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묘하게 "당한다면 갚아주겠다" 라는 표현이 "당한만큼 갚아주겠다" 로 잘못 인식되고 있어요.
"야라레타라 야리카에스(やられたらやり返す)" 라는 일본어 원문에서 야라레타라(やられたら)는 어미가 가정형이라서 의미는 "당한만큼" 이 될 수 없어요. 사실 이것 이전에 "당한만큼" 이라는 표현이 성립하려면 후속하는 배, 10배, 1000배, 1000배는 더더욱 나올 수 없어요. 당한 양의 100%를 갚아준다는 게 어떻게 그것의 몇배에 해당하는 수치와 양립할까요? 원문해석도 틀린데다 논리마저 맞지 않아요. 이러니 알의 모서리라고 안 부를 수가 없겠어요.
그리고 이제는 그 비스크 돌은 사랑을 한다의 경우.
본작의 주인공은 히나인형 제조공장의 가업에 종사하는 남학생 고죠 와카나 및 같은 고교 같은 반의 패셔너블한 갸루 여학생이자 패션잡지의 독자모델도 겸업하는 키타가와 마린. 특히 키타가와 마린은 작중의 인기 미소녀 연애시뮬레이션 게임의 캐릭터를 매우 좋아해서 그 캐릭터의 의상까지 재현하여 코스프레를 즐기려고까지 하고 있어요.
우선 원작을 확인해 보면 그 캐릭터의 이름은 한자로 되어 있어요. 쿠로에 시즈쿠(黒江雫)라고. 현재 스퀘어에닉스에서 무료로 공개해 둔 제1화의 끝페이지(바로가기, 일본어)만 읽어 보아도 예의 캐릭터의 성명이 한자로 선명하게 표기되어 있는 게 보여요. 쿠로에(黒江)는 일본의 성씨, 클로에(Chloe)는 그리스가 기원인 서양의 여성명. 게다가 시즈쿠는 대체로 일본의 여성명이죠. 특단의 사정이 없는 한 성씨가 없이 이름만 2개가 연이어 등장하는 경우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렇다면 어느 것이 확률이 높을까요? 성씨와 이름이 하나씩 조합된 것과 성씨 없이 이름만 2개가 나열된 것 중에서.
이렇게 생각해 보면, "클로에 시즈쿠" 라고 번역하는 순간 그 결과는 원작 미확인에 논리 부족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죠.
일본산 영상물에 대해서 나날이 역식이 범람하는 그 정성은 이런 데에서만은 대상외라는 게 참으로...
사실, 그 비스크 돌은 사랑을 한다 국내방영판에서는 키타가와 마린이 입은 비키니 하의를 모자이크처리한 기묘한 상황까지 나오지만 이건 다른 기회에 이야기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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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키
2022-01-25 01:07:29
유튜브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종종 외국어 채널의 제목과 동영상 소개를 한국어로 번역해주는데, 이게 또 훌륭한 번역체 어투라서 웃음거리죠. 예시는 원문의 의미가 짐작조차 안가는 자동번역의 폐해(?)
마드리갈
2022-01-25 15:42:57
대체 원문이 뭔지 전혀 가늠이 안되네요. 정말 답이 없어요...
어디에서인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는데, 저런 기계번역 중에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게 있어요. Pussycat을 참 기막히게 번역해 놓은 것을 보고 뒷목을 잡았던 적이 있거든요. 이미 수년 전에도 그랬는데 나아진 게 없네요. 역시 번역이라는 게 절대 쉽지가 않다는 게 이렇게도 드러나네요.
Lester
2022-01-25 07:14:00
동종업계라서 대놓고 까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작 이 정도를 틀리냐'라고 묻고 싶은 것도 분명 있긴 합니다. 설령 해당 표현을 몰라도 문맥을 통해 유추할 수 있고, 유추조차 안 되면 구글링이라는 방법이 있거든요. 물론 언어란 게 문화적 요소를 담고 있다보니 구글링으로 알아낼 수 없는 정보도 많고, 특히나 개인의 창작물일 경우 작가가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꼬아놓았을 가능성이 있어서 오역의 가능성이 더 높아지지만 말입니다.
일단 1번의 경우 저도 서점에서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를 표지만 슬쩍 봤는데, "당한 만큼 갚아준다. 배로 갚아준다!"라고 쓰여 있기에 의도는 이해했지만 곱씹어 보니 자기 말을 정정하는 것 같아서 굉장히 묘했죠. 사실 저 문장 앞에 (당한다면)이 생략됐다고 판단하고 넣어주면 말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가정형 표현까지 일일이 번역하면 중언부언하는 느낌이 있는 건 사실이거든요. (ex. 영어의 'if I say', 'if you ask me' 같은 경우) 혹은 "당한 만큼 갚아준다. (그것도) 배로 갚아준다!" 이렇게 '이해하라고' 표현했을 수도 있죠.
혹은 좀 더 생각해 보면, "당하면 갚아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라는 (개인적 혹은 사회적, 작가의) 인식 때문에 '당한다면'이라는 부분을 '당한 만큼'이라고 바꿨을 수도 있습니다. 애초에 한자와 나오키 시리즈 자체가 복수물(?)인 걸 감안하면 굳이 '당한다면'이라고 직역하여 '내가 이런 일을 안 당했으면 편했을 텐데' 같은 오해의 여지(?)를 남길 필요는 없긴 합니다.
저야 일본어는 잘 모르겠지만 위의 내용을 감안한다면 "건드리면 갚아주마. 배로 갚아주마!" 라고 번역할 것 같습니다. 주어를 "(내가) 당한다면"이 아니라 "(누가 됐든) 건드리면"이라고 바꿔서 대사가 가리키는 대상이나 조건(사실 '당한다'라는 게 일상에서 잘 안 쓰이는 표현이긴 합니다. 써도 'XX당했다'라고 수식어가 더 붙죠)을 명확하게 바꿀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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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은 음... '가타카나 때문에 외국인이라고 생각한 거 아닐까' 하고 변호하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까 제반지식이 부족해서 생긴 실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일본 창작물에서 DQN네임이 판을 친다지만 원문에 떡하니 한자 성씨를 썼으면 일본 이름이라는 건데 그걸 굳이 외국어로 해석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번역이라는 게 단순히 A→B 수준의 기계식 작업이 아닌데... 이런 일이 부각될 때마다 '아 나는 번역가로서 아직 문제 없는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개인이면 몰라도 정식발매를 담당하는 프로나 업체에서 저런 일이 벌어진다니 말이죠. (사실 이걸로 치면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 건으로 엄청나게 두들겨맞던 모 프로가 가장 악명높기도 하고)
마드리갈
2022-01-25 16:05:16
말씀하신 취지는 이해하지 못하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한자와 나오키에서의 번역문제는 여전히 문제가 있어요. 사실, 예의 그 대사에 대해서 오오와다 아키라가 "당한다면 갚아준다? 처음부터 안 당해야지." 라고 비웃는 장면이 나오거든요. 즉 오오와다 아키라는 한자와 나오키의 발화 속의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 되어요.
일본어의 경우는 수동형이 상당히 많아요. 그렇다 보니 "당한다면" 등의 표현은 상당히 많이 쓰여요. 특히 능동형으로 쓰더라도 사용하는 동사는 타동사를 쓰는 경우가 많다 보니 화자와 청자의 방향전환도 흔하고 따라서 자동사보다는 타동사가 유용해요.
"쿠로에" 라는 발음의 이름에 대한 번역문제는 이미 다른 경우에도 꽤나 반복되고 있어요.
특히 "아리스" 라고 발음되는 이름을 영어권의 Alice에서 유래한 앨리스라고 써야 하는지, 아니면 有栖 등의 한자로 표기되는 일본식 이름으로 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관적인 기준은 없어요. 일차적으로는 원문확인,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작중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상황을 판단하여 추론하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