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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가 사라져가는 시대

Papillon, 2016-03-26 02:38:05

조회 수
179

만화 “원피스”의 어인섬 에피소드를 보면 호디 존스라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호디는 인간을 혐오하는 어인우월주의자로 어인섬의 정권을 잡고 인간과 전쟁을 벌이길 원하죠. 작중 세계관 내에서 어인은 인간에게 오랜 시간 차별받아 온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다보니 어인들 중에서는 실제로 인간에게 참혹한 행위를 당한 인물들도 있죠. 이런 세계관이니 호디와 같이 인간을 증오하는 어인 캐릭터가 나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아 보입니다. “X-Men”의 인기 캐릭터인 매그니토 역시 마찬가지로 차별을 겪고 인간을 증오하는 캐릭터니까요. 그런데 호디 존스의 특이점은 이 캐릭터가 매그니토나 기타 “극단적 우월주의자” 캐릭터와는 달리 인간에게 아무 짓도 당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호디 존스는 본인이 인간에게 당한 것도 없고 인간이 왜 혐오스러운지도 생각지도 않아요. 그저 “인간은 나쁘고 혐오스러운 존재니까 없애야한다!”가 이 캐릭터의 사상입니다.

이번에는 게임에 나온 어떤 단체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Fallout” 시리즈를 보면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이라는 단체가 나옵니다. 이 작품의 배경은 핵전쟁 이후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이고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은 문명 재건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죠. 이들은 본디 문명 재건을 위해 구시대의 기술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기술 수집 행동은 세월이 흘러 본편 시점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어요.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왜 기술을 모으기 시작했는지” 잊어버렸죠. 이 때문에 이들은 그저 기술, 특히 무기 기술만 보면 광적으로 이를 수집하려고 하며 수집 외에 다른 행동에 대해서 철저히 수구적인 대답만을 내놓습니다. 기술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돕는 것? 안됩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는 것? 안됩니다. 황무지에 있는 다른 문명 단체와 손을 잡는 것? 안됩니다. 이들은 그저 이유 없이 기술을 수집하고 있을 뿐이죠.

호디 존스와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은 다른 존재입니다. 한쪽이 하는 것이 혐오라면 다른 한쪽이 하는 것은 무조건적인 금지와 반복행동이죠. 하지만 이 둘은 동시에 비슷합니다. 둘 다 “왜?”라는 의문을 잊어버렸으니까요. 호디는 상대를 왜 미워하는지도 모르고 미워하고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은 자신들이 왜 기술을 모으는지도 모릅니다. 

창작물 속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가면 갈수록 “왜?”라는 질문은 사라져가고 있다는 걸 느낍니다. 누군가는 호디 존스가 그랬던 것처럼 특정 대상을 혐오하지만 왜 그런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은 없죠. 다른 누군가는 브라더후드 오브 스틸처럼 꽉 막힌 채 모든 것을 금지하기만 합니다. 

“왜?”라는 질문이 점점 사라져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겁니다. 사회분위기 자체가 “왜?”라는 질문에 긍정적이지 않은 것. 먹고 살기 힘들다보니 “왜?”라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여유가 없는 것. 학창시절부터 입시만을 위해 달리다보니 “왜?”라는 질문을 하는 교육을 받지 않은 것. 인터넷과 SNS를 통해 너무나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보니 스스로 “왜?”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 것……. 무엇하나 그럴싸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왜?”라는 질문을 잃어버린다면 결국 모두 발전 없이 정체되어버릴 뿐이죠. “왜?”라는 질문이야 말로 인간을 발전시켜 온 힘이니까요. 

현실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왜?”라는 질문이 많아지길 바라며 이상 글을 마칩니다.
Papillon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2 댓글

SiteOwner

2016-03-26 17:36:54

우선, 좋은 관점을 제공해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인류사를 발전시킨 원동력 중의 하나가 왜라고 묻는 능력이었습니다. 여러 자연 및 사회 내의 현상이 왜 그러한지, 그리고 그러한 현상에의 해법 중 왜 이것은 되고 저것은 안되는지를 파악하는 데에서 인류는 진보했고 문명의 소산이 착실하게 축적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그러한 질문이 사라져 가는 것은 인류사의 위기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주어진 게임의 법칙대로만 움직이지 않는 행태적 특징은 여러 사회문제를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긍정적인 요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왜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러한 행태적 특징은 퇴화할 것이고, 또한 순기능과 역기능의 비율은 역전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인문학 부재의 삭막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드리갈

2016-03-27 18:58:40

맹목이라는 말 그 자체의 좋은 예시네요.

말씀하신 사례와 비슷한 것으로는, 스타크래프트의 저그 및 헤일로의 코버넌트가 떠오르고 있어요. 그들은 왜 다른 종족을 죽여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아요. 그저 상대를 죽이고 정복하는 것이 목표일 뿐이고, 모든 행동의 우선순위가 그것에 맞춰져 있어요.

그러한 기능주의적인 사고방식은 상당히 효율적으로 작용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최선의 수단일까요? 그건 결코 아닐 거예요. 그러한 기능주의는 결국 사회구성원의 희생을 사회목표의 달성이라는 거대담론에 얼마든지 희생시켜도 된다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정당화하게 되어 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에 어떤 의문도 가지지 못하게 만들어요. 바로 그것이 왜라고 묻는 능력이 없어질 때 벌어지는 참극이죠.


인간이 왜라고 묻지 않게 되면, 인간이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전락하고, 나아가서는 언젠가는 용도폐기될 거예요. 그래서 말씀하신 그것은 현대인의 실존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즉 누구든지 스타크래프트의 디파일러 체력 보충을 위한 먹이가 되거나, 최전선 돌격임무에 내몰리는 그런트가 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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