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은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200여년 전입니다. 당연히 세계관을 공유하고요.
사실상의 첫 작품인데 다시 올려 보자니 뭔가 쑥스럽기도 하네요.
참, 스크롤 압박 조심하시길...
4월의 어느 화창한 날 아침. 대정 공화국의 수도 ‘강영’ 북구의 대정 경비대 ‘수도경비사령부 북부대대’. 이등경부터 상등경까지의 전 병사들은 아침 일찍 점호를 마친 후 아침밥을 먹고 일과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고, 간부들은 거의 모두 출근을 마쳤다. 저 멀리서 간부 한 명이 영문을 통해 들어온다. 영문 경비는 외부 업체가 맡고 있었다. 그들은 그 간부의 간단한 출입사항을 적고는 들여보냈다. 그는 헐레벌떡 대대장실로 뛰어 들어오며 경례를 했다. 최태우 대대장은 그 간부의 경례를 받았다.
"아, 이민우 1등위. 왔나?"
"예. 저 왔습니다."
"자네 오늘 10분이나 늦었군."
"죄송합니다. 중간에 열차가 고장 때문에 멈춰서..."
"아니, 죄송할 것까지는 없어. 자네는 언제나 작전에서 아주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고, 자네의 그 모습은 자네의 직속상관인 나와 다른 모든 상관들과 자네의 부하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고 있지. 이번만은 특별히 봐 주겠네. 내 권한으로 말이지."
"감사합니다, 대대장님."
이민우 1등위는 언제나처럼 자기 중대로 가서 부하들과 인사하는 것으로 하루 일을 시작했다. 가장 먼저 경례하는 이는 경험이 많은 2등사 조준호였다. 그 외 소대장들과 병사들도 그에게 경례를 했다. 왠지 그날따라 부하들의 목소리가 더욱 우렁차게 들렸다. 기분이 좋아진 이민우는 일일이 경례를 받아 주었다. 중대장실에 들어가기 위해 행정실에 들어가니, 행정사무원들이 인사를 했다. 행정사무원들은 모두 경비대원이 아닌 외주업체 직원들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 또 반갑게 인사를 받아 주었다. 오늘은 특별히 어디 나가서 교육하는 것 없이 그냥 오전에 정신교육 같은 걸 한다고 했다.
‘참 그 때가 생생하군...’
그는 중대장실 의자에 앉아 지난 날을 회상했다. 훈련을 받고 정식으로 경비대에 입사한 지도 2년이 넘게 흘렀다. 그간 대학을 졸업하고 2년 동안 훈련을 받은 시간이 아직도 어제 일어난 일 같이 느껴졌다. 수많은 훈련을 받았지만 기억에 남는 것은 2년째에 4개월 동안 받은 비밀 훈련이었다. 그것은 정말 ‘비밀’이라 할 만한 것으로, 동기들도 그가 4개월 동안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몰랐다. 동기들에게는 파견 교육을 간다고 했다. 2년째에 여러 가지 조사를 했는데, 신체 조건, 정신 조건 등에 모두 최적 판정을 받았기에 그가 뽑혀간 것이다. 가서 한 것은 명상, 최면 같은 것이었다. 누구인지 모르는 교관은 분노의 순간을 떠올리라고 했다. 그런 것들을 가시 에너지로 극대화하여, 그 에너지를 조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밀 훈련 때 되뇌인 문구가 아직도 떠올랐다.
‘내 마음은 내가 지배한다... 나는 나의 분노의 주인이다...’
그 때에는 그것만 반복했는데, 솔직히 혼자서 코웃음을 칠 때도 가끔 있었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자고 쉬고 하는 것 말고는 내내 그것만 했다. 하루 종일을 그것만 반복한 것이다. 이렇게 지루한 것이 훈련이었단 말인가? 그만두고도 싶었지만 어디인지도 모르는지라 묵묵히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비밀 훈련 중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쨌든, 예정된 시간이 되자, 그는 정신교육을 하러 대대 내의 강당으로 갔다. 부하들은 이미 와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졸려 보이는 병사도 있었고 각잡고 있는 병사도 있었다. 그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주위를 보니 대대장이나 참모들, 다른 중대장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중대장들은 모두 그의 선임들이었다. 이윽고 대대장이 들어왔고, 그는 경례를 했다. 대대장은 경례를 받아 주었다. 중대장들이 한 마디씩 했다.
“아, A중대장? 너 여자친구 사귄다며?”
“몇 달 됐다는데? 이야, 니 나이 치고는 너무 늦은 거 아냐?”
“뭐, 여자친구랑 결혼할 거면 빨리 하는 게 좋아. 본사에서 결혼 수당도 나오고 하니까, 잘 생각해 보라구.”
선임 중대장들은 모두 한 마디씩 건넸다. 사실 그에게는 여자친구가 있다. 사귄 지는 6달 정도 되었다. 사실 그는 자립 문제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는데 선임 중대장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니 더 고민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자립하려면 수입도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지금의 수입으로는 부족하다. 여자친구는 자기 말로는 무슨 일을 한다는데, 그녀가 정사원인지는 알 수 없다. 여자친구는 일단 신경 끄고, 일단 자기 자신부터 좀 살펴야 한다. 그래야지 연금 혜택도 누릴 수 있고 하기 때문이다.
저쪽에서 병사 한 명이 “강사님 들어오십니다.”하자, 모두들 웅성거림을 멈추고 자리에 앉았다. 40대로 보이는 강사가 들어왔다. 강사는 본사의 ‘인프라기획부’ 소속이라고 간단히 소개하고는 강연을 진행했다. 강연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랬다. 요즘 ‘타타리아’라는 나라는 ‘제클 버’라는 독재자가 집권하여 군비를 확장하고 공공연히 호전적인 태도를 취하여 이웃한 나라들을 불안에 빠트리게 하고 있다. 그들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비인간적인 실험을 자행하고 저항하지 못하도록 세뇌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야욕을 실현시키고자 한다. 하지만 우리는 전 우주에서 가장 진보되고 합리적인 체제의 나라다. 우리가 비록 인구는 적을지라도 전 우주를 위험에 빠트리려 하는 저들에 맞서 언제 싸워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할 것이다. 강사가 강연을 마치자 우레와 같은 박수소리가 이어졌고 강사는 그 박수소리 속에 조용히 퇴장했다. 곧이어 전 대대의 전 병력들이 질서정연하게 자기 중대로 돌아갔다. 이민우도 역시 중대장실로 돌아가 털썩 앉았다.
‘이제 오늘 일은 다 끝났군. 그런데 이제 뭘 하지... 전화나 해 볼까...’
바로 그 때였다. 전 중대 내에 비상음이 울렸다. 비상사태 아니면 출동을 의미한다. 바로 뒤이어 방송이 나왔다.
“출동, 출동이다. 북구청 주변에 대규모 시위 발생. A중대 전원은 시위 진압을 위해 신속히 출동하라.”
그는 뭔가 심각함을 느꼈다. 그는 즉시 중대장실에 있는 헬멧을 꺼냈다. 밖에서는 병사들의 한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곧이어 소대장들이 중대장실로 들어왔다.
“중대장님. 이번에도 저번처럼 3방향 포위작전으로 합니까?”
“그렇다. 이번에도 저번과 똑같다. 3개 소대는 적당히 시위대를 사거리로 유인해라. 그러면 나 혼자 앞에 나서서 그들을 상대하겠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인원이 훨씬 많습니다. 중대장님 혼자서 상대하는 건 안됩니다.”
“내게도 다 생각이 있으니, 그대로 따라 봐.”
“아...알겠습니다.”
“그럼, 너희 애들 데리고 바로 연병장 앞으로 나와. 차가 이미 대기 상태일 테니.”
“예, 바로 가겠습니다.”
소대장들은 자기 소대로 가고, 그는 헬멧을 쓰고 통신병, 운전병들과 함께 먼저 나와서 기다렸다. 곧바로 소대장들이 병사들을 이끌고 나왔다. 그는 짧게 몇 가지 지시사항을 하달하고는 곧바로 중대장 차에 올라탔다. 그는 운전병에게 물었다.
“현장에 몇 분이면 도착하나?”
“1~2분이면 갑니다. 눈 깜짝할 새에 도착할 겁니다.”
“흠... 자네, 나 같은 중대장 만나서 운전 많이 하니, 참 뭐라고 할 말이 없군.”
“이런 나라에서 저 같은 보직이 아직도 있으니 그것도 다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20년 전까지는 대정 경비대의 비효율적인 체제를 일신하고자 하여 도입된 무인운전 시스템을 군수에도 적용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은 우주 공간을 항행하는 전함이나 상선에나 적합했을 뿐, 도로를 운행하는 차량에는 아무래도 위험하고 부적절했다. 40년 전의 군수 무인운전 시스템 도입 이후에는 1년에 20번꼴로 연례행사처럼 사고가 자주 일어났다.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고를 보다 못한 경비대와 본사는 20년 전 무인운전 시스템을 폐기하고 다시 운전병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단, 폐지되기 전과는 달리 양성 과정에서 숙련도를 많이 높였다. 그 결과, 사고율이 90% 감소했다. 효율을 추구하는 대정 체제에 만족하는 사람들 중 한 명인 이민우도 여기 대해서만큼은 충분히 동의하고 있었다. 아니, 그는 검증 안 된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것도 그래. 아무리 인공지능이 발달해도 완전한 무인운전은 좀 위험하기야 하지. 검증되지 않은 건 그만큼 사고를 부르지 않나.”
“이제 도착합니다. 저기 보이는 건물 옆에 세우겠습니다.”
“그쪽은 시위대의 예상 이동 경로 중 하나다. 병력 수송 버스를 바리케이트로 하고, 그 뒤쪽에 세워라. 통신병, 각 소대 탑승 버스에 연락해라.”
이민우가 중대장으로 있는 A중대는 주로 시위가 일어났을 때 시위 진압에 투입되었다. 전 중대장들이 시위 진압 경력이 상당한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이민우의 시위 진압에 필요한 능력은 아주 특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능력은 시위 진압뿐만 아니라 여러 작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그 능력은 그가 다른 동기들보다 6개월이나 먼저 1등위로 진급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였다.
이윽고 모든 병력 수송 버스가 제 위치에 도착했다. 수송 버스들은 시위 진압이나 전투 시 바리케이트 기능을 상정하여, 앵커를 박아 고정하는 기능이 있다. 건물이 있는 도로에 이것을 사용하면 버스를 부수지 않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곧이어 모든 병력이 하차했다. 그는 명령을 하달하기 시작했다.
“A소대, 시위대를 유인해라. B소대, 나와 함께 있어라. C소대, 만약 내가 실패했을 경우, 후방에서 제압하라.”
이윽고 ‘공룡기업, 악덕기업 GT 타도’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적은 시위대가 행진을 하여 이민우의 부대가 있는 곳까지 왔다. 그는 이런 건 몇 번이고 겪어 봤기에 흔들림이 없었다.
“흔들리지 마. 평소처럼 하면 된다. 흐트러지지만 않으면 돼.”
그는 위치 유지를 지시하며 부하들을 독려하였다. 새로 들어온 병사들을 빼고는 모두 시위 진압에는 베테랑이라고 할만했다.
시위대가 저 쪽에서 오고 있는 걸 보고 그는 또 다시 훈련받을 적의 생각에 잠겼다. 명상 과정도 끝났고, 그는 야외의 넓게 트인 장소에 세워진 흰 벽 앞에 섰다. 명상을 할 때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인간의 능력은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네가 저 앞의 벽을 의지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면 믿겠는가?”
그는 의아해했다. 머리를 갸우뚱했다. 목소리가 또 다시 들려왔다.
“의심하면 이룰 수 없다. 너를 믿어라. 그리고 그것을 폭발시켜라. 믿으면 가능하다!”
그가 생각에 빠져 있는데, 시위대를 유인하고 있던 A소대장의 교신이 들려 왔다.
“큰일났습니다. 시위대 몸싸움조가 나타났습니다!”
몸싸움조란 이들 반정부 시위대에서 경비대의 진압에 대응하기 위해 힘을 써서 경비대를 막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조들을 경비대에서 부르는 말이다.
“A소대장, 자세한 상황 말하라.”
“몸싸움조는 지금 각목, 쇠파이프 등을 들고 저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지금 방패로 막고 있는데, 중대장님께서 빨리 도와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다. 조금만 버텨라. 내가 신호를 주면 옆으로 비켜라!”
어느 정도 A소대가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그는 다시 흰 벽 앞에 처음 섰던 때를 떠올렸다. 그는 의심이 갔지만 그래도 목소리가 말한 대로 한 번 해 보기로 했다. 그는 그 벽이 무너지는 것을 상상했으며 그 벽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 벽이 자신에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신호를 내렸다. A소대가 옆으로 물러났고, 몸싸움조가 부대 앞에 선 그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A소대장이 말했다.
“중대장님, 위험합니다! 저들은 살상이 가능한 것을 들고 있습니다!”
“A소대장! 넌 나와 함께 있을 때 뭘 본 건가!”
그는 벽이 있는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고 고함을 크게 한 번 질렀다. 갑자기 앞에 있던 벽이 앞으로 넘어졌다. 그는 그 이후로 그의 의지를 믿게 되었다. 그 때와 같이, 시위대들이 줄줄이 쓰러져서 시위대 진열은 무너지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것을 본 이민우가 명령했다.
“이 때다! 포위하라! 놓쳐서는 안 돼!”
시위 진압은 겨우 40분 만에 끝났다. 시위 지도부는 따로 대대 본부에 불려가 조사를 받게 했고, A중대는 오늘도 그렇게 쉽게 작전을 완수했다. 대대장도 이민우를 따로 불러 그에게 수고했다고 말했다. 그는 흐뭇해진 채 중대로 돌아갔고, 부하들은 “중대장님, 수고하셨습니다!”하고 일제히 말을 건넸다. 그도 부하들에게 다 너희들 덕분이라고 답했다. 어쨌든 이 날도 하루를 마치고 그는 퇴근했다.
그의 퇴근길은 지하철과 함께 시작되었다. 부대에서 2분 거리에 시가지가 있었고, 거기에 지하철역이 있었다. 그는 내려가서 개찰구를 통과하고, 승강장으로 내려가서 바로 오는 열차를 탔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시위자들이 왜 시위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정의 기업국가화 이후, 대정의 성장은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독재자가 지배하던 시절보다 생활은 더욱더 윤택해졌고, 가난에서도 탈출했다. 모기업 GT 그룹의 연구를 통해 세크라듐 채굴의 효율성은 더욱 좋아졌고, 경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상황이 좋다. 그런데 왜 저 시위대들은 뭐가 그리 불만인가? 뭘 더 해야 그만둘 것인가? 그렇게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 새 환승역인 중앙대로역에 도착했다. 그는 그쪽에서 ‘동영’ 방면의 열차를 갈아타고 약 15분 정도 멍하니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기대서서 뭔가를 열심히 보거나,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거나 하는 것 같았다. 지하철 안에서는 ‘GT 식품’의 광고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었다. 종착역인 동영에 도착하자, 그는 내려서 역 남쪽으로 10분 정도 거리의 자신의 집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많이 없었다. 길거리에는 주로 일찍 퇴근한 사람들이 많았다. 벌써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 쪽에 보니 노점이 하나 있었다. 저녁을 먹기 전에 출출한 배나 채울 생각으로 군것질을 좀 하기로 했다. 더불어, 광고에는 나오지 않는 것이라 흥미를 느끼기도 했다. 노점에는 어묵, 떡볶이 등을 팔고 있었다. 그는 늙어 보이는 노점 주인에게 물어 보았다.
“저기, 이거 맛있습니까?”
“음, 맛있네. 맛있고말고. 내가 매일 직접 만들고 있지.”
그는 노점 주인의 말에 즐거워하며 계속 어묵을 먹었다. 노점 주인이 그에게 불쑥 물었다.
“입은 옷을 보니... 자네... 정사원이지?”
이민우는 경비대 전투복을 그대로 입은 채였다. 아니라고 둘러댈 수도 없었다. 그는 노점상에게서 이야기나 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예, 그렇습니다만...”
“내가 정사원들을 보고 생각한 게 많지. 그런데, 생각할수록, 정사원들이 부러웠네. 완전히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셈이니까 말이지.”
“정사원과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 남편은 하청 업체 직원이었지. 지방 말단 관청의 말단 직원 말이야. 평생을 힘들게 일했는데도 하청 업체라서 연금 같은 것도 없어. 나는 한술 더 떠서, 아예 고용되지 않았지. 그래서 보험, 연금, 이런 것도 없어. 그냥 늙을 때까지 이러다 가는 거야. 에휴... 정사원이 뭔지...”
그는 아무리 들어 봐도 무슨 말인지 감이 안 잡혔다. 들을수록 알 수 없었다.
“잘 먹고 갑니다. 안녕히 계세요.”
하고는 그는 도망치듯이 노점을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길에는 사람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뒤를 돌아보니 노점에는 사람이 두어명 정도 서 있었다. 그 노점의 위에는 광고판이 끊임없이 식당 광고를 보내고 있었다. 보나마나 그 식당은 GT 리테일 소속일 것이다. 그는 집이 있는 아파트 단지에 도착해 집으로 올라갔다. 집은 평소 그의 성격처럼 깔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이번에 GT 인더스트리에서 새로 나온 가정 관리 인공지능 ‘SH-006'을 열람하여 집에 별 일이 없음을 확인하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연락 기능을 잠시 차단하기로 했다. 그는 며칠 전에 산 캡슐 음식으로 간단히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는, 방 한 켠에 꽂혀 있는 역사책을 들고 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의 뇌리에 문득 독재자 ’최준우‘가 떠올랐다.
이 ‘대정’이라는 나라는 본래 주력 34년, ‘지구’라는 인류의 모행성의의 ‘한국’계 주민 약 3만명이 이민선 모선에서 분리하여 지금의 수도 ‘강영’에 착륙하여 세운 나라이다. 인구가 적었기에 사람들은 땅에 여유를 가지고 살았고, 주로 개간을 수반한 농업을 통해 경제 활동을 영위해 나갔다. 그러던 대정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지구에서 볼 수 없었던 우주선 강화재로 쓰이는 광물인 ‘세크라듐’이었다. 세크라듐은 우주선의 외벽으로 쓰여, 우주 먼지나 유성 등으로부터 우주선을 충분히 지켜 주어 군용 전함에도, 상선에도, 여객선에도 폭넓게 쓰였다. 세크라듐은 대정에서 제아 총 매장량의 40%가 넘게 채굴되었다. 당연히 신주나 타타리아를 포함한 주변 국가들이 이에 눈독을 들였고, 국지전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대정의 용맹한 군대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이를 모두 지켜 내었고, 세크라듐을 토대로 경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한때는 최강대국 신주의 소득마저 넘어섰기에 모든 대정의 국민들은 100~200년경까지의 시기를 황금기로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 시절은 모두가 동의하는 대정의 영광스러운 시대였다. 하지만, 대정의 전성기가 지나가고, 경제 사정이 불황 및 채굴량 감소 등으로 인해 휘청였다. 국민들은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고, 이 요구에 부응한 사람이 269년에 집권한 최준우였다. 최준우는 당선되기 이전부터 국가에 필요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해 왔고, 역대 최고의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경제를 일으켜 세우겠노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그를 뽑은 것은 대정 국민들의 가장 큰 실수였다. 최준우는 집권 1년 만에 자신을 종신 대통령으로 선언하고, 일족이 국가 요직을 독점했다. 최준우 일가와 그 측근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지만, 국민들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당연히 반대파는 들고 일어났고, 최준우는 그들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국민 상당수가 최준우 일파가 자행한 학살과 폭정으로 인해 죽거나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 한때 300만에 가까웠던 인구가 40년 만에 190만까지 줄어들었다. 경제는 당연히 파탄이 났다. 그들이 처음 행성에 도착했을 때보다 더욱 참혹한 지옥도가 펼쳐졌다. 최준우는 304년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최명훈은 그의 아비보다 더한 자였다. 최명훈은 최준우도 하지 않던 반대파에 대한 고문을 자행하였고, 때마침 전국에는 기근까지 돌았다. 최명훈은 결국 318년 군대의 봉기와 국민들의 호응으로 인하여 권좌에서 쫓겨나 마사타 행성으로 망명했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측근들은 성난 군중들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최준우 부자 집권 동안, 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그간 국가를 휘어잡던 최준우 부자가 없어지자 내정은 더욱더 혼란에 빠졌다. 결국 정부는 325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정부는 제아 행성 전체에 입찰이 걸렸고, 신주의 거대 기업집단 GT 그룹이 나서서 정부를 인수하겠다고 했다. GT 그룹은 정부를 해산한 뒤, ‘대정국 신정부 주식회사’ 및 자회사들을 설립하였다. 이로써 대정은 GT 그룹 산하의 기업국가로 거듭났고, GT 그룹의 노하우를 따라간 결과 경제 또한 회복하였으며 400년 현재까지 70년간 그 체제가 이어져 오고 있다.
역사를 곱씹어 본 이민우는 노점 주인을 떠올렸다. 역사 시간에 배운 하층민들이 지금까지 있다니... 그들을 보면 전에 배웠던 독재 시절과 별반 다른 것 같지는 않다. 차이점이라면 지금은 독재 정치가 없어졌고 최준우의 흔적은 완전히 일소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 의문이 생겼다. 그들은 그렇게 사는데, 나는 왜 이렇게 대접받고 사는가? 시장 사회에서의 평등이 우리나라의 모토 아니었던가? 도대체 최준우 이래로 진정한 자유가 있기는 한 건가? 그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때, SH-006이 여자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연결하라고 했다. 그런데 연락이 왔다니? 어떻게 된 거지?
“민우야. 뭐해. 왜 오늘 하루 종일 연락을 안 하는 거야.”
“야, 너 어떻게 연락이 된 거냐? 참 대단하다. 내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암호도 걸어 놨는데.”
“자기 덕분에 푼 거지, 뭐.”
“조, 좋아. 그건 그렇고, 우리 이번에 휴가 가기로 했었지? 동부 지방으로.”
“그래. 너는 회사에 말하기로 한 거 잘 된 거야?”
“난 말야. 너만 잘 되면 돼.”
“알았어. 내가 내일 가서 말해 볼게.”
“그래. 자기야. 잘 자. 늘 내가 지켜보고 있는 거 잊지 마.”
여자친구의 연락은 끊어졌다. 하지만 어째 오늘은 여자친구가 왠지 무섭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휴가를 갈 생각에 즐거움으로 가득찬 나머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수면보조제를 먹고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요즘 며칠 동안 잠만 자면 이상한 꿈을 꾸었다. 계속 어딘가에 묶여 있고 연구원들이 그 앞에 서 있었다. 일어나도 잠자리가 뒤숭숭했다. 하지만 GD 제약에서 새로 개량된 수면보조제라면 복용하는 사람을 원하는 시간 동안 잠자리에 들고 개운한 아침을 맞게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곧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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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뒤. 이민우는 여자친구와 그토록 원하던 휴가를 떠나게 되었다. 얼마 전에 할인행사에서 산 그의 차는 마치 하늘 위에 떠서 다니는 기분이 날 정도로 승차감이 좋았다. 더욱이 여자친구와 같이 타니, 하늘을 넘어 천국을 다니는 기분이었다.
“미나야, 좋지?”
“와! 바람 좋다.”
약 1시간쯤 고속도로를 달렸다. 드디어 푸른 산으로 둘러싸인 협곡이 나오기 시작했다. 병풍처럼 둘러진 산들은 완전히 초록색으로 우거져 있었다. 평소 여자친구가 말한 동부 지방이란 바로 이런 걸 말하는 것이었다. 다리를 건널 때 밑으로 지나가는 강물의 소리는 그렇게 힘찰 수가 없었다. 가끔씩 지나가는 구름과 비마저도 그들을 설레게 했다. 비가 내릴 때 차창으로 튕겨져 나가는 빗물도 보기에 아름다웠다. 그들이 원하던 최고의 휴가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참 지나다 보니, 바위산이 보였다. 이 풍경에 어울리지 않는 바위더미도 있었다.
“저거 봐! 뭔가 이상하지 않아? 사람들도 모여 있고. 자기야! 자기가 좀 아는 거 아냐?”
자세히 보니 경비대 전투복을 착용한 사람 몇 명이 소총을 들고 서 있었다. 복장으로 보아 모두 병사 아니면 사급 간부였다. 그는 무슨 일인지 알아보기로 했다.
“내가 가 볼게. 여기 차에서 잠깐만 기다려.”
그는 차에서 내려서 사람들이 모인 쪽으로 갔다. 전투복을 착용한 사람 몇 명 말고는 모두 민간인들로 보였다. 모두 초조한 눈빛이었다. 이민우는 사람들에게서 빨리 그가 뭔가 해 주길 바라는 눈치를 느꼈다. 앞에 지키고 서 있던 경비대원들이 그를 막아섰다. 상등경 계급장을 단 경비대원이 말했다.
“이곳은 접근 제한 구역이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지키고 있는 것 안 보이는가? 허가 없이는 들어올 수 없다. 당장 물러나지 않으면 즉각 조치하겠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사원증 홀로그램을 켰다.
- 이민우, 98-11064, 대정 경비대 1등위, 입사 398년 4월 -
그것을 본 경비대원들이 황급히 그에게 경례를 붙였다. 그 중 대표격인 듯한 2등사가 말했다.
“이민우 1등위님, 몰라뵈었습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냐. 휴가 중이니 몰라볼 수도 있지.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은 지금 누구인가?”
“이 사람들은 지금 이 근처의 세크라듐 광산에서 굴착 및 채굴을 하기 위해 징발된 사람들입니다. 저희도 지금 본사의 지시가 있어 그대로 시행하는 중입니다.”
“음, 그런가? 총본사에서 뭔가 할당량이 부족했던 건가?”
경비대원들이 말하는 본사란 경비대 사령부를 의미했다. 경비대는 독립된 법인이었으므로 모기업인 정부는 총본사라고 칭했다.
“이 사람들, 자원해서 온 건가?”
“아닙니다. 임의로 뽑아 온 겁니다.”
“그런가? 이 사람들 안 그래도 억지로 온 거잖아. 그런데 강압적으로 대해서야 되겠나? 좀 그런 건 신경써 주면 좋을 것 같아.”
“알겠습니다. 휴가 나오셨다고 하셨습니까? 좋은 시간 되십시오!”
그는 차로 돌아왔다. 여자친구가 그에게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래? 자기야, 무슨 일 있었어?”
“아냐... 아무 일도 아냐. 계속 가자.”
그는 일단 그 일을 잊고 여자친구와 즐겁게 놀 일만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은 2박 3일 동안 상류 쪽에 올라가서 물놀이도 하고, 산에도 올라가며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냈다. 일상에서는 경험해 보지 못한 자연이었다. 또한 동부 지역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곳이라 그들은 자연을 만끽하고, 일상을 잊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이민우는 다시 그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을 바라보던, 광산 앞에 서 있던 그 사람들의 눈빛이 뇌리에서 없어지지 않았다. 원래 그는 일상에서 벗어나고자 휴가를 갔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그 일상보다 더 큰 것을 알게 되었다. 그가 며칠 전에 생각해 봤던 그 역사의 현장이 되풀이되는 것을 그 날 본 것이다. 그는 큰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야, 정말 뭐 안 좋은 거 있어? 왜 그렇게 표정은 어둡고 그래? 속이 안 찬 거야?”
“아냐... 아무것도 아냐. 걱정해 줘서 고마워.”
약 이틀 뒤, 그는 다시 부대로 출근했다. 평소와 다름없이 부하들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고, 그도 인사를 했다. 행정사무원 중 한 명과 B소대장이 그에게 다가와 말했다.
“중대장님, 어제 저희가 B중대와 시위를 진압하는 와중에 시위의 총책임자를 잡아왔습니다. 지금 부대 내 유치장에 있으니, 중대장님께서 조금 있다가 직접 심문해 보라고 대대장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알았어. 가 봐.”
그는 부대 내의 간이 심문실로 가 봤다. 이곳은 본격적으로 교도소 등으로 보내기 이전, 체포된 사람에 대해 간단한 심문을 하는 곳이었다. 어제 연행해 왔다는 시위 총책임자는 그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그가 심문실로 들어오자, 그곳을 지키고 있던 3등사가 경례를 붙였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자동문 쪽을 향해 외쳤다.
“1237 오주원! 나와라!”
시위 총책임자의 이름이 오주원인 듯했다. 오주원과 이민우는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이민우가 우선 입을 열었다.
“나는 시위 주동자들의 생각이 뭔지를 알고 싶었다. 그간 내가 시위를 많이 진압해 왔는데, 연행한 자들을 심문한 건 언제나 다른 중대였지. 그리고, 내 개인적인 의문점도 있었다. 오늘 당신에게서 말을 한 번 들어 보고 싶군.”
“당신이? GT 그룹의 충실한 종인 당신이 말요? 참 웃기는군.”
“나는 당신에게서 진실한 이야기를 듣고 싶단 말이오.”
“내 이름은 아까 저 3등사가 말해 주어서 알 것이오. 나는 원래 정사원이 될 예정의 촉망받는 대학생이었소. 당신과 똑같이 정부에 지지를 보냈지. 하지만, 4학년이 되던 해 기업국가의 실체를 알게 되었소. 그리고 나는 감히 국가에 의문을 품었다는 이유로 쫓겨났고, 비사원으로 내려앉았소.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자리에 위치하여 시위를 주도해 오게 된 거요.”
이민우는 그가 원래 엘리트였다는 사실에 놀라워했지만, 한편으로는 더욱더 궁금해했다.
“그럼, 당신이 깨달았다는 그 실체에 대해 말해 주실까.”
“좋소, 몇 가지만 이야기해 주지. 지금 이 나라는 정사원, 비사원으로 나누어져 있소. 정사원이 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는 반면, 비사원은 그런 건 없지. 이것은 GT 그룹이 70년 전에 우리나라 정부를 인수한 이후부터 시작된 거요. 기업의 기본적인 목적은 이윤 추구요. 이는 지구에 있던 시절부터 바뀐 게 없소. 아니, 지구에 있었던 때보다 지금 이 시간대로 넘어와 여러 행성에 나뉘어 정착한 시점에 더 치밀해졌지. 기업국가란 간단해. 국가가 국민들을 보호하는 게 아닌, 국민들로부터 수익을 창출할 생각을 하는 거지. 당신도 강영 밖을 다니다 보면 봤을 거요. 국가가 나서서 비사원들을 싼 값에 착취해서 세크라듐을 채굴하고 있소. 국가는 돈이 쌓이지. 그 밑의 정사원들도 당연히 주식이 있고 배당금을 받으니 풍족해. 하지만 전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비사원들은 지옥의 나락이지. 이건 최준우 부자 집권 때와 다를 게 없소. 내가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건...”
오주원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민우 역시 정사원으로써 배당금을 받고 있었다. 또 그가 휴가 중에 목격한 것도 딱딱 들어맞았다. 오주원이 뭔가 더 말하려는데, 3등사가 막아섰다.
“잠깐! A중대장님! 죄송합니다! 여기서 심문을 중단하라는 대대장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1237 오주원! 다시 원래 위치로 복귀한다!”
3등사는 그를 자동문 저편으로 끌고 갔다. 오주원은 이민우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가 한 말을 잊지 마시오! 당신이라면 알 수 있을 거요!”
“...!”
이민우는 중대로 복귀해서 그가 한 말을 다시 떠올렸다. 순간 휴가 때 본 사람들이 다시 생각났다. 그 오주원이라는 자의 말을 생각해 보니, 그것이었다. 그는 떨쳐오는 의문감을 지울 수 없었다.
‘아냐... 거짓이다... 내가 본 건 거짓이야...’
이렇게 생각하며 잊으려 해도 그가 본 것과 들은 것은 엄연히 사실이었다. 사실을 거짓이라고 부인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그가 살아오면서 굳게 다져 온 생각이기도 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었다. 마침 그의 앞에 중대장 결재 서류가 쌓여 있었다. 그는 업무를 보며 잠시 숨을 돌리기로 했다.
“왜 이렇게 서류가 많지?”
“오늘이 정기 결재일입니다. 부하들 휴가 결재와 포상, 징계, 이런 문서들입니다.”
“아, 내가 깜빡하고 있었군. 그래. 알았네.”
그는 쉬엄쉬엄 문서들을 결재하면서 아까 일을 잊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생각난다. 그것은 그에게는 뭔가 지울 수 없는, 각인된 것이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떠오른다. 게다가 그 오주원이라는 사람의 얼굴마저 생생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잊어야 하는데... 잊어야 하는데... 계속 떠오른다. 어느덧 점심 시간이다. 그는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중간에 대대장이 왔다. 그는 얼른 일어나 경례를 붙였다. 그런데 대대장의 태도가 뭔가 변한 듯싶었다. 평소 입에 마르게 그를 칭찬하던 대대장은 오늘은 그를 만나더니 그냥 경례만 붙이고는 다른 중대장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싸늘해진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중대장들에게 다가가서 경례를 해도 그냥 받아 주기만 하고 저들끼리 밥을 먹었다. 대대장과 다른 중대장들이 작은 목소리로 수군대는 것이 보였다. 그는 조용히 식사를 계속 했다. 아까 오주원을 심문했던 일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고만 추측할 뿐이었다.
그 날도 그는 마찬가지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공기가 전과는 다르게 무겁게 느껴졌다. 그는 그 스스로에게 당당하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은 전혀 알 수 없었다. 오주원이 한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는 발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SH-006을 열람해서 뭔가 일이 있나 확인했는데, 특별한 건 없었다. 단지 여자친구가 또 연락 기능 차단을 풀고 음성 메시지를 몇 개 남겨 놓은 것밖에는 없었다.
‘걔 참 대단하다. 얼마나 할 게 없었으면 수시로 이런 걸 남겨 놓을까.’
그러고서 저녁 식사를 하려는데, 여자친구에게서 또 연락이 왔다.
“자기야! 뭐해?”
“아유, 너 또 이거 풀었어? 그래, 심심해서 어떻게 지냈어?”
“자기 생각하면서 지냈지 뭐.”
“그래? 자기 내 목소리 들으면서 무슨 생각 안 들어?”
“음,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거야?”
“요즘 내가 머리가 아프다. 넌 모르겠지?”
“뭐야, 날 그렇게 바보 취급하는 거야?”
“에휴... 하여튼, 내가 요즘 아주 상황이 안 좋아. 어쨌든, 그렇게 알고 있어 줘. 내가 언제나 자기 안 잊고 있는 거 알지?”
“음... 알았어. 그럼 이따가 또 연락한다?”
여자친구의 연락은 끊겼다. 그는 어차피 연락 기능을 차단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녀의 말을 들으면 안심이었다. 그래도 아까 일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은 그를 조금은 불안하게 했다. 그는 그에게 당당했다. 그가 들은 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안한 건 앞으로의 일이었다. 대대장이 어떤 것 때문에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총본사의 사원 관리 체계에 기록이 어떤 방식으로든 남을 건 확실했다. 그것은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뜻이고,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뜻이다. 총본사에서 본사로, 본사에서 대대로 어떠한 조치가 내려올 것이다. 이래저래 머리가 아팠다. 그는 오늘 일찍 자기로 했다. SH-006에 자기가 잔다는 공지를 띄워 놓고, 9시간짜리 수면 보조제를 들이켰다. 곧 그는 잠자리에서 잠에 빠져들었다.
이렇게저렇게 3일이 흘렀다. 아침에 막 일어났는데, SH-006에 대대장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강영 북쪽 교외 오로의 경비 파견 부대 검열을 갔다 와야 한다. 오늘은 부대에 출근하는 대신 그곳에 다녀올 것. 이상.’
“뭐지? 대대장님이 내게 이런 건 잘 안 보냈는데. 뭐, 오늘은 부대에 출근 안 하고 검열을 간다니 그냥 정장으로 입고 가야겠군.”
보통 검열을 갈 때는 사원으로써 가므로 전투복이 아닌 정장을 입었다. 그는 아침을 먹고 시간이 될 때까지 인터넷 검색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여자친구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메시지를 하나하나 보니, 그녀는 그에게 변치않는 관심을 주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는 내심 흐뭇해했다. 그러면서도 왠지 무슨 일이 닥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사실 그는 오주원을 심문한 이후로 계속 의문이 들었다. 그 자신이 기계로 느껴질 정도였다. 어쩌면 자기 자신은 GT 그룹이라는 커다란 기계 속에 있는, 대정이라는 작은 기계 속의, 또 그 속에 들어 있는 대정 경비대라는 더 작은 기계의 부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GT 그룹에게서 자유로워 본 적이 없었다. 생필품도 GT 그룹 산하의 회사 제품이고, 길거리에는 GT 그룹의 광고로 가득 차 있고, 학교 수업은 상품 홍보가 상당수 들어 있고, 심지어는 생필품 여기저기에 광고가 부착되어 있었다. 그는 그것이 점점 답답해졌다. 뭔가 벗어나 보고 싶었다. 그런데 그 길은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었다.
시간이 되자 그는 정장을 차려입고, 거울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리고,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가서 차에 시동을 걸고 운전을 시작했다. 강영 시내가 아니면 철도 사정이 좋지 않아 자동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아침이라 도로는 다소 막혔다. 이 시간의 도로상의 차들은 거의 대부분이 정사원들의 출근 행렬이다. 정사원들의 근무지는 지방 행정 관청 아니면 대부분 강영 중심가에 있었다. 그만큼 길도 막힐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일단 강영 순환 고속도로로 빠지기로 했다. 고속도로만 타면 다섯 가닥으로 뻗은 고속도로를 통해 대정의 여러 방향으로 갈 수 있었다. 그 중 북부 고속도로를 타고 10분만 가면 오로라는 소도시가 나온다. 이곳은 군사 시설 밀집 지역으로 이민우가 있는 부대는 그쪽의 탄약고 경비 파견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인지도 알려 주지 않고, 그냥 검열하라며 가라니 그게 말이나 될 일인가? 대대장이 이렇게 추상적인 명령을 내린 건 처음이었다. 그는 자신이 무척 피곤하고 고달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늘 뭔가를 도맡아 해야 하고, 또 탈출구를 찾고 싶어하니 말이다. 그는 오주원의 말을 한 층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오로 방면으로 빠지는 나들목이 나왔다. 나들목에서 부대까지의 거리는 5분이었다. 그런데 가다 보니까 길 앞에 검문소가 있었고 사람 몇 명이 무릎꿇려져 있었다. 검문소의 경비대원들이 그의 차를 세웠다.
“잠깐, 정지! 멈추시오! 여기는 신분이 증명되지 않은 사람은 지나갈 수 없소!”
“신분이라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사원증 말이오. 사원증이 없으면 통과할 수 없소.”
그는 주머니를 뒤져 봤다. 사원증이 없었다. 사원증은 전투복에 넣고 다니는데, 그 날따라 그것을 깜박했던 것이다.
“아, 이걸 어쩌지? 내가 오늘 깜빡하고 사원증을 집에 놓고 왔습니다.”
“그럼, 내리시오.”
“무슨 소리요? 나는 대정 경비대 1등위 이민우란 말이오!”
경비대원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당신 거짓말도 참 잘 하시는군. 감히 누굴 사칭하는 거요? 당신같이 사원증 없이 행세하는 비사원들을 많이 봤지. 저기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쇼.”
“이봐, 나는 경비대 1등위다. 누구의 지시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지금 내게 이런 행위를 한 건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다.”
“입 닥쳐 새끼야! 빨리 안 내려!”
다른 경비대원이 운전석에서 그를 끌어내려 사람들이 있는 곳에 꿇어앉혔다. 경비대원 한 명이 그의 머리에 소총을 들이밀었다. 그는 무슨 일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져 갔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검문소 쪽에서 호송차 한 대가 왔다. 경비대원들은 그들을 그곳으로 끌고 갔다. 이민우 역시 그곳에 탔다. 호송차 문이 닫혔다. 호송차 천장에서 뭔가 향긋한 냄새의 기체가 뿌려졌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금방 잠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몇 시간 동안 어디론가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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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어딘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뒤 호송차에서 내려서 구불구불한 통로를 지나 여기에 도착한 지 몇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이 작은 방 안에는 햇빛이 들어오지 않았다. 오로지 위에 있는 희미한 LED 조명만이 이 방을 밝혀 주고 있을 뿐이었다. 방의 냄새는 아주 쾨쾨했다. 방들은 벽을 마주보고 있었고, 벽에 붙어진 레일로는 감시카메라가 쉴새없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게다가 아침식사를 한 이후로 몇 시간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당연히 지치고, 배는 고팠다. 이 방 안에 먹을 게 있을 리가 없다. 방문은 환히 뚫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다고 나갈 수도 없다. 문은 투명하기 때문이다. 그는 턱에 손을 괴었다. 천장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2059 이민우! 턱을 괴지 마! 손 떼!"
그는 다시 무릎 위에 손을 대고 앉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그나저나, 이 나라가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같이 성실했던 사람이 조금 이상한 생각을 품었다고 이렇게 되다니... 오주원이 말한 게 거짓은 아니었어.’
옆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입을 열었다.
“당신, 어쩌다 여기 오게 된 거요? 보아하니 체격도 좋은데, 뭘 하던 사람 같군.”
“아, 저는 원래 대정 경비대의 장교였습니다. 오늘 아침에 차를 타고 길을 가는데 검문소에서 사원증 제시를 요구할 때 사원증이 없었고, 저는 바로 체포되어서 여기로 오게 되었죠.”
“그런가? 안 믿기는데. 여기는 그런 것 가지고 오는 곳이 아니거든. 아주 중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만 오는 곳이오. 반체제 활동을 하거나 그에 동조하는 행동이나 언행을 했다던가, 강도상해나 사기죄를 저질렀던가...”
“보아하니 나이가 좀 지긋해 보이는데, 어떻게 오신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는 비사원이오. 하청으로만 40년을 일했지. 어느 날 배가 고파서 사원증이 없으면 출입이 금지된 사원 전용 식당에서 몰래 식사를 하고 있었소. 당연히 직원들이 와서 사원증을 요구했지. 나는 나갈 수 없다며 버텼소. 직원은 경비대를 불렀지. 직원과 몸싸움이 벌어졌고, 나는 분을 못 참아서 직원의 얼굴을 몇 차례 쳤소. 그 이후 나는 ‘감히 비사원이 사원을 폭행했다’는 이유까지 덤으로 씌워져 이곳으로 잡혀 오게 된 거요.”
“참... 억울하셨겠군요. 그런데 반체제 활동가들은 보통 한 곳에 잡아 둡니까?”
그 말을 듣고는 옆에 있던 남자 한 명이 입을 열었다.
“내 이야기를 하는군. 당신은 잘 알고 있소. 중대장으로 활동하며 시위를 진압할 적에 우리 활동가들을 많이 잡아 넣었지. 당연히 잊을 리가 없지.”
“아니, 정성훈? 당신은 그러면 그러한 것을 잘 알고 있단 말이오?”
“그럼, 알고말고. 반체제 활동가들은 이곳저곳에 분산수용되어 있소. 쓸데없이 모여서 서로 정보를 주고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는데, 놈들은 그런 얄팍한 수작을 써서라도 반체제 활동가들을 분산시키려고 애쓰고 있소. 참, 그런데 당신 왜 잡혀왔는지는 저 분에게 말씀했고, 어쩌다 그리 된 거요?”
“며칠 전, 오주원이라는 반체제 운동가를 심문했소. 그 때 ‘개인적인 의문점’이라는 말을 했지. 생각해 보니 그게 이상하게 된 것 같소. 그 전에 세크라듐 광산으로 끌려가는 비사원들도 봤고. 아무튼 이 나라, 상당히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소.”
“바로 보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시위 진압할 때 썼던 능력을 왜 지금은 못 쓰는 거요?”
“모르겠소... 여기 몇 시간밖에 안 있었는데도 시간 개념이 없어지고 혼란스러워지는군. 정신이 맑지 않으면 그것을 쓰지 못하는데... 이곳은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락에 빠트리기에 충분한 곳이오. 여기 온 지 몇 시간밖에 안 됐지만, 나는 그렇게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 때였다. 밖에서 워커 소리가 들려왔다. 벽을 울리는 그 소리는 방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공포로 이끌고 가기에 충분했다.
“젠장! 또 누구 하나를 305호 분실로 끌고 갈 모양이군. 놈들은 짧으면 하루, 길면 며칠을 가뒀다가 저렇게 하나씩 끌고 가지. 거기 가면 어떻게 될지는 몰라.”
워커 소리가 그가 있는 방 앞에 멈췄다. 그가 고개를 돌아보니 경비대 3등위 1명과 3등사 2명이 방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이 누군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4487 정성훈! 나와라. 305호실로 간다.”
“젠장! 당신들은 다 똑같군. 당신들 중 누구 하나 나를 인간으로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 비사원이라고 갖은 수모를 주고, 여기 와서도 며칠씩이나 굶겼지. 이제 당신들도 그럴 테지. 어디 끌어갈 테면 끌어가 봐라.”
정성훈은 의자를 잡고 놓지 않았다. 병사 두 명이 그의 다리를 잡고 안간힘을 썼다. 3등사가 다가왔다. 순간 이민우는 3등위 오른쪽에 서 있는 3등사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예전에 그의 부하로 있었던 조준호 3등사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를 몰라본다. 아니, 안다고 해도 알아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어쨌든 그는 허리춤에서 진압봉을 꺼내들더니 정성훈의 손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정성훈이 비명을 지르며 잡은 손을 놓았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병사들이 그의 다리를 잡아끌고 방을 나갔다. 정성훈은 그렇게 비참한 몰골로 305호실로 끌려갔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지금은 아마 그 다음 날 아침이리라. 그는 하염없이 온 몸이 가려웠다. 이곳에는 벌레도 있는 모양이었다. 정사원 때에는 방이 깔끔하게 관리가 되어서 그런 건 찾을래야 찾아볼 수 없었다. 아무튼 그에게는 열심히 긁기 위해 움직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나가는 몇 시간 동안 벽돌 수를 세 보기도 했었다. 여기가 어딘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반드시 살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몸과 정신이 온전해야 한다. 기회를 마치 매가 먹이를 노리듯 노리지 않으면, 여기서 온전히 살아나갈 수 없다. 그 생각은 정성훈이 끌려나가는 것을 보고 나서 더욱 절실해졌다. 그는 옆에 있던 나이 지긋한 방 동료에게 물었다.
“어르신, 여기서 혹시 탈옥한 사람은 없습니까?”
“없소... 이곳은 3중 경비가 되어 있고, 복도마다 모두 자동화 경비 시스템이 갖춰져 있소. 설사 시스템이 고장이 났다 하더라도, 경비대원들이 쉴새없이 돌아다니지.”
옆에 있던 덩치 큰 죄수가 거들었다.
“이곳에서 빠져 나가려고 하느니, 차라리 죽는다고 생각하는 게 나을 거요. 여기서 탈옥하려는 사람은 모두 경비대원들 손에 죽었지. 그냥 초탈하슈.”
그 죄수는 벌써 체념한 분위기였다. 그 말을 듣고 이민우가 말했다.
“당신은 무슨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거요. 나는 여기서 그냥 안 죽을 겁니다.”
그 죄수는 무슨 소리를 들었다.
“잘 들어 보슈. 저기 또 공포의 사자가 오고 있군. 워커 소리 들리우? 또 누군가 저렇게 잡아가겠지. 305호실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는 저 정성훈이라는 자가 잘 말해 줬을 거요.”
그 워커 소리가 그 방 앞에 멈췄다. 2등위 1명과 3등사 2명이었다.
“2059 이민우, 나와라.”
“무슨...일이오?”
“305호 분실로 간다.”
같은 방의 죄수들은 하나같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하지만 이민우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조금의 떨림도 없었다.
“그...렇소? 내 차례가 됐단 말이오? 뭐... 그럼 가 봐야지.”
그는 태연하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병사들 사이에 섰다. 2등위는 약간 놀랐으나 곧 말했다.
“당신 참 말을 잘 듣는군. 당신같이 우리를 잘 따르는 죄수는 처음이야. 본래 정사원이라 그런가? 다만 그 말투만 좀 공손하게 해 줬으면 좋겠군. 자, 가지.”
이민우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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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는 어떤 방에서 한 중년 남성을 마주보고 서 있었다. 중년 남성은 정장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나무로 만든 탁자를 앞에 놓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중년 남성은 방을 지키고 있던 경비대원들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고 했다. 중년 남성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네가 온 이유를 알고 있나, 이민우?”
“제 이름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사원 등록 시스템을 사용하면서 그런 것도 모르나. 조회하면 다 나온다네. 그건 그렇고, 자네 여기 온 이유를 알고 있나?”
“제가 무슨 이상한 말을 해서입니까?”
그는 일단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아직은 기회가 아니었다.
“정답에 상당히 가까워. 자네는 진도가 빠르군. 내가 만나 본 자들 중에는 처음이야. 그런데 요점은 이상한 말이 아니야. 자네는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구.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이 그걸 모르나?”
“죄송합니다. 아직...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런 것도 생각나지 않는 걸 무슨 엘리트라고 할 수 있겠나! 원래 이곳은 물리적 심문을 하는 곳이다. 문을 닫으면 완벽하게 밀폐되어서 누구도 알 수 없지. 뭣모르고 기어오르는 놈들은 여기서 울고불며 다 자백을 하게 돼! 나는 자네가 원래 정사원이고, 또 순응적으로 나오기에 이렇게 편의를 봐 주고 있는 건데, 자네도 그런 꼴 당하고 싶나?”
중년 남자는 격하게 말했다. 이럴 때는 움츠러드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이롭다.
“죄송합니다. 전 아직도 부족한가 봅니다.”
“흠, 그런가?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떠오를 거야. 나는 자네를 겁주려는 게 아니라, 다시 사회 구성원의 일원으로써, 올바른 인식을 가지게 하려고 해 주는 것뿐이니까 말이야.”
중년 남자의 얼굴이 점차 풀어지고 있었다.
“아, 이제 안 것 같습니다.”
“오, 그런가? 답이 심히 기대되는군.”
“저는... 한 순간의 잘못된 생각에 휩싸였습니다. 대정을 올바로 세우려는 노력에서 벗어나 쓸데없이 반체제가 주장하는 소위 자유화를 꿈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잘못한 것인데, 그것을 입 밖으로 냈으니 더더욱 잘못입니다. 지금 저는 제가 품어왔던 잘못된 생각을 모두 벗어버리고자 합니다. 저를 치료해 주십시오.”
그는 그러고서 무릎을 꿇었다. 중년 남자의 얼굴에서 완전히 경계하는 빛이 없어졌다. 중년 남자는 그의 앞으로 걸어나와서 말했다.
“좋아! 자네는 배우는 속도가 아주 좋군. 내 보고하여 좋은 대우를 받게 해 줌세.”
‘이 방은 밀폐되어 있다고 했지... 지금이 기회다...’
갑자기 이민우가 온 몸을 중년 남자 쪽으로 날리며 일갈을 질렀다. 중년 남자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지며 머리를 탁자 모서리에 박고 기절했다. 이민우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고 어떤 움직임도 없는 것 같았다. 이민우는 남자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나에 대해 두 가지를 모르는군. 이것은 사원 정보 시스템에도 없는 것이다. 하나는 나의 불굴의 의지이다. 다른 하나는 안 가르쳐 줄 것이다.”
그는 일단 문을 열어 보기로 했다. 만약 경비대원이 지키고 있다면 바로 정면 돌파할 것이고, 아무도 없거나 한눈팔고 있다면 몰래 나가서 혼란케 하리라. 그는 살짝 문을 열었다. 문을 연 쪽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을 좀 더 열고 앞을 봤다. 경비대원 2명이 벽에 기대서서 잡담을 떨고 있었다. 다행히 문으로부터 얼마 안 되는 쪽에 비상 통로 같은 것이 보였다. 그는 잠시 살피더니, 벽에 붙었다.
‘지금이 기회다.’
그는 벽에 바짝 붙어서 갔다. 잡담하는 경비대원들은 반쯤 열린 문에 가려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벽에 붙어 가다가 옆의 통로로 빠졌다. 성공이었다. 그는 일단 한숨을 돌렸다. 앞을 보니 계단이 있었다. 계단은 원형으로 약 10m쯤 위까지 뻗어 있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계단을 돌아 올라가니 좁은 길이 나왔다. 좁은 길을 따라서 가 보았다. 쪽문이 하나 보였다. 쪽문을 살짝 열고 보니 화면이 여럿 설치되어 있었고 거기서 경비대원 2명이 열심히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건 도박이다... 어제부터 종일 여기에 있어서 체력이 좀 딸리는 것 같군...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정신은 나의 가장 큰 무기이니...’
그는 저들을 정면으로 상대하기보다는 저들을 어떻게든 조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태껏 정신 에너지를 한 점에 폭발시키는 것을 한 적은 있었지만 상대를 마인드 컨트롤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야말로 도박이었다. 그는 쪽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앉아 있던 경비대원들이 흠칫 놀랐다. 당황한 경비대원 1명이 어딘가에 연락하려는데, 이민우가 그를 조용히 응시했다.
‘옆에 앉아 있는 놈을 두들겨 패라.’
갑자기 그 경비대원이 옆의 대원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당황한 옆의 대원은 조종당하는 대원을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다. 이민우는 문을 다 닫고 나서, 그 막으려는 대원을 함께 두들겨 팼고, 두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그 경비대원은 기절했다. 이민우는 다시 조종당하는 대원을 가만히 응시했다.
‘잘했다. 다시 앉아라.’
경비대원이 다시 앉고, 그는 감시카메라들이 전송하는 화면들을 바라보았다. 경비대원들이 쉴새없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정성훈이 ‘반체제 인사들은 분산되어 있다’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이들을 최대한 많이 구출하려면...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그는 다시 그 경비대원을 응시했다.
‘반체제 인사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을 표시해라.’
그러자 화면이 전환되고, 전체 약도에 빨간색으로 반체제 인사들이 수감되어 있는 곳이 표시되었다. 거기에는 이름까지 자세히 나타나 있었고, 이민우는 거기 있던 메모지 하나를 가져다가 그 모두를 메모지 위에 펜으로 적었다. 그는 또다시 그 경비대원을 바라보았다.
‘감방의 문을 개방한다. 반드시 모든 문을 열어라.’
경비대원이 버튼 몇 개를 조작하자 화면으로 문이 모두 열리는 것이 보였다. 죄수들이 감방 밖으로 몰려나왔다. 순찰을 돌던 경비대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죄수들을 막아 보려 했으나 죄수들이 구름같이 몰려나오자 경비대원들은 포위되어 어쩔 줄 몰라했다. 이민우는 다시 그 경비대원을 바라보았다.
‘마지막 명령이다. 내게 너의 소총을 잠시만 빌려 다오.’
경비대원이 아무 말 없이 소총을 넘겨주었다. 그는 소총을 거꾸로 들더니 총열로 경비대원의 뒤통수를 내려쳤고, 경비대원은 기절했다. 그는 일단 그곳을 빠져나와 감방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가 가는 길에는 아무도 없었다. 감방 문이 모두 열려, 비상사태였기 때문에 경비대원들이 모두 그리로 간 탓이었다. 감방이 있는 곳에 도달하니, 죄수들과 경비대원들의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죄수들이 경비대원들을 밀쳐내고 있었고, 경비대원들은 진압봉과 방패로 그들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죄수들 사이에 끼어서 들어갔다. 그곳은 오주원이 있던 곳으로, 그는 그 이름을 보고 찾으러 갔던 것이다. 오주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방 안에 있었다. 죄수들이 이미 나와서 크게 소란을 피우고 있었으므로 그는 힘들이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예상대로 그는 오주원이었다.
“이봐,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요?”
“당신은... 누구요?”
“저 모르겠습니까? 저번에 부대에서 봤잖습니까! 저 이민우요!”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거요?”
“그러는 당신은 왜 나가지 않고 여기 있는 겁니까?”
“혹시 나갔다가 저들이 제압되면 나한테 불이익이 있을 거 아니겠소?”
“당신, 당신같지가 않아! 전에 나와 마주앉았을 때는 패기가 넘치던 사람이 지금 왜 그러는 겁니까?”
“모르겠소... 저들에게 한번 무지막지하게 당하니 뭔가 내 안에서 내려앉는 것 같소...”
“뭐야, 당신 그 정도로 약한 사람이었나! 잘못된 사회를 바꿔보려는 사람이 이 정도에서 무너지다니! 왜 이곳을 박차고 나가지 않는 거요! 모름지기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당장 나갑시다! 동료들을 찾아야죠! 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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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오주원을 반 억지로 끌고 방 밖으로 나왔다. 경비대원들은 우락부락한 죄수들을 막느라 그들에게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어서 찾읍시다! 당신의 동료를 찾아요! 여기서 다같이 빠져나가야 합니다!”
오주원은 동료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단 옆쪽의 방에서 한 명을 찾았다. 하나 둘 찾고 나니, 동료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야, 이게 누구야? 전에 우리를 잡아넣던 이민우 중대장님 아니신가?”
“지금 그럴 말할 시간이 없습니다, 윤영훈 씨. 저도 당신들과 한 배를 탔습니다. 어서, 나머지 분들을 찾읍시다.”
“그럼, 당신이 이렇게 우리를 탈출하게 만든 거요? 거 참, 기막힌 인연이네그려. 그런데 당신 어떻게 탈출한 거요?”
“그건 나중에 말합시다. 일단은 지하에 있는 305호실로 간 동료들부터 구해야 합니다. 지하에 있으니, 그들을 구하고 창고로 가면 탈출에 필요한 호송차와 병력 수송 버스를 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가는 길은... 어떻게 할 거죠?”
“응? 최세미 씨, 자네도 탈출한 건가?”
“뭐 남자 방만 열린 줄 압니까? 여자 방도 다 열렸다고요.”
“조금 전에 죄수 탈출 경보 2단계가 울렸습니다. 경비대원들은 모두 죄수들을 막아서려 할 것입니다. 지금 탈출하는 것이 기회입니다.”
“아... 알았소. 그럼 갑시다.”
어느 새 20여명으로 늘어난 그들은 발걸음을 옮겼다. 경비대원들은 예상대로 모두 죄수들을 막으러 갔으므로 그들은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지하로 갈 수 있었다. 지하에 가서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니, 기력이 쇠한 것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이 있었다. 그 중에 이민우의 눈에 익은 사람도 있었다.
“정성훈! 무슨 일을 당했길래 그렇게 된 겁니까?”
“꽤 안 좋은 일을 당했소... 나중에 자세히 말할 테니 우선 여기서 탈출합시다.”
그들은 이민우가 미리 알고 있었던 길로 갔다. 움직이기 힘든 사람들은 부축해서 옮겼다. 지하실에서 계단을 올라가니 정비고, 무기고 등의 시설이 나왔다. 당연히 경비대원들은 죄수들을 막으러 올라가느라 없었다.
“이제... 뭘 하면 되는 거지?”
“여기에 무기류나 경비대원 전투복 같은 것이 있습니다. 챙길 만큼 챙겨서 여기 있는 호송차들을 타고 탈출하면 될 것 같습니다. 저들이 이리로 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으니, 최대한 빨리 챙겨서 차에 타야 합니다.”
이민우가 말하자 옆에 있던 반체제 인사 한 명이 말했다.
“그런데 이걸 입는다고 우리가 뭐 달라지는 것 있나? 저놈들은 어차피 우리를 공격할 거 아냐. 뭣같은 저놈들에게 또 당하기는 싫단 말야.”
“그런 소리 말고, 빨리 입게. 탈출하려면 어쩔 수 없지 않나!”
그들이 전투복을 다 입고, 무기까지 들자, 제법 그럴듯한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호송차 몇 대에 나눠 올라탔고,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운전을 맡았다.
“자, 이민우 씨, 이제 시동을 걸면 되는 건가?”
“제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출발하십시오.”
그가 시동을 걸어 출발하자, 다른 차들도 일제히 출발했다. 원래 그가 대정 경비대 간부기이도 했지만, 호송차를 운전하는 그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위병소에 다다르자 영문 경비업체 직원이 무슨 일로 나가냐고 했다. 그가 탈출한 죄수들을 잡으러 간다고 하자, 직원들은 그냥 통과시켜 주었다. 동료들은 놀라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아해했다. 자신들이 너무나도 쉽게 탈출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민우의 옆에 앉아 있던 오주원이 말했다.
“당신이 해낼 줄 알았소. 당신을 믿은 건 도박이었는데 말이지.”
“애초에 저게 치밀해 보이기는 해도 속은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그건 제가 3년간 경비대 간부로 있어 봐서 어느 정도 잘 알지요. 돈이 되는 것이면 적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라도 기꺼이 합니다. 제가 접근할 수 있었던 문서만 봐도 그들이 그렇게 증오하는 타타리아의 독재자 ‘제클 버’에게 돈을 받고 초합금 소총의 설계도를 판 것을 봤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이제 큰 그림이 그려지는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 거요?”
“여기서 총본사로 갈 겁니다. 대통령과 직접 담판을 지을 겁니다.”
“당신 미쳤소? 총본사이니만큼 경비가 더 삼엄할 것 아니겠소? 그건 미친 짓, 아니 죽음이나 다름없소.”
“제가 어떻게 시위진압을 했는지 못 보셨습니까?”
“아... 알겠소. 그러면, 그곳의 위치는 알고 있소?”
“운전석 계기판에 지도와 위치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위치를 찍어 놨으니, 혹시 경비대원들이 공격하면 총구를 열고 대응사격을 하면 됩니다.”
“위치가 어딘지는 대충 표시되어 있는 거요?”
“예, 지금 강영의 본사 기준으로 동쪽 방향으로 30km 떨어져 있습니다. 1시간도 안 되어 도착할 겁니다.”
병력 호송 행렬로 위장한 그들은 아무 제지도 받고 고속도로를 탔다. 그는 차를 몰면서 뒤에 있는 동료들에게 말했다.
“제가 항상 생각한 게 있습니다. 저는 그간 정사원으로 있으면서 비사원들을 많이 보지 못했었습니다. 아예 그들과는 분리되다시피 했으니까요. 하지만 당신들을 만나보고, 책도 읽어 보고, 제가 배운 역사를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이제 깨달았습니다. 이 나라는 이상해도 한참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예전에 알았던 것을 저는 지금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
강영의 시가지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는 강영 시가지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급히 나들목에서 빠져나와 그의 집 쪽으로 향했다. 옆에 있던 오주원이 물었다.
“고속도로가 더 빠른 것 같은데, 그리로 가지 않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소?”
“만약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고속도로는 쉽게 노출되어 있으니 얼마 못 가 제압당할 것이 분명합니다. 차라리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밑으로 내려가서 이리저리 피해 가는 것이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 집 근처가 이쪽입니다. 집에서 잠깐 볼일이 있습니다.”
“당신, 앞의 것이 본래 목적이오, 뒤의 것이 본래 목적이오?”
“물론, 앞의 것이 목적입니다만, 집에 가서 할 일이 잠깐 있습니다.”
“음... 그럼 빨리 갔다 오시오.”
곧이어 이민우가 뒤에 따라오는 호송차들에 교신을 했다.
“제가 곧 차를 세우면 정지합니다. 5분간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그의 아파트 앞에 도달하자, 그는 차를 세웠다. 곧 뒤에 따라오는 모든 호송차들이 멈췄다. 이민우가 아파트로 올라가자 호송차 안에서 동지들이 한 마디씩 했다.
“그런데 저 놈을 믿어야 하나? 저렇게 전향적인 태도를 보여도 꼭 배신하는 놈이 있단 말이지.”
“기다려 봐요. 사람은 일단 믿고 봐야 하는 거 아닌지요?”
“그런데 말야, 저 이민우라는 자는 예전에 우리를 잡아넣는 데 앞장섰어. 정사원이기도 했고. 그것도 경비대원 말이지. 어쩌면 저 놈이 감옥에 들어왔다가 우리를 빼낸 것은 또다른 상부의 지시가 있어서가 아닐까?”
“그런 멍청한 소리는 그만 하슈. 뭐 음모론 맹신자도 아니고.”
한편 이민우는 아파트에 올라가 자신의 집에 들어갔다. 집은 어제 나왔을 때의 그대로였다. 그는 자신이 즐겨 읽던 역사책을 챙기고, 소지품 몇 가지를 챙겼다. 그리고 옷장 안의 자신의 전투복으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아파트를 나오려는데, 문 앞에서 여자친구와 마주쳤다.
“어? 자기야! 너무 보고 싶었어! 왜 없었던 거야?”
“미안... 말하지 마... 나 지금 중요한 일을 하고 있어.”
“그게 무슨 일이야? 말해 봐!”
“정말이야. 말할 수 없어. 너와 나의 관계를 알면, 네가 큰일나.”
“무슨 큰일! 뭔데!”
“반체제 인사들하고 엮여서 쫓기게 됐어. 놈들이 너는 아직 모를 거야. 미나야, 너는 나한테 얽히지 말고, 새로운 삶 살아.”
그러고서는 이민우가 도망치듯 엘리베이터를 타려는데, 여자친구가 그의 팔을 잡았다.
“민우야. 너한테 이제껏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사실, 나도 정사원이야. 암호 관련 부서에서 일했어. 그런데, 어제부턴가 동료 직원들의 시선이 많이 변했어. 말은 안 해도 서로 뭔가 알고 있는 눈빛이었어. 그걸 보고 알았지. 그대로 있다가는 나도 어떻게 될 거라는 걸 말야. 난, 너와 함께 가고 싶어. 어차피 너와 사귀기 시작하면서 다 생각했던 거야.”
“그래? 그럼, 나와 같이 가자!”
이민우는 여자친구와 함께 아파트를 나와서 차 쪽으로 뛰어갔다. 정확히 4분 51초 걸렸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오주원이 한 마디 했다.
“그 여자는 누군가?”
“이제 저희와 한 배를 같이 탔습니다. 미나야, 여기 있는 무기 중 아무거나 들어.”
“내가 보기에는 뒤의 것이 목적 같구만.”
“뭐해? 미나야. 인사해.”
“아, 안녕하세요. 저는 나미나라고... 합니다. 예전에 하던 건 암호 해독 및 설정 관련 일이었어요.”
“그런가? 민우 씨, 이 사람 믿어도 되겠지?”
“네, 믿어도 됩니다. 저와 함께하기로 했으니까요.”
“민우 씨! 이제 출발할 때 되지 않았나?”
“출발하겠습니다! 모두 마음 단단히 먹으십시오!”
행렬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뒤에서 동료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런데 이거 말야. 우리는 대정 전체를 위하여 투쟁하는 건데... 이렇게 소수로 가는 건 의미가 없지 않을까? 뭐랄까, 좀 독선적인 거라구.”
“하지만 우리가 그 동안 여러 차례 시위를 이끌어 와 봤자, 저놈들은 모르쇠로 일관해 왔지. 어떻게 보면, 이런 충격 요법이 그들로 하여금 뭔가 바꾸게 할 수 있을지도 몰라. 손바닥으로 여러 번 치는 것보다, 송곳으로 한 번 찌르는 것이 더 아프듯 말이지.”
듣고 있던 이민우가 한 마디 했다.
“저는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효율성과 정사원 신분의 풍요를 긍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속에서만 살아 왔고, 그 속에서 주는 여러 혜택에 묻혀 있었으니까요. 저를 바꿔 놓은 건 노점상을 하고 있던 한 할머니였습니다. 그 할머니는 정사원인 저를 부러워하였습니다. 그 할머니가 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 할머니를 다시 만나보고 싶군요.”
뒤에서 듣고 정성훈이 말했다.
“우리 동지들 중에는 정사원 출신도 있고, 비사원 출신도 있네. 자네도 알듯이, 자네 옆에 앉은 주원이는 자네와 똑같은 엘리트 과정을 밟다가, 사회에 의문을 품고 대학을 뛰쳐나왔지. 서로가 서로의 위치에서 현재에 의문을 품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한 결과 이렇게 서로 만나게 된 거야. 서로 뜻이 같으면, 서로 뭉치게 돼. 그렇지 않고 각자 위치에 안주하려 하면, 정사원은 각종 복지와 혜택에 묻히게 되고, 비사원은 점점 더 추락해서 노예가 되어 가는 거야.”
“또 이런 적도 있었습니다. 제가 며칠 전 휴가를 나가서 동부 지방의 산지로 가던 도중에 세크라듐 광산을 보았습니다. 그곳에서 경비대원들이 비사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강압적으로 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습니다. 저 위에 있는 누군가가 명령을 내렸을 테니...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습니다.”
역시 뒤에서 최세미가 말했다.
“마음고생이 심했겠어. 그걸 보고도 뭔가 느끼지 않는 건 이미 사람이 아냐. 부품일 뿐이지. 우리는 그 부품이 되지 않으려고 몸부림쳐왔어. 시위에 나가서 우리의 목소리를 외쳤지. 그러나, 돌아오는 건 발길질과 매질뿐이었어. 우리는 더욱더 쪼그라들었어. 이민우 씨, 자네를 만난 건 그야말로 기적이야.”
호송차 행렬은 도심부로 점점 더 들어가고 있었다. 마침 시간은 오후 5시를 지나고 있었다. 그 때, 길가에서 방송이 나왔다.
“사원 여러분께 알려 드립니다. 조금 전, 동부 감옥에 같혀 있던 테러리스트들이 탈출한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들이 강영 쪽으로 향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으며, 정확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사원 여러분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훗, 우리보고 테러리스트라는군! 한 번 해 보자는 거지! 그리고 사원만 대피하라구? 사원 아닌 사람은 인간도 아닌가 보군!”
“모두 총을 드십시오. 당장 쏘지는 않더라도 몸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그리고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라앉혀야 합니다. 놈들이 언제 공격해 올지 모릅니다. 오주원 씨는 이 차 안에 방어 시스템 같은 것이 있는지 살펴봐 주십시오.”
“알겠네. 이 앞에 있는 걸 보면 되는 건가?”
오주원은 화면에 있는 ‘자동 방어 시스템 작동’버튼을 보았다.
“이민우 씨, 자동 방어 시스템 작동이라는 버튼이 있는데, 이걸 누르면 되나?”
“네, 그럴 겁니다. 그런데, 지금 누르면 안됩니다. 제가 누르라고 할 때 누르십시오.”
“음... 자네 그러고 보니 이 차를 많이 알겠군. 자네 결정에 따르지.”
행렬은 이제 시가지에 진입하고 있었다. 시가지는 이상하게 음산했다. 평소라면 퇴근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눈에 띄기 시작해야 할 때인데 아무도 없었다. 방금 전의 안내방송 때문인 듯했다. 이상하게 본사로 가는 길은 한산했다.
“이상해. 아무도 제지하지 않고, 길거리에 차도 없고 말야. 민우 씨, 이건 함정인 것 같아. 돌아가서 다음을 도모하는 건 어떨까?”
이민우는 잠시 운전을 자동 모드로 전환하고, 자신이 들고 온 역사책을 꺼내 보이면서 말했다.
“기회가 있으면 즉시 행동에 옮기라고 하였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이 역사책에서 본 바로는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고, 그 때 비로소 최씨 부자 정권이 무너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회는 그렇게 왔고, 민중들은 그 기회를 잡아 최씨 정권을 몰아냈습니다. 지금은 기회입니다. 그리고 제가 방금 자동 방어 시스템이 있다고 말했잖습니까. 저만 믿으십시오. 그리고 여지껏 수없이 많은 위험과 싸워 오며 반체제 운동을 해 왔던 분들이신데 이렇게 소심한 모습을 보이면 되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는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차는 어느덧 목표지점을 400m 가량 남겨두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계기판에 붉은 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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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우 씨, 이 붉은 점들은 뭔가?”
“일단 차를 멈추십시오. 지금이 바로 자동 방어 시스템을 사용할 때입니다. 제 신호에 누르십시오.”
그 시간, 1개 중대 병력의 경비대가 20층 정도 높이의 건물 위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3개 소대로 나누어 각각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일등경 한 명이 밑을 내려다봤다. 약 100m 밖에서부터 호송차 행렬이 오고 있었다. 일등경은 중대장에게 물어 보았다.
“저기 호송차들이 오고 있습니다. 저희 지원병력입니까?”
“아니다. 동부 감옥에서 탈출한 놈들이다. 총본사 쪽으로 향하고 있으니 맞을 거다. 내가 대대장님께 보고하겠다.”
즉시 중대장은 소속 부대의 대대장에게 보고했고, 대대장으로부터 허가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신호하면 즉시 쏜다.”
한편 밑에서 호송차를 모는 이민우는 건물 위에서 총을 장전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위에서 기회를 노리던 중대장은 지금이라고 생각하고 발사명령을 내렸다.
“발사!”
“지금입니다! 누르세요!”
위에 있는 경비대원들이 일제 사격을 개시했다. 사격은 약 30초간 이어졌다.
“계속 쏴라!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쏴라!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 한 놈도 살려보내선 안 돼!”
이윽고 총알이 다 떨어졌다. 중대장은 호송차에 있는 사람들이 죽었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중대원들에게 밑으로 내려오라고 지시했다.
“밑으로 내려와라. 확인 후에 보고한다.”
한편 차 안에서는 이민우와 일행이 숨죽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무사하셨습니까? 지금 저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아마 죽었는지 확인하러 내려오는 걸 겁니다.”
“그런데, 이거 원리가 어떻게 되는 거지?”
“버튼을 누르면 시스템에 의해 일시적으로 차체 장갑이 초고도로 단단해져서 아주 강력한 포탄이 아닌 이상 어떤 총탄에 의한 공격도 흡수합니다. 이건 그룹 쪽에서 개발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단은 가만히 있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가까이 오면?”
“그 때는 제가 처리하지요.”
이윽고 그 중대가 가까이 다가왔다.
“모두 몸을 낮추십시오. 제가 됐다고 할 때까지는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이민우는 그러면서 뭔가 생각했다.
‘전에 벽을 넘어뜨린 게 생각나는군... 그 때와 비교하면 정말 상상도 못할 정도의 정신력을 느낀다... 감옥에 있었던 기억 때문인가...’
한편 바깥에서는 경비대원들이 소리가 들리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바깥에서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중대장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창문을 열어 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아니다. 열지 마. 저 놈들이 뭔가 꿍꿍이가 있을지도 몰라. 부비트랩이라던가...”
“중대장님, 저놈들은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뭘 가지고 나왔겠습니까? 그냥 열어서 확인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순간, 차문을 열고 누군가가 나왔다. 복장까지 완벽히 경비대원과 똑같았다.
“너는 누구냐!”
다음 순간 그들은 폭풍과도 같은 충격파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버텨낼 수 없을 만큼 강했고 그들의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민우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넘어진 경비대원들이 어지럽게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이민우는 차로 돌아왔다.
“지금입니다! 출발합니다!”
안에 있던 동료들은 모두 한숨 돌렸다는 표정이었다. 뒤에서 여자친구가 말했다.
“민우야, 네가 이런 건 몰랐는데...”
“나도 네가 정사원인 거 몰랐잖아? 그럼 똑같아진 건가?”
“야. 그거랑 차원이 같냐? 정사원이랑 초능력 쓰는 거랑 같냐구?!”
“자자, 둘 다 그만들 하고, 지금은 그런 걸로 다툴 때가 아니야. 지금은 본사로 가는 것에만 집중하자고.”
이제 그들은 본사에서 500m도 안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여기까지 온 것이 어떻게 보면 기적이었다. 그것도,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그리 먼 거리도 아니고, 그리 가까운 거리도 아니군. 그토록 위압적으로 느껴졌었는데, 이렇게 쉽게 이곳에 도달할 줄이야...”
드디어 본사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 100m 높이의 원통형 빌딩에 그것보다 3배는 넓은 기단이 받치고 있는 형태였다. 주위 100m에는 건물이 없도록 해 놨고, 둘러싼 건물들도 모두 낮게 지어졌기 때문에 높이에 비해서 돋보이는 느낌이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저기 들어갑니다. 딱히 보이는 건 없어 보이는데...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제 느낌인가요?”
“아냐. 자네 느낌이 맞아. 본사를 둘러싼 건물들 위에서 경비대원들이 우리를 포위하고 있어. 내가 지금 뒤에 난 창으로 봤는데, 역시 자네 예감은 적중했어.”
그 때, 본사를 둘러싼 건물 위에서는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북부대대. 그 중에서도 시위 진압으로 명성이 높은 A중대는 행렬의 뒤편에 있었다. 물론 이민우는 공식적으로는 행방불명 상태이므로 다른 중대장이 와 있었다.
“내가 첫 번째로 맡는 작전인데... 잘 되겠지? 이번 작전을 잘 해야 대대장님께서 뭔가 포상도 주고 할 텐데 말야.”
“저, 중대장님. 지금 그런 걸 생각하실 때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서부대대 B중대가 원인불명의 연락두절상태에 빠졌습니다. 서부대대 B중대의 마지막 보고에 따르면 차 안에서 경비대 전투복을 입은 누군가 나왔다고 합니다. 뭔가 심상치 않습니다.”
“이봐, 반체제 놈들이 있어봐야 뭐 있겠어? 그냥 호송차를 방패삼고 맨몸뚱이로 온 거 아닌가? 모두 신호가 가면 진격 개시다. 다른 중대에서도 우리가 가는 것과 동시에 진격할 것이다. 알았나?”
“예, 알겠습니다.”
소대장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하지만 그 중대장이 생각하는 ‘반체제 놈들’은 맨손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신호가 떨어지자 그들은 건물에서 내려와 포위를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그들은 ‘안에 들어 있는 놈들’이 뭘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이번에도 아까처럼 하면 됩니다. 단, 이번에는 놈들이 그냥 다가오고 있으므로 그냥 제가 나와서 아까처럼 할 겁니다. 지금 몸을 낮추고 계시면 됩니다.”
북부대대 경비대원들은 조금씩 포위망을 좁혀 가고 있었다. 그들은 한 발짝,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A중대에서 한 소대장이 말했다.
“잠깐, 멈춰라! 저 안에서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 대기!”
“A소대장, 뭐 하나? 내 말이 말 같지 않은 건가? 어서 전진해!”
“아... 알겠습니다.”
소대장뿐만 아니라 다른 병사들도 똥 씹은 표정으로 전진했다. 물론 그들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는 채였다. 그들이 호송차 행렬을 완전히 둘러쌌다.
‘그 때였지... 훈련할 때가 또 생각나는군...’
그 때 이민우는 또다시 혼자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는 굵직한 철봉이 여럿 놓인 곳에 있었다.
‘저게 내 주위로 촘촘이 놓여 있는데, 저걸 넘어뜨리라고? 말도 안돼.’
그 순간 익숙한 음성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너는 할 수 있다. 저번처럼 또 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것도 하는데, 큰 것이라고 못 하겠는가? 저것을 무너뜨린다고 생각만 하라. 그러면 이루어지리라!”
그는 벽을 넘어뜨렸을 때를 또 생각하며 이번에는 그 기둥들이 우수수 쓰러지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서 기둥들이 쓰러지고 있었다. 그는 그 순간 눈을 딱 뜨며 고함을 한 번 내질렀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을 중심을 하여 철봉들이 모두 방사형으로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때와 같았다. 더군다나 둘러싼 경비대원들은 철봉보다도 가벼웠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은 다음, 차문을 열고 나왔다. A중대의 소대장 한 명이 누군가 익숙한 사람임을 느꼈다.
“아니, 당신은...”
그러나 그는 그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굉장한 충격파가 그의 온 몸을 때렸다. 그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북부대대의 경비대원들 중에 제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민우는 차에 돌아왔다.
“됐습니다. 이제 고개를 드셔도 됩니다.”
“다음은 어떡할 건가?”
“저 문 앞에 감시가 삼엄할 겁니다. 맨몸으로 나왔다가는 죽고 말 겁니다. 하지만 저 앞의 문이 모두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저기를 그냥 뚫어버리고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갑시다.”
모든 차가 시동을 걸고, 속력을 높였다. 유리문을 향해 그대로 돌진했다. 유리문이 와장창 하고 깨지고, 그 사이로 모든 차가 들어왔다. 본사 건물 진입은 의외로 쉬웠다.
“이제 여기부터는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무기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할 겁니다. 그럼 나가겠습니다!”
“민우야, 여기 하얀 지뢰는 뭐지? 후폭풍 조심이라고 써 있는데...”
“일단 챙겨, 미나야.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그들의 차가 멈춰 선 로비 앞에 큰 계단이 있었다. 계단 위에서 경비대원 몇 명이 나타났다. 그들은 경보를 울렸다. 그 때 옆에서 오주원이 수류탄의 핀을 뽑아 계단 위로 던졌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고 계단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갑시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그들 앞으로 또 경비대원들이 오고 있었다. 뒤에서 최세미가 말했다.
“앞에 분들 조심하세요! 또 하나 갑니다!”
그 말과 동시에 뒤에서 수류탄이 날아왔다. 수류탄은 경비대원들에 적중했고 경비대원들은 폭음과 함께 쓰러졌다. 경비대원들의 시신을 뒤로 한 채 그들은 계속 올라갔다. 건물은 천장을 제외한 가운데가 뻥 뚫린 원통형 구조로 되어 있었다. 복도가 나선형으로 되어 있어 빙빙 돌아 올라가면 각 층의 복도가 나오는 형태였다. 경비대원들은 위에서 총을 쏠 게 분명했다. 일단 허리를 최대한 숙이고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정성훈 등 몇 명은 감옥에서 겪은 고초 때문에 허리를 숙이고 포복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오주원이 말했다.
“이거 위험하겠는데... 한데 뭉쳐서 가기에는 너무 위험해. 게다가 동지들 중에는 고초를 겪어서 지친 사람들도 있다고. 조를 나눠 가야 할 것 같아.”
윤영훈이 말했다.
“오주원 , 자네 미쳤나? 우리는 절대 떨어져 갈 수 없어. 우리는 생사를 함께하고 뜻을 같이 한 동지야. 아무리 몸이 불편하다고 할지라도, 누군가를 버린다는 건 미친 짓이고, 인간이 할 짓이 아냐. 그건...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아무렇게나 내팽개치고 쫓아내는 이곳과 다를 게 없어.”
“내가 말한 건 특정한 몇 명을 지칭한 게 아냐. 뭉쳐 가면 생존 가능성이 더욱 낮아지지. 흩어질수록 생존 가능성은 더욱 높아져. 자네 그 동안 여러 번 시위 해 봤잖나.”
“시위와 지금 이 상황이 같나? 시위 때는 잡혀갈 때는 잡혀가도 죽지는 않았잖나? 그런데 이건 아냐. 이건 목숨을 건 상황이야!”
옆에서 듣고 있던 정성훈이 말했다.
“이봐, 자네들, 걱정해 줘서 고맙기는 한데, 나는 어차피 이도저도 못하니까 그냥 지름길로 가면서 자네들 지원사격해 줄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무도 대답을 못 하는데, 이민우가 한 마디 했다.
“자, 자, 지금은 두 분 다 이러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정성훈 씨도 그렇게 계시면 안 됩니다. 일단, 조를 2개로 나눠야 할 것 같습니다. 오주원 씨, 윤영훈 씨, 성한 분들과 함께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불편하신 분들은 저와 함께 가도 되겠습니까?”
모두들 반대의 눈치는 없었다.
“좋습니다. 오주원 씨, 윤영훈 씨, 성한 분들을 이끌고 먼저 올라가 주십시오. 지금 손에 드신 DG-3 소총은 제가 최고의 화기라 자부합니다. 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 줄 겁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하신 분들은 제가 지금까지 보여 준 능력을 믿으시면 됩니다. 자, 가죠. 미나야, 같이 가자.”
오주원과 윤영훈의 조는 일단 나선형의 복도를 올라가기로 했다. 위쪽에서 총알이 계속 날아들었다. 서서 갔다가는 안전을 보장하지 못할 판이었다.
“어떡하지?”
“우리도 여기서 두 조로 나누는 게 어떨까? 뭉쳐서 가서는 생존성을 보장하지 못해.”
“오주원, 정말 미쳤구만! 뭉쳐서 가도 살아남지 못할 판에 뭐? 또 나누자고?”
그 때 옆에서 누군가 말했다.
“이봐, 이봐. 지금 이렇게 언쟁할 때가 아니라고. 뭐 징집되긴 했어도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다 군생활 해 봤잖나.”
그 때였다. 오주원이 들고 있는 총에서 삐-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주원이 총을 왼쪽으로 돌릴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뚜렷해졌다.
“자네를 노리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아.”
그 때 오주원이 소총을 겨누고 쐈다. 동시에 위에 있던 경비대원 한 명이 쓰러졌다.
“살았군. 괜히 이게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 줄 거라고 한 게 아니었어.”
“그런데, 이거 우리를 벌레 취급하던 저 GT그룹 놈들이 만든 무기 아닌가?”
“저 놈들이 만들기는 했어도, 실제로 공장에서 땀흘려 이걸 만든 사람들은 모두 비사원들이야. 모두 사원과 비사원의 철저한 차별과 착취의 결과물이지.”
“자, 자, 그건 이따가 한 번 들어 보자구. 자, 계속 가지. 내가 앞장설게.”
윤영훈이 앞서 가면서 다른 동료들을 재촉했다. 그들은 계속 복도를 따라 올라갔다. 한편, 이민우의 조는 천천히, 그러나 차근차근 전진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민우 씨, 이거 빨리 안 가면 안 되나?”
“여러분을 생각해서입니다. 여러분은 몸이 안 좋잖습니까. 아까 가신 분들처럼 몸을 숙이고 포복하고 하면 몸에 심각한 무리가 생깁니다. 저만 따라오십시오. 그리고 저를 믿으십시오. 여러분은 살아서 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한적한 길을 찾아 움직였다. 옆에서 여자친구가 한 마디 했다.
“민우야, 네가 이런 일을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이렇게 힘있는 모습을 본 적 없어. 그건 듣고서는 느낄 수 없어.”
“내 정신력 때문일 거야.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도 그것을 느낄 정도면 강력한 건 분명해.”
그들이 계속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그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예감이 안 좋아. 직감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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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였다. 오주원에게서 연락이 왔다.
“민우 씨, 들리나? 나 오주원이다. 슬픈 소식을 전하려고 한다.”
“무슨... 일이십니까?”
“윤영훈이 앞서서 나아가다가... 부비트랩에 걸려... 폭사했다.”
“아...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윤영훈이 이렇게 죽은 건 슬프지만... 별수 있겠나. 안 움직이면 우리가 죽는 판에... 우리는 윤영훈이 열어 준 길로 계속 간다. 모두 함께야. 더 이상의 희생은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여러분! 저희는 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로 올라가겠습니다.”
“엘리베이터라니! 위험하지 않나? 엘리베이터를 타면 나 죽여 줍쇼 하는 거라구."
“저도 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안전할 겁니다.”
“알았네. 뭐 도박이니, 같이 가 보도록 하지.”
그들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12초 정도를 올라갔다. 꼭대기층까지 가는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리니, 경비대원 몇 명이 쉬고 있었다. 이들이 이쪽으로 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 중에 한 명이 이 쪽을 쳐다봤다. 이민우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순간 그 경비대원이 동료들을 향해 소총을 난사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한명씩 이 쪽을 쳐다보는 순간, 제가 조종하는 대로 될 겁니다.”
과연 말대로였다. 조종당한 경비대원이 동료들에 의해 쓰러지면, 궁금증에 경비대원들이 이쪽을 쳐다봤다. 그러면 또 한 명이 조종당하고, 차례로 쓰러져 한 명도 남지 않게 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 층에 있던 모든 경비대원들이 쓰러졌다. 옆을 보니 아까 그 나선형 복도로 내려가는 입구가 있었다.
“저는 오주원 씨의 조를 지원하러 가겠습니다. 여기 혹시 살아있을지도 모르니 감시해 주시겠습니까?”
그가 내려가자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이놈들이 무슨 죄람... 그저 여기 지키는 것밖에는 없을 텐데.”
“아니, 자세히 보니 얘들은 뭔가 휘장이 다른데. 계급장도 달라. 최소한 사급이야. 징집된 애들은 아니란 거지.”
“나도 경비대 생활할 때 들었어. 본사 경비는 2등사 이상만이 뽑혀서 간다고.”
“그런데 이민우 씨는 너무 독선적인 것 아닌가?”
“맞아. 좀 너무 우리가 어떻게 말을 걸 수 없다고 할까? 그런 것 같아. 물론 우리가 말을 안 건 건 아니지만 말야.”
“그런데 이민우 씨의 말에서는 진심을 느꼈어. 안정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고.”
“듣고 보니 그것도 맞는 것 같아. 민우 씨가 정신력이 좀 세다고 했는데...”
“좀 센 게 아니라, 민우 씨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걸 넘어섰어.”
그들이 한 마디씩 할 동안, 밑에서는 오주원과 일행이 나선형 복도를 올라가고 있었다.
“주원 씨, 위에서는 총알을 만드나? 그런 것도 아닐 텐데 말야.”
“세미 씨, 그런 말 마. 이건 죽고 사는 문제라고. 잠깐, 세미 씨 총에서 뭔가 소리 안 들려?”
또 그 삐, 삐 하는 소리였다.
“누가 세미 씨를 조준하고 있어!”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삐, 삐 소리도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후, 빵 하고 총소리가 들렸다. 몇 명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떠 보니 최세미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후, 천장에서 경비대원 한 명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민우 씬가?”
“여러분, 접니다! 제가 도우러 왔습니다!”
“민우 씨, 그렇게 소리지르면 안 돼!”
“괜찮습니다! 위는 벌써 끝났고, 나머지는 제가 하나씩 조종중입니다. 이놈들은 지금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금방 끝날 겁니다.”
이윽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희미하게 들려오던 총소리가 멎었다. 그가 말했다.
“이제 허리 펴시고 올라오셔도 됩니다!”
윤영훈을 제외한 모두가 다시 한 자리에서 만났다.
“주원 씨, 영훈 씨는 어떻게 된 건가?”
“앞서 말한 대로야. 우리 앞에서 앞장서 가다가... 부비트랩이 작동해서 그 자리에서 산산조각났어. 그걸 우리는... 눈 앞에서 봤지.”
오주원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하긴 그랬다. 몇 년을 함께 정부와 GT 그룹에 맞서 싸워 오던 동료였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가니 슬프지 않을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최세미가 말했다.
“왜 우는 거지? 영훈 씨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아니, 죽은 게 아냐. 우리 기억 속에 살아갈 거야. 우리 앞에 앞장서 나가던 그 모습대로 말야. 이제 그만 눈물 그쳐. 우리 앞에는 더 큰 게 있어.”
그 ‘큰 것’이 앞에 보였다. 대통령 집무실이라고 되어 있었다.
“누가 한 나라의 원수 아니랄까봐 이렇게 철문을 박아 놨군. 미나 씨, 아까 하얀 지뢰 있다고 했나? 그거 내가 경비대 있을 때 다뤄 봤는데.”
오주원이 나서서 지뢰를 몇 번 만지작거렸다. 지뢰에서 드릴이 나왔다. 그 드릴을 철문에 대자, 드릴은 철문을 뚫고 제자리에 안착했다.
“초읽기 들어간다. 모두 최대한 옆으로 피해! 저거 폭발력이 장난 아니니까!”
모두가 옆으로 피하자마자, 지뢰가 큰 폭발음과 함께 폭발했다. 그토록 육중한 철문이 산산조각났고, 길이 열렸다. 정면으로 나오는 후폭풍은 통유리를 능히 박살냈다.
“이거, 영화에서 많이 본 장면 같은데...”
“민우 씨, 그런 소리 할 시간 없네. 저 앞에 우리 목표가 있다고! 자네다운 모습을 보여야지!”
“오주원 씨, 뭔가 제 머릿속에서 불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이 정신상태로는 무리일 것 같습니다. 잠시 대신 이끌어 주시겠습니까?”
“아... 알겠네. 자! 다들 들어가자고!”
일행 모두가 대통령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대통령은 책상에서 시가를 피우다가 그들이 오는 것을 보고 껄껄 웃으며 일어났다.
“드디어 나오셨군. 너희들이 바로 비사원들의 우두머리인가?”
“무슨 소리인가. 지금까지 쓰러져 간 소외된 자들을 대신해 당신을 단죄하러 온 건데. 그리고 여기 비사원만 있는 건 아냐. 정사원도 있다.”
그러나 그 정사원 중 한 명은 대통령을 보자마자 머리를 싸매고 앓는 소리를 냈다.
“으... 으...”
“아니, 이게 누구신가? ‘초인 프로젝트’로 탄생한 이민우 1등위가 아닌가?”
그 순간이었다. 이민우의 머릿속에 이전과는 다른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는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 머리에는 전극이 수십 개 붙어 있었고, 끊임없이 전기 자극이 주어졌다. 계속 그런 기억이 반복하여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드디어 뭔가를 알아낸 듯했다.
“당신!!!! 왜 나를 그렇게 만들었지? 왜 거짓 기억을 넣은 거지?”
그 순간, 대통령 집무실 전체에 충격파가 퍼졌다. 집무실에 있던 모두, 심지어 대통령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이제껏 그 어느 때도 느끼지 못했던 강력한 분노를 느꼈다. 얼마 후, 대통령이 가장 먼저 자리를 털고 나서 말했다.
“극비 실험이었다. 경비대의 모든 임원들에게도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지. 순전히 내가 입안하고, 주도한 것이다. 말하자면 너는, 시제품이지.”
“뭐라고? 시제품? 내가 어디 짐짝같이 보이나!”
“그렇게 4개월 동안 온갖 실험을 거치고 아무도 모르게 경비대로 돌려보내서 실험해 봤는데... 결국 너도 실패작이군 그래. 자기 정신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는데 성공작이라 할 수 있겠나. 내가 여기서 확인했으니 당장에 폐기처분해야겠군.”
“뭐? 폐기처분? 나는 정사원 신분이다!”
“정사원이고 뭐고 상관없다. 국가란 하나의 거대한 기계와 같지. 그 기계를 돌리는 데 있어 조금이라도 오류가 있으면 국가는 망가지지. 그 오류를 어떻게 해야 하나? 바로바로 제거해야 한다. 국가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데 있어 오류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바로바로 제거되어야 한다.”
“잠깐! 그건 경비대, 아니 대정 전체에서 그렇게 증오하던 타타리아의 지도자 제클 버와 같은 것이 아닌가?”
“물론 공식적으로는 우리는 타타리아를 적국으로 보고 있지. 하지만, 그들에게서 배울 좋은 점도 있지. 때에 따라서는 두 가지 관점을 동시에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지. 타타리아는 한 지도자의 영도 아래 일사불란하게 국가가 돌아간다. 오류는 모두 제거되고, 모두가 하나로써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지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류는 없어야 한다. 내가 말한, 오류가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물론 저 뒤에 있는 비사원 찌끄러기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말이지.”
뒤에서 최세미가 말했다.
“우리가 왜 찌끄러기냐? 우리는 인간이다! 너희 같은 놈들의 도구가 아니란 말이다!”
대통령이 말했다.
“비사원들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
오주원이 그에게 총을 겨누었다.
“대답하라! 대답하지 않으면 쏠 것이다.”
“비사원 놈들이 감히 날 잘도 협박하는군. 훗, 좋다. 비사원들은 오류 정도가 아니다. 누구나 18세가 되면 사원 적합성 검사를 한다. 거기서 떨어진 자들은 정사원이 될 자격이 없는 자, 즉 살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즉, 너희들은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든다. 그래서 너희들의 위치에 맞는 삶을 제공하는 것이다. 비사원들이 현재 그렇게 사는 건 자신들이 자초한 것이다.”
“우리도 비사원들을 벌레 보듯 하는 당신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존재 가치가 없다고? 천만에! 나는 공정한 투표로 뽑혔다. 그리고 이 나라를 이끌어가는 데 가장 적합하기에 이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 때 이민우가 말했다.
“그 투표는 사실 1인 1표가 아니라 1주 1표야. 주식은 모두 신주의 GT그룹이 가지고 있지. 외국의 재벌에게서 뽑혀서 온, 정당성도 없는 자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어.”
“내가 너희들의 말을 받아 주느라 시간이 너무 흘렀군. 이제 죽을 시간이다.”
그는 대기중인 경비대원을 호출하려 했다. 그러나 이민우가 말했다.
“지금 대기중인 경비대원들은 우리를 못 죽인다. 오히려 우리를 돕겠지.”
“대통령 경호대! 뭐 하는가! 어서...”
하지만 대통령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이민우는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우리를 여기서 즉시 나가게 하고, 우주선을 제공해 이 행성에서 나가게 하라.’
대통령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폈다 하다가 입을 겨우 열며 이렇게 말했다.
“아... 아... 알겠다. 그렇게... 하라! 아래서 대기중인 경비대원들! 여기서 20여명이 내려갈 것이다. 그들을 중남부 우주기지까지 호송해서 40인승 우주선에 태우도록!”
동료들은 모두 안도의 얼굴색을 비쳤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경비대원들은 머리를 갸우뚱하면서도 그들을 중남부 우주기지까지 호송했다. 그들이 경비대원들의 호송을 받으며 중남부 기지로 갈 때쯤, 대통령은 그들이 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민우... 제법이군. 네놈이 정신조종을 구사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꼼짝없이 당했군. 그러나...”
한편 중남부 우주기지에서는 이민우, 오주원, 정성훈 및 함께 한 반체제 인사들 전부가 탑승을 완료했다. 우주선은 무인 조종이 가능했고 인공지능으로 움직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기세등등하던 대통령이 우리를 순순히 보내 주다니...”
“큰 도박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정신력은 대단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자리까지 올라오려면 정신력이 보통 사람들 이상이어야 했을 겁니다. 그런 정신력의 인간을 조종한다는 건 보통 쉬운 게 아닙니다.”
“그런데 왜 대통령을 안 죽였나?”
“저희가 대통령을 죽였으면 저희는 아마 살아나가지 못했을 겁니다. 나오면서 보셨죠? 경비대원들이 건물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경비대에 있으면서 들은 바로는, 대통령의 뇌파로 작용하는 폭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대통령이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하면 작동되는 그런 것 말이죠.”
“민우야. 하나만 얘기할게. 넌 너무 강해. 때때로 그걸 조절할 필요도 있을 것 같아.”
우주선은 문이 닫히고 이제 이륙 준비를 모두 마쳤다. 곧, 대기권 이탈용 엔진에 불이 들어오더니 우주선이 상공으로 수직상승했다. 대기권을 완전히 벗어나는 데는 3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윽고 우주선의 엔진이 점점 기하급수로 가속되기 시작했다.
“지긋지긋한 대정, 그리고 이 행성이여, 안녕...”
“지금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냐. 우리는 일단 이 행성을 탈출했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건지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그 때였다. 계기판에서 뭔가 신호가 올렸다.
“이상한데? 무슨 기계 고장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뒤에 무인기 6대가 우리를 추격중입니다. 이대로라면 2분 안에 따라잡힙니다.”
“젠장, 겨우 그놈들로부터 탈출했는데 죽을 판이라니! 우주 공간에서 불귀의 객이 되는 거 아냐! 대통령이라는 그 작자가 끝까지 우리를 죽이려 그러는군!”
“민우 씨, 이 상황을 좀 설명해 줄 수 있겠어? 대통령은 민우 씨가 완전히 지배했을 텐데...”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대통령은 정신력이 강해서 저도 완전히 지배하지는 못했습니다. 완전히 지배했으면 말이 바로 나왔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는 게 좀 이상했습니다. 하지만 저 무인기는 생물이 아니라... 저걸 어떻게 해야...”
그 때였다. 이민우의 여자친구가 나섰다.
“제가 저 무인기들을 따돌려 보죠. 이래봬도 암호 관련 부서에서 일했거든요.”
곧 그녀가 계기판 아래의 자판에 대고 자판을 몇 번 두드렸다. 곧 계기판의 화면에 무인기의 정면, 측면, 후면 등의 그림이 뜨고 일련번호 같은 것이 나왔다. 그 중에 무인기의 머리 쪽을 터치하자, 무인기의 인공지능 정보에 대해 자세히 나왔다.
“시간이 없겠어! 저게 이제 우리 눈에도 보여!”
“한 50m 안까지 온 것 같은데...”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계속 자판을 두드렸다. ‘암호 재설정 중’ ‘명령 재설정 중’ 등의 메시지가 몇 개 뜨더니, 곧이어 ‘설정 완료’라고 떴다. 그러자 그들을 추격하던 무인기들 중 선두에 섰던 3대가 거짓말처럼 오던 길을 돌아서 갔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무인기들에 돌진했고 그대로 모두 폭발했다.
“10년 감수했군. 만약에 미나 씨가 조금만 더 늦었어도 우리는 우주 공간을 떠돌아다니는 귀신이 될 뻔했어. 미나 씨, 정말 고마워.”
“솔직히 이번 암호 재설정은 도박이었어요. 제가 암호만 몇 년을 붙들고 있었기는 한데, 저렇게 어려운 건 처음이었거든요.”
완전히 그들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것을 알자, 오주원이 동료들에게 말했다.
“이제 안전한 것 같으니, 내가 제의를 하나 하지. 우리, 잠깐 윤영훈 씨에 대하여 묵념하자고. 윤영훈 씨는 우리와 함께 하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갔어. 우리가 잊으면 안 되잖나.”
그들은 잠시 묵념을 했다. 묵념이 끝나자, 뒷자리에 있던 정성훈이 이민우에게 물었다.
“그런데 민우 씨, 이제 우리 어떻게 할 건가?”
“은하 중심부 부근에 ‘모코’라는 행성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은하 전역에서 온 수많은 종족들의 용병이나 해적이 모여 있는데다가 다른 행성의 국가들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져 있어서 그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용병과 해적, 그리고 수많은 종족? 용병이나 해적이면 모르겠는데, 수많은 종족이라니? 다른 종족은 왠지 골치 아파. 같은 인간도 저렇게 상대하기 어려운데...”
“훗날을 도모하는 데는 그곳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겁니다. 저희는 그곳으로 아예 도피하는 것이 아닌, 대정 공화국의 해방, 그리고 모두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것이 목표잖습니까. 민중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았습니다. 저희가 일깨워 주고, 또 저희가 이끄는 것이 아닌, 그들 속에서 함께 참여하는 것이 저희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누굽니까.”
“하하하, 자네가 그런 것까지 다 생각하고 있었다니, 정말 우리는 자네를 잘 만난 것 같군. 알았네. 여기 워프 엔진 같은 건 있겠지?”
“네, 있네요. 지금 가동시킬까요?”
워프 엔진이 가동되었다. 우주선은 비틀리는 공간 속으로 그대로 사라졌다. 그들이 가고자 하는 미지의 세계는 2만 광년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 미지의 세계로 첫발을 내딛었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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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하네카와츠바사
2013-05-07 15:59:34
재미있는 설정이 많이 보이네요. 이주 행성민, 에스퍼, 기형적인 사회 체제... 다만 한 편에서 모두 마무리 짓기 위해서인지 모르지만 사건 전개가 굉장히 급해 보여서 아쉽네요. 2~3편 정도 분량으로 여유 있게 주인공의 심리 변화 등을 묘사하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처녀작'이라는 표현은 수정해 주시겠습니까? 일반적으로 흔히 쓰이는 표현이긴 하지만 성차별적인 어감이 있어서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니라고 보거든요. 적어도 여기 사이트에서는 지양해 주셨으면 합니다.
수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드리갈
2020-01-18 23:06:25
[내용추가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