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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호 사원 지하 통로.
“리브...”
뒤를 돌아본 비앙카는, 그 익숙한 얼굴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진다.
그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선글라스를 쓴 민머리의 남자.
바로, 키릴!
“다시 이렇게 만나니 만감이 교차하는군, 비앙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리브.”
“리브라니.”
리브라는 이름을 두 번이나 들은 키릴은 끓어오를 뻔하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건 내가 원하는 이름이 아닌데. 키릴로 불러 주었으면 좋겠군.”
“그래?”
비앙카는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다시 입을 연다.
“생각나는군. 풀네임이... 키릴 리브 싱클레어였지.”
“그래.”
“그런데 나는 왜, 리브라는 미들네임이 더 입에 착착 감기지?”
“좀 제대로 불러라. 너도 네 친구 꼴이 나고 싶은 거냐?”
“친구? 누군데?”
“내 발에 개미지옥이나 만들고 말이야. 그래서 혼 좀 내 주고 있지!”
발 밑에 개미지옥을 만든다고 한다면 설마... 바리오가!
“너 이 자식, 바리오한테 도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뭐기는, 바리오 녀석은 자기가 한 짓의 대가를 치르는 거지. 안 그런가?”
“......”
반박은 하지 못하겠으니, 비앙카는 주먹을 쥐고 키릴을 노려보며 공격을 할 타이밍을 노린다. 하지만 키릴은 좀처럼 빈틈을 주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떨고 있는 것 다 알아, 비앙카. 내 빈틈을 노리려는 것도 다 알고.”
“무슨 독심술이라도 있어? 내가 아는 너는 그런 초능력은 없는 것으로 아는데.”
“물론 독심술은 아니지. 하지만, 네가 지금 어떤 심리 상태인지는 다 알 수 있지. 그것은 즉...”
키릴이 막 거기까지 입을 뗐을 때.
“응?”
비앙카와 키릴 둘 다, 한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통로 한쪽에서, 사람들 여러 명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이쪽으로 가까워져 오고 있다.
“누구지? 작업자들은 아닌데...”
조금 더 그 웅성거리는 소리가 가까워지자...
“아니, 왜 하필 이 시간에 관광객들을 여기 넣고 그래!”
키릴은 아주 격앙된 반응을 보이며, 바닥을 발로 굴러 댄다.
“어떤 녀석이 여기 관광객을 넣으라고 한 거야, 응!”
“모르지, 나도. 그건 여기 유적을 관리하는 기관에다가 물어보라고.”
“좋아...”
키릴은 분이 풀리지 않는 얼굴을 하고 비앙카를 한 번 더 노려보며 말한다.
“잘 생각하라고. 큰 충돌 없이 마무리를 지을지, 아니면 유혈사태까지 날지는 너희 판단에 달렸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지.”
“그리고 너희 처신에 따라, 바리오의 목숨도 달렸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겠지? 나는 할 일이 많아서, 이만.”
그 말을 남기고, 키릴은 어디론가 사라진다.
“야, 야! 바리오는... 야!”
비앙카가 막 키릴을 붙잡으려는 찰나...
“자, 지나가는 길에 뭐가 보이시나요?”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점점 더 커져 오는 웅성거림. 그 목소리를, 비앙카는 바로 알아본다.
미켈이 아닌가!
“야, 야...”
아는 척을 하려다가, 금세 입을 틀어막고서, 비앙카는 시치미를 딱 떼고는 모른 척을 한다. 마치 태연하게, 작업을 하다가 그곳을 지나가는 척한다.
“그렇습니다. 지금 작업자들 중 몇 명이 분주하게 지나가는 게 보이시죠?”
“어, 저기, 저기 좀 봐요!”
조제가 통로 왼쪽의 불빛이 나는 곳을 가리킨다. 조제가 가리키는 중에도 작업자 몇 명이 그쪽으로 드나들고 있다.
“저런 데서 작업을 하는 거죠?”
“네, 맞습니다.”
미켈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아무래도 오늘은 좀 많이 바쁜 날이다 보니 사람들도 좀 많이 오가는군요. 이 정도로까지 분주한 건 요 근래 정말 보기 힘들죠. 이런 점에서 보면, 여러분이 여기 온 건 정말 행운이라고 해도 되겠습니다.”
일행이 조금씩 웅성거리는 조짐이 보이자, 미켈이 손을 들어 제지한다.
“여러분, 소리가 커지면 작업자 분들에게 방해가 되니, 소리는 좀 줄이고, 질서있게 둘러보며 통과하시면 되겠습니다.”
미켈의 말에 따라, 현애 역시 뭐라고 말해 보려던 걸 멈추고 주위를 그냥 둘러보기 시작한다. 천천히 둘러보니 지하 통로는 마치 공사 현장처럼 여기저기 작업 도구가 세워져 있고, 일부 벽면은 시멘트 같은 게 묻어 있기까지 하다. 모르는 사람에게 보여 주면 정말 공사 현장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그래도 역시 유적은 유적인지, 사이사이의 벽화라든가 조각 등이 눈에 띈다. 그냥 지나가듯 봐도 눈길을 안 줄 수가 없는데...
“야, 야, 저기 봐봐.”
외제니가 옆에 있는 현애와 세훈에게 벽화를 가리키며 아주 조그맣게 말한다.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지 않아?”
“응? 어디?”
그러고 보니, 딱 떠오른다. 도입부에 들어가면서 봤던, 4개의 거대한 석상!
“어? 아... 알겠다!”
“그러고 보니까, 여기 이쪽도 얼굴만 있네.”
세훈이 가리킨 곳을 보니 한쪽 벽에는 사람의 얼굴들이 어림잡아 수십 개 정도는 조각되어 있다.
“야, 네 얼굴 있나 좀 찾아봐라.”
장난기가 돌았는지, 현애가 다시 세훈을 쿡쿡 찔러 대며 말한다.
“있어? 있어?”
“야, 네 얼굴이나 찾아.”
세훈도 마찬가지로 장난스럽게 받아친다. 그렇게 지나가다 보니, 어느새 일행은 터널을 다 지난다.
터널을 지나자, 미켈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어, 여보세요, 비앙카?”
“바리오가 잡힌 것 같아.”
“누구한테?”
순간 미켈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떤 녀석한테 잡힌 거야? 바리오는 잡힐 녀석이 아닌데.”
“누구기는, 슈뢰딩거 그룹의 리브지!”
“아... 리브? 누군지 알 것 같은데...”
미켈은 이름을 듣자마자 바로 말한다.
“그 녀석, 좀 위험한 능력을 사용한다고 들었어. 조심해!”
“야, 미켈. 넌 다 좋은데, 왜 남 일 말하듯 말하냐?”
전화 너머의 비앙카가 볼멘 소리로 말한다. 쌓인 게 좀 많았는지 은근히 끓어오르는 듯한 소리는 덤이다.
“좀... 우리 크루라고! 좀 생각해서 말해!”
“아... 알겠어.”
미켈은 잠시 한숨을 푹 쉬더니 다시 입을 연다.
“혹시나 해서 묻는데, 제10호 사원 쪽의 작업자들은 모두 슈뢰딩거 그룹 쪽에 넘어간 게 맞지?”
“아... 맞아.”
“그럼 다들 제12호 사원으로 가고, 제10호 사원 상황은 누가 전하지?”
“아... 그건 내가 작업자들 작업복에 발신 장치를 달아 놨으니까 걱정은 마. 나도 금방 제12호 사원으로 갈 테니까.”
“그래, 신경 써 줘서 고맙다.”
그로부터 약 1시간 정도 후.
제10호 사원과 제12호 사원 사이에 있는 테마정원. 서부 유적군의 사원들의 축소 모형들이 나무들 사이사이에 꾸며져 있고, 한가운데에는 유적들을 조망할 수 있는 테라스도 마련되어 있다. 공원 사이사이로 서 있는 조각상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처럼 만들어졌는데, 자세히 보니 아까 유적에서 봤던 이레시아인들의 옷차림이다. 한쪽에는 다른 종족들로 보이는 조각상들도 서 있다. 산책로 사이사이로는 매점도 몇 군데 보인다. 다만 일행 말고 다른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래서 그런지 차분하게 걷기 좋은 점도 있기는 하지만.
현애와 세훈, 니라차가 산책로를 걷고 있는데, 누군가가 옆에 끼어든다.
“어? 파울리 씨!”
“이렇게 갑자기 끼어들어오면...”
“괜찮아, 여기는?”
“어... 여기요? 그냥 쉬어 가는 느낌인데...”
세훈의 말에 미켈은 기다렸다는 듯 말한다.
“잘 알고 있네. 원래 이 공원은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거든. 물론 예전만큼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은 아니지만.”
“그런데, 미켈...”
그때까지 말없이 있던 현애가 입을 연다.
“오늘 무슨 날이야? 아까 그 발굴하고 있는 지하 통로에 지나가면서 봤는데,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아? 발굴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그렇게까지 많이 하지는 않을 텐데.”
“뭐, 날이기는 하지...”
미켈은 곧바로 한숨을 푹 쉬며 말한다.
“생각해 봤는데, 콘라트 뮐러에 대한 평가를 조금은 다시 내려야 할 것 같아.”
“응? 콘라트는 왜? 이미 죽어 버린 녀석 아니야?”
“그러니까... 그 콘라트 녀석이 여행 일정을 이렇게 설계했단 말이지. 우리가 그때 급박하게 자료를 넘겨받다 보니, 콘라트 녀석이 짠 경로를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쓸 수밖에 없었던 거고.”
“그 경로라면...”
현애뿐만 아니라 옆에서 듣고 있던 세훈의 머릿속에도 다시 그려진다. 첫날의 호수 사원에서부터, 유적공원, 그리고 오늘 둘러보는 유적군까지. 그리고 하필 오늘, 이 유적군이 코스에 포함된 이유는...
“그래, 이제 좀 알 것 같아.”
“콘라트가 여행업과 유적발굴업 쪽에 모두 발을 걸친 마피아라서 가능했겠지.”
미켈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콘라트는 그 태양석 유물이 나올 때를 어림잡아 계산하고 나서 코스를 그렇게 짰어. 그래서 딱 오늘 시점에 이렇게 대규모 발굴 현장으로 오게끔 유도한 거지.”
“오, 그래?”
“너희 부모님 있지?”
미켈은 옆을 돌아보며 니라차를 부른다.
“어... 네.”
“아마도 너희 부모님과도 얽혀 있는 게 좀 크겠지. 내가 관련된 문서를 좀 검토해 보니까 콘라트는 너희 부모님에게 유물을 팔 계획도 있었고. 그 태양석도 포함해서.”
“어... 정말요?”
“맞아... 인정해야겠어. 나보다 사업가 기질이 더 센 녀석이었어.”
미켈은 그렇게 말하고서 잠깐 먼 데를 보더니, 잠시 후 다시 입을 연다.
“하지만 몇 수 앞은 내다보지 못했던 녀석이었지. 설마 자신이 그걸 얻지도 못하고 죽을 줄은 몰랐을 거야.”
“하긴...”
현애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연다.
“하지만, 그건 콘라트에게 운명이었을지도 모르지.”
“응? 그건 무슨 말이야?”
“그 녀석이 나한테 한 짓과 평소에 했던 언행으로 미루어 봐서는, 나나 바리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누군가에게 죽을 운명이었어. 나는 그걸 조금 더 앞당겼을 뿐이고.”
“그런 걸까...”
♩♪♬♩♪♬♩♪♬
막 미켈이 심란한 표정으로 먼 데를 바라보려던 그때, 미켈의 전화가 울린다.
“여보세요?”
미켈은 전화를 받는다.
“아, 미켈. 나 비앙카야.”
“어, 그래. 제10호 사원은 어떻게 됐어?”
“없어.”
“응? 없다니?”
비앙카의 말에서 짐작은 가지만, 미켈은 다시 한번 묻는다. 확실히 듣기 위해서.
“없었다고. 그 태양석은.”
“후...”
미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제 한 군데에 더 집중할 수 있어서 다행이야.”
“미켈, 이게 좋아할 일이야?”
하지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비앙카의 목소리는, 오히려 화내는 것에 더 가깝다.
“슈뢰딩거 그룹 녀석들이 악착같이 달려들 거라고. 무슨 말인지 알아?”
“알지... 그래서 우리 크루들을 전부 가라고 부탁한 거고.”
“그래. 알겠어. 너도 이따가 가는 거지?”
한편 그때, 그 광경을 은밀히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다.
덥수룩한 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때때로 콜록거리는 남자.
“콜록...”
다름아닌, 슈뢰딩거 그룹의 조나다.
“그랬나... 콘라트, 보통 녀석이 아니었어...”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4 댓글
마드리갈
2021-08-20 23:59:27
역시 키릴은 미들네임 리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군요. 어디서 온 이름이길래...
실제 인물에 그런 경우가 있었죠. 존 윈스턴 레논(John Winston Lennon, 1940-1980). 존 레논 본인은 그 윈스턴이라는 미들네임을 좋아하지 않았고, 오노 요코(Yoko Ono, 1933년생)와 결혼하면서 이전의 미들네임을 버리고 존 오노 레논(John Ono Lennon)으로 개명했어요. 그게 같이 생각나네요.
당장 싸우고 싶어도 물불 안가리고 앞뒤 안재는 그런 사람들은 아니었군요.
그나마 그게 다행인 건가 싶기도 하네요.
그런데 구석에서 상황을 보는 자가 콘라트의 이름을 거론하는 건 껄끄럽게 보이네요. 그를 기억하는 것으로 봐서는 과거에 뭔가 크게 했다가 몰락한 자일까요?
시어하트어택
2021-08-22 20:15:55
왜 리브라는 미들네임을 싫어하는지는 따로 써 볼 기회가 있을 겁니다.
콘라트는 아무래도 공공의 적이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주인공과 적대하는 조직이라도 저렇게 한을 품는 건 이상한 게 아니죠.
SiteOwner
2021-09-03 23:32:02
꼭 보면 상대가 싫어하는 것을 골라서 하는 사람 있지요.
그런 사람에게는 똑같은 논리로 갚아주면 알아서 조용해집니다.
고등학생 때 일인데, 어떤 학생이 성기의 명칭으로 저를 부르려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답을 안했더니 왜 대답을 안 하냐고 신경질을 내더군요. 저는 더욱 흉악한 욕설로 그 학생을 불렀고, 대답 안하면 칼로 입을 찢어버린다고 한 마디 해주니 저에게 더 이상 말을 걸지 않고 그 이후로 저를 피했습니다.
문제의 콘라트가 참 인물은 인물입니다.
죽어서도 이렇게 온갖 영역에 유산을 남기고 있군요. 그다지 반가운 유산인 것은 아닙니다만...시어하트어택
2021-09-05 20:36:12
콘라트가 테르미니의 여기저기에 사업을 벌려 놨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겠죠. 문제는 그 수익을 거둬들이기도 전에 죽어 버린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