“그... 그 남학생 아니었나? 클라인하고 같이 다니던...”
“맞는 것 같은데. 우리 옆의 F반이었지, 아마?”
“저런 인간들은 저렇게 자기 세를 과시하지 못해 안달이라니까. 그래서 꼭 끼리끼리 모여 다니지. 몇 년 전에도 저런 녀석들이 많았는데...”
패거리를 보는 서언의 표정은 냉소적이다. 하지만 주리는 뭔가 다른 걸 본 모양이다.
“그런데 저 남학생을 따라다니는 애들 말이야... 왜 저렇게 눈이 이상하지?”
“아니, 뭐가?”
“내가 잘못 봤나. 어쨌든 눈이 좀 이상해 보여.”
“기분 탓이겠지.”
“그런가...”
주리는 헬멧을 꼭 눌러 쓴다.
“그럼 나 정말로 간다. 내일 또 보자.”
주리는 오토바이에 시동을 건다. 오토바이는 금세 도로 저편으로 사라진다. 서언과 세훈은 오토바이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는, 길을 계속 걷는다. 말로는 신경을 안 쓴다고 했지만, 갈색 머리의 그 남학생이 계속 신경 쓰인다. 그 남학생 쪽을 한번 슬쩍 바라본다. 아니나 다를까, 그 남학생이 세훈을 본 모양이다. 남학생은 미소를 짓고 있다. 한쪽 입꼬리를 기분 나쁘게 올린 그 미소는 조롱에 가깝다. 얼른 다시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척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척 계속 길을 간다. 애써 아무 일 없다는 듯 미소도 지어 보고, 얼굴에 잔뜩 힘을 넣어 보지만, 그렇다고 이미 굳어질 대로 굳어진 세훈의 얼굴은 펴지지 않는다. 점점 그 굳은 표정은 어색해져 간다.
“왜 그래?”
서언이 세훈의 얼굴을 슬쩍 보고서는 말한다.
“안 좋은 생각이라도 하고 있어?”
“아... 아무것도 아니야.”
“방금 그 남학생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구나?”
“아... 아닌데.”
“맞는 것 같은데...”
“계속 생각이 나는 걸 어떡하지.”
“서서히 잊게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럴까...”
벌써 새벽 1시다. 세훈은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저녁에 봤던 그 남학생만 생각하면 잠이 안 온다. 그 녀석 이름이 뭐였지... 분명 같은 반이었는데... 그건 그렇고, 주리가 그 남학생 뒤에 따라다니는 애들의 눈이 좀 이상하다고 했는데, 그것도 생각하면 할수록 자꾸 잠이 안 온다. 도대체, 그 녀석은 뭐지? 뭐 하는 녀석이지?
침대에서 잠깐 일어나, 창밖을 본다. 역시나, 창밖은 도시의 야경이 그대로 비친다. 잠이 더 안 온다. 창밖을 안 봤어야 할 것 같았다. 창문을 닫고 커튼으로 가려 버린다. 다시 침대에 눕는다.
“세훈 님? 세훈 님?”
아... 이건 *나라의 목소리다.
“아... 잠이 안 오시는군요.”
“그래... 잠 좀 잤으면 좋겠네.”
정신은 아까보다도 더 또렷하다. 미칠 것 같다. 이제는 여러 가지 생각이 마치 파도가 오듯 밀려온다. 이 밤을 어떻게 무사히 지낼지... 세훈은 그 걱정이 가득하다.
“지금 머릿속에 걱정이 많은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세요. 금방 잠이 오게 하는 음악을 들려 드릴 테니.”
“아... 고마워, *나라.”
잠시 후 잔잔한 바이올린 독주곡이 방안에 은은히 들린다. 조금 후, 세훈은 언제 그랬냐는 듯, 그렇게 원했던 잠이 든다. 잠시 걱정은 접어 둔 채로.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SiteOwner
2020-01-20 21:38:54
평온한 생활상 속에서도 역시 위험요소는 있기 마련입니다.
세훈이 봤던 그 문제의 남학생 및 그의 패거리는 바로 그 위험요소.
게다가 나쁜 생각을 하면 그게 알게 모르게 외견에 드러나서 인상을 험악하게 만드는 것인가 봅니다. 그것을 어떻게 인간이 판단하는지는 명확히는 설명할 수 없지만 경험적으로는 분명하고...위험에 대비하는 인간의 본능인 것인가 싶습니다.
걱정은 전혀 안 할 수도 없지만 거기에 너무 사로잡혀 있을만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합니다.
마드리갈
2020-01-20 22:36:15
일상은 정말 몇 안되는 요소만으로도 크게 변화하는 것임이 잘 드러나네요.
의외로 생활권역에 소소하게나마 초능력을 쓰는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데다 주리는 오토바이를 타는 여학생이고 메이링은 자유분방한 복장의 변호사이고...
하지만 몇몇 요소는 전혀 반갑지가 않죠. 역시 무리지어 다니는 불량학생들은 경계를 안 할 수가 없어요.
게다가, 늘 경계한다고 해도 막상 문제되는 상황이 일어났을 경우 잘 대처할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라서 그게 또 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