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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자 H] 10화 - 미로 속

시어하트어택, 2020-05-08 12:20:47

조회 수
117

잠시간의 침묵이 흐른 후, 세훈이 입을 연다.
“뭐래.”
“응? 너 뭐라고 했어? 흐흐흐... 내가 혹시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슬레인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깊은 동굴에서 먹잇감을 노리고 있는 괴물처럼.
“흐흐흐히히히... 헛소리하지 말고, 확실히, 확실히! 내 귀에 똑똑히 말해 주란 말이다! 내가 듣고 싶었던 ‘그 말’을 말이야!”
슬레인은 악을 쓰며 말한다. 동시에, 두 눈이 빛난다.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간다. 승리에 대한 믿음으로.
하지만...

“확실히 말을 들어야 하는 쪽은 나다!”
“무...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는...”
세훈의 일갈. 슬레인이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
세훈이 빠르다.
재빨리,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세훈은 모으고 있던 두 손을 뗀다. 마치 진공으로 팽팽히 붙어 있던 철구를 떼는 것만 같다. 두 손 사이로, 불투명한 점액이 두껍게 들러붙어 있다. 막이 될 정도로 두껍고, 매우 질기다. 그것을, 대뜸 슬레인의 얼굴에 갖다 댄다!
“윽... 익...”
뭔가 말을 해 보려던 슬레인의 얼굴이 그 점막에 완전히 들러붙는다. 세훈은 그것을 힘껏 눌러 슬레인의 얼굴을 더욱 강하게 덮어쓴다. 마치 데스마스크를 만드는 것과 같이.
슬레인이 만든 점막에, 마치 기념물처럼, 슬레인의 얼굴이 새겨진다. 눈과 코, 입, 귀 등, 불투명하고 하얀 점막에 그 윤곽이 드러난다. 점막에 덮이지 않은 목과 손은 이미 벌게졌다. 아무 말도 못 한 채로, 슬레인은 발버둥질할 뿐이다. 그야말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다.
“......”
“자, 이제 내가 기회를 줄게. 뭐든 말하고 싶으면 말해 봐.”
세훈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그러나 조용히 말한다.
“......”
“왜 그래? 말하고 싶은 건 뭐든 말하라니까?”
“......”
슬레인은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두 손을 든다. 두 손의 열 손가락은, 마치 바람에 몸을 맡긴 가느다란 갈대처럼 덜덜 떨리고 있다. 두 손을 펴서, 창백해진 손바닥을 보인다. 잠시 들었던 두 팔에도 이제 점점 힘이 없어진다.
잠시 후.
세훈의 두 손을 덮었던 점막이, 깨끗이 사라진다. 한순간에. 두 손에는 어떤 형태의 끈적거리는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주위를 둘러본다. 사라졌다. 괴물의 입 같던, 도서관 한쪽을 온통 뒤덮은 점액이. 서가에도, 세훈이 앉은 의자에도, 테이블에도. 창가에도. 어디에도 점액은 남아 있지 않다. 세훈의 앉은 자리 밑에, 울상을 하고 머리를 푹 숙이고 꿇어앉은 슬레인만이 있을 뿐이다. 세훈은 다시 뒤를 돌아본다. 현애는 아무 이상 없다. 다시 슬레인을 돌아본다. 세훈은 호기롭게 슬레인을 보고 말한다.
“그럼 그렇지.”
“요... 용서해 줘! 뭐든 할 테니!”
아까의 도서관을 다 집어삼킬 것 같던 기세는 어디 가고, 슬레인은 비굴하게 울먹이며, 두 손을 모으고 말한다.
“정말? 용서받고 싶은 거야?”
세훈이 한껏 과장을 섞어 가며 슬레인에게 얼굴을 들이대자, 슬레인은 더욱 더 울상을 지으며, 두 손은 손바닥이 벌게지도록 빌고, 마치 호두까기 인형이 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잠시 세훈은 말이 없다가, 조금 지나 입을 연다.
“부 활동 끝나고, 나 따라와.”
슬레인이 호두까기 인형마냥 더욱더 강하게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인다. 세훈은 다시 뒤를 돌아본다. 현애가 고소한 듯 웃고 있다.

오후 4시 30분, 미린고등학교 정문 근처의 주택가. 마치 피의자를 호송하는 경찰관들처럼, 슬레인을 가운데에 두고, 세 사람이 각각 양옆에서 걷고 있다. 왼쪽에는 현애와 주리 오른쪽에는 세훈이 걷고 있다. 슬레인은 그 가운데서 머리를 푹 숙이고 걷고 있다.
“말해 봐.”
현애가 슬레인을 쏘아보며 말한다.
“그 후드 쓴 음침한 녀석이, 너보고 뭐라고 하던데?”
“하, 그러니까 말이야... 그게 그러니까 있지... 그게...”
슬레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말하지 않고 말을 빙빙 돌린다.
“빨리 말해, 네 입을 얼려 버리기 전에엣!”
현애는 마치 얼굴 바로 앞에서 휘몰아치는 눈보라처럼 일갈한다.
“알았어, 알았어! 말하면 되잖아!”
슬레인은 화들짝 놀라, 급히 한 손은 풍차처럼 내젓고, 다른 손으로는 입을 가린다.
“얼른 말해.”
“알았어...”

슬레인은 일주일 전인 4월 29일, 하굣길에 그 후드 쓴 남자를 만났다. 저녁 8시쯤, 지하철역에서 내려서 역에 연결된 지하상가를 통해 그가 사는 아파트단지로 들어가려고 할 때, 화장실 쪽 구석에서 뭔가 이상한 기척을 느꼈다고 한다. 호기심에, 화장실 쪽 구석에 깊숙이 갔을 그때, 그와 마주쳤다.
“빈센트 로스 클라인의 패거리, 슬레인 존 콘리였지?”
“그건 맞는데... 당신 누구야? 누구냐고?”
슬레인은 공포스러움에 짓눌려, 평소라면 크게 냈을 목소리도 모기 날갯짓하는 소리만큼이나 작게 나왔다. 정말로 그때는 무서웠다고 한다.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에 대한 일거수일투족까지 어떻게 다 알고 있나 하는 공포심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두려워 마라.”
후드 쓴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다. 그 남자치고는 조금 높지만 근엄하게도 느껴진 목소리가, 그렇게 편안할 수 없었다.
“그... 그러면...”
“너를 해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선물을 주려는 거지.”
“선물이라니...”
“클라인은 네가 초능력에 재능이 있음을 알고 패거리에 끼워 준 것 같은데, 아직 너는 그러지 못했지.”
“마... 맞습니다...”
이때부터 슬레인의 말투는 공손해졌다. 공포감과 한데 섞인 경외감, 그것이 더해져, 그 남자를 따라야겠다는 생각을 그에게 심어 주었다.
“내가 선물을 줄 테니, 대신 내 말을 따르는 건 어떻겠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슬레인은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 뒤, 총을 꺼내 붉은빛의 액체가 담긴 탄환을 그에게 쏘고 ‘전학생을 해치워라’라고 한 건 니라차와 똑같았다.

“참 이해가 안 되네.”
슬레인의 말을 듣고 있던 주리가 슬레인을 흘겨보며 말한다.
“그 녀석의 말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따른 거야? 네가 좋아하는 그 빈센트 선배한테도 그랬으면서.”
“아... 아... 그러니까... 그 사람들한테는... 뭔가... 뭔가... 공통점이 있어! 사람을 홀리는... 그런 능력 말이지. 그것도... 능력인 것...”
“정신을 못 차렸네.”
세훈이 슬레인의 머리를 한 대 쥐어박는다.
“또 아까처럼 숨 못 쉬게 해 줄까?”
“아,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래? 네가 말해 봐.”
“절대 안 건드릴게. 세훈이 너도, 현애도, 주리도! 절대 안 건드릴 거야!”
“지금 우리가 보는 앞에서, 다시 한번 약속해라. 우리 인공지능들도 녹음하고 있으니까.”
세훈은 AI시계를 켜고 자기 인공지능 *나라에게 말한다. 현애와 주리도 각각 *프로도와 *하나를 준비했다.
“*나라, 녹음할 준비 됐지?”
“시작해.”
슬레인은 얼굴이 붉어져서는, 숨을 가쁘게 쉬며 말한다.
“나, 미린고등학교 1학년 B반 슬레인 콘리는, 이 시간 이후로, 미린고등학교 1학년 G반 조세훈, 공주리, 남궁현애를 절대 건드리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만약 건드릴 경우, 합당한 처벌을 받겠습니다! 이상!”
“좋아.”
슬레인을 보내고 나서, 주리는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는지, 슬레인이 간 방향을 자꾸 보며 세훈에게 말한다.
“이거, 메이링 씨한테 한번 말해 보는 게 좋겠지?”
“그러는 게 좋겠네.”

그 시간, 법률사무소 스텔라. 처음에 2개였던 테이블은 7개까지 늘어났다. 물론 4개는 주인이 없다. 한쪽에는 사무원 모집 공고도 붙어 있다, 야구모자를 쓰고 검은 탱크톱을 입은 메이링과, 깃 있는 셔츠를 입은 앨런, 푸른 셔츠에 조끼까지 차려입은 자비에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르다.
메이링과 앨런, 자비에는 오늘은 법정에 나갈 일이 없는 관계로, 이런저런 일에 한창이다. 메이링은 자비에의 자리 뒤에 서서 자비에가 소장을 검토하는 것을 도와주고 있다. 앨런은 책상 위에 홀로그램으로 세라토시 지도를 띄워 놓고, 인공지능 *소피아의 도움을 받아 VP재단의 자료와 대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여전히 미궁 속인데요...”
앨런이 푸념하듯 말한다.
“뭐가, 앨런?”
메이링이 앨런 쪽을 보고 막 뭔가 말하려는 그때.

♩♪♬♩♪♬♩♪♬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클래식 음악이라면, 메이링의 전화다. 메이링은 바로 주머니에서 AI폰을 꺼내 전화를 본다. 세훈으로부터의 전화다.
“여보세요? 세훈아, 웬일이야?”
“그 후드 쓴 녀석 말인데요.”
“아, 미안해. 지금은 바빠서 전화를 못 할 것 같네.”
“네... 네?”
“혹시 메시지로 보내 줄래? *나라가 녹음한 게 있다든가 하면 그걸 보내 줘도 돼.”
“아... 알겠어요.”
세훈으로부터의 전화가 끊긴다. AI폰을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으며, 메이링은 한숨을 쉰다.
“하... 내 몸이 열 개였다면 좋을 텐데. 그런 초능력은 없나?”
“지금 변호사님 능력도 충분히 위협적인데요.”
앨런이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말한다.
“변호사님 앞에서는 아무도 초능력을 못 쓰잖아요.”
“원래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잖아.”
“하하하, 그렇죠. 그건 그렇고 말이죠...”
“왜, 앨런?”
“엘더 박사님을 추적할 수 있는 단서는 안 나오네요. 아직까지 어떤 단서조차도 못 찾았어요. 뭔가 연결고리가 있어야 하는데...”
앨런은 머리를 싸맨다. 한숨을 푹 내쉰다. 당장이라도 이 머리가 폭발해 버릴 것만 같다. 끝없이 들어오는 소송건도 그렇고, 이 초능력자 급증 사건도 그렇고, 엘더 박사의 실종도 그렇고... 얼른 끝나 버렸으면 좋겠다. 앨런은 그렇게 생각한다.
“저, 주임님, 다 방법이 있겠죠. 너무 걱정 마세요.”
“하... 그럴까?”
자비에가 말을 너무 쉽게 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이상하게도 자비에의 말을 듣자 조금 마음이 놓인다. 조금 머리가 덜 아픈 것 같다. 좀 낫다...

다음 날인 5월 7일 수요일 저녁 5시 40분, RZ백화점 지하 1층 식품관 ‘미린 푸드마켓’.
평일임에도 원체 이곳의 유동인구 자체가 많아서, 주말만큼은 아니더라도 많이 붐빈다. 그 한가운데를, 현애와 세훈, 주리가 나란히 걷고 있다.
“이야- 여기 완전히 핫플레이스잖아. 안 그래?”
현애가 조용히 말한다.
“맞아.”
주리가 입을 연다.
“우선 여기 RZ타워에는 없는 게 없지. RZ그룹에서 자기네 본사라 작정하고 만들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말이야. 우선 우리가 걷고 있는 여기 RZ백화점이 있고, 지하에는 환승역인 미린역이 있지. 백화점 위쪽으로는 실내 놀이공원, 박물관, 미술관, 온천, 오피스, 고급주택, 호텔 등이 있어. 물론, 맨 꼭대기로 올라가면 전망대도 있지. 전망대에서는 세라토 시가지와 남쪽으로 펼쳐진 바다가 훤히 보여. 아무튼, 이런 게 전부 합쳐져서, 여기는 랜드마크가 된 거야.”
“음, 그래? 슬슬 출출한데, 우리 뭐 먹지?”
현애의 말에 이번에는 세훈이 말한다.
“이것저것 다 있어. 우주 곳곳의 별미들, 디저트, 간식, 빵집, 카페, 거기에다가 스트리트 푸드까지 말이야. 뭐 먹고 싶어?”
“음, 글쎄... 그렇게 말하니까 더 못 고르겠는데...”
현애가 입맛을 다시며 말한다.
“네가 좀 골라 줘 봐.”
“그럼 내가 골라 줘야지.”

그때, 누군가가 옆에서 세훈을 툭툭 친다.
세훈은 돌아본다. 큰 키의, 익숙한 얼굴이다. 순간적으로 경계했던 세훈의 얼굴이 금방 풀어진다.
“여- 즐거운 저녁이야. 여기서 만나다니.”
“어? 그래! 너는... 우리 반의...”
시어하트어택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2 댓글

마드리갈

2020-05-09 12:57:48

슬레인 콘리는 자신이 선보인 특수능력이 타인을 압도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군요. 자신이 압도당할 줄은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그게 현실로 구현되니 참 볼만한 상황이 되어 버렸어요. 허세의 크기만큼이나 굴욕의 크기도 커졌고...

그렇죠. 생면부지의 누군가가 자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은 공포 그 자체.

예전에 굉장히 이상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어요. 사람의 음성은 아니고 ARS였는데 저의 인적사항을 읊으면서 특정 서비스의 요금을 납부하라는 안내의. 물론 그 전화에서 말하는 서비스 자체를 이용한 적은 없었고 따라서 그게 사기전화라는 것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수일간은 굉장히 불안했어요. 물론 그 이후 그 전화로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현애가 둘러치고 있는 마음의 벽도 다소 낮아져 있네요.

SiteOwner

2020-05-09 21:10:50

자승자박이라는 것은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봅니다.

그렇게 특수능력으로 만들어 낸 점액에 슬레인 본인이 그렇게 당할 거라고는 자신은 생각도 못했겠지요. 심정적으로는 그 점액에 찍힌 슬레인의 얼굴이 그대로 데스마스크가 되었으면 더 좋을텐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러모로 죠죠의 기묘한 모험이 많이 오마쥬된 게 보입니다.

후드 쓴 남자가 슬레인을 종속시킨 과정에서는 3부의 디오가 카쿄인 노리아키를 자객으로 만들었던 것과 무함마드 압둘이 필사적으로 디오로부터 탈출할 때의 상황이, 슬레인이 제압당한 뒤 세훈과 주리와 현애 앞에서 다짐한 장면은 4부의 오토이시 아키라가 스탠드 능력을 쓰지 않을 것을 히가시카타 죠스케와 니지무라 오쿠야스 앞에서 맹세하는 상황이 연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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