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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유명했던 사진 작가가 있었다. 찍는 작품마다 사람들의 찬사가 쏟아졌으며, 그의 작품을 교과서나 다른 책에 싣고 싶다는 문의도 왔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를 교수로 기용하고 싶다는 학교도 많았고, 그녀는 승승장구 할 것 같았다. 어디를 가든 그녀의 작품이 걸려 있었고, 어디를 가든 그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어디를 가든 그녀의 모델이 되고 싶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미국의 어느 유명한 배우 역시 화보를 찍는다면 그녀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과거의 영광이었다. 지금의 그녀는 어느 누구도 찾아주지 않았으니까.
어제부로 교수직에서도 물러났고, 그녀에게 남은 것은 이제 없다. 일생을 함께 해 온 카메라와 과거의 영광을 대변해 줄 트로피, 그리고 화보집 몇 권. 그것이 그녀에게 남은 전부였다.
"여보세요? 응, 나야. 다음 달 화보 안 들어가? ...그래? 알았어... "
그나마 그녀를 기용해주던 잡지사에서도 더 이상 그녀와 함께 일할 수 없다는 전화를 받았다. 더 감각이 뛰어나고 더 오랫동안 일할 것 같은 작가를 만났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녀의 활동에는 공백기가 있었다. 화보 스케줄만 하루에 몇 개씩 소화하던 그녀는 돌연 일을 잠시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을 선언했다. 주변에서는 모두들 그녀를 보고 무슨 영문인지를 물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며 그녀를 만류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일에서 잠시 한 걸음 물러나 멀리 보는 것은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서는 옳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가 일을 구만둔 후, 신예로 주목받던 사진작가가 그녀의 일을 꿰찼다. 그녀가 찍었던 화보들, 그리고 그녀가 찍었던 사진들을 신예 작가의 사진이 대신하고 있었다. 긴 공백기를 가지고 돌아온 그녀는, 그 동안 이어오던 일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새로운 일마저 시작하지 못했다.
"서 작가, 오랜만에 돌아온 김에 화보 하나만 찍자. "
"누구? "
"여배우. 이번에 잡지 화보 촬영할 거거든. "
"배우 누군데? "
"자기도 알텐데... 차혜자라고, 왜 얼마 전에 종영한 드라마에 나왔던. "
"아아... 최근 드라마에 나왔던? "
"응. 어떄, 복귀작으로 한번 해 볼까? "
"아니, 그건 좀... "
그녀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친구의 제의를 단칼에 거절했다.
"그 분은 너무 나이들었고... 나, 젊은 애들 아니면 모델 안 하는 거 알잖아. "
"정신차려, 서 작가. 너, 예전같지 않아. 자기가 공백기일 때 자리를 꿰찬 작가가 얼마나 뛰어난데. 나 지금 옛 정을 생각해서 자기한테 의뢰하는거야. 요즘 젊은 모델들, 다 그 작가 아니면 안 해. "
"...... "
"나라도 옛 정 봐서 어떻게든 해 주려고 했는데, 더 이상은 연락 못 할 것 같다. "
그녀는 오히려 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현재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를.
그렇게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지내던 그녀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대학로로 나갔다. 대학로에는 젊은 배우들도 많고, 신생 잡지사라면 그녀를 써 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거리는 그녀가 알던 것과는 매우 달랐다. 몇 년동안 해외에 나가 있던 사이, 대학로는 연극의 메카가 되었다. 거리마다 붐비는 사람들을 향해 연극의 홍보 전단을 나누어주는 젊은 청년들이 보였다.
연극 홍보지를 받은 그녀는 눈을 의심했다. 한 번도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아름다운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연극은 한번도 본 적 없었던 창작극이었고, 거기서 주인공쯤 되어 보이는 역할을 하는 듯 했다. 단언컨대, 그녀는 그녀가 지금까지 사진을 찍어 왔던 여배우들의 젊은 시절들보다도 훨씬 아름다웠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다니... 내가 없는 동안 많이 변했네. '
그녀는 전단 속 여자를 보기 위해 연극을 관람했다. 연극은 네 쌍의 커플들이 만나고, 사랑을 이루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전단 속 그녀는 그 중에서도 첫 번째 커플로 나와 연기를 했다.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얼굴이 창백했지만 그녀는 조명 탓이겠거니 했다. 조명에 창백해질 정도로 하얀 피부에, 어떠한 보석보다도 붉게 빛나는 두 눈, 그리고 곱게 빗은 하얀 머리칼까지. 그녀는 그녀가 지금까지 작품을 위해 찾고 있었던 뮤즈였다.
연극이 끝난 후, 배우들과 사진을 찍는 시간이 있었다. 그녀는 맨 마지막에 사진을 찍고, 여자에게 명함을 건네고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내가 누구인지 알면 연락이 오겠지, 그렇지 않더라도 흥미가 생긴다면 연락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며칠 후 낯선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
"저, 며칠 전에 명함을 받았는데... "
"아아, 혹시 그 때 연극 무대에 섰었던...? 아아, 기다리고 있었어요. 저는 사진작가 서혜림이라고 해요. "
"아... 네. "
"괜찮으면 한번 만나봤으면 해서 그러는데, 내일 정오까지 사무실로 와 줄 수 있어요? 사무실은 G 사거리 현대빌딩 2층에 있어요. "
"음...... 네, 뭐... 그럼 그 때 뵙겠습니다. "
뭐라고 얘기를 꺼내야 할 지, 그녀는 벌써부터 고민중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찍어왔던 화보와 사진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이 있다니, 그 자체로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그녀가 반드시 자신의 뮤즈가 되어 준다면 어떨까, 그녀의 자리를 꿰찬 신예 작가마저도 누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음날, 정오.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그녀가 나타났다.
"아, 어서 와요. "
"안녕하세요. "
사무실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평범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숨길 수 없는 아우라를 뽐내고 있었다. 이런 사람이 어째서 모델도 하지 않고 연극 무대에서 썩어갈 수 있는지 화가 날 정도였다. 그녀는 일단 그녀를 테이블에 앉힌 다음 차를 내 왔다. 하얀 얼굴이 형광등 아래에서 마치 달처럼 빛나고 있었다.
"어제 전화했던 서혜림이예요. 사진작가로 일했다가 지금은 쉬고 있고요. "
"아아...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네요. 어릴 때 작가님의 화보가 실린 잡지를 많이 봤었는데... 한 번쯤 그 화보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어요. "
"영광이네요. "
"그런데... 왜 저에게 연락을 하신건가요? "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저의 뮤즈가 되어 주세요. "
"...네? "
그녀는 그녀의 두 귀를 의심했다.
"당신이 제 뮤즈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출연하는 연극의 홍보 전단을 봤을 때부터, 인상깊어서 지켜보고 있었어요. 당신은 정말 아름다워요. 어째서 그 아름다움을 숨기면서 연극 무대에서 지내야 하는 지 모를 정도로 말이죠. "
"...... "
"지금 하고 있는 일은 있어요? 연극 무대에 서는 것 말고는? "
"아뇨, 딱히 없어요. 어차피 연극도 오늘부터는 배우가 바뀔 예정이었고... "
"그러시군요... "
다행이다, 그녀는 생각했다. 마침 무대에 더 이상 설 일도 없었고, 다른 일을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얼마를 주더라도 그녀를 꼭 자신의 모델로 세워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럼, 모델 일을 한번 해 볼 생각은 없나요? "
"모델이요? "
"네. 때로는 잡지 화보를 찍기도 하고, 때로는 본인의 화보집을 내기도 하는거예요. 때로는 광고를 할 때도 있고... 페이는 얼마든지 드릴게요. "
그녀는 무언가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이내 살짝 웃어보였다.
"당신은 지금, 예전의 명예를 다시 찾고 싶으신건가요? 그런 게 아니라면 저를 통해 다시 일어서고 싶은건가요? "
"그게 무슨... "
"전자라면, 단순히 돈으로 지불하기에는 너무 적은데... 후자라면 얼마든지 모델이 되어 드릴 수 있지만, 전자라면 다시 생각해보세요. "
"...... "
"그럼, 전 이만. "
그녀는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는 잡지사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까까지 얘기를 나눴던 여자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친구는 그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더 수소문해주겠다는 대답만 듣고 전화를 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무슨 뜻인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다. 예전의 명예를 다시 찾으려는 목적일까, 아니면 단순히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어서 그녀를 부른 걸까. 지금 신예 작가가 꿰차고 있는 그 자리, 그 자리를 되찾기 위해서일까. 아니면 그런 것 상관 없이 이 일을 계속 하고 싶어서일까?
고심 끝에 그녀는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결론은 내셨나요? "
"네. ...이전의 명예를 되찾고 싶어요. 하루에 화보를 몇 번이고 찍던 그 때의 나, 내로라하는 잡지사에서 모셔가던 예전의 나. 그 지위를 되찾고싶어요. "
"그 지위라... 금방 되찾으실 수 있겠지요, 저와 함께라면. "
"...... "
"좋아요, 당신의 뮤즈가 되어드릴게요. "
그녀는 흔쾌히 수락했다.
며칠 후, 스튜디오로 그녀를 부른 그녀는 카메라를 손질하고 있었다. 스튜디오에 걸려 있던 드레스 중에서 제일 예쁜 것으로 골라서, 악세사리를 준비하고 헤어와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구했다. 그녀는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촬영에 들어 갈 준비를 마치고 드레스를 건넸다. 드레스를 갈아입은 그녀가 나왔을 때, 그녀는 과거에 같은 드레스를 입고 찍었던 여배우를 떠올렸다. 그 때의 그녀는 '한국에서 최고로 요염한 여배우', '당대 최고의 팜므파탈'로 불리었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 때 그 배우보다 더 요염하고 아름다웠다.
"헤어랑 메이크업 준비가 되는대로 촬영을 시작하죠. "
"네. "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부지런히 그녀의 얼굴에 분을 칠하고, 헤어 디자이너는 부지런히 그녀의 머리를 손질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그녀의 두 눈을 의심했다. 여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믿을 만큼 아름다운 자태였다. 그녀의 카메라로는 다 담지도 못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셔터를 누르고 그녀를 찍을 때마다, 감탄의 연속이었다. 이다지도 아름다운 사람이, 어째서 사람들 속에 숨어있었을까?
그녀는 완성된 화보를 친구에게 보냈고, 곧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기, 이 사진 뭐야? 되게 아름답다. "
"내가 얼마 전에 연극에서 만났다고 했던 뮤즈. 사진으로 담아낼 수도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어. "
"어디서 이런 모델을 발굴해냈을까, 대단하네. "
"어때, 이 정도면 화보집 하나 내도 되겠지? 어떤 테마로 하든 잘 어울릴 것 같으니까. "
"그러네. 화보집 하나 내 봐. "
며칠 후, 그녀는 친구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그녀의 사진을 편집장이 봤는데, 잡지에 싣고 싶다는 것이었다. 잡지에 실으려고 사진 속 여자에게 연락도 해 봤지만, 그녀는 혜림이 아니면 촬영을 하지 않겠다고 한사코 거절했고 그 때문에 그녀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혜림은 그녀의 화보를 찍기 위해, 오랜만에 잡지사로 찾아갔다.
"오랜만이야, 혜림 씨. "
"오랜만이네요, 편집장님. "
"이 분, 혜림 씨랑 전속 계약이라도 맺은 거야? 혜림 씨가 아니면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하던데... "
"뭐... 그런 셈이죠. 저의 뮤즈가 되기로 했으니... "
"흠흠... 아무튼, 촬영 시작하자고. "
그녀가 도착하자마자, 그녀는 의상을 건네주고 메이크업 아티스트와 헤어 디자이너에게 스타일을 주문했다. 옷을 다 갈아입은 그녀는 머리 손질과 화장을 마치고 잡지에 실릴 화보를 찍었다. 그리고 잡지가 발간된 날, 잡지는 역대 최다 판매량을 기록할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그녀를 표지에 실어야 한다는 그녀의 말대로, 표지를 그녀의 화보 중 하나로 하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까지는 우연의 일치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우연이 아니었다. 그 뒤로 그녀의 사진을 찍고 싶어하는 여러 곳에서 연락을 받았다. 광고 회사는 물론이고 의류 브랜드, 다른 잡지사에서도 그녀에게 무수히 많은 요청이 들어왔다. 신예 작가가 꿰차고 있던 자리, 그리고 과거의 영광을 그녀가 되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 한 번도 이름을 물어본 적은 없네요. "
"아아... 애시라고 합니다. "
"애시... 그래요, 애시. 애시 덕분에 얘전의 지위를 되찾은 것 같아요. 이 은혜를 어떻게 갚는 게 좋을지 모르겠네요. 참, 메트로폴리탄에서 누드 화보를 찍어줄 수 없겠냐는 연락을 받았는데... 괜찮죠...? "
그녀는 의외로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촬영 당일, 그녀는 탈의실에서 나온 그녀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녀의 몸 이곳저곳에는 뱀처럼 비늘이 돋아 있었다. 비늘은 절묘하게 그녀의 몸 이곳저곳을 가리고 있어, 다른 연출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무사히 화보를 찍을 수 있을 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렇게 강렬한 아우라를 풍기는 몸은 처음이야, 그녀는 생각했다.
그녀는 메트로폴리탄에서 연락을 받았다. 역대 최고의 모델이었다는 것과, 정말 아름다운 모델이었다는 것, 그리고 내년 창간호에 다시 한 번 와 줄 수 있냐는 제의까지. 그녀라면 뭇 남성들을 한눈에 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는 말까지. 이 이상 성공가도를 달릴 수 없을 정도로 그녀는 성공했다. 이전보다 훨씬 더, 그녀는 잘 나가고 있었다. 한때 한물 갔던 사진작가로 불리던 것도 옛말이었다.
"후우... 메트로폴리탄 창간호 제의라니... 영광스럽네요. 이게 다 애시 덕분이예요. "
"저는 한 게 없는걸요. 다 작가님의 사진 실력 덕분이죠. "
"자, 여기 이번 모델료예요. 그리고 이건 선물. "
그녀는 그녀에게 따로 선물까지 챙겨줄 정도로 그녀를 아꼈다. 다른 곳으로 가서 다른 작가의 뮤즈가 된다면 자신의 명예는 다시 떨어져버릹 것 같았다. 그 전에,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몇달 후, 그녀는 메트로폴리탄의 창간호 표지 모델 사진을 찍었다. 한 해 한 해 나이를 먹어가는 사람들과 달리, 그녀는 해가 갈수록 더 아름다워지는 것 같았다. 하루를 더 해갈수록 미모가 빛을 발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 듯, 그녀는 그녀만을 고집했다.
밤 늦게 촬영을 마치고, 사람들이 돌아갔다. 어질러진 스튜디오를 치우던 그녀를, 누군가가 끌어안았다. 애시였다. 비늘 떄문에 부분부분 까실까실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아직 안 돌아갔어요? "
"이제 슬슬, 대가를 받아갈까 해요... "
"대가라니... 페이라면 아직 입금이 안 됐는데... "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이전의 지위를 찾는 대가는 금전으로 지불하기엔 너무 크다고? "
"더 큰 금액으로 지불하면 되나요? 모델료를 올려줄까요? "
"설마, 지불할 능력이 안되는 건 아니겠죠...? "
지불할 능력이라니, 그녀는 그녀의 두 귀를 의심했다. 지금의 자신이라면 몇 억이고 몇십억이고 줄 수 있었다. 과거와 달리 그녀의 이름을 대면 몇 억이고 돈을 빌릴 수 있을 정도로, 그녀는 성장했다. 당장 그녀의 친구에게도 몇 천만원은 빌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으니까- "
"저는 돈으로 받는다고 한 적 없는데... "
"그... 그럼... 뭘로 지불하길 원해요? 내 대신 뒤를 잇고 싶은거예요? 아니면, 이 스튜디오를...? "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네... 뮤지션 Hopper의 죽음, 원인이 뭐라고 생각해요? "
Hopper는 그녀가 활동하던 시절, 갓 데뷔를 마친 신인 래퍼였다. 그녀가 갓 데뷔했을 때 앨범 자켓을 무상으로 찍어 줄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그녀가 공백기를 가질 동안 유명해져서 해외 방송에도 출연할 정도였다. 그녀는 TV에 출연한 Hopper를 보고 따로 연락까지 할 정도였다. 그랬던 그였는데, 돌연 사망 소식이 들렸다. 원인은 불명. 마치 잠든 것처럼 편안하게 죽어 있었으나 자살을 할 만한 이유는 없었다. 유서도 없었고, 누군가 죽인 흔적도 없어 미제로 남았던 사건이었다.
"그건... 미제라고...... "
"승승장구하던 뮤지션이 갑자기 죽었다... 그런데 시신 근처에는 유서도 없고, 타살 흔적도 없고... 마치 잠든것처럼 편안히 죽어있었아요. 후훗... 그건 말이죠... Hopper도 유명해지기 위해 나와 거래를 했기 때문이예요. 자신을 유명해지게 만드는 댓가로, 그는 자신의 남은 수명을 지불했어요. "
"수...명...? "
"그는 수명을 다해서 죽은 것 뿐이예요. 저에게 남은 수명을 갖다 바치고... "
"...... "
"당신이 명예에 대한 욕심 없이 일 할 생각이었다면, 수명은 지불하지 않아도 됐어요. 하지만 명예에 대한 욕심을 버리느냐, 갖느냐에서 후자를 택하고 나와 거래를 한 이들은 수명을 지불해야 해요. 지불한 수명만큼 다음 생에 더 사는 것도 아니예요. 그건... 이 생에서 유명해지기 위한 대가니까요. "
"...... 그럼... "
"당신은 앞으로 50년 이상은 족히 살 수 있었지만... 당신이 지금까지 얻어 온 명예에 대한 대가는 55년이예요. 50년이라니~ 멀게 느껴졌겠죠? 하지만... "
그녀는 그녀를 안은 팔을 풀었다.
"당신은 내년 3월 10일에 죽을거예요. "
"자, 잠깐만... 조금만 더 살게 해 주면... 아직 할 일이... "
"당신의 수명이 다 하는 날까지, 저는 당신의 뮤즈로 활동할거예요. 하지만 그 뿐이예요. 그 이상 지위가 상승하는 일은 없을테니까... "
엄마가 고지고 아빠가 성원숭인데 동생이 블레이범인 라이츄. 이집안 뭐야
3 댓글
마드리갈
2020-02-12 22:00:12
안녕하세요, 국내산라이츄님. 오랜만이예요.
그리고 간만에 이렇게 괴담수사대의 외전 신회차를 읽게 되네요.
다 읽고 나서 굉장히 섬뜩하면서 동시에, 대체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가 왜 여생을 대가로 치루어야 할 정도로 큰 죄인가 싶은 의문이 떠오르기도 하네요. 딱히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도 아닌데...
유명해지고 싶은 욕구가 없이 평온한 삶을 희구하는 저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고, 또한 이번 회차에 나오는 상황 또한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네요.
국내산라이츄
2020-02-13 02:18:39
애시가 모든 사람들에게서 유명해지는 대신 여생을 가져가는 건 아닙니다. 단순히 명예, 돈이 목적이 아니라 순수하게 이 일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은 무료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녀가 모델 일을 하기 전에 몸담고 있었던 극단은 순수하게 연극을 하고 싶어서 모였지만 여건이 안 돼서 해체 위기였고, 그녀는 무료로 극단이 연극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줬습니다. 반면 여생을 받아 간 사진작가는 오랜 공백기를 가졌고, 이전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는 매우 혹독한 노력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일말의 노력도 없이 이전의 명예를 되찾았을 뿐 아니라 이전보다 더 명예로워졌으니 그 노력에 상응하는 수명을 가져간 것 뿐이예요.?
돈을 모으기 위해 꾸준히 일을 하느냐, 아니면 돈을 벌기 위해 큰 한 방을 노리느냐의 차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SiteOwner
2020-02-14 20:30:34
읽고 나서 오싹함이 느껴지는 단편이었습니다.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는 굳이 따져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여러모로 씁쓸한 감은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래전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게 생각납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에서는 7년마다 왕을 뽑는데, 새 왕을 뽑을 때면 이전의 왕은 축제의 장에 끌려나와 중인환시하에 참혹히 살해당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서도 서로 왕이 되기 위해서 난리가 난다고 합니다. 7년 뒤의 당선자의 운명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운명을 알아도 이런데 모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