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주제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철도는 철제 레일로 이루어진 궤도 위를 규격에 맞는 차량이 달리는 육상교통체계입니다. 그렇다 보니 두 레일의 안쪽 최단거리인 궤간(軌間, Gauge)은 양쪽 차륜간의 물리적인 규격을 구속하는 기준이 되고 궤간이 다른 경우에는 철도관련의 규격을 이리저리 논할 이유도 원칙적으로는 없습니다.
그 중 국내에 팽배한 표준궤 만능론을 비판해 보겠습니다.
표준궤란 4피트 8.5인치(=56.5인치)의 궤간으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1435.1mm입니다만 보통은 소수점 아래를 버림하여 1435mm로 쓰입니다. 이것은 철도의 발상지인 영국은 물론 대륙유럽, 북미, 중국, 호주 등이 주력으로 사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규격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궤간의 주력은 표준궤입니다.
그런데 표준궤가 철도의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특히 표준궤 만능론은 일본의 철도네트워크의 주종인 1067mm의 케이프궤간(Cape Gauge) 또는 삼륙궤간(三六軌間)에 대한 비하의 의미가 많이 담겨 있는데 과연 그게 정당한 것인지는 그 자체로도 여러 배경을 감안해도 깨지게 되어 있습니다.
1. 표준궤가 아니면 다른 궤간과 호환되지 않는다?
틀렸습니다. 어차피 궤간이 다르면 호환 안되는 건 표준궤든 광궤든 협궤든 똑같습니다.
2. 수송력이 낮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기본적으로 수송력은 철도의 시설한계 및 운용차량의 규격에 제한될 따름이고 여객열차의 경우 바닥면적에 따라 수송력이 결정되고 화물열차의 경우는 바닥면적 및 허용축중 문제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표준궤라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컨테이너를 옆으로 2개 탑재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KTX 및 원형인 프랑스 TGV가 협궤라서 차폭이 좁은 것도 아니고, 일본의 케이힌급행철도 및 케이한전철은 표준궤라도 차폭이 좁습니다.
3. 궤간이 다르면 갈아타야 해서 불편하다?
그러면 철도로 이동할 때 반드시 직통열차만 이용합니까? 그게 아닌 데에서 이미 이 주장의 정당성은 깨졌습니다.
그리고 궤간이 같더라도 갈아타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를테면 국내에서 KTX와 일반열차인 새마을호나 무궁화호와의 환승 같은 것. 어차피 운전계통이 다르더라도 사람은 자기 힘으로 이동가능하니까 갈아타면 그만인 것을 꼭 이상하게 표현하는 게 문제입니다.
4. 속도가 느리다?
표준궤가 반드시 빠르고 협궤가 반드시 느린 것은 아닙니다.
표준궤인 일본 나가사키노면전차와 1067mm 궤간의 호주 퀸즐랜드철도만 비교해봐도 이미 답은 나왔고, 한 국가 안이라면 스페인의 1668mm 재래선과 1435mm 고속선같은 사례도 있습니다.
5. 협궤면 물류비가 비싸진다?
철도화물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컨테이너나 벌크화물용 차량이 표준궤라고 해서 더 큰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물류의 상당부분을 철도가 차지하는 나라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미국같이 내항해운 이용이 곤란한 국가에서는 철도가 물류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높습니다만 일본처럼 내항해운을 이용하기 좋은 국가는 해운의 물류량 점유율이 4할 가까이가 됩니다. 가장 저렴한 물류수단이 선박이라는 점은 생각지도 않는가 봅니다.
6. 전차(?車)를 운반못하니까 협궤는 쓸모없다?
그럼 지하철이나 노면전차나 모노레일도 쓸모없으니 다 갖다버려야겠습니다.
물론 일본이나 남아프리카의 1067mm 협궤에서는 전차를 수송하려면 포탑을 탈거한 후 별도로 적재하여 운반뒤 현장에서 재조립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표준궤의 경우라도 전차수송은 사정이 낫긴 하지만 매우 조심스러운 게 사실입니다. 플랫카(Flatcar)를 다수 연결하여 플랫폼에 인접해 두고 전차를 저속으로 그 위를 달리게 한 뒤에 세우고 고정한 후에 견인하는 방식인데 사실 반드시 이렇게 수송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실제로 육군에서 사용하는 장비 중 전차수송차 같은 것이 기동성이 더욱 좋은데다 철도가 없는 지역에서도 사용가능합니다.
7. 협궤니까 악천후에 약하다?
표준궤는 좀 더 낫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천후에 무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실제로 인도, 파키스탄 및 방글라데시에서 1676mm 궤간이 채택된 큰 이유가 영국의 인도 통치시대 때 사이클론(Cyclone) 피해를 우려해서 표준궤보다 더 큰 규격을 채택한 역사가 있고 비슷한 이유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오클랜드간 도시철도인 바트(BART) 또한 비슷한 이유로 1676mm 궤간을 채택해 있습니다.
8. 협궤면 차량수출에 난점이 있다?
그럼 영국 브리티시레일 클래스 800과 한국의 코레일 200000호가 어디에서 제조된 것인지 보기 바랍니다. 둘 다 히타치레일의 것입니다. 참고로 호화로운 지하철로 작년의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때 화제가 된 카타르 도하지하철의 차량은 미츠비시중공업 및 킨키차량제조가 담당했고 우리나라에서 운용되던 과거의 많은 철도차량도 일본의 철도차량제작사에서 만들어진 게 많았습니다. 어차피 오늘날의 철도차량은 차량한계만 맞으면 보기식 대차를 교환하는 것으로 대응이 가능합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외형의 한계를 정한 기준인 차량한계입니다. 그러니 일본의 차량제작사들이 주문한 철도운영사의 차량한계에 맞춰 제작하고 대차도 그에 맞게 제작해서 장착하면 해결되는 문제입니다.
보통 이 정도면 표준궤 만능론은 거의 다 논파되고도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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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키
2023-02-12 20:52:13
일본만 해도 일본에 처음으로 철도가 부설된게 메이지 시대인 19세기인데, 당대 지식인들이 바보도 아니고 철도 시스템을 가져온 영국의 철도환경을 벤치마킹하고, 철도가 감당할수 있는 수송량과 수송력, 그리고 궤간을 까는데 들어가는 비용 등을 따져서 협궤를 채택한 선택이 꼭 잘못되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죠. 19세기에 만들어져 정착한 시스템을 21세기의 잣대로 중량물 화물 운송을 못하니 협궤를 굴리는게 바보같다는건 웃기지도 않는 주장이니 반박할 가치조차 없구요.
예전에 소개해드린 소련의 궤간 1520mm의 광궤형 증기기관차 LV 클래스를 1435mm 표준궤형으로 개조한 중국의 전진형 증기기관차의 사례처럼 아예 기관차의 궤간 자체를 개조해버리는 방법도 있고, 신칸센 처럼 애초에 독자 노선을 구축해 재래선과 섞이는 일 자체를 방지하고, 부득이하게 혼선이 되야 한다면 아예 해당하는 재래선을 신칸센의 표준궤 규격에 맞춰 개궤하거나 양 궤간에 대응하는 듀얼 게이지 선로를 부설하거나, 열차를 신조하는 것으로 대응하는등,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왔죠.
극단적인 예시로, 북단 홋카이도부터 남단 큐슈까지 신칸센으로 4시간 주파가 가능해 항공기와 경쟁이 가능했던 일본의 여객 철도 환경과, 항공기에 경제성이 밀리는 대륙 횡단 여객선은 포기하고, 수백대의 화차에 컨테이너를 2층으로 쌓아 다중련 기관차로 대륙을 주파하는 미국의 화물 철도 환경 중 어느쪽이 우월한가, 어느쪽이 더 효율적인가는 저울질 할 수 없는 것이죠. 각자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특화되어 진화한거니까요.
SiteOwner
2023-02-21 14:36:14
그렇습니다. 철도는 폐쇄적인 네트워크인 터라 그 네트워크 내에서의 운용사정에 적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표준궤가 아니라고 비하할 필요도 없고 그렇습니다. 게다가 철도를 도입한 당시의 1870년대의 일본은 공업생산력도 토목공사수준도 미약했다 보니 철도건설비용의 압박이 매우 컸고 그래서 교량이나 터널을 최소한으로 피하는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어서 곡선주로가 많았습니다. 이 상황에서는 적은 캔트량, 즉 좌우 레일의 고저차로도 곡선주로를 잘 돌 수 있는 협궤가 유리했습니다. 표준궤나 광궤의 경우는 곡선주로에서의 주행저항이 크다 보니 캔트량이 커야 하고 그렇게 되면 곡선주로에서의 캔트량이 크게 요구되기에 공사 자체의 난이도가 급증합니다.
또한 일본의 케이프궤간 채택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당대 일본의 미약한 공업생산력을 서구열강에서 보호하는 일종의 장벽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요즘같이 차량에 궤간별로 맞는 대차를 바꿔다는 식이 아닌 19세기에는 궤간별로 차량을 처음부터 따로 만들어야 했고, 서구열강들은 일본에 군함 등의 물품은 팔 수 있었지만 철도차량만큼은 그러지 못한 반면 일본에서는 철도차량의 자급에 성공하고 이후에는 레일이나 철교 구성품 등도 자급할 수 있게 되어 공업역량이 급증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는 버스를 개조하여 만든 차량인 기동차가 탄생한데다 세계최초로 전금속제 객차가 등장했고 21세기 들어서는 철도의 본고장인 영국에 고속철도용 차량을 수출하는가 하면 미국에 신칸센을 건설추진중입니다. 그러면 이 논리로 협궤 찬양도 성립해야 합니다. 표준궤 사용국가는 일본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일본은 표준궤 사용국가에 진출했으니...
미국의 더블데커 마일트레인도, 일본의 신칸센 및 전국각지의 JR과 사설철도의 경쟁체제 및 정확한 운영시스템도, 유럽의 대륙을 주유하는 국제철도망도 모두 각각의 특색과 강점을 지녔으니 그걸 궤간을 문제삼아 잘났니 못났니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