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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실직에서 생각나는 것들

마드리갈, 2022-01-06 21:23:30

조회 수
192

수년 전부터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잘 쓰이는 표현이 있죠. 사탄이 실업자가 되었다, 악마가 실직했다 등등...그런데 악마가 실직한다 한들 딱히 악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악의 실행주체가 단지 악마에서 인간으로 이동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기도 해요.

사실 그 사례는 이루 다 열거할 수 없지만 극히 최근의 것만 떠올려 봐도 생각도 하기 싫은 게 있어요.
스포츠센터 대표가 직원의 몸 안에 긴 막대기를 찔러넣어 살해한 사건, 개에 돌을 달아 얼어붙은 수면 위에 방치한 사건, 오피스텔의 세입자가 방의 내부에 고양이를 수십마리 방치하고 도주한 사건, 여당 정치인이 야당 정치인의 비난에 근래의 최악의 해난사고인 세월호를 거론한 사건 등,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끔찍한 사건이 신년의 뉴스를 차지하고 있어요.

요즘 생각나는 게 있어요.만일 이 세계의 어딘가에 악마의 영역이 있고 있고 그런 악마들이 인간의 악행을 보고 뭐라고 말할지에 대한.
인간의 영역에서는 악행을 저지른 자를 "악마같은 놈" 이라고 욕하지만 그런 매도가 부당하다고 생각하다고 생각하는 악마들은 이렇게 항변할지도요. "인간같은 놈이 어디서 헛소리야!!" 라고.
20세기의 독일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말한 악의 평범성(Banalität des Bösen)이라는 개념은 이렇게 21세기에서는 악마의 실직으로 광범위하게 정착하네요. 그렇게 악이 대중화되고, 조금이라도 투사의 대상이 있다면 기꺼이 악의 집행인이 되는 이런 시대가 지금이라는 것은 희극일까요, 아니면 비극일까요.
게다가 한가지 더. 통상적인 업무영역으로서 유태인 학살을 집행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은 법의 심판을 받고 사형에 처해졌어요. 하지만 지금의 경우 악이 워낙 대중화되어 그 악이 곳곳에 뿌리내렸으니 심판이고 뭐고 가능할 리도 없겠네요. 부스러진 건물 틈에 자란 나무가 이미 건물과 일체화되어 제거할 수 없는. 이런 게 악의 21세기 뉴노멀인 것인지...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6 댓글

마키

2022-01-07 00:44:59

오죽했으면 사탄이 자신이 한거라니까 신(아마도 야훼)이 "거짓말 하지마! 너는 저런걸 생각할 악성이 없어!" 라는 풍자도 있었죠...

마드리갈

2022-01-07 21:18:38

소개해 주신 풍자에 정말 동의하게 되어요.

비록 초창기이긴 하지만, 인류는 원자력기술을 손에 넣고 우주탐사를 시작하는 한편 유전자의 구조도 파악해 두었죠. 그렇게 신의 영역을 넘보는 인간이기에 이미 악마의 영역도 넘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렇죠. 정말 악이 어디로까지 진화할지 한계를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Lester

2022-01-07 03:35:59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부도덕한 행동이 필요하다(그리고 이것을 우리는 '정당방위'라고 부르죠)고 합니다만, 요새 흔히 부각되는 행동들은 정당방위도 아니고 그냥 명확하고 불필요하며 백해무익한 행동들입니다. 비단 저런 구체적인 행동만이 아니라, 간단한 언어적 표현조차도 '일단 저질러놓고 보자'는 식의 소위 '노빠꾸(no back, 즉 무르기 없음)'가 많아요. 그리고 나서 핑계만 대려고 하는 건 둘 다 마찬가지고요. 애들이 싸우다가 '장난이었어요'하고 어물쩍 넘기는 경우가 많은데, 애들도 아니고 어른들이 그러는 걸 보면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막막해집니다.

마드리갈

2022-01-07 21:37:40

품위도 없고 유능하지도 않고 무책임할 뿐인 이 풍조...현재의 사회상이 혼란 그 자체인 것의 원인은 역시 멀리 갈 것도 없네요.

나쁜 방향으로는 변하기 쉽지만 좋은 방향으로는 변하기 어렵죠. 몇 배나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으니 일단 저질러놓고 보는 그런 오늘만 사는 사고방식은 아주 크게 역풍이 불지 않는 한 해소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그런 역풍이 불어서 사람의 생각을 바꿀 레벨이 되면 이미 상황이 크게 엎어진 뒤겠죠. 여러모로 답이 없어요. 늦든 빠르든 간에 청구서가 돌아오겠지만 감당할 수 있을지...

대왕고래

2022-01-08 23:48:54

작품에 나오는 캐릭터는 작가의 지능을 넘을 수가 없다고 하죠. 그 생각이 나네요.

어릴 적에는 나쁜 건 악마! 하고 생각한 거 같은데, 나이가 들면서 이런저런 범죄소식이나 매너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보니, 이제는 악마라는 게 어딨냐?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그래도 천사같은 사람들이 있으니 다행이구나 하고 생각해요. 적어도 이승에 악마만 살지는 않는다는 거니까요.

마드리갈

2022-01-08 23:59:22

역시 현실이 창작물을 넘어서는 게 그래서일까요. 작가가 진짜 작정하고 악인이 아닌 이상 진짜 악인의 수준을 넘을 수가 없어서 그런 것일지도...

악마가 실업과 생활고를 호소할만큼 악인이 넘쳐나고, 게다가 그런 악인들이 어딘가의 악의 비밀결사의 조직원이나 거대 권력자 등도 아니라 생활저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 중에 있다는 것이 정말 무섭죠. 그래도 말씀하신 것처럼 천사같은 사람들이 더 많으니까 아직 세계는 살만하고 또 온존하는 게 아닌가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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