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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훈아... 세훈아!”
“으... 으...”
세훈은 머리를 감싸쥔 채 신음하고 있다. 주리는 한쪽 무릎을 굽힌 다음 세훈의 머리를 받치고 나서 세훈의 눈을 바로 응시한다. 세훈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고 어딘가를 고통스럽게 응시하는데, 주리를 보자마자 조금은 안도하는 표정이다.
“아... 주리구나...”
“뭐가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잠이 들었는데... 누군가가 나를 꿈속에서 막 괴롭히더라고... 보니까 독서부 선배였어... 그렇게 내던져지고, 밟히고, 이리저리 휘둘려지고 하는데 잠에서 깨더라.”
“그래? 방금 내가 그 능력은 해제시켰는데.”
“다행이다... 다행인데... 지금은 머리가 아파. 앞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고, 머릿속에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 와.”
“누구 목소린데?”
“여자애 목소리... 날카로운 칼로 찌르는 듯한 목소리야. 지금 이 순간에도... 이 순간에도 자꾸 들려와...”
세훈은 머리를 감싸 쥔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조금 전보다 더 큰 신음 소리를 내며 머리를 쥐고 바닥을 뒹굴거나, 벽에 기대거나, 머리를 바닥에 파묻거나 하고 있다.
“여기 있어. 내가 지금 이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이 누군지 찾아낼 테니.”
주리는 이 말을 하고, 일어나려 한다.
“자... 잠깐...”
세훈은 한 손으로는 머리를 감싸 쥔 채로 다른 한 손으로 주리의 다리를 잡으며 말한다.
“나도 같이 가야겠어... 누가 나를 공격하는 건지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반드시, 누가 나를 공격하는 건지 알아야겠어...”
세훈은 한 손으로 주리의 손을 잡고 일어선다. 다리가 조금 흔들리기는 하지만, 이내 두 다리로 선다. 하지만 머리는 계속 아파진다.
“괜찮겠어?”
“그래, 이러면 돼.”
주리에게 의지한 채, 세훈은 발걸음을 옮긴다. 한 걸음씩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기는 하지만 괜찮다. 걸을 수 있으면 된다. 하지만... 걸을 때마다 여자의 목소리가 자꾸 커져 온다!
“으... 으으...”
세훈은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지끈 감는다.
“왜 그래?”
“자꾸 그 목소리가 들려 와. 거기다가... 점점 크게 들려.”
“점점... 크게... 들린다고?”
주리는 세훈을 돌아보며 말한다.
“어떤 말을 하는지 말해 줄 수 있어?”
“그러니까... 아... 지금도 계속 들려오는데... ‘무릎을 꿇어라’, ‘버러지 같은 놈’, ‘너 같은 친구를 둔 너희 반이 불쌍하다’ 이런 말이 자꾸 들려 와. 그리고... 목소리 중에 ‘선배님께서’라는 말이 자꾸 들려 와. 선배님이라고 한 걸 봐서는... 리하르트 선배는 아니야.”
“리하르트 선배라면...”
“독서부 선배 말이야. 그 선배도 지금, 분명히 나처럼 머릿속에서 저런 목소리가 들려올 거란 말이야. 내가 잠들었을 때 악몽을 꾸게 하고, 지금도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이 사람은... 어딘가에서 자기 능력을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그리고?”
“여기서 멀지 않아...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을 정도라면!”
“멀지 않다고?”
세훈의 고통스럽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에, 주리도 조금은 당황한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데?”
“내가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마치 컴퓨터나 AI폰의 볼륨을 올릴 때처럼, 내 머릿속을 괴롭히는 그 목소리가 점점 커져. 지금... 이 순간에도.”
세훈은 신음 소리를 흘러가며, 목에 힘을 가득 주고 말한다.
“그러니까... 내가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거야.”
“괜찮겠어? 그 사람에게 가까이 가면 참을 수 없도록 고통스러울 텐데...”
“나는 괜찮으니까, 빨리 찾기나 하자고.”
세훈은 어느새 주리의 앞에서 움직이고 있다.
“정말 괜찮은 거야?”
“그렇고말고...”
세훈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확신에 찬 대답을 한다. 순간, 주리는 세훈의 이 목소리를 어디서 들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며칠 전, 금요일에 예준의 호출을 받고 학교를 나서기 전, 주리가 가는 것을 말릴 때 자신은 괜찮다고 했던, 그때 그 목소리다. 확신과 결의에 가득 차 있던 그 목소리. 상황은 달라도, 그 느낌은 같다.
“아니... 내가 볼 때는 안 괜찮아.”
“그러면? 나보고 다시 뒤로 가라고? 내가 찾아야 하는데...”
“같이 찾아내자는 거지!”
주리는 이 말을 하며 세훈의 옆에 선다.
“고... 고마워.”
세훈과 주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도서관 출입문 쪽으로 가까이 갈수록, 세훈의 머리가 점점 더 지끈거려 온다. 여자의 목소리도 더욱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으... 으음...”
“괜찮은 거야?”
“나는 괜찮아... 그리고 말이지... 이 근처야... 한 10m 안에 있는 것 같아!”
“10m 안이라니...”
주리는 주위를 둘러본다. 하지만 주변에는 머리를 싸매고 있는 사람들 말고는 별다른 건 보이지 않는다.
“정말, 확실해?”
“내가... 내가 말했잖아. 마치 볼륨이 커지듯, 선명하게, 점점 선명하게 그 목소리가 들려온다고!”
“하지만... 이 도서관 안에는 딱히 그런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없다고?”
주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이지?”
“맞아... 내가 아까 도서관 안을 뒤져 봤는데, 딱히 그런 사람은 없었어. 아까 나한테 쓰러진 그 한 명을 빼고서는.”
“그래? 그럼... 밖으로 한번 나가 보자고.”
“밖에? 밖이라고?”
“그래... 멀지는 않을 거야. 출입구에 가까워질수록, 내 머리도 점점 더 아파져 오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정말... 그 사람은 도서관 밖에 있는 거지?”
“맞다니까...”
세훈과 주리는 도서관 문을 나선다. 세훈이 도서관 밖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머릿속에 들리는 여자의 목소리 때문에 안 그래도 아팠던 머리는 이제는 정말로 머리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이 아파져 온다. 그리고... 그 강도는 점점 더 강해진다.
“아... 멀지 않아. 바로 여기서 10m도 안 되는 것 같아...”
“어느 쪽인데? 지금 여기 기준으로... 오른쪽, 왼쪽? 어디야?”
“아... 오른쪽... 오른쪽이야!”
“오른쪽?”
세훈과 주리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튼다. 세훈이 발걸음을 옮길수록 그 목소리가 더 선명해지고 머리를 찌르는 듯한 고통도 더 강해진다. 이제는 서 있기도 힘든지, 자꾸 다리가 후들거린다.
“괜찮아?”
“괜찮아... 계속 가! 찾아야만 해!”
“그런데... 여기는 그냥 복도밖에 안 보이는데...”
“좀 더 자세히 찾아봐!”
주리는 주변을 둘러본다. 과연, 오른쪽에 보니 화장실이 보인다. 그 사람이 있을 곳이라고는... 화장실뿐. 화장실로 들어가 본다.
“그런데...”
세훈이 신음을 흘리며 말한다.
“그 사람은... 아마 여자 화장실에 있을 것 같은데...”
“누군지 알 것 같아... 그럼 내가 들어가서 확인해 볼게.”
“알았어. 부탁해.”
주리가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고, 세훈은 남자 화장실로 들어가서 조용히 숨죽이고 기다린다. 이제 머리의 통증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진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을 정도다. 벽에 등을 기대 본다. 그래도 버틸 수 없을 정도다. 자연스럽게 바닥에 쪼그려 앉는다. 목소리는 아주 선명해진다.
“저항은 무의미한 짓이야... 부질없는 짓이야... 네가 이렇게 저항해 봤자 네 고통만 더 심해질 뿐이야... 이제 무릎을 꿇으라니까... 어서 무릎을 꿇어!”
“그건 안 되지...”
“빨리... 무릎을 꿇어!”
이제 눈조차 뜨기 힘든 상황. 이 와중에도 세훈은 한 번 심호흡한다. 그리고 입을 연다.
“네가 아무리 나를 괴롭힌다고 해도, 너는 절대 나를 무릎 꿇릴 수 없어...”
이제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하고, 벽에 기대 있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다. 어떻게든 힘을 쥐어 짜내서, 세훈은 더욱 힘을 주어 말한다.
“그래, 절대 무릎을 꿇릴 수 없다고... 절대... 절대... 절대. 절대!”
놀라운 건 다음 순간. 세훈의 머릿속을 울려오던 그 고통스러운 목소리가, 서서히, 마치 먹구름이 걷히듯, 서서히 사라져 간다. 먹구름 사이로 다시 햇살이 찾아오는 듯, 세훈의 머릿속도 그렇게 맑아지고, 세훈에게도 다시 힘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윽고, 머릿속에서 완전히 그 목소리가 사라진다. 초원 위에 홀로 서서 시원한 바람을 온몸으로 가득 맞는 느낌. 이렇게 상쾌한 기분은 이제껏 느낄 수 없었다. 세훈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온다.
주리는 어떻게 되었으려나... 문득 궁금해진 세훈은 화장실에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긴다. 나가는 길에 거울을 한 번 본다. 다른 건 몰라도, 머리가 많이 헝클어져 있다. 머리를 만져서 다듬어 본다. 아까 전의 머리 모양으로 되돌려 놓기는 했지만, 어째 미묘하게 다른 것 같기도 하다.
바로 그때, 옆에서 여학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라고 하는지 자세히 들리지는 않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다. 한 명이 아니다. 두 명이다! 높은 목소리 하나와, 그것보다는 조금 낮은 목소리 하나. 잠시 후, 여자 화장실에서 주리가 나온다. 그리고, 주리의 손에 끌려 나오는 또 한 명의 여학생. 붉은 머리를 두 갈래로 묶은 보라색 눈의 여학생이다. 그 여학생은 주리에게 끌려 나오면서도 세훈을 쏘아본다. 얼굴 한가득, 분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너...”
“첼시 오쇼네시, 맞지.”
그 여학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한 줄 알아. 험한 꼴 안 보고 끝났잖아.”
“거, 참 다행이네.”
첼시는 퉁명스럽게 말한다.
“아까 일은 어떻게 된 거야?”
“......”
첼시는 말이 없다. 아니,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주리야, 어떻게 된 거야?”
“변기 칸 하나에 문을 잠그고 숨어 있더라.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뭔가를 계속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거야, 그래서 금방 알아봤지. 호스를 하나 들고 와서, 당장 능력을 해제하지 않으면 물을 뿌려 버리겠다고 하니까, 알았다고 하면서 나오더라.”
“아, 아니야! 훨씬 더 심한 말이었어! 막 소리도 지르고, 죽여 버린다고도 하고...”
“주리야, 정말이야?”
세훈은 주리에게 장난스러운 말투로 묻는다. 아까의 고통에 시달리던 건 언제 잊어버렸냐는 듯이.
“아, 아니! 전혀.”
“봐봐! 아니라잖아.”
“......”
첼시는 분하다는 듯 말이 없다.
“그건 그렇고, 물어볼 게 하나 있어.”
“뭘 물어볼 건데?”
“너 만화부원이지?”
“마... 맞아. 그 ‘코믹 피에스타’에도 가고.”
첼시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네 패거리한테도, 내가 거기 간다는 걸 알렸겠네?”
“맞아, 알렸지.”
세훈은 잠시 말이 없다. 주리는 세훈과 첼시를 번갈아 보고는, 입을 연다.
“세훈아, 이제 어떡하려고?”
“피할 수 없잖아, 어차피...”
세훈은 첼시를 보며, 단호하게 말한다.
“그래서, 네가 좀 나를 도와줘야겠다.”
“뭐? 하하하...”
첼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지금 나보고... 너를 도와 달라고? 참... 어이가 없어서. 나는 빈센트 선배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아... 그래?”
세훈은 태연하게 말한다.
“그러면... 거래를 하나 제안하지.”
“거... 거래라니?”
“네가 이중간첩 역할을 좀 해 줘야겠다.”
“이... 이중간첩이라니? 지금 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랬다가는... 내가 선배님한테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아이고... 그러면 처음부터 클라인 밑에 들어가지를 말았어야지?”
주리가 첼시에게 불쌍하다는 듯 핀잔을 준다.
“아버지는 우주군 장군이시고, 어머니도 음대 교수씩이나 하는데, 네가 이런 걸 하고 있으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겠냐, 응?”
“너... 너 내가 그 선배님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하는 이야기야?”
“뭐, 알고말고. 네 신변은 내가 아는 곳에다가 연락해서 잘 보호해 줄 테니까, 그런 건 걱정 말라고.”
“뭐? 그게 말이나 돼? 기껏해야 평범한 학생밖에 안 되는 네가!”
“뭐, 네가 하고 싶으면 하지 않아도 돼.”
세훈은, 전에 예준과 클라인에게 들었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며 말한다.
“그런데, 네가 나를 처치하지 못했으면, 어차피 그 선배한테 찍힌 거잖아? 지금 이건 기회야. 너한테 둘도 없는 기회. 그러니까, 잘 생각해 보라고. 알았지?”
“야, 너, 말 다 한 거야?”
“현명한 판단을 기다릴게!”
이 말을 하며 세훈과 주리는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간다. 첼시는 세훈과 주리의 뒷모습과 반대편 복도를 번갈아 본다.?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첼시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그건 그렇고, 조세훈 저 녀석의 자신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어차피 빈센트 선배님한테 찍혔고, 무릎 꿇거나 아니면 병원에 실려 가거나 둘 중 하나의 운명일 텐데 말이야... 그런 운명에 처한 사람들같이 보이지 않아... 어째서지? 저 자신감은 도대체... 저 당당함은 도대체...”
첼시가 그러든 말든, 세훈과 주리는 제 갈 길을 갈 뿐이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3-06 20:33:21
첼시 오쇼네시같은 인물을 보면서 생각나는 게 있어요.
교정시설이나 포로수용소 등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간혹 보이는, 죄수 신분이긴 하지만 권력자로부터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는 인물. 속칭 완장 찼다고 하죠. 그런 사람들이 다른 죄수들 위에서 군림하려고 하죠. 실상은 그 또한 죄수임에는 하등의 차이도 없는데다 권력자가 그를 용도폐기하면 그냥 끝나는 정도도 아니고 그에게 한을 품은 다른 죄수들이 사적보복에 나서서 비명횡사하는 게 정해진 수순.
한번 끄나풀이 되었는데 두번 세번 못되겠냐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네요.
SiteOwner
2020-03-07 15:47:13
이중간첩, 참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이미 클라인 패거리의 첩자로 활동하고 있는 첼시 오쇼네시를 역이용해서 클라인 패거리에게 반격을 가해 주는 것도 상당히 기대됩니다. 자신의 심복이라고 생각했던 자에게 배반당한 것을 느낄 때의 표정이 볼만하겠습니다.
인신공격은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그것도 모든 경우에 예외없이 보편적으로 적용될 사안이냐고 단언은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주리가 첼시에게 저렇게 말한 것은 아주 좋다고 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