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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드 바텔이 21세기의 한국을 보았다면...

마드리갈, 2021-07-17 00:38:53

조회 수
113

2017년 12월에 몽구스, 사자와 드 바텔의 경구로 보는 한중관계 제하로 쓴 글의 속편을 이제 쓰게 되네요.

산골의 가난한 소국으로 남성들이 용병으로서 타국의 전쟁에 참전하여 벌어들이는 돈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던 스위스에서 탄생한 법학자 드 바텔은 베스트팔렌조약 체제로 확립된 주권평등원칙을 말하기도 하였어요. 그의 생존시기에 스위스를 둘러싸고 있는 국가에는 동쪽에는 오스트리아, 서쪽에는 프랑스라는 전통의 열강이 있었고 국경도 바로 접하고 있었어요. 게다가 북쪽의 독일, 남쪽의 이탈리아는 여전히 통일된 국가가 아닌 상태라서 불안한 상태였어요. 이렇게 사방이 위험한 나라인 스위스 출신의법학자가 주권평등원칙을 말했다는 것은 굉장히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이죠.

드 바텔이 21세기의 우리나라를 보았다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요?
라인강 상류의 바젤을 제외하면 바다로 나갈 길 자체가 없는 내륙국인 스위스에 비해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이자 무역대국이고, 또한 문화컨텐츠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매력적인 국가임에도 틀림없어요. 게다가 인구도 많다 보니 체급이 스위스보다 월등히 큰 것도 당연하고, 정말 강력하고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국가일 거예요. 게다가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한 세계 유일의 국가니까, 드 바텔이 보고 이런 나라는 스위스에 없는 장점을 갖추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겠죠.

그런데, 이 사안에는 너무나도 조용하네요.
어제인 7월 16일, 외교관례를 어기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초당적인 항의가 있었다는 건 아직 본 적이 없어요.
문제의 사건은 이것.


이 기사에서, 주한 중국대사인 형해명(邢海明, 1964년생, 중국명 싱하이밍)이 유력 대권주자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외교안보 관련 견해에 대해 반박하는 기고문을 게재했어요. 사실 이것만으로도 외교관례를 깨는 중대사태임에 분명한데, 더욱 문제되는 게 있어요. 기고문의 내용 중 이러한 것들. 재인용해볼께요. 각 문장별로 줄바꿈을 하고 이탤릭체로 바꾼 이외에는 원문을 그대로 인용했음을 밝혀요.

천하의 대세는 따라야 창성하다는 말이 있다.
중국은 이미 5억명에 가까운 중산층 인구를 가지고 있고, 향후 10년간 22조 달러 규모의 상품을 수입할 계획이다.
중한 무역액은 이미 한미, 한일 및 한-EU간 무역액을 모두 합한 수준 가까이 되고 있다. 중국은 전 세계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집적회로 시장으로, 전 세계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이른다.
한국은 약 80%의 메모리 반도체를 중국에 수출하고 있다. 올 상반기 중국 경제는 전년 동기대비 12.7% 성장했으며 계속해서 안정적으로 호전되고 있다.
시진핑 주석의 굳건한 지도 아래, 중국은 전면적 사회주의 현대화 국가 건설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미래의 중국은 한국을 포함한 각국에 거대한 시장과 더 좋은 발전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 6개의 문장을 드 바텔이 말한 주권평등주의에 얼마나 부합하는가를 따져볼까요?
첫째 문장에서부터 이미 부합되지 않죠. 그 천하의 대세라는 것이 국가주권보다 우선하는 것이고 따를 의무가 있는 것인가요? 설령 그 천하의 대세의 성격을 인정하더라도, 중국이 만든 것은 없어요.
둘째 문장에서 말한 중국의 내수시장의 규모를 보니 수적 우세에 대항하지 말라는 말로밖에 안 보이네요.
셋째 , 넷째 문장은 무역규모가 크면 종속국이 되어야 한다는 논리를 보이고 있어요.
다섯째 문장은 경제문제가 어느새 정치문제로 환원되어 있는 기적의 사고전환.
여섯째 문장은 사자의 몫 같네요. 마치 중국이라는 거대시장이 한국경제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니까 좋은 말할 때에 순응하라는.

그러니 주한 중국대사의 기고문은 주권평등주의에 무엇 하나 부합하는 게 없어요.

이틀 전에 오빠가 소개해 놓은 문화체육관광부의 카드뉴스에 이러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보이네요(문화체육관광부의 카드뉴스 "쇠퇴하는 일본" 참조). 게다가 주한 중국대사의 기고문에서는 구체적인 수치까지. 쇠퇴하는 일본을 선진국인 우리나라가 때리는 것처럼, 구체적인 수치로 월등히 앞서는 중국은 우리나라를 더욱 마음대로 두들겨팰 권리가 있을 거고 말이죠. 저 카드뉴스가 7월 8일에 나왔다는데, 열흘이 안되어 우리의 목을 조르는 자승자박으로 돌아오네요.

스위스보다 더욱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세계 유수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우리나라가, 중국 외교관의 무례한 기고문에 이렇게 모욕당해도 좋은 것일까요, 그리고 여기에 대해 왜 반발의 목소리는 별로 많이 안 보이는 것일까요. 일단 야당의 중진, 외교통 의원들이 반박에 나서긴 했지만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는지 많이 보이지는 않네요. 사실 시간을 좀 더 두더라도 반발의 목소리가 많이 확대된다고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요. 누구들에게는 그저 이 사태가 차도살인(借刀殺人)을 위한 절호의 기회라서 그러는지, 아니면 중국에게는 최소한의 국민적 자존심까지 유보하는 것으로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2 댓글

Lester

2021-07-17 02:23:43

일전에 들었던 '대국이라 하기엔'이란 개그가 그대로 떠오르는 상황이네요. 저렇게 대놓고 종속을 요구하는데 대체 누가 응할지 참 궁금합니다. 중국 시장이 그 규모에 비해 실제 내부 구조는 얼마나 편협하고 비논리적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감안하면 이미 중국으로부터 얻을 건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은' 강대국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는 비극 때문에 대놓고 싫은 소리를 못할 뿐이지만요.

마드리갈

2021-07-17 02:45:05

저 주한 중국대사의 발언은 미사여구로 포장되어 있지만 대놓고 구체적인 샤프 파워(Sharp Power),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에게 날카로운 치명상을 입힐 힘의 의지관철을 나타내는 매우 폭력적인 표현임을 부정할 수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종속에 응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이 남긴 독트린이 있다는 것이죠. 이를테면 강경화 전 외교부장관의 3불정책인 미국의 미사일방어(Missile Defense, MD), 사드(THAAD) 추가배치 및 한미일 군사동맹을 체결하지 않겠다는 방침은 사실상 중국에 대한 주권양보에 다름아니예요.


2017년에 쓴 글에서 경계했던 것이 현실화되고 있어요.

중국이 베트남과 호주에게는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있어요. 베트남의 경우는 이미 중월전쟁에서 중국이 대패한 경험도 있는데다 이후의 온갖 간섭에 대해 강경하게 대응하고 심지어는 과거의 적이었던 일본, 미국과도 손을 잡는 등 과감한 행보를 보이니까 중국이 베트남을 껄끄럽게 여기고 있어요. 호주의 경우는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은 것을 이유로 중국에게 시달리기도 했지만 중국이 발전용 석탄의 상당부분을 호주산에 의존했다가 경제제재에 역풍이 부는 등의 문제가 일어나자 예전만큼 호주를 집요하게 압박하고 있지도 못해요. 여기서 우리나라의 선택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는 재론의 여지도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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