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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 외제니!”
조제의 눈앞에 보이는, 호르헤가 캡슐 하나를 두 손가락으로 주물럭거리는, 저 모습. 호르헤는 조제의 얼굴을 보며 실실 웃고 있다.
“살려 줘! 조제! 조제!”
외제니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린다. 조제는 이를 악물고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기분나쁜 웃음소리...
“흐흐흐히히히...”
외제니의 목소리로 시작한 웃음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어그러지더니, 한 남학생의 웃음소리로 바뀐다. 듣기 기분 나쁠 정도로, 자연스러우면서도, 조제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온통 후벼파는 듯한, 그런 웃음이다. 이윽고, 호르헤의 뒤에서, 의기양양하게 웃음을 짓는 서준이 나온다. 조제는 이를 꽉 문다. 서준을 한 대 후려치고 싶지만, 지금은 참아야 한다...
“어때요, 제가 너무 흉내를 잘 냈나요?”
서준이 낄낄대며 말한다.
“말해라. 외제니를 어떻게 한 거냐!”
조제는 최대한 끓어오르려는 것을 눌러 가며 말한다.
“뭐, 들었으면 알 거 아니에요?”
서준은 화를 억누르려는 조제가 더욱 재미있는지, 일부러 눈을 가로로 찢은 것처럼 뜨고, 입꼬리는 최대한 올려 가며 말한다.
“제가 그렇게 잘 재현해 주었으면 고맙다고나 할 것이지.”
“내가 네놈들의 셈을 모를 것 같아서?”
“왜 모르겠나요, 당연히 알죠.”
조제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 호르헤가 캡슐을 만지작거리며 말한다.
“그 눈은 여전히 떨고 있네요.”
“당연하지. 외제니한테 무슨 짓이라도 한다면, 그때는 나도 모른다.”
“훗, 저희는 알 수 있죠. 외제니 선배보다 겁도 많고, 쫄기도 잘 하잖아요? 안 그래요?”
“이것들이 정말!”
말은 그렇게 해도, 조제는 확 터뜨리지를 못한다. 그걸 아는 서준과 호르헤는 더욱 재미가 올라서, 눈을 확 까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조제는 주먹만 불끈 쥘 뿐...
“자, 그럼 당장 우리 앞에서 개처럼 짖어보시라니까요?”
“외제니 선배를 구하고 싶다면 말이죠. 흐흐흐흐흐...”
서준과 호르헤는 조제를 잔뜩 약올린다. 그중 서준은 입을 하늘 높이 내밀고 ‘월월월’ 거리며 개 짖는 흉내를 내기까지 한다.
“흐흐흐, 그분 앞에서 무릎 꿇고 한번 해봤잖아요? 그러면 익숙할 텐데요.”
“이 자식들, 나를 시험하고 있나 본데...”
조제는 그래도 서준과 호르헤의 뜻처럼 좀처럼 넘어가 주지를 않는다.
한순간, 조제의 머릿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게 있다. 맞다. 서준과 호르헤, 그리고 외제니가 말하는 대로, 조제는 겁쟁이가 맞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하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감히 맞서지를 못하고, 무기력하게 무릎을 꿇었던 게 전부니까. 하지만 이제는 정말 용기란 걸 내 보고 싶다... 정말... 정말. 하지만, 조제는 또 한탄한다. 왜 자신은 이럴 때면 항상 마음속으로 움츠러들기만 하는 건지...
이런 내가 싫다...
이런 내가...
이런 내가...
“흐흐흐...”
바로 그때.
또다시, 호르헤의 음흉한 웃음소리가 들린다.
“이걸 보고도, 가만히 있으려나 모르겠군요?”
호르헤의 양손... 한 손에는, 어느새 뚜껑이 열린 흰 상자가 들려 있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스무 개가 넘는 캡슐들, 그리고... 또 한 손에는, 조제의 오른손이 들려 있다! 조제의 오른손을 높이 들어 보여주며, 호르헤의 입꼬리는 더욱더 올라간다. 조제의 눈이 축 처진다.
“흐흐흐흐... 이 캡슐들, 이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아시겠죠?”
“뭐... 뭐야아아아!”
그때까지는 절제되어 있던 조제의 목소리가, 확 높아진다. 점점 붉어지는 얼굴, 그리고 끈적끈적해지는 이마, 그때를 놓치지 않고, 서준도 나선다.
“조제! 조제! 도와줘!”
“살려줘... 살려줘!”
“나 좀 꺼내줘, 꺼내줘, 제발!”
무려 스무 명이나 되는 동급생들의 목소리를, 따라한다. 그것도, 잔뜩 과장해서 말이다. 조제를 보고, 음흉하게 웃어 가며!
“이... 이 자식드으으으을!”
드디어, 수천 년이나 잠자던 화산이 폭발하듯, 조제가 눈을 부릅뜨고 달려든다.
“외제니! 아... 안돼!”
자신을 향하여 똑바로 달려오는 조제를 보고도, 호르헤는 태연하다. 아니, 오히려 만족감에 웃는다. ‘이제 다 됐다’는, 크고도 큰 만족감이, 호르헤를 감싼다. 상자를 앞에 놓고, 캡슐을 하나 꺼내든다.
“흐흐흐흐흐... 됐다. 성공이다! 극대노의 저 표정! 마침내, 내 손에!”
그 순간, 조제의 눈앞이 팽팽 돌기 시작한다. 서준과 호르헤가 서 있는 모습, 주변의 풀과 나무, 육교의 모양이, 흐릿흐릿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색채의 소용돌이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뭐... 뭐야!”
호르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왼손... 왼손도 없잖아!”
“왼손? 저 선배 왼손?”
서준이 다급히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저... 저기 좀 봐!”
서준이 뭔가를 가리키며 다급히 소리 지른다.
“왜 그래?”
호르헤가, 서준이 가리킨 곳을 돌아보는 그때...
“뭐... 뭐야!”
조제의 왼손이, 뭔가를 어지럽게 흩어 놓고 있다! 다름아닌 그 흰 상자. 곳곳에, 캡슐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다... 그리고 캡슐들의 상당수가 열려 있다...
“빠.. 빨리 저걸 다 주워 담아!”
호르헤가 서준에게 급히 말한다.
“나는 이 선배를 마저 처리할 테니!”
“처리... 라고? 그렇게는 안 되지.”
빨려들어감을 느끼는 순간.
조제는 한마디 한다.
“이제 나도, 외제니에게 부끄럽지 않게 됐구나.”
그 말을 마치자마자, 조제는 캡슐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이... 이... 이게...”
서준과 호르헤의 눈 앞에 펼쳐진, 믿지 못할 광경.
육교 밑 길바닥에 열댓 명의 미린고, 미린중 학생들이 주저앉아 머리를 흔들거나, 자리에서 일어서며 옷을 툭툭 털고 있다. 그중에는 현애, 세훈, 주리도 있다. 물론, 외제니도 있다.
“야! 상자 똑바로 봐야 할 거 아냐!”
“뭐야! 나는 내 능력 쓰는 데 집중하고 있었어! 조제 선배를 제대로 봐야 할 거 아냐, 네가!”
서준과 호르헤가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초겨울의 차디찬 기운이, 서준과 호르헤를 휘감는다.
“다시 볼 줄 몰랐는데, 너희들.”
서로 드잡이하고 싸우던 서준과 호르헤가, 돌아본다.
“이... 이이익!”
눈앞에 현애가 서 있다. 그리고, 그 뒤에, 세훈, 주리, 외제니도!
“오... 오지 마시죠, 선배님들.”
그 뒤에 서 있는 자기 동급생들은 아랑곳하지도 않고, 서준과 호르헤는 자기 선배들만을 의식한다. 호르헤는 덜덜 떨면서도 캡슐 하나를 앞에 내밀어 보인다.
“이... 이... 이게 뭔지... 모르는... 모르는 거, 아니죠?”
그러든 말든, 현애는 한발 한발 서준과 호르헤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만 더 오면!”
“사... 살려줘! 외제니! 외제니! 살려 줘!”
또 한번, 서준이 조제의 목소리를 따라한다. 이번에도, 아주 듣기 나쁜, 기분 나쁜 추임새를 넣어서. 서준과, 호르헤의 눈에 보인다. 외제니의 얼굴이 붉어지는 모습이.
“너희들 이... 이 자식들...”
“좋아, 좋아! 극강의 분노를 보이면 또 걸려드는 거다! 서준아, 한번 더!”
호르헤가 다시 한번 호기롭게 말하지만...
“끄읍...”
뭔가에 막혀 버린 듯.
서준은, 갑자기 말이 없다.
아니, 입을 열지를 못한다.
“왜,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호르헤가 황급히 입을 감싸 쥔 채 말을 못 하는 서준을 감싸고 뭐라 해 보려는데...
“그 입, 더럽네그래.”
현애와 세훈의 뒤에서, 주리가 팔짱을 끼고서 말한다.
“혀를 고정해 놓으면, 말을 꺼낼 일도 없겠지. 안 그래?”
“정말... 보자 보자 하니까...”
호르헤가 현애, 세훈, 주리 쪽을 다시 돌아본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로웠던 얼굴은 어디 가고, 마치 신호등처럼 붉어진 얼굴, 완연히 부릅뜬 두 눈, 잔뜩 악문 위턱과 아래턱. 처음 보는 사람이 보면, 아까의 호르헤와 지금의 호르헤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고 인식할 정도다.
“똑똑히 보라고!”
호르헤는 악에 받쳐 소리 지른다.
“아직... 아직 조제 엔히크스는 내 손 안에 있어! 허튼짓... 허튼짓하기만 하면...”
뭔가 더 말하려다가, 호르헤는 뭔가 감지한다. 누군가가 호르헤의 능력을 증폭시켜 주고 있다!
“하... 세훈 선배... 고마워. 본의는 아니겠지만... 이걸로... 분노를 보이기만 해도 나한테 빨려들어 오는 거라고! 알겠어? 히히히히히...”
“뭐라는 거야, 저 녀석.”
“그러게.”
현애와 세훈이 호르헤의 발악에는 관심 없다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호르헤는 폭발한다.
“짜부라뜨려 버리겠어! 히히히... 이렇게 말이야!”
호르헤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손가락을 까딱하려는데...
안 된다!
“으... 뭐야...”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금속이 된 것만 같이...
“외제니 선배! 당신...”
금속이 되어 굳어버린 팔, 그리고 조용히 웃고만 있는 외제니를 잠시 번갈아보다가, 호르헤는 여전히 입을 틀어막은 채 말을 못 하는 서준을 본다. 어느새, 조제도 캡슐 안에서 나와, 머리를 감싸고 앉아 있다.
“서준아... 같이 가자! 아무래도 지금은 후퇴... 후퇴해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서준과 호르헤의 두 다리가, 얼음조각이 되어, 땅바닥에 붙어 버렸다. 마치 사람의 상반신만 똑 떼서 하반신을 조각한 얼음조각상에 붙여 놓은 것만 같이.
“서... 선배... 도대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앞에 서 있는 현애를 보고서는, 온몸이 굳어 버린 호르헤는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말하고, 말을 못 하는 서준은 그저 공포 섞인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나는, 솔직히 말해서, 너희들하고는 별 접점도 없고, 그 후드 쓴 녀석 아니었으면 엮일 일도 없거든?”
“서... 선배... 제발... 용서... 용서해... 주시면...”
“용서? 나는 용서받을 게 별로 없는데? 이것도 그냥 놀이로 치부하면 그만이지.”
서준과 호르헤의 눈이, 일말의 희망으로 잠시 빛난다.
하지만.
“용서는, 저 뒤에 있는 너희 동급생한테 빌어.”
순간적으로 찾아왔던 희망이, 서준과 호르헤의 눈에서 다시 사라진다.
“자! 그럼 우리는 가 볼까?”
현애의 뒤를 따라, 세훈과 주리, 조제와 외제니가 자리를 뜬다. 뒤에서 가는 조제와 외제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맞잡은 손을 꽉 잡는다. 그 모습이 싫지는 않았는지, 현애는 그걸 보며 살며시 미소짓는다.
그리고 서준과 호르헤는 본다. 두 눈을 이글거리며, 주먹을 꽉 쥐고 자신들에게로 바로 다가오는 동급생들을.
한편, 먼발치에서, 금발의 남학생이 육교 아래서 벌어진 광경을 지켜보다가, 발걸음을 돌린다. 교복 위에는 초록색 후드티를 걸치고 있다. 손에는 붉은 탄환이 2개 들려 있다.
그 남학생은 바로, 미린고등학교 1학년 G반, 앙드레 블레즈.
“안되겠는걸, 이거...”
앙드레는 혼자 중얼거린다.
“더 강한 녀석을 찾아봐야겠는데...”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0-08-19 15:19:36
섭씨 38도의 폭염경보 상태인데, 읽고 있는 도중에 섬뜩하게 추워지다가 읽고 나니 시원해졌어요!!
역시 상대를 얕보면 안되는 법. 서준과 호르헤의 능력은 분명 무서운 것임에 틀림없어요. 타인의 목소리를 흉내낸다든지, 사람을 캡슐 속에 가두어 버리는 건 마음만 먹으면 치명적인 힘이 되지만, 상대를 얕보았고 그 상대가 신체 일부를 분리하여 운용가능한 조제 엔히크스라는 게 문제였어요. 그들이 모아둔 캡슐을 담은 상자는 조제의 왼손이 헤집어 놓고, 외제니의 금속화 능력과 현애의 냉기 능력이 그 둘을 고정시켜 버리고, 세훈의 능력강화가 호르헤에게 오히려 독이 되었고...
싸우는 모습은 별로 안 좋아하지만, 서준과 호르헤가 주먹세례로 보답받는 것만은 보고 싶어지네요.
그것도, 미소를 지으면서.
시어하트어택
2020-08-20 08:16:43
마드리갈님이 즐기면서 읽었다는 게 벌써부터 눈에 선합니다.
하지만 즐거움도 잠시, 이제는 중요한 대결을 앞두고 있기에 결코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되겠죠.
SiteOwner
2020-08-24 19:15:27
교토삼굴(狡兎三窟)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토끼처럼 적에 맞서 싸울 수 없고 피하는 것만 선택가능한 입장에서도 이렇게 여러 경로나 플랜B를 확보해 두는 것이 중요한데, 남을 공격하는 입장에서 만약의 시나리오를 상정하지 않는다면, 결과는 좋지 못한 방향으로 수렴되기 마련입니다. 서준과 호르헤는 자신들의 계획이 어그러지자 그냥 그대로 확 무너져 버리는군요. 그리고 그 다음은 신나게 얻어터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 확정. 그렇게 당해도 또 같은 짓을 한다면 몸이 안 남아날 것 같습니다만...
앙드레 블레즈가 문제의 후드 쓴 남자인 건가요.
그리고 계속 자신의 대리인을 찾고 있군요. 본인등판에 따른 리스크는 역시 짊어지기 싫은 건가 싶기도 하고...
시어하트어택
2020-08-24 23:21:54
맞습니다. 웬만큼 임기응변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이 계획해 둔 게 바닥나면 무너지고 말겠죠.
앙드레도 이제 직접 나설 수밖에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