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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4시, 미린초등학교 앞 주택가.
여느 날과 달리, 민은 친구들과 같이 가지 않고, 혼자서 길을 걷고 있다. 복장은 평소 입는 빨간 점퍼 차림이다.
“어? 너 오늘은 왜 혼자 가?”
같은 반 친구 우린이 민을 보고 아는 척을 한다.
“평소에는 다른 애들하고 같이 가더니...”
“아, 그런 일이 있어!”
“어, 정말?”
민이 한번 고개를 끄덕이자, 우린은 아쉽다는 듯 웃는다.
“아... 아쉽네. 그럼 또 봐!”
우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는, 민은 또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사실 뭔가 일이 있다든가 하는 건 아니지만, 오늘은 그냥 바로 집으로 가고 싶어졌다. 그렇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조금 걷다 보니, 길가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게 보인다.
가만 보니, 미린고등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 두 명이 서 있다. 잘 아는 얼굴이다. 민은 바로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어? 현애 누나, 세훈이 형 아니야?”
“민이잖아!”
먼저 아는 척을 하는 사람은 세훈이다.
“웬일이야? 오늘은 다른 친구들하고 혼자 안 다녀?”
“아... 그런 일이 있어.”
“그런 일이라니?”
이번에는 현애가 묻는다.
“에이, 몰라도 돼. 뭐 그런 것까지 알려고...”
민이 막 얼버무리려는 바로 그때.
“어, 여기 있잖아!”
또다른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얇은 푸른 재킷을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 대학생 한 명과 그의 친구로 보이는 비슷한 키의 자주색 셔츠를 입은 짧은 검은 머리의 여자 대학생 한 명이 나란히 서 있다. 갈색 머리의 남학생은 민과 현애, 세훈을 보고 바로 손을 흔든다.
“서언이 형 아니야!”
먼저 말하는 사람은 세훈.
“여기는 웬일이야?”
“아, 친구하고 카페 갔다 오는 길이야.”
“카페?”
“어, 맞아. 이 친구가 카페를 너무 좋아해서, 매번 친구들 데리고 카페 탐방을 다니거든.”
“어, 정말?”
현애와 세훈이 신기한 듯 그 여학생을 보자, 남학생은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는다.
“아, 그리고 내가 왜 여기 왔냐면...”
바로 그때, 또 누군가가 이쪽으로 온다. 갈색 단발머리의 군청색 후드 점퍼를 입은 여자다.
“아, 반디 고모! 여기요!”
서언이 보자 반갑게 외친다.
“누나잖아!”
“반디 씨! 여기요!”
민과 현애, 세훈도 다들 반디를 보고 인사한다. 그리고 서언 옆의 남학생도 돌아보더니...
“반디 선배 아니세요?”
“민이하고 서언이, 여기 있었네?”반디는 민과 서언을 한 번씩 보며 인사한다.
“그런데 둘 말고도 여기 왜 모여 있는 거야?”
“아, 그게... 그렇게 됐죠.”
세훈이 대충 얼버무린다.
“뭐... 그래, 좋아. 그러면...”
“잠깐만...”
그 여학생이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중간에 말을 막는다.
“여기 얘가... 반디 선배님 동생이라고요?”
“응, 맞아.”
여학생이 보기에도, 민은 키가 좀 크긴 하다. 여학생 자신보다 아주 약간 작을 뿐이다. 그것만 빼고 보면 아무리 봐도 초등학생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서언이는 반디 선배님 조카인데...”
여학생은 잠시 혼란이 온 듯 머리를 잠시 싸맨다.
“그럼 저 애가... 서언이 삼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안 그래?”
반디는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아... 네...”
남학생은 어색하게 웃는다.
“그럼... 다들 또 봐. 우리는 또 어디 가야 하니까.”
민과 반디, 서언은 현애, 세훈, 남학생과 인사하고는 갈 길을 간다. 셋이 시야에서 보이지 않자, 현애가 그 여학생에게 말을 건다.
“저기, 카페 다니는 걸 좋아하신다고요?”
“아... 좋아하죠, 많이.”
“혹시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미린고등학교 1학년의 남궁현애라고 합니다.”
“아, 저는 미린대 경제학과 2학년에 다니는 레나 밴더빌트입니다.”
“이 동네 카페는 여러 군데 가 봤는데, 특별히 추천하는 곳 있으면 한번 같이 가 봐도 되겠...죠?”“그럼요. 언제든지.”
“그럼 내일 만나죠!”
다음 날 토요일 오후 1시.
여느 날처럼, 민은 친구들과 오락실에서 놀고 점심식사를 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이다. 막 집에 들어가기 위해 미린역 남쪽에 있는 카페거리를 지나가는데...
“아니, 멋대로 제 커피를 바꾸면 어떡해요!”
“그러지 말고 현애 양, 제 말 좀 들어 봐요. 여기 커피는...”
익숙한 이름인데?
민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본다.
역시나.
현애와 레나가 어느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다. 둘은 서로 금방이라도 잡아먹기라도 할 듯,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응? 그런데 왜 고성을 지르는 거지?”
민은 궁금했는지, 좀더 가까이 가서, 하지만 거리를 두고 살펴보기로 한다. 가까이서 보니, 현애와 레나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져서, 서로 노려보고 있다. 얼핏 보니 초능력의 아우라가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현애뿐만 아니라, 레나에게도? 잠깐만, 그렇다면 레나도 초능력자라는 건가?
“잠깐, 이거 꽤 지켜볼 만하겠는데?”
민은 구경이나 할 겸 해서 한 걸음 더 가까이 가서 본다. 도대체 뭘 멋대로 바꿨다기에 저렇게 싸우는 건가 궁금하다.
“아니, 레나 씨, 제가 아이스 아메리카노 시켰잖아요! 알고서도 이렇게 한 거예요?”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요! 여기 원두는 따뜻하게 마셔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고요! 그것도...”
한눈에 보기에도, 레나는 목에 힘을 가득 주고 핏발을 세우고 말한다. 친구들과 놀 때의 모습보다는 떼를 쓸 때의 모습에 더 가깝다. 적어도 민이 보기에는 그렇다.
“아무리 그래도 멀쩡히 마시려던 걸 이렇게 뜨겁게 만들면 기분이 좋겠어요?”
“현애 양, 제 말 좀 들어 봐요. 분명히, 아까 카페 들어가기 전에는 뜨거운 걸로 같이 마시기로 하지 않았어요?”
“저기 레나 씨. 그건 기분 맞춰 주느라 한 말이고요.”
순간 찬 기운이 확 올라오는 게 민의 눈에도 보인다. 현애 앞에 있는 커피잔의 커피가 어느새 다시 얼음이 가득한 잔으로 변했고, 그 앞의 테이블에도 서리가 낀 듯 하얗게 변했다. 심지어 그 찬 기운은 레나의 앞에 있는 커피잔을 거의 둘러싸고 있다!
“지금 뭐 하는 거죠?”
레나의 목소리도 확 오른다. 또다시 민의 얼굴에 닿는다. 이번에는 뜨거운 기운, 눈앞에서 불길이 화르륵 불타오르는 듯한 기운이다. 설마, 레나도 초능력자였다는 건가? 그렇다면, 아이스 커피가 저렇게 뜨거워진 것도...
“지금 이렇게 하면 원두의 맛이 변질이 된다고요. 조금이라도 찬 기운에 닿게 되면...”
“뭐라고요, 변질?”
현애가 잔뜩 열이 받은 듯 소리 지른다.
“그거 지금 레나 씨가 할 말이 아닌 건 알고 있어요?”
그러면서 현애는 커피잔에 다시 손을 가져가려 하는데...
“아, 앗... 뜨뜨뜨...”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현애가 급히 커피잔에서 손을 뗀다.
커피잔 안의 커피가, 부글부글 끓기 직전이다!
“레나 씨. 자꾸 이러시면...”
“이러시면 뭐요? 그러면 처음부터 제 말에 따라서 뜨거운 커피도 마셔 보고 했어야지!”
“뭐? 지금 말 다 했어?”
현애도 더 이상 못 참았는지 쾅- 하고 테이블을 내려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남이 아이스커피 먹겠다는데 자꾸 감 놔라 배 놔라야! 이러려고 같이 카페 온 줄 알아?”
큰일났다. 민은 침을 꿀꺽 삼킨다. 춥다. 주위가 초겨울이 된 것 같다. 날카롭게 얼려 버리는 그 감각이 온몸을 덮는다. 위에 점퍼를 입고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바로 온몸을 웅크려야 할 판이다!
“좋아, 정 그렇게 나온다면...”
이번에는 화르륵거리는 기운이 민의 얼굴을 스친다. 금방이라도 화상을 입을 것만 같은 열기가 둘이 앉은 테이블을 넘어 주변을 다 태워 버릴 듯 타오른다!
“아니, 레나 씨, 그러니까, 애초에 상대방의 말을 좀 들어 주고 했어야지! 자기 고집만 세 가지고는...”
“뭐? 고집이 어째?”
레나가 현애의 멱살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이럴 수가! 큰일났다. 이제는 눈에도 보일 정도로 냉기와 열기가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다. 벌써 주변 화단의 꽃들은 서리를 뒤집어썼거나 화르륵거리는 열기에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고, 카페의 난간도 벌겋게 달구어진 게 반, 얼음을 뒤집어쓴 게 반이다. 두 사람 앞에 놓인 커피가 부글거리다가 통얼음이 되었다가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거기에, 카페 안까지 퍼지기 일보직전인 냉기와 열기는 덤이다!
“지금 말 다 했어? 자세부터가 틀려먹었는데 어떻게 커피의 맛을 가르쳐 줘?”
“뭐가 어째?”
현애와 레나는 서로 주먹다짐만 안 할 뿐, 대치상태를 풀지 않는다. 점점 더 거세지는 냉기와 열기, 민의 피부에 닿기에, 마치 사막의 뜨거운 모래폭풍과 빙하지대의 눈보라가 동시에 때리는 것 같다. 큰일났다. 냉기와 열기가 이제 거리로까지 발산하고 있다.
그때.
뭔가 날아오는 것 같다.
“읏...”
열기 덩어리가 허벅지에 닿았다. 뜨겁다!
“앗, 뜨뜨뜨...”
이대로는 안 되겠다.
민에게는 아주 사소한 것이지만 한번 해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어... 엇?”
둥둥 뜬다...
현애와 레나, 그리고 테이블, 커피잔까지.
한순간에 확 떠올라 버렸다...
“누... 누구...”
그렇게 말하지만, 현애는 누가 이랬는지 대략 짐작이 간다.
돌아보니...
“야! 민이 너 왜 거기 있어!”“아니, 왜. 염동력 좀 썼어.”
민은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고는 현애와 레나를 올려다본다. 겉으로는 그냥 웃고만 있지만,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게 ‘왜 그런 걸로 싸우냐’는 말을 하는 것 같다.
“왜 왔냐니깐?”
“그만. 다들 좀 그만 싸우고. 이러려고 다들 카페 왔어?”
“아니, 아니. 그런 게 아니고, 커피에는 원두가...”
레나는 여전히 진정되지 않았는지, 목소리를 다시 높이려는데...
“어... 어엇?”
레나 혼자서 높이, 더 높이 올라간다. 마치 풍선이 올라가는 것처럼.
“나... 나 좀 놔 줘... 안 그럴 테니까...”
“이런 거 가지고 안 싸울 거야?”
“그... 그래! 그러니까 나 좀...”
하늘 높이 뜬 레나는 다급했는지, 울상을 하고서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애원한다.
“나 좀... 여기 좀 내려 줘!”
“좋아.”
현애와 레나, 둘 다 땅에 다시 발을 딯는다. 거의 동시에.
“휴-”
둘 다 안도했는지 숨을 크게 내쉬지만, 레나가 내뱉는 게 훨씬 더 크다. 여전히 그 숨결에서는 열기가 느껴진다.
그리고서 돌아본다...
아무 말 없이 현애와 레나는 1초간을 서로를 노려보고는, 아무 말도 없이 돌아서서 등을 맞댄다. 그리고서 막 돌아서려는 둘에게서, 다시 또 냉기와 열기가 발산되기 시작한다...
그때.
“엇-”
또 뭔가 강하게 잡아당긴다. 둘을.
“야! 민이 너 또 왜...”
“내가 잘 아는 데 있는데, 가 볼래? 둘 다 좋아할 것 같은데...”
“그... 그래.”
현애와 레나는 반쯤 민의 염동력에 이끌린 채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민을 따라간다.
그리고 다음 날, 일요일.
오늘도 친구들과 놀고 집에 돌아가던 민의 눈에 또 현애가 보인다.
그리고, 레나가 옆에 같이 있는 것도.
다들 어제 싸운 건 싹 잊어버렸는지 싱글벙글 웃고 있다.
“어? 둘이 많이 친해졌나 봐?”
“하하하, 레나 씨가 커피에 대해서 좀 많이 가르쳐 줬지.”
“어, 그래?”
“나도 마찬가지야. 현애한테서 많은 걸 배웠어.”
“잘 됐네!”
“그래서 결론 내린 건데.”
현애와 레나가 동시에 말한다.
“결론? 그 결론이 뭔데?”
“역시 차가운 건 내게 안 어울려. 이런 여름이라도 뜨거운 커피가 내겐 딱이야.”
“나? 나는 저기 빙하 한가운데 떨어뜨려 놔도 아이스커피 먹을래.”
“에이, 그럼 그렇지.”
민은 김빠진 소리로 둘을 보며 말한다. 하지만 별로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안 싸우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만약에 또 싸우는 게 보인다면, 어제처럼 할 것이다. 그러고서 둘이 가는 뒷모습을 본다.
그래도 안 싸우니 좋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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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써 본 단편입니다.
뜨거운 커피와 차가운 커피에서 영감을 얻어 손이 가는 대로 써내려갔는데, 재미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SiteOwner
2021-04-18 22:21:13
자기가 마시고 싶은대로 마시면 되지, 뭘 저렇게...
레나 밴더빌트가 잘못한 게 명백합니다. 꼭 저렇게 타인을 가르쳐야 되는 건지...
반감이 들다 보니 저라면 결코 우호적으로 대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둘이 어떻게 화해한 것 같으니 다행이라 할까요.시어하트어택
2021-04-19 00:21:48
그래서 남을 존중하려는 태도가 중요한 거죠. 저렇게 존중 못하고 가르치려고만 하는 걸 못 버리면 나중에 '꼰대' 소리 듣게 되는 거고요... 쉬우면서도 쉽지 않지요.
아, 저는 아이스커피만 먹습니다...
마드리갈
2021-04-20 13:30:50
이 단편을 읽다 보니 예전의 불쾌했던 경험이 떠오르네요.
물론 초능력 관련은 없지만, 레나 밴더빌트처럼 타인을 잘못되었다는 전제하에 가르치려 드는 부류의 사람을 만난 적이 있었어요. 냉면을 먹는데 분명히 면을 가위로 자르지 말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무시하고 기어이 가위로 면을 확 잘라 버린 식당측이라든지...작년 여름에 썼던 합석을 싫어하는 게 결코 나쁘지만은 않네요의 코멘트에도 언급해 두었던 문제의 그 사건이예요.
그나마 그 레나도 완전히 꽉 막힌 것만은 아니라는게 다행일까요.
어떻게 가능했는지는 미지의 영역이지만...
시어하트어택
2021-04-24 23:22:11
꼭 그런 사람들이 있죠... 저도 그런 상황을 가끔 겪곤 합니다. 겪으면 정말이지 기분이 나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