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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오전 9시 50분으로 돌아간다.
매그넘 골드 빌딩 28층 법률사무소 스텔라에서는, 모두가 한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한가운데 앉은 메이링부터 시작해서, 그 옆에 있는 앨런, 그리고 오늘 새로 온 직원 2명까지. 메이링 오른쪽의 비어 있는 한 자리를, 모두 주목하고 있다.
“자비에는 언제 오는 거죠?”
앨런이 약간 졸린 듯한 얼굴을 하며 메이링에게 묻는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이것저것 열심히 일하고 있다.
“이러다가 아예 안 오면 어떡하죠?”
“에이, 걱정 마. 그런 일은 없겠지.”
“자비에 성격상 한번 문 건 절대 놓지 않으니까, 괜히 걱정돼서 그러죠.”
메이링도 그렇고, 앨런도 그렇고, 새로 온 직원 2명도 그렇고, 모두 걱정스럽게 문만 바라본다. 심지어 메이링의 컴퓨터에 나타난 *소피아의 신호도 자꾸만 흔들거리는데...
지잉- 하고 문이 열린다.
“죄송합니다!”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자비에잖아!”
“왜 이렇게 늦은 거야?”
“하... 하...”
자비에는 한 손을 벽에 대고서, 숨을 헐떡인다.
“제가... 제가 많이 늦었죠?”
“아, 아니야! 그렇게 많이 늦은 건 아닌데...”
“후... 일단... 일단 새로... 오신 분들께는 제 소개를 해야겠지요?”
그러고서 자비에는 오른쪽에 보이는 연갈색 머리의 남자 직원과 분홍색 올림머리를 한 여자 직원을 돌아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프랑수아 자비에 라크루아’입니다. 저도 한 달 전에 왔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치라유 치아라와논’입니다.”
“저는 ‘아냐 골로바텐코’라고 해요. 이쪽이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치라유와 아냐가 차례로 인사하자, 자비에는 숨을 한 번 돌리고는, 다시 메이링을 보며 말한다.
“그리고... 이제 말할까요, 변호사님?”
“뭔데 그래?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늦게 온 건지...”
“알았어요. 그 녀석이 누군지.”
메이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
‘짝’ 하고 손뼉을 친다.
“아, 누군지 알지! 나도 그거 때문에 답답했는데...”
“그렇게 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변호사님!”
자비에는 잔뜩 얼굴이 붉어진 채로 메이링에게 고개를 숙인다.
“변호사님도 여전히 생각하고 계셨군요!”
“맞아.”
오후 3시 20분, 미린고등학교 동관의 만화부실. 30개 정도의 자리는 상당수가 채워져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도 몇 명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평균 정도로 온 편이다. 오늘은, 현애도 어디 딴 데 들렀다가 온다든가 위치를 헷갈린다든가 하지 않고, 제대로 잘 찾아서 왔다. 정말이지, 지난 주에 외제니와 싸웠던 그때를 생각하자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만화부실 앞쪽도 아니고 뒤쪽도 아닌, 중간 정도 되는 자리를 잡고 앉아, 만화책을 보고 있자니, 이렇게 좋을 수 없다. 마치 혼자만의 세계에 온 듯한 기분이다...
“안녕하세요!”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인사한다. 현애를 포함해, 대부분의 만화부원들이 돌아본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레아와 사이. 다들 손을 흔들어준다. 레아와 사이는, 곧바로 현애의 옆에 가서 앉는다.
“선배님!”
“아, 너희들 왔네.”
현애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잘 지냈어?”
“아, 잘 지냈죠.”
“잘 지냈고말고요. 이상한 녀석은 하나도 안 만났고요.”
레아는 차분하게, 사이는 정신없이 웃으며 말한다.
“그래. 나도 뭐... 잘 지냈지. 이상한 녀석한테 공격받은 것만 빼고.”
“혹시 어제 만났던 그 보라색 모자 쓴 사람, 누군지 알아요?”
레아가 목소리를 죽이고 말한다.
“아무리 찾아도 우리 학교에는 그런 사람은 잘 안 보이던데...”
“너답지 않게 왜 그래. 벌써 내가 찾아서 혼내 줬어.”
“어, 정말요?”
레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한다.
“그런 사람, 우리 학교에 있었어요?”
“맞아. 우리 학교 2학년이더라.”
“이상하다...”
레아가 머리를 긁는다.
“내가 보니까, 학교에서는 그런 모자를 쓰지도 않았고, 분수대에서 대면했을 때 살짝 보여 주던데.”
“아, 그래요? 글쎄, 그 선배는 왜 그런 짓을 했대요?”
“평소에 자존감이 좀 떨어졌다고 하더라.”
“자존심을 꼭 그런 식으로 세워야 하나.”
만화부원들이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떠들고 있는 그때.
“자, 이제 올 사람은 다 온 것 같네.”
만화부장 윤진이 목소리를 키우고 말한다.
“시간도 됐으니까 오늘의 만화부를 시작해 볼까?”
“네, 선배님!”
윤진이 활기차게 말하자, 만화부원들은 더 활기차게 답한다.
어느덧, 시간은 3시 50분.
릴레이 만화 그리기가 다 끝나고, 오늘은 남는 시간에 애니메이션 영화를 한 편 보기로 했다. 제목은 <날씨를 보는 그녀>. 작화가 꽤 유려하고, 여러 가지 촬영 기법이 동원되었으며, 줄거리 또한 감동적이기로 유명해서, 작년에는 2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박스오피스 순위권에 들었다. 또한, 팬덤 또한 탄탄하게 형성되어 있어, 지금도 여러모로 회자되는 작품이다. 러닝타임이 90분 정도 되는 관계로, 두 번에 걸쳐서 끊어서 보기로 했다.
지금은, 막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어느 스페이스 콜로니에서 처음 만나, 서로 이름을 묻는 장면. 러브라인이 막 생기려고 할 즈음으로, 팬사이트에서 뽑은 명장면 중에서도 순위권에 드는 장면으로 꼽힌다.
한참 애니메이션에 막 빠져들어 넋을 놓고 보고 있을 때...
뭔가 기척이 온 것 같은, 문밖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말이다...
“음?”
한번, 문 쪽을 돌아본다.
만화부실 출입문이, 살며시 열려 있다.
“야- 현애야-”
문밖에서, 세훈의 조그만 목소리가 들린다.
뭐지? 왜 세훈이가 나를 부르는 건가? 이 시간에? 이상하다... 지금은 도서부도 한창 하고 있을 텐데... 빨리 끝난 건가? 어째서지?
“야- 남궁현애- 잠깐만 나와 봐-”
맞다... 들리는 목소리는 세훈의 목소리가 맞다. 일단은, 나가 보기로 한다.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살며시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다가간다. 살며시 열린 문 너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야, 조세훈. 오늘 도서부 하는 날 아니야?”
일단은, 바로 나가지 않고 물어 본다. 그러자 바로 답이 온다.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오늘 도서부가 좀 빨리 끝나서, 너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와 본 거라니까? 좀 나와 봐.”
말투도 틀림없는 세훈의 말투다. 혹시나 해서, 문 앞에 가만히 서서 AI폰을 본다. 과연, 메시지가 하나 와 있다.
[오늘 도서부 좀 일찍 끝나. 주리하고 같이 갈 거야. 기다려]
메시지도 그렇고,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도 그렇고, 확실히 세훈이 맞다. 나가 보자... 일단은 나가 보자.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밀어 밖으로 나선다.
그런데...
뭐지?
세훈은 어디 갔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고...
“걸려들었네요, 선배님.”
생판 모르는 중학생 2명이 서 있다.
한 명은 검은색의 반삭 머리에 금팔찌를 몇 개 차고 있고, 또 한 명은 푸른색 머리에 뒤에는 꽁지로 묶었다. 척 보니, 둘 다 인상이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인상은 나쁘지는 않더라도, 그 속에서 나오는 독기까지는 어떻게 숨길 수 없다.
두 남학생 다, 그 자리에 버티고 서 있다. 마치, 현애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뭐야.”
현애는 순간 당황했는지, 자기도 모르게 몸에서 냉기가 스며 나오고 있다.
“너희들은 대체 누구야!”
“아, 알잖아요.”
두 남학생 중, 반삭 머리의 남학생이 건들거리며 말한다. 직감한다. 이건, 공격이다! 그것도, 2대 1 상황.
“우리는 ‘그분’이 보내서 왔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그거 말고, 나는 너희들이 누군지 모르겠는데. 이름이라도 말해 봐.”
“아, 이름이요? 좋아요. 말씀드리죠.”
반삭 머리의 남학생이, 마치 자신이 다 이겼다는 듯 말한다.
“제 이름은 성서준이라고 하죠. 미린중학교 2학년 C반으로, 여기 제 옆의 ‘호르헤 카바예로’와는 같은 반이고, 친구죠.”
현애는 서준의 자기소개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서준에게 묻는다.
“그래. 하나만 물어보자. 방금 전까지 여기 다른 남학생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애는 어디 갔어?”
“하,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죠. 여기에는.”
서준이 건들거리며 말한다.
“이 자식들, 뭐야!”
“그리고 저희한테 제대로 걸려들었죠.”
서준 옆의 호르헤가 서준을 거들며 낄낄댄다.
“너희들이 세훈이를 가장해서 나를 이리로 꼬여내려고 그런 거야?”
“반은 맞는데, 반은 아니죠.”
서준이 비웃는 웃음을 풀지 않고 말한다.
“조세훈 선배는, 도서부가 일찍 끝나, 이리로 오고 있었어요. 그건 사실이에요.”
“한번 말해 봐. 너희들이 세훈이를 어떻게 한 건지.”
서준이 말한 건 이렇다.
세훈이 도서관에서 만화부실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던 중, 서준과 호르헤는 세훈과 마주쳤다. 물론 세훈이 어디로 가는지를 미리 알고, 미리 기다리고 있던 것이었다. 세훈을 유인할 때, 서준은 자기 능력을 사용해, 주리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계획대로 세훈이 자기들 앞에 나타나자, 세훈은 바로 서준과 호르헤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서준과 호르헤가 보기에, 세훈은 자신들의 약점을 탐색하며 찾아낸 다음, 자신들을 일망타진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상황은 반전되었다.
호르헤는, 거짓을 좀 섞어, 현애가 이미 자신들에게 납치되었고, 세훈이 만약 여기서 항복한다면 순순히 풀어 줄 것이라고 했다. 그 순간, 호르헤가 원하는 그림이 나왔다. 세훈의 눈이, 분노에 사로잡혀 거세게 불타는 바로 그 모습이 말이다. 그것을 매개로, 호르헤의 능력이 발동했다. 호르헤의 능력으로, 세훈을 캡슐 안에 가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흐흐흐, 세훈 선배는 지금 여기 잘 있죠.”
호르헤는 일부러 가방 안에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꺼내 보여 주며 말한다.
“자, 선배님, 이제 선배님이 취해야 할 자세가 뭔지, 바로 나오지 않아요?”
호르헤가 든 상자를 잠시 유심히 보더니, 현애가 다시 입을 연다.
“아, 알겠네.”
“자, 말해 주시죠.”
“너희들을 쓰러뜨리기만 하면, 아무 문제 없겠어.”
현애의 대답을 듣고도, 서준과 호르헤는 아무 미동도 없다.
“훗, 과연 그럴까요?”
오히려, 서준은 낄낄대며 웃으며 말한다.
“선배님이 여기에 세훈 선배의 목소리에 이끌려 여기로 나온 순간, 우리는 이미 성공이라고요.”
“해 보라고. 너희들의 수에 그렇게 쉽게 넘어가지는 않을 테니까.”
현애도 맞받아친다. 여전히 한 주먹은 꽉 쥐고, 주변의 냉기를 흩트리지 않은 채로. 서준과 호르헤는 여유롭게 웃는다. 현애는 각오로 눈을 빛낸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08-14 15:03:22
여자중고등학교 주변에 간혹 나타나는 속칭 "바바리맨", 여자대학을 급습하는 속칭 "아담" 등의 노출증 변태성욕자가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의외로 표면적으로는 멀쩡하거나 소심하다고 하죠. 보라색 모자를 쓴 그 사람도 그와 본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일고 있어요.
오랜만에 평온이 왔나 싶은데 또 난리네요.
게다가 세훈은 서준의 목소리 변조 및 호르헤의 캡슐화 능력애 이미 당한 상태...
시어하트어택
2020-08-14 22:54:02
이제부터 일어날 에피소드는 전에 적으로 한번 나왔던 캐릭터가 다시 나오게 됩니다. 그 캐릭터도 뭔가를 하게 되니, 기대해 주시기 바라겠습니다.
SiteOwner
2020-08-17 20:14:47
읽고 있다 보니, 고등학생 때 저에게 선배의 전령 노릇을 했던 동급생이 생각납니다.
현애를 찾아온 서준과 호르헤가 현애와 동급생은 아니고 하급생이라는 것이 크게 다르지만요.
폭력을 행사해 놓고도 선배 대접을 받고 싶다? 제하로 정리해 놓은 당시 상황과 작중의 상황을 대조해 가면서 읽어 보니, 그 동급생들이든 작중의 서준과 호르헤든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자존감을 자신이 아닌 외부에서 찾으려 하고, 또한 누군가의 조종을 받는 수하라는 점에 일말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 이런 인간들은 본인들도 혼이 나야 하지만, 조종하는 그 인물도 혼내야 더욱 효과적입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주군" 이 모욕당하는 꼴을 보면 이중삼중으로 타격을 입기 마련입니다. 어차피 충신장같이 행동할 가능성도 없는 위인들이니 남은 건 손발을 고생시켜주는 것.
시어하트어택
2020-08-18 08:15:05
오너님이 잘 분석한 것 같습니다. 제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고, 괴롭힘을 당하거나 하기도 했기 때문에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머리를 혼내지 않고서 그 수족들만 어떻게 한다는 건 그냥 언 발에 오줌누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