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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올 한해를, 작년이 1년 늘어난 기분으로 살았답니다.
말 그대로, 작년의 감정을 질질 끌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이유로 공부도 1년을 내리 쉬었지요.
1. 작년에 제가 속한 학과의 학생회장이 되었답니다.
아무도 제가 학생회장이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답니다.
말도 잘 못 하고, 표정도 굳어 있는 애라서 공식석상에서 말 한 자리라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했습니다.
2. 제가 회장이 되자마자 저희 학과에서는 때마침 미투 사건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세 명의 성폭력 피해자가 대자보를 쓰게 된 겁니다.
학내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를 중심으로 대자보에 대한 논쟁이 점화되다가, 급기야는 학과 내부 반-여성주의자들과 여성주의자들 간에 상당히 비열한 싸움이 점화되면서, 안 그래도 돈 못 벌어서 밑바닥인 학과 이미지가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고, 제가 욕을 가장 많이 먹은 것 같습니다(물론, 피해받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가장 힘들다고 자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간과하면 안 되겠죠).
저는 1년 내내 익명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는 느낌으로 살았답니다.
꽤 오랫동안 정신과를 전전하면서 이것저것 약을 처방받았는데, 저는 그 이후로 정신과에 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안 그래도 폭발 직전인 분위기에 대안 없이 무턱대고 대표직을 맡은 것에 큰 책임을 느끼고 있답니다.
어쩌면, 그 폭발 직전의 분위기에는 아무도 대표직을 맡고 싶지 않아 저 같은 사람이 대표가 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3. 작년 말에는 4년간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절교하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저를 총학생회의 중앙감사위원장으로 추천했고, 마찬가지로 당시에 아무도 그 직책을 맡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친구가 내 능력을 신뢰해주니 고마워서 일단 받아들였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망했답니다.
연말에 친구가 제게 실망감을 나타내는 편지를 써서 숨겨두고 연락이 끊겼습니다.
친구가 피감기구였기에, 감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숨겨진 편지를 찾아내야 했지요.
겨울방학이 끝날 때까지 열심히 찾아다녔는데 올해 여름이 되어서야, 그 편지가 사실 10장이었고, 가짜 편지가 5장 포함되어 있으며, 가짜 편지는 가운뎃장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통해 가짜임을 알 수 있는 구조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저는 지금도 그 편지를 다 찾지 못했고, 앞으로도 찾을 생각이 없습니다.
4. 본래 겨울방학에 이루어졌어야 하는 감사는 제 능력 부족으로 인해 무산되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교내신문이지만 신문 1면에 실리게 되었답니다.
감사 무산과 총학생회 공백, 그동안 대충대충 이루어졌던 대학 예산 집행이 맞물려서, 대학본부는 더이상 학생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학생들을 모아 학내행사를 진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1년간, 총학생회가 무너져내리는 걸 지켜봤는데,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답니다.
5. 저는 석사과정에 잘 적응하지 못해서, 대학원 진학 이후 지금껏 새로 사귄 친구가 한 명도 없답니다.
매년 어림잡아 한 권 정도의 책을 진지하게 읽는데, 올해는 1년 내내 마사 누스바움의 『감정의 격동』을 읽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공부는 쉬었고, 아직도 가끔 익명 커뮤니티에 글이 올라오면 흠칫 하다가 저랑 아무 관련 없다는 것을 깨닫는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제가 회장 일을 할때 계획서에 사인을 해주시던 고마운 학과장 교수님과 만났습니다.
그러다가 그 교수님의 매개로, 절교한 친구를 고깃집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답니다.
친구는 저와의 절교를 선언한 이후 홀가분해져서, 자신이 전공하는 중국철학에 대한 꽤 많은 지식을 쌓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쉬었던 저를 불쌍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조언을 해주더군요.
저는 내심 잠시 발끈했지만, 요즘들어 스스로가 위축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며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자주 느낀답니다.
6. 그래서 지금은 한 해를 마치는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찰스 테일러의 언어능력에 관한 이론을 다루려고 했지만, 워낙 느긋하게 쉬엄쉬엄 하다 보니 조사를 마치지 못했답니다.
그래서 결국 1년동안 읽은 누스바움의 감정 이론을 급하게 정리해가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수면이 신체의 손상을 직접 회복시키지 않듯, 휴식이 심리적 생명력을 직접 회복시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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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댓글
마드리갈
2019-12-20 13:24:50
안녕하세요, 비둘기님, 오랜만이예요. 5년만이예요.
올해 1월에 포럼에 오셔서 로그인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올해 1년간이 휴지기였다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리고 많이 고생하셨다는 것도 이렇게 알게 되었어요.
거론해 주신 여러 사안에 대해서 일일이 말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것만큼은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무엇을 위해 싸웠고, 또 그렇게 싸워서 얻은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이렇게 된 것에 누가 만족했는가에 대한 의문만큼은. 그리고,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지난 날을 돌아볼 수 있을만큼 회복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도 더해서예요.
휴식이 심리적 생명력을 직접 회복시키지는 않겠죠. 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공헌할 수는 있어요. 그래서 중요할 거예요.
SiteOwner
2019-12-20 19:10:06
반갑습니다, 비둘기님. 포럼에 다시 와 주신 점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말씀해 주신 지난해의 일을 보니, 저의 대학생활인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전반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정보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인 것은 전혀 달라진 게 없는가 싶습니다. 대학생 때 겪은 학내분규가 여전히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점에서는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하긴 하지만, 어느 정도는 예견한 것이다 보니 놀라지는 않았습니다만...
잘 쉬어야 더 나은 내일이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다른 걱정보다도 지친 심신을 치유하시는 데에 주력하시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언제든지 다시금 포럼을 찾아 주시기를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