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는 아래 글에 대해 코멘트로 작성하려고 했습니다만,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 내용이 길어져서 코멘트에 넣으면 읽기 힘들 것 같아 독립된 글로 작성합니다.
구글에서 "북한서체 문제"로 검색해보니 가장 최근 사건이 작년 1월 당시 선거 관련 촛불집회에서 전자개표 조작을 의심하는 플래카드에 북한서체가 쓰인 것을 토대로 종북세력의 개입이라는 논란이 있었다고 하는군요. 당시 미디어오늘에서는 조선일보 등의 보수 성향 언론들이 종북세력 개입 의혹을 부채질한다며 비판(링크)하는 동시에, 인터넷에 이미 자유롭게 퍼졌다고 증언한 데가 다름아닌 조선일보이므로 종북세력 개입 의혹은 확대해석이라며 과거 기사(링크)를 끄집어내면서까지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두 기사를 비교해보면 알겠지만 미묘하게 다릅니다. 조선일보에서는 북한서체의 자유로운 이용과 범람을 지적하면서도 폰트업계 관계자들의 말을 통해 '한국 폰트는 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 반면 북한 서체는 발전이 없었기에 과거 7~80년대를 떠올리게 한다'라고 밝히지만, 행간을 읽어보면 "80년대 이전의 한국 (고유의) 폰트를 사용한 것은 아니다"라는 지적이 숨어 있습니다. 반면 미디어오늘의 기사에서는 한글미디어디자인연구소 노수용 소장의 발언을 집중적으로 인용하고 기사를 위해 새로 인터뷰까지 하며 '북한 폰트는 남북폰트교류연구회라는 단체에서 북한과 함께 3년 동안 공동개발한 폰트 이외에는 공식적인 경로를 통해 들어온 폰트는 없다, 하지만 인터넷상 쉽게 다운로드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데, 남북폰트교류연구회는 노수용 소장이 당시 공동연구를 진행할 때 회장으로 있었던 곳입니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사를 더 찾아봤더니 2년 뒤인 동아일보와의 기사(링크)에서 '순수 연구 목적으로 받았을 뿐 유출시킨 적은 없으며, 당시(2009년) 개발된 서체는 (시위에서 사용돼 논란이 된 광명납작체가 아닌) 정음체이다'라고 선을 그었네요. 그 외에 북한 폰트와 한국 폰트의 상세한 비교는 여기를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 채널이 역식(역자+식자) 관련 커뮤니티인 것도 그렇고, 북한서체가 사용되는 이유는 '독특하니까 + 분위기에 맞으니까 + 유행이니까' 정도로 복잡하면서도 대체로 신진 문화라는 것이 느껴집니다. 즉 정말로 북한을 추종하려고 사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단 얘기죠. 위에 링크한 기사들에서 언급된 공영방송 KBS의 사례에서도 '느낌 난다'는 이유로 사용하는 것에 일일이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며 검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관련 논문 초록(링크)에서 유추하자면 TV의 경우 뉴스라면 신문보다 이용자층이 넓기에 정치적 논거가 약화될 것이고, 프로그램(ex. 채널A의 이제 만나러 갑니다)이라면 볼 사람만 볼 경향이 높을 것이며, 단순 예능이라면 좌우대립 자체를 피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공중파나 예능에서의 북한서체를 가볍게(?) 사용하는 것 자체는 딱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최근(2023년 11월~)에 논란이 된 손가락 사태를 비롯한 남성혐오 상징 삽입 사건이나 공중파에서 노무현 합성 이미지 사용 사건처럼 노골적인 경우라면 당연히 문제를 삼아야겠지만요. 자신들의 사상이든 나태함이든 드러내지 않고서야 못 배겨서 사고를 치는데 봐줄 이유가 없잖습니까. (특히 전자의 경우 나중에 따로 글을 쓰겠지만, 정상적인 흐름이나 사소한 순간마저도 의심하게 만드는 풍조를 낳아서 더욱 악질입니다)
의도를 알아채기 쉬운 이미지와 달리 서체 자체는 도구에 불과하기에 특정 문구가 아닌 이상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는 점도 근거로 작용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동아일보 기사 말미에서 지적했듯이 '진의가 의심받는 상황에서도
사용하는 부류'라면 말할 것도 없겠다 싶지만요. 어쩌면 이들도 위에 언급한 사건들처럼 본색을 드러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 외에는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으니까요. '구하기 쉬운 북한서체를 어쩌다(?) 반정부 시위현장에서 사용했다'는 건 합리적 의심을 해볼만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억울하면 다른 폰트 찾아서 정치적 중립성을 주장하든가요.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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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댓글
마드리갈
2024-01-13 20:33:44
우선 제 글(바로가기)을 숙독해 주시고 이렇게 더 깊이 의견을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려요.
확실히 문제의 서체가 북한폰트여서 사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거예요. 언어에 관심없는 사회인데 그 언어를 표기하는 도구인 서체에 관심을 가지는 건 더더욱 기대할 수 없겠죠. 말씀해 주신 "독특하니까 + 분위기에 맞으니까 + 유행이니까" 의 3박자가 거의 대부분이고 이 범주를 피할 수 있는 이유도 없어 보여요. 그런데 문제의 3요소 중 가장 큰 문제는 "유행이니까" 가 아닐까 싶어요. 특히 한국사회 내에서의 특정방향으로의 쏠림은 매우 심각한 문제죠. 이게 사상적으로는 조선시대의 주자학 편중에 이어 현재에는 민주화운동을 독점하는 86세대의 병폐 등으로 대표되는 정치극단주의와 2010년대 후반부터 급부상중인 래디컬 페미니즘 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경제분야에서는 각 분야별로 특정기업의 특정상품에 대한 독점을 너무나도 쉽게 허용하는 등의 움직임이 있어요. 서체에만 예외가 적용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많아요.
저는 북한서체 사용을 정보전달 등의 한정된 목적을 제외하면 전면적으로 쓰지 말아야 한다고 보는 아주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어요. 산돌이나 윤디자인같은 국내 서체개발사들의 아름다운 서체를 놔두고 왜 그런 열등재를 써야 하는지 이해불가인데다 한결같이 적대적인 적성국의 문물을 써야 할 어떠한 이성적인 또는 감성적인 이유가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최종결과물인 미디어를 향유하는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어도 문제없겠지만, 기술적인 입장에서 북한서체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그것은 바로 위험성.
북한에서 자체 개발한 각종 소프트웨어 중에는 파일의 해시값(Hash Value) 변경기능을 내장한 경우가 많아요. 간단히 말해서 파일이 어떤 하드웨어를 거쳐갔는지를 정확히 기록에 남기는 장치인 것이죠. 그것도 꼭 특정 하드웨어에서 그 파일을 열지 않더라도, 단지 저장장치를 연결한 것만으로도 그 연결된 디바이스의 파일에 그렇게 변조된 해시값을 남겨 버리는.
실제로 그런 문제점이 다른 영역에서 가시화된 적도 있어요.
북한 폰트 파일 위장 랜섬웨어, 구글 검색 통해 유포되나, 2018년 7월 10일 보안뉴스 기사
그리고, 흔히 하는 말로 주민등록번호가 공공재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사회의 정보보안 역량은 그리 좋지 않아요. 즉 미디어 제작사의 제작환경에서 북한폰트가 빈번히 쓰이면서 미디어 제작사의 직영채널을 구독하는 소비자들이 영향받지 말라는 보장도 없어요.
좋은 게 좋다 하고 넘어갈 일이 아니예요. 국내 서체 제작사들이 싹 망해버려서 정말 선택지가 북한폰트 말고는 전혀 남지 않는 상황 또한 안 오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대학생 때 윤디자인의 폰트패키지를 구매해서 만든 과제물 및 각종 자료가 미려하고 알기 쉽다고 찬사를 받았던 그 경험이 "반동분자의 자본주의적 책동" 으로 인민재판당하는 날이 오는 것도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고 있어요.
Lester
2024-01-14 11:03:11
북한의 백도어가 악명 높기로 유명한데 역시 폰트 파일에도 그런 게 숨어 있었군요. 말씀하셨듯이 전반적으로 '북한이 위험한 건 아는데 쟤들이 뭐 어쩌겠어? 전쟁해봤자 질텐데?'라는 의식이 깔려 있어서 얕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DDretriever
2024-01-14 06:17:46
저도 예전엔 몰랐는데 알고보니 방송가에서 북한서체가 정말 많이 쓰이고 있더군요.
개인적으론 별로 마음에 들진 않는지라 이런 점이 고쳐졌으면 좋겠는데 전혀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Lester
2024-01-14 11:05:12
몇 번이고 기사화가 됐지만 그렇다고 처벌 혹은 징계할 사안까지는 아니다보니 결과적으로 허용 혹은 묵인해주는 상황이 되는 거겠죠. 사안은 좀 다르지만 JYP처럼 소속사 아이돌들에게 역사교육 시키듯이 방송사 내부적으로도 그런 게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너무 많은 걸 기대하는 것이려나요.
SiteOwner
2024-02-11 21:12:59
한국사회의 온갖 방면에 퍼진 북한서체는 저도 동생도 포럼에서 자주 비판해 온 "언어에 관심없는 사회" 가 낳은 소산이 아닐까 싶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세상을 사는 듯해도 보수든 진보든 이런 데에서만큼은 놀라울 정도로 동일합니다. 이런 데에서 한 민족이라는 게 드러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위에서 동생이 지적했듯이 북한폰트라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다 보니까 그렇게 되었을 확률이 확실히 높을 듯 합니다.
사실 북한서체의 문제점은 이미 다른 분의 글에서도 드러난 적이 있습니다. Dueleast님이 쓰신 이번 듀얼링크스 번역은 눈 뜨고 못 보겠네요 제하의 글에 첨부된 스크린샷에는 북한서체가 보입니다. 번역도 조잡한데다 서체도 조잡한 게 보이는데, 일본의 컨텐츠가 한국어판으로 만들어질 경우 저런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그에 대해서는 제가 저 글의 코멘트로 언급해 둔 게 있습니다. 일본에 본점을 두고 있는 일본기업이지만 실은 조총련계인 CGS같은 기업들이 일본내에서 나름대로 입지가 굳건해서 그런 듯합니다. 2000년 8월 29일 전자신문 기사(바로가기)에 등장한 바로 그 기업입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그런 풍조가 있습니다. 북한이 도발을 아무리 많이 하고 해도 북한의 언어생활이 주체적이라고 여기면서 그다지 비판하지 않는 풍조가 비록 퇴조하긴 했어도 제대로 비판받은 적이 없이 퇴조했을 뿐입니다. 그러니 북한서체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틱톡 논란처럼 그렇게 될 상황이 농후합니다. 1990년대 운동권 논리를 세계에 구현한 틱톡(TikTok)에서 지적된 문제와 놀라울 정도로 성격이 비슷합니다.
Lester
2024-02-11 22:20:24
인디게임의 번역을 하다 보면 역시 자금난이나 정보 부족에 시달리는 인디게임 개발자라고 해야 하나, 가끔 "한국어로 적당한 무료 폰트 없을까?"라고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유희왕 정도로 규모가 있는 작품이라면 더더욱 북한서체에 잘 노출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멋져서라기보다는 그냥 업체가 선택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사실 이건 국립국어원에서 북한서체를 쓰지 말라고 벌금을 매기지 않고서야 절대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무감각한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