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하게 몰아쳐서 마감을 1주일 미뤄야 했던 작업이 끝나서 정신적 여유를 되찾을 수 있었기에, 바쁘다는 핑계로 미뤘던 방청소도 하고 기한이 다 되어가는 문화상품권으로 책도 샀습니다. 어제 주문해서 오늘 도착해 가져온 책들 중에 한 권이 "코난 도일을 읽는 밤 (by 마이클 더다)"으로, 셜록 홈즈 시리즈의 작가인 아서 코난 도일 경의 생애와 작품 세계 및 전반적인 저술 방식에 대한 안내서였습니다.
급한 일도 없고 오랜만에 제대로 독서한 적이 없으니 귀가길에 커피 하나 시켜놓고 느긋하게 읽으면 되겠다 싶어 그렇게 했는데 역시 잘 아는 주제에 대한 책이라 그런지 순식간에 읽었습니다. 다만 코난 도일의 다른 작품군인 챌린저 교수 시리즈는 하나도 안 읽어본데다 그 외에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은 이름조차 몰랐기에 해당 서적의 중간은 거의 건너뛰다시피 읽을 수밖에 없었던 게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저자가 홈즈 시리즈를 처음 접한 경험에 대해 얘기하는 부분은 제 어린 시절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그리고 중간중간에 잠시 책을 덮고 허공을 올려다보며 어린 시절을 회상하기도 하고, 더 나아가 지금의 답보 상태인 글쓰기에 대해서도 고민했습니다. 그 문제가 바로 이번 글의 제목인 "왜 홈즈였는가, 왜 GTA였는가"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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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홈즈 시리즈를 정식으로 입문했던, 즉 원작을 읽어서 접했던 건 중학교 시절입니다. 하지만 홈즈 자체를 접한 계기 자체는 무려 초등학교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엔 자잘한 추리 문제집을 푸는 데에 집중했을 뿐이라 홈즈에 대해서는 이름만 알았을 뿐 소설의 주인공이란 것도 몰랐습니다. 그러다 명탐정 코난이란 만화책을 계기로 추리 커뮤니티에서 잠깐 활동하기도 했죠. 거기서 서로 문제를 내고 맞추는 게시판에서 활동할 때는 이미 어딘가에서 소개된 문제를 '도둑질'해서 제가 만든 것마냥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유명한 사안의 경우엔 들켜서 핀잔을 듣기도 했지만요.
그런데 이 시절을 돌이켜보니, 저의 진짜 글쓰기가 시작된 건 GTA 팬픽을 쓰던 고등학교 시기보다 바로 이 무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당시 저는 문제를 그대로 올리는 게 아니라, 홈즈 시리즈의 영향을 받아서 (누가 봐도 홈즈와 왓슨인) L이 문제를 내고 H가 그 문제를 푸는 형식으로 작성했습니다. 문제글이기에 분량은 얼마 되지 않았고, 영어도 못하던 시절이라 이니셜을 사용했지만요. 그마저도 H는 당시 중학교 친구였던 홍XX의 성 이니셜을 따온 것이고, 이니셜을 쓰는 방식 자체가 당시 인기 영화였던 "맨 인 블랙 2"에서 착안했던 거였습니다. 이렇게 문제글을 좀 더 부풀리는 방식은 엄밀한 의미의 창작이 아니다보니 큰 인기는 얻지 못했지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창작에 대해 관심과 애착을 품고 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더 거슬러 올라가보니, 홈즈를 떠나서 창작 그 자체를 시작한 계기는 초등학교 2~3학년까지도 올라갈 수 있겠네요. 물론 창작이라 할 레벨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채팅이라는 걸 처음 접했을 때 현실(실제 사람)과 창작(게임 내에서 말하는 캐릭터)의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그러니까... 그저 신비롭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에 팍 꽂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집에서 혼자 도화지에 색연필로, 혹은 (한글97[현 한컴오피스]을 구할 방법이 없어서) 워드패드로 닉네임과 대사를 형형색색으로 표현하면서 사람들의 대화를 만들어 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창작이라고 할 건 아니었고, 그냥 친구가 없었던 시절에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편법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지금 돌이켜보면 계속 글쓰기에 미련을 놓지 못했던 것은, 그렇게 상상과 창작으로나마 외로움과 인간관계를 충족시키려고 했던 발로가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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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다시 돌려 추리 문제를 이야기 한 토막처럼 부풀렸던 중학교 시절을 넘어 고등학교 시절에 이르면, 역시 일전에 언급했듯이 GTA 팬픽이긴 해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오랜만에 해당 커뮤니티가 있던 Daum 카페에 들어가서 내글보기로 확인해 보니 가장 처음으로 팬픽을 썼던 날이 2007년 7월 26일이네요. 초창기의 작품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문자 그대로 손발이 오그라진다고 할 정도로 엉터리였습니다. 지금이라면 엄두도 못 낼 원작 훼손이 '난무'했으니까요. 어린 시절의 패기였을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재미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원작에 얽매이지 않았기에 제 마음대로 이야기를 펴낼 수 있었고, 그만큼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나름대로의 기법을 배워나갈 수 있었다고 봅니다. 지금으로 치면 '외전'에 해당하는 이야기로 세계관을 보충한다거나, 완전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되 형식을 유지해서 거부감을 최소화한다거나, 좋아했던 고전게임의 모티브만 따와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를 써낸다거나 하는 식으로요. 그 과정에서 '차기작은 좀 더 방대하고 체계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야지' 하면서 노트에다가 등장인물이며 세계관이며 지도며 하고 엄청나게 적어나갔던 것도 기억이 납니다. 이 설정노트들 중 일부는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손발이 오그라들까봐 못 꺼낼 뿐이지만요. 아무튼 당시 회원 분들이 재밌게 읽어준 덕분에 인기(?)가 엄청났고, 이 중 어떤 사람은 저에게 헌정 만화를 만들어 주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했듯이 이 사람과 다시 연락할 방법이 영영 사라진 게 정말 안타깝네요.
그런 GTA팬픽도 인기가 시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작가인 저 자신이 수능의 압박에 치이기 시작한 것도 있고, 제가 운영진으로 올라서면서 운영진 권한으로 개인 게시판을 만들어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반감을 샀을 수도 있고, 본격적으로 원작을 '존중'하기 시작하면서 내용이 치밀해진 대신 글자수가 많아져서 이탈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원작의 시간대를 모두 따라가는 일종의 장편 서사시를 쓰려고 했지만 결국 1부(1986년, 마이애미)를 완결하고 2부(1992년, 캘리포니아)를 조금 쓰다가 (2012년, 즉 대학 진학 후 사회복무요원 말미에) 손을 놓아버렸는데, 아마 인기도 인기지만 저 자신이 힘에 부쳤던 건 아닌가 싶습니다. 최소한 저 자신이 애착이 남았다면 누가 읽건 말건 계속 글을 썼을 텐데, 원작을 존중하느라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부담감을 느꼈던 거죠. 원작을 최대한 파악하되 어긋나지 않는 선에서 제 이야기를 풀어내야 했으니까요.
이후 해당 커뮤니티가 모종의 사정으로 네이버로 옮겨간 뒤에도 비교적 가벼운 내용으로(즉 원작 세계관 기반이되 몰라도 되는 내용 중심으로) 연재를 하긴 했지만, 그것도 결국 취업의 압박 때문에 그만뒀습니다. 더 따져보면 Daum에 'Daum 소설'이라는 코너가 있을 때 스타크래프트 유즈맵의 '좀비 시티 시리즈'를 기반으로 팬픽을 쓰기도 했고 나름대로 인기가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 그만뒀습니다. 이렇듯 돌이켜보면 제가 GTA 외에도 많이 손댔다는 것을 깨닫고 새삼 놀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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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글쓰기를 놓은 지 5년 이상이 되었다가 포럼에서 다시 글쓰기를 시작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글쓰기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해서인지 예전만한 열정은 없는 건가 하고 스스로에 대해 안타깝기도 합니다. 이전에 '작가수업'이란 말머리로 우왕좌왕하며 고민했던 글들이 그 흔적이죠. 좋은 아이디어나 방법이 생각나기도 했고, 불필요한 아이디어들을 골라서 버리기도 했고, 장르 자체에 대해서 엄청나게 번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을 하면서도 글 자체는 거의 쓰지 못했습니다. 입으로만 고민을 해결했다고 했을 뿐, 정체불명의 고민과 미련을 안고 있었기에 그랬던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구입한 "코난 도일을 읽는 밤"을 통해 홈즈 시리즈를 처음으로 접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제 글쓰기 경험을 회고하다가, 드디어 모든 문제의 핵심이자 이번 글의 제목이라 할 수 있는 "왜 홈즈였는가, 왜 GTA였는가"에 도착했습니다. 분명 이전의 작가수업 글에서 언급했듯이 지금 제가 쓰고 있는 소설 코스모폴리턴에는 홈즈도 GTA도 모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왜 홈즈였을까요? 왜 GTA였을까요? 어째서 제가 글쓰기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고 큰 도움을 줬던 두 거대한 작품군이, 어째서 지금은 하나도 힘을 주지 못하고 있을까요?
(2/2로 이어집니다.)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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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4-06-20 20:08:58
정신활동의 근간이 될 수 있는 건 여러가지가 있죠. 레스터님의 경우는 코난 도일의 추리소설인 셜록 홈즈 시리즈와 게임 GTA였고, 창작활동과 여러 접점이 있었다는 게 특이하네요. 제 경우는 개를 길렀던 유년기 및 클래식음악이 정신활동의 근간이었지만 창작활동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거든요. 개와 같이 하는 생활에서 희로애락이 있었지만 그건 창작으로 바로 이어질 성격이 아니었고, 클래식음악 또한 창작보다는 재현이 중심인 예술이다 보니 딱히 창작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거든요. 역시 어떠한 것을 근간으로 삼는가에 따라 그 연장선도 매우 달라지는 게 이렇게 잘 보이네요.
그러면, 이어서 제2편을 읽어볼께요.
Lester
2024-06-21 02:30:38
무언가를 즐긴다고 해서 바로 창작으로 이어지는 건 당연히 아니겠지만, 창작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를 비교해보면 즐기거나 감동을 받았던 요소가 꼭 있더라고요. 그러니 제가 창작이라는 목표를 정해두고 접했다기보다는, '빠져놓고 보니 도움이 되더라'가 더 정확할 듯합니다. 특히나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서점에건 인터넷에건 작법과 관해 정보가 넘쳐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티브이자 원동력으로 삼아라'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빼먹거나 있긴 한데 크게 부각되지 않더라고요. 그렇기에 저의 경우 홈즈와 GTA 둘 다 입장이 다를 뿐이지 범죄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이 둘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모르는 사이에 깨달으면서 즐기기만 하다가, 비로소 채팅을 처음 접했을 때 '어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다'라고 품었던 생각을 위한 발판으로 삼았지 않나 싶습니다.
SiteOwner
2024-06-27 20:38:04
자신이 추진하는 프로젝트의 원점을 돌아보는 것은 정말 중요한 것입니다.
홈즈와 GTA가 그렇게 영향을 끼친 과정에 대해서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창작이라는 것이 기존의 여러 요소를 기반으로 할 수도 있는데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이다 보니 그렇게 여러모로 시도해 보신 것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만, 역시 결국은 자신의 오리지널이 있어야겠지요. 그래서 인간의 창작은 계속되는 것인가 싶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타 커뮤니티 언급은 창작활동에 대한 출처표시로서 필요최소한 수준인데다 분쟁유입도 아니고 상황중계도 아닌 점이 인정되므로 이것에 대해서는 문제없음을 선언하겠습니다.
Lester
2024-06-28 23:45:03
지금도 번민하는 중이지만 저의 현재 문제 중 하나는 '오리지널에서는 약하다'입니다. 팬픽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의 작품에 기반하거나 혹은 남의 작품을 개선(?)하는 것은 제법 잘 한다고 생각하는데, 반면에 처음부터 직접 설정을 만들어서 쌓아올리는 게 정말 어렵네요. 그러기가 귀찮으니까 이미 준비된 남의 작품을 활용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아니면 개선하는 데에만 집중해서 진도가 안 나가니까 답답한 건가 싶기도 하고... 손꼽히는 이유가 너무 많네요.
그나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 모두 서로 영향을 주거나 받거나 한다 = 그렇기에 순수한 오리지널이란 불가능하다)"라는 마음을 가지면 좀 나아질 듯하긴 합니다. 작정하고 클리셰를 따라가는 것도 해법이 될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