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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MOPOLITAN] #3 - One Step on the Road (2)

Lester, 2020-11-16 19:15:28

조회 수
140

One Step on the Road - 천릿길도 한 걸음




레스터는 별안간 잠에서 깼다. 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긴 했지만 단순히 늦잠을 자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예전에 살던 집을 떠나 존이 있는 릴리퍼트 아파트로 이사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아니, 아주 아니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환경에 매우 민감한 경우가 있었고, 레스터는 유독 심한 부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리틀 아시아는 생각보다 시끌벅적하지도 조용하지도 않았다. 레스터를 깨운 것은 일상 자체는 크게 변한 게 없음에도, 무언가 크게 바뀌어버리고 말았음을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지만, 정작 그 무언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하기 그지없는 현실이었다.

"......"

레스터는 침대에서 비척비척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를 했다. 찬물을 맞으며 정신을 가다듬다 보니 문득 존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레스터의 방에 어느새 쳐들어와서 그의 안경을 인질(?)로 잡고는 기묘한 제안을 했던, 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가 크게 바뀌어버렸던 그 날이었다. 순간적으로 레스터는 화장실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방 안엔 아무도 없었고 끄지 않은 세면대에서 물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이 방이 존의 방이라고는 해도, 정작 주인은 여기보다는 다른 곳에서 먹고 지내는 일이 더 많았다. 이래저래 사건사고를 달고 다니는 이상 본거지로 쉽게 돌아올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하긴, 날마다 그렇게 난장판이 벌어지지도 않을 거고."

레스터가 안심하고 세면대의 물을 끄는 순간 '응, 아니야'라고 대답하듯이 레스터의 핸드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존이 다른 건 다 늦어도 상관없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핸드폰은 재깍재깍 받으라고 했기에, 레스터는 부리나케 달려가서 핸드폰을 받았다.

"네, 레스터입니다."

"좋아, 시킨 대로 바로바로 받는구만."

"...그 장난 친 지가 벌써 3일째야."

레스터는 짜증난다는 듯 봐달라는 듯 애매하게 말했다. 물론 혹시나 존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목소리도 낮췄다. 하지만 그것이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존의 목소리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런 경찰 사이렌과 총소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잠깐, 뭐야? 지금 경찰한테 쫓기고 있는 거야?"

"알 것 없고, 지금부터 정확히 30분 안에 프라임 파크, 사우스 23th 스트리트의 뉴포트 주차장Newport Car Park까지 와. 2층이다. 똑똑히 들었지? 몇 분이라고?"

"30분."

"어디?"

"뉴포트 주차장 2층. 프라임 파크의 사우스 23th 스트리트."

"좋아. 씨발! 차 똑바로 몰라니까!"

전화는 긴박한 욕설과 함께 끊겼다. 마지막 말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탄 사람에게 한 게 분명했다. 그걸 들으니 더더욱 서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스터는 대충 옷을 챙겨입고 릴리퍼트 아파트의 주차장으로 나왔다. 입주민이 별로 없다보니 주차장에 있는 차들 대부분은 존의 것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뭘 타고 갈지 고민할 시간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레스터는 길거리로 달려나가 택시를 잡고 곧장 존이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뉴포트 주차장은 프라임 파크 근처에 있긴 했지만 큰 건물들에 둘러싸여서 그런지 도시에서 가장 큰 공원이 보이진 않는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인근에선 굉장히 큰 편에 속하는지 무려 4층까지 있었다. 레스터가 택시에서 내려 2층까지 걸어 올라가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아슬아슬하게 28분 안팎이었다. 하지만 주차장 안을 둘러봐도 존이나 그 일행인 듯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약속했던 30분이 지나고 다시 10분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없자, 레스터는 점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설마 경찰에게 잡힌 건가?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지? 설마 죽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문득 레스터는 존과의 인연은 그 출판사에서의 일이 전부인데도 그렇게까지 걱정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전부터 친하게 지내온 것도 아닌데, 걱정할 필요가 있나? 그래도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그건 그거고, 그 이후에 별다른 일도 없었잖아? 마피아들로부터 구해주겠다고 집까지 내줬잖아? 거기 아니라도 살 수 있고, 그 이후에 마피아가 진짜로 날 노린다는 보장 있어? 그냥 겁주는 거 아닐까? 내가 특별히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휘몰아치다 한 쪽으로 쏠리기 시작하던 순간, 아래층에서 어떤 차가 타이어 꺾는 소리를 시끄럽게 내며 들어왔다. 레스터는 직감적으로 존이라고 생각했다. 그 차가 울퉁불퉁한 원형 통로를 통해 2층으로 올라오자, 레스터는 자기 직감이 맞았음을 알았다. 존이 두 사람을 태우고 만신창이가 된 검은색 세단을 몰고 오고 있었다. 레스터가 저도 모르게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마냥 달려나가자, 존은 곧장 차를 세우더니 차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그래, 그래, 미리 와 있었다니 다행이네. 일이 좆같이 꼬이다보니 늦어서 미안하다."

존이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사과를 잊지 않자 레스터가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됐길래 그래?"

"가면서 설명할 테니까, 얼른 차나 꺼내와. 차 키는 여기 있어. 나는 짐을 내려야 해서 말이야."

레스터가 차 키의 버튼을 눌러 확인해보니 이 상황에 전혀 걸맞지 않게 깜찍한 분홍색 SUV였다. 레스터가 당황하면서도 차를 끌고 오니 존과 정장을 입은 두 복면의 남자는 걸레가 된 세단에서 묵직한 가방들을 하나씩 꺼내고 있었다. 천하의 존도 레스터의 차를 보자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유치원이냐?"

"나도 몰라!"

"뭐, 됐다. 의심은 확실히 받지 않겠네. 어서 짐이나 실어."

레스터가 트렁크 뚜껑을 열자 존과 두 복면의 남자는 커다란 가방을 트렁크에 넣고는 각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존이 조수석으로 들어오자 뒤에 앉은 두 남자가 그제서야 복면을 벗었다.

"휘이~ 드디어 안심하겠구만."

"그치? 그치? 정말 가슴 떨려 죽는 줄 알았다니까. 이렇게 크게 한 탕 해보는 게 꿈이었는데, 소원을 이뤘네. 어디서 그랬잖아. 꿈은 이루어진다!"

"그래, 그래, 네 똥 굵다. 여기까지 왔는데 잡히면 참 해피 엔딩이겠다, 그치?"

존이 송곳 같은 핀잔을 던지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레스터는 그제서야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세 사람이 원래 아는 사이인지 '계약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딘가를 '털고' 왔고, 레스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도주책'을 맡게 된 것이었다. 레스터의 몸 속에 긴장감이 끓어올랐지만, 한편으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가 스릴을 느끼는 건가? 레스터는 짐짓 냉정한 척하며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면 돼?"

"피너츠필드Peanutsfield의 스미스 애버뉴로 가. 그 인근의 골목에서 정리를 할 거니까."

존은 그렇게 말하고는 뒷좌석의 손님들에게 말했다.

"너희들, 주차장 나갔을 때 경찰 있다고 손 흔들고 그러면 안 된다?"

"염려 마십쇼, 대장!"

두 사람이 호언장담했지만 존은 못 믿겠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앞을 봤다. 레스터가 분홍색 SUV를 몰고 주차장을 나오자마자 그 앞을 경찰차가 지나갔지만, 존은 태연하게 창문을 내리고는 담배를 피웠다. 의심을 살 수도 있는 양복 윗도리와 넥타이는 어느새 벗어서 무릎 위에 올려두고 있었고 소매도 팔뚝까지 걷어올린 상태였다. 그걸 보자 뒷좌석의 두 사람도 황급히 윗도리와 넥타이를 벗었다. 허둥대는 걸 보니 왜 존이 그들을 못 미더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 동안 레스터는 여기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홍등가인 피너츠필드로 차를 몰았다. 레스터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조용히 차를 모는 것밖에 없었다. 큰 길이라 차가 신호등에 막히자, 레스터가 의심을 풀기 위해서였는지 물었다.

"혹시 좋아하는 라디오 채널 없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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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모 게임의 멀티플레이에서 죽을 쑤다 보니, 시간이 날 때마다 차라리 이렇게 글을 쓰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화는 최대한 집중하고 써서 그런지 특별히 어느 대목에 무슨 의미를 담아냈다고 딱히 떠오르는 부분이 없네요. 의미가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겠지만요. 말 그대로 무아지경인듯. 액션씬을 넣을까 했는데 꼭 필요한 장면은 아닌 것 같아 뺐습니다.
Lester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4 댓글

마드리갈

2020-11-17 00:07:56

화장실에서 무엇인가를 할 때 전화가 울리면 정말 난감하죠.

손을 씻는 중이면 그나마 낫지만, 용변을 보는 중이라면, 그것도 막 시작해서 멈추면 안되는 경우에 울려오면. 게다가 그냥 안부전화도 아니고 급박한 일이면 정말 곤란해요. 그것도 이 세계에서는 특성상 대사건으로 이어질 확률도 높고...


레스터의 자동차인 분홍색 SUV, 그리고 상대를 어린애 보듯 말하는 존의 모습이 꽤나 웃기게 보여요. 분명 심각한 상황에 직면하고 있는데 기묘하게도...

Lester

2020-11-17 17:51:03

현실이 아니니까 그렇겠죠. 현실이 아니니까 적절한 타이밍에 전화가 오고, 차가 막히는 일 없이 제 때에 도착하는 거죠. 무엇이 대사건으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점도 현실이 아니니까 좀 더 심각해질 수 있는 일이고.


그리고 분홍색 SUV는 레스터의 자동차가 아닙니다. 레스터는 분명히 택시를 타고 갔다고 언급이 되어 있고, 존도 열쇠를 주긴 했지만 그게 '그런' 차일지는 몰랐다는 반응을 보이는 걸로 봐서 제3자(아마도 계획을 세운, 이른바 범죄 코디네이터)나 다른 도주책이 준비했다고 보는 게 자연스럽죠. 그거하고 별개로 존이 우습게 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좀 웃기게 표현한 건 사실입니다. 나중에 사건이 '전문적'으로 심화되면 이런 개그스러운 장면은 빼고 심각한 장면을 많이 넣을 겁니다.

SiteOwner

2020-12-29 18:56:22

분명 정신없는 상황인데, 묘하게 한편의 개그 버디무비를 보는 인상이 들고 있습니다.

기묘하게 여기저기서 집중적으로 방해하듯이 일어나는 일과 그 안에서 쫓겨다니면서 "내가 대체 뭘 위해서 이 짓거리를 하는 건가" 하는 자괴감이 엉켜서, 이 상황이 끝나면 참으로 더러운 하루였다 하고 쓴웃음을 짓는...


분홍색 자동차 하니까 엘비스 프레슬리의 핑크 캐딜락이 생각나기도 하고, 패리스 힐튼의 벤틀리 컨티넨탈 GT 플라잉스퍼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확실히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홀딱 깨는 색깔일 것입니다.

Lester

2020-12-31 19:49:16

사실 저런 개그 장면들은 약간 의도적으로 삽입하고 있긴 합니다. 딱 1회만 연재했던 This is the Vice처럼 마음만 먹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심각한 장면으로만 채울 수도 있습니다만, 본 작품은 주제도 주제거니와 분위기가 너무 심각해지는 걸 피하기 위해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개그 장면을 넣고 있는 것이죠. 이러나 저러나 범죄미화물이란 욕은 못 피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하다못해 지나치게 비정하거나, 잔인하거나, 심각한 장면은 가급적 피하려고 합니다. 때가 되면 봉인을 해제하겠지만요.


말씀을 듣고 보니 분홍색은 정말 깨긴 하네요. 더구나 존이 의심을 피하겠다고 담배 피는 일반인 연기를 하는데 그런 행동을 분홍색 차에서 한다라... 유치원 개그도 있으니 노란색으로 할 걸 그랬나 싶지만, 그냥 분홍색으로 밀고 가야겠네요. 플롯 아머 덕분에 잡히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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