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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르미니 호수 근처의 골목길. 여행객들이 분주히 이리저리 지나가는 가운데, 세훈, 시저, 조제, 외제니. 그리고 니라차와 니라차의 부모님이 길 한쪽에 딱 붙어 서 있다. 다들 초조한 얼굴이다.?
“아니, 그런데 왜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두 사람은?”
시저가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현애와 미켈을 찾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여기 분명히 있지 않았어?”
“어... 그러게요, 시저 형.”
세훈이 머리를 긁적인다.
“특별히 어디 갔을 만한 데는 없어요. 멀리 가지는 않았겠죠.”
“그럴까?”
시저의 얼굴에서는 걱정이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도 잠깐 눈에서 안 보이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불편하다니.”
“에이, 가이드가 어디 도망갈 데가 있다고요.”
“그렇겠지?”
세훈의 말에, 시저는 마치 먹은 음식이 소화되지 않는 듯한 표정을 하며 어색하게 대답한다. 그래도 불안했는지, 시저는 자꾸만 주위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런다고 사라져 버린 현애와 미켈이 뿅 하고 나타나서 돌아올 리는 없다.
“도대체 둘 다 어디 간 거지... 아무리 봐도 잘 안 보이는데, 설마 진짜 둘 다 어떻게 된 거 아니야? 아니면...”
한편, 알 수 없는 어느 미로 같은 공간.
“얼빠진 녀석 같으니라고. 이제 똑똑히 깨닫게 해 주겠다!”
레베카의 일갈이 흰색의 미로 안에 울려 퍼진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을 한 레베카의 높이 들어 올린 오른손의 끝이 앞에 쓰러진 현애를 향하고 있다.
“자, 몇 초 후, 네 표정이 궁금하군! 그럼 받아라!”
높이 올려 들었던 레베카의 오른손이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대로 레베카의 손끝이 닿는다면, 몇 초도 안 되어, 현애의 중력 감각은 이상하게 바뀔 것이다. 바닥이 천장이 될 수도 있고, 벽이 될 수도 있다. 눈앞에 다가온 승리에 도취된 건지, 레베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벽면’에 엎드러져서 일어나지 않는 미켈을 보며 한껏 웃음을 지어 보인다. 레베카가 미리 미켈의 중력을 이리저리 꼬아 놓은 덕분인지, 미켈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괴로운 얼굴을 하고서 자신을 향해 비웃음을 내비치는 레베카를 겨우 노려보고 있다.
“어때? 그 상태에서 내게 뭘 할 수 있겠어? 어림도 없지!”
일어나지 못하는 미켈을 향해, 레베카가 마치 쐐기를 박듯 말하려는데...
“훗, 아주 못하는 건 아니지.”
“뭐... 뭐?”
미켈의 한 마디가 들려온 순간, 현애를 막 내려치려는 그때.
오른손 손끝의 감촉이 이상하다.
마치 손가락들을 전부 진득진득한 점액 안에 푹 담근 것 같다. 손가락 끝만 그렇다. 손가락 끝으로부터 벌레가 팔을 타고 위로 올라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매우 불쾌하고, 떨구어 버리고 싶다. 얼른 공격하려던 걸 거두고, 오른손을 본다.
엄지를 제외한 네 손가락이 흐물흐물거린다. 마치 오징어 같은 연체가 된 것 같다. 레베카의 의지대로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겠다. 애써 움직여 보려고 해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흐물거리기만 할 뿐이다. 거기에다가 손바닥과 손등에는 끈적거리는 점액이 기분 나쁜 질척함과 함께 흘러내리고 있다.
“이딴 짓을...”
“왜? 아주 사소한 손놀림일 뿐인데.”
미켈이 힘겹게, 그러나 한껏 비웃음을 담아 레베카를 약 올린다.
레베카는 애써 끓어오르려는 걸 억누르며, 오른손을 거둔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 상태로는 미켈이나 현애와 원활하게 싸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래... 아주 사소한 공격이었군.”
레베카는 꽤나 불쾌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다시 눈앞에 있는 미켈과 발 아래의 현애를 불쌍하다는 얼굴을 하고 번갈아 보며 말한다.
“사소한 손놀림이니만큼, 내가 받은 피해도 코딱지만 했지. 하지만 지금 너희가 처한 상황은 어떻지? 내가 나가라고 하지 않으면, 너희 둘 중 누구라도 여기서 나갈 수 있기나 하나? 너희는 내 질문에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면, 한 발짝도 여기서 나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답? 무슨 답?”
“네 녀석이 가져간 거 말이다.”
“하, 꼭 말해 줘도 모르는 녀석들이 있지.”
미켈은 오히려 코웃음 친다.
“내가 뭘 모른다는 거냐?”
“글쎄. 그걸 내가 말해 줘야 할지는 모르겠는데.”
“이 자식...”
레베카는 문득 왼손을 들어본다.
다행이다. 아직 왼손은 흐물거리지 않는다!
그대로 왼손을 뻗어 능력을 발동해서 미켈을 제압해 보려고 한다. 효과는 있다. 쓰러져 있던 미켈이 옆으로 굴러간다.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머리를 한 손으로 부여잡으며, 굴러가는 걸 어떻게든 막아 보려 다른 손으로는 ‘바닥’을 여러 차례 짚는다.
“너 이 자식, 내가 말했다고 따라 하지 마라. 그딴 식의 말장난을 더 했다가는, 평형감각조차 상실하게 만들어 줄 테니!”
열이 받은 듯 레베카는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내 밑에 쓰러진 네 동업자 녀석도!”
“동업자?”
“그래!”
“그렇단 말이군...”
미켈이 고개를 떨구는 듯 힘없이 말하자, 레베카는 더욱 큰 소리로 말한다.
“이제 알겠지? 상대가 누구인지 좀 알고서 덤볐어야지!”
“......”
“하나 말해 줄까? 좀 전에는 그나마 선택지가 두 개는 있었지만, 이제는 그나마도 줄어 버린 것 같군. 0 또는 1이 되었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아, 그래. 잘 알고는 있지.”
벽을 잡으며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는 미켈을 보는 레베카의 의기양양한 목소리가 높아진다.
“자, 이제 결정을 내릴 때가 됐는데?”
“결정?”
“그래.”
“......”
미켈은 레베카의 독촉을 듣고도 벽만 잡고 있을 뿐 아무 말도 꺼내지 않는다.
“뭐 해? 빨리 말이나 하라고!”
“말? 나는 말하겠다고 안 했는데.”
벽을 잡으며 힘겹게 말하면서도, 미켈의 입꼬리는 올라가 있다. 그것도 레베카를 정면으로 향해서. 당연히 레베카의 두 눈이 이글거린다.
“뭐라고? 왜 말을 바꿔?”
“아니, 말을 바꾼 게 아니야.”
레베카를 둘러싼 분위기가 좋지 않다. 예감이 안 좋다. 이 공격적이면서도 싸늘한, 마치 칼바람이 부는 듯한 분위기는...
“설마...”
레베카는 불안한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두 발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발가락을 움직여 보려고 해도 감각이 없다. 움직이지 못하겠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레베카가 딛고 선 바닥이 모두,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 빙판이 어디서 왔는지를 보니...
“무슨 짓을...”
“왜, 그러니까 한눈팔면 안 되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던 현애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애초에 말이야, 사전조사나 좀 제대로 했어야지.”
“그게 무슨 말이냐?”
말투는 여전히 지지 않겠다는 듯 당당한 척 꾸미지만, 레베카의 두 눈은 어느덧 앞에 선 현애를 보고 덜덜 떨리고 있다.
“너는 머리 손질하러 갈 때 레스토랑에 가냐?”
“아니, 그건 논리의 비약이 심하잖아! 머리 손질과 식사는 아주 다른 건데...”
“애초에 엉뚱한 데다가 물어보니까 뭘 해도 안 되는 거 아니야, 너는!”
레베카는 뭔가에 강하게 얻어맞은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젓는다. 다시 현애와 미켈을 번갈아 보고서는, 잠시 말이 없다가, 이윽고 한마디 한다.
“좋아. 다시 묻지. 너는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알고 싶다고?”
현애의 목소리가, 마치 속삭이는 듯 레베카의 귀에 들린다.
“하지만 이미 늦었어. 헛발질만 하다가 아무것도 못 얻는 녀석은, 너니까!”
“아니, 그게 무슨...”
레베카는 현애에게 다시 물어보려고 하지만...
그것뿐.
강한 주먹 한 방이, 레베카의 가슴에 직격한다. 보통의 주먹이라면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만, 두 발이 어찌나 심하게 얼어 버렸는지, 두 발은 레베카에게 들어온 충격을 견디지 못한다. 주먹 한 방에 맞았을 뿐인데, 레베카의 몸이 붕 뜨더니, 뒤로 날아가 버린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오싹할 정도로 찬 기운이 퍼진다. 레베카의 온몸 구석구석에. 그것도 그냥 차가운 게 아니라, 마치 냉동창고 안에 하루는 족히 있었던 느낌이다. 온몸의 혈관 곳곳에 냉기가 퍼져나간다!
‘이럴 수가... 정신을 차려야... 정신을 차려야 되는데...’
하지만 레베카의 이런 바람이 행동으로 표출되는 일은 없이, 레베카의 머리까지 강렬한 냉기가 퍼져, 레베카는 정신을 잃고 만다.
한편 그 시간.
“정말 어디 간 거지?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이잖아. 벌써 3분이 다 된 것 같은데...”
니라차의 부모님이 전화가 되지 않는 AI폰을 보며 초조하게 말한다.
“조금만 기다려 보고, 안 오면 정말 경찰이나 여행사에 연락해 봐야 하나...”
“겨, 경찰이요?”
세훈, 조제, 외제니, 시저가 눈이 휘둥그레지며 묻는다.
“그래. 좀 시끄러워진다고 해도 어디로 갔는지 못 찾고 슬프게 여행이 끝나 버리는 것보다는 낫지.”
그때까지 동요가 거의 없던 조제와 외제니도 ‘경찰’이라는 말을 듣자 순간 얼굴이 일그러진다. 기대감으로 맑던 하늘에 순간적으로 먹구름이 껴 버렸다. 일행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지는 바로 그때...
“여러분, 죄송합니다!”
어디선가, 미켈의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일행의 뒤에서다. 일행이 돌아보니...
골목길 한쪽 구석에, 현애와 미켈이 서 있다! 둘 다, 일행을 돌아보고서 멋쩍은 표정을 하고 서 있다.
“후...”
세훈을 포함해, 다들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3분이 3시간이 된 것만 같았다. 어디 갔다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가 이렇게 무사히 일행 앞에 돌아왔다는 건 다행 아닌가!
“하, 다들 기다렸어?”
현애는 한껏 과장된 몸짓을 하며 기다리던 일행에게 손을 흔든다.
“에, 내가 좀 오래 안 보였나?”
“천만에. 지금 시간 봐봐.”
세훈이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를 가리킨다. 현애도 세훈을 따라 시계를 본다. 시간은 오전 9시 20분을 가리키고 있다.
“어? 뭐야, 겨우 3분 지난 거야?”
현애는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한 20분은 지난 것 같았는데, 3분 지난 거야?”
“어? 20분이 지나?”
오히려 세훈이 놀란 듯 반문한다.
“어디에 있었길래 20분이나 지났다는 거야?”
“어...”
현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딴 데를 한번 보고 다시 세훈을 돌아본다.
“아, 별거 아니야. 내 감각이 어딘가 이상하게 되어 버린 건지도...”
“아, 그래. 다행이다.”
세훈은 현애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미켈 역시 은근슬쩍 일행의 앞에 들어와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입을 연다.
“자, 제가 없는 동안 많이 섭섭하셨죠? 그럼 이 골목길의 풍취를 흠뻑 느끼실 수 있도록, 빠른 걸음으로 걷지 말고, 천천히 걸으세요. 빠르게 걸으면 천천히 걸을 때의 감동을 경험할 수 없으니까요!”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5-10 19:11:28
누군가를 특정공간으로 끌고 오고 그 안의 중력을 조작하는 능력은 대단하죠.
하지만 아무리 대단한 능력이라도 잘못 쓰는 이상 소기의 성과를 내는 건 기대하지 말아야 해요. 레베카는 그걸 몰랐으니 저 꼴이 날 수밖에...자초했으니 어쩔 도리가 없어요.
그런데, 그 엄청난 소동이 겨우 3분 안의 일이었어요? 일각여삼추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네요. 안그래도 오늘 날씨도 가을날씨 같다 보니...
그렇죠. 느긋이 걷는 게 참 중요해요. 교토의 아라시야마 같은 곳이 정말 그렇게 시간이 멈춘 듯 느긋이 즐길 수 있는 곳이죠. 그것도 같이 생각났는데 벌써 3년 전의 일이라서 무상감이...
시어하트어택
2021-05-16 21:18:09
사실 저도 좀 느리게 걷고 싶습니다만, 자꾸 시간을 맞추려고 하고 나름 바쁘게 살다 보니 걸음이 자기도 모르게 빨라지더군요. 그래서 느릿느릿 걷는 건 또한 제 소망이기도 하죠...
SiteOwner
2021-05-15 23:29:01
시간의 길이란 참으로 상대적인 것 같습니다.
1984년을 강타했던 미국드라마 V에서 벌어졌던 지구인과 우주인의 장대한 투쟁은 잠깐 동안의 꿈 속 이야기였고, 소중한 사람과의 1시간은 1분같지만 싫은 사람과의 1분은 1시간같은...
레베카의 마수가 작동하지 못해서 천만다행입니다. 그리고 그 레베카를 저지하기 위한 3분은 정말 길게 느껴지고 중요한 3분이었습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어하트어택
2021-05-16 21:22:28
어떨 때 보면 불과 5분을 있었는데 1시간은 넘게 지나간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하루가 1시간 지나간 것 같기도 합니다. 절대적인 것인 줄만 알았던 것들이 어떨 때 보면 지극히 상대적인 경우가 참 많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