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프롤로그
어느덧 10월 말이 다가왔습니다. 연말까지 길어야 두어달 남았다는 것이 실감가지 않는 하루하루네요. 봄이 시작되었을 때는 아직도 한참 남은 것 같았는데, 여름이 시작되고 방학이 시작되었을 때는 마냥 길었을 것 같았는데, 하고 머리 속 시계를 되감아봐도 금방 이 곳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 글은 포럼에 글을 올린 직후 시작된 제 여름의 회상록입니다. 저에게 있어선 태양보다도 뜨겁게 시작했던,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던 경험들이 여름을 통해 물밀듯이 밀려들어온 이야기입니다.
1. 만남, 뜨거워지는 여름 햇살은 예상치 못한 인연을 안겨줬습니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하는 일은 생각보다 고된 일이었습니다. 그릇은 무겁고, 설거지에 익숙하지 않아 허리와 팔이 빠질 것 같고, 주방은 더웠고, 손님이 오는 시간도 불규칙해 밥을 먹다가도 일어나 보조를 맞추는 일이 잦았습니다. 일에 정신이 팔린 사이 저는 늘 가지고 다니던 휴대폰 충전기를 가게에 두고 온 걸 알게 됩니다. 학교를 다녀오고 난 길에, 저는 평일에 홀을 담당하는 분에게 설명을 드리고 충전기를 돌려받았습니다. 일한 지 한달 쯤 되었을까, 저는 가게를 접는다는 이야기, 사장님들의 상의 끝에 다시 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평일에 만났던 홀 씨에게 고백을 연달아 받게 됩니다. 돈이 필요했던 저는 흔쾌히 주말 아르바이트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고, 홀 씨와는 개인적으로 교류하다가 난생 처음으로 사귀자는 고백을 받고 연인관계라는 걸 얻게 되었습니다.
그 즈음 저는 우울감을 버티지 못하는, 나날이 약해져가는 체력에 한계를 느끼고 개별 코칭을 해준다는 피트니스 센터를 등록했습니다. 처음 일주일 간은 운동 자세를 따라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빠져나가고 몸이 무너져가는 느낌에 '괜히 시작했다' 하는 원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잘하고 계시다' 는 코치님의 격려와 몰랐던 사이 숫자를 늘려 운동할 수 있는 걸 알게 되자, 운동에 재미를 붙이고 방학이 끝날 동안 쭉 유지하게 됩니다. 그렇게 제 여름방학 스케쥴은 평일은 운동, 주말은 아르바이트, 남는 시간은 홀 씨와 연애하는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2. 이별, 작렬하던 해는 빛을 거두어가며 조용히 저물어갑니다.
가게를 접는다는 이야기의 영향으로, 주방 담당 중 한 분과 주말에 근무하던 홀 씨는 다른 일거리를 찾아 떠났습니다. 새로 들어온 주말 홀 아가씨와 여전히 유쾌한 사장님들, 요령도 늘어 일을 계속하던 저는 조금씩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이 웃고 일하지만, 그 이상 다가가지 못 하는 아르바이트 자리의 사람들, 그 속에서 고립되어가고 있다는 자격지심, 어쩐지 계속 같은 주제를 빙빙 돌아다니며 그 이상 타협하지 못 하는 홀 씨를 발견하게 된 겁니다. 가게에서는 컵을 깨고, 빨리 행동하지 못 하는 탓에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주방 직원분의 일침, 홀 씨와 함께 만나는 상황에서는 지적과 고쳐야 한다는 점을 계속 듣게 되면서 불안했던 정신력이 완전히 폭주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때를 전후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꽤나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이 때문에 상당한 기간을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버텨야 했고, 이를 제 탓이라며 자학으로 다스리던 저는 뭔가 일을 치를 것 같은 불안감에 지역 보건소를 거쳐 병원에 찾아가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됩니다. 홀 씨와는 싸우지도 타협하지도 못 하는 상황을 반복하다 헤어지게 됩니다. 일련의 사건으로 완전히 지쳐버린 저는 아르바이트도 그만두며 다음 학기를 준비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옵니다.
3. 변화, 황혼 속의 무지개빛 하늘을 본 적이 있으신가요?
해가 질 때의 하늘의 방향을 잘 보고 계시다 보면, 밤이 찾아오는 탓에 윗 부분은 보랏빛으로 물들고 태양이 여전히 내뿜는 빛 때문에 그 사이의 하늘이 무지개빛처럼 층층이 나눠질 때가 있습니다. 무지개빛으로 빛나는 부분은 금방 저물지만 그렇기에 더욱 아름답게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답니다.
홀 씨는 연애를 하는 동안 늘 가만히 있던 저에게 계속 '예쁘다'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해줬습니다.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걸 원했지만, 그걸 받을 자격이 없다고 쭉 생각하던 저에게 있어서 그 말은 정말 큰 원동력이 되어줬습니다. 주어진 일을 완벽하게 처리하려는 강박을 가지지 않아도,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맙다고 해주는 말은 제게 많은 용기와 생각할 계기를 가지게 해줬습니다.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다는 감정을 받을 수 있었다는 것, 사람마다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가치관이 있고 그것은 각각 다르다는 것, 사람을 대할 줄 아는 방법은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르게 들린다는 것 외에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한 곳은 업무를 처리하는데 있어서의 냉정함, 원한다고 해서 쉽게 풀리거나 얻을 수 있는 건 한정되어있다는 것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생에게까지 아침밥, 점심밥을 차려주면서 항상 인사를 빼먹지 않았던 직장이었지만, 일과 업무에 관해선 한없이 엄격해서 실수의 반복은 절대 용납하지 않았으니까요. 대학교를 나가고 뛰어드는 사회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을 거라는, 그런 냉랭함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었던 아르바이트였다고 생각합니다.
개인 코칭을 통한 운동은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 뿐만 아니라 성취감을 느끼게 하기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다. 내 몸이 이렇게 약해빠졌나? 하고 괴로워하다가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자신을 다듬는다는 것에서, 그 동안 남을 추월하지 못해 늘 불안해하고 아파하던 상처를 치료할 수 있었습니다. 때문에 코칭이 없는 날도 매일매일 나갔고, 인스턴트와 단 것을 철저히 피하면서 운동을 지속했고요. 자신과의 싸움이란 건 가장 힘들었지만, 그렇기에 성취감도 의욕도 하나하나 키워나갈 수 있는 활동이었습니다.
4. 그리고 또 다시 만남, 낙엽이 들기 전부터 가을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모든 걸 떠나보내고 텅 비었다고 생각한 저에게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합니다. 통지서에는 성적 우수 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100만원을 등록금에서 제한다는 고지서 안내문이 있었고, 저는 지금까지의 3년을 되돌아보며 제가 해오던 생각들, 지금까지의 자신을 통째로 부정하던 굴레에서 이제야 벗어난 것 같아서, 고지서를 들고 아주 조금 울었던 것 같습니다.
지역 보건소에서 추천해준 병원의 원장님은 무슨 이야기를 하던 조용히 듣고, 그 원인을 정확히 파악해 진단해주셨습니다.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점을 바늘로 찝어내듯 꽉 잡아내면서도, 특유의 부드러운 저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공해주시면서 충분히 호전될 수 있는 상태라고 안심시켜줬습니다. 나름대로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약 처방을 받을 땐 두근두근거렸네요. 자학과 부정적인 생각도 약물을 통해 훨씬 호전되어가는 느낌입니다. 이전까지는 부모님과 이야기하다 뜻이 안 맞으면 울면서 소리를 지르거나 벌컥 짜증을 내곤 했는데, 최근은 '이건 이러이러해서 제게 상처가 되니, 부디 신경써주세요' 정도로 표현을 다듬을 수 있게 되었어요.
학교 가로수의 은행이 떨어질 때 즈음, 교양 수업을 위한 계단을 오르던 중 제게 먼저 인사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똑같이 인사를 하고 어디에서 봤더라, 하고 기억을 더듬다가 같은 과의 전공을 듣는 중국인 학생 분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다음 날, 빠른 교수님 말씀 때문에 미처 끝내지 못했던 필기를 도와준 계기로, 저와 중국인 학생은 금방 친해졌고 교양 수업에서도 옆 자리에 앉아 서로서로 중국과 한국의 다른 면모에 대해 더듬거리나마 함께 이야기하며 웃고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신청한 교내 장학금 프로젝트(일정 시간의 교육을 이수할 시 장학금 지급)를 위해 시작한 토익스피킹 수업에선 얼결에 조장을 맡은 분과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습니다. 초반엔 교육을 중복 이수하느라 놓칠 때마다 숙제를 알려주던 단계였지만, 간간히 추우니 몸조심하라는 안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항상 웃고 있으면서 친절을 베푸는 분이라, 이런 사람도 있구나 하고 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영어 단어를 정말 잘 외우는 분인지라, 그 비법을 꼭 얻어내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적는 동안 저는 또다시 지금의 제 시간으로 돌아옵니다. 다음 주는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와 학사 일정으로 밀려버린 중간고사가 기다리고 있으니, 쉬는 동안 당분간 골머리를 썩여야겠군요.
최근엔 중국인 친구로부터, 토익스피킹의 선생님으로부터 외국어 발음이 아주 좋다는 칭찬을 연달아 들었습니다. 때문에 좀더 능숙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서 외국어 공부를 뭐부터 어떻게 시작하면 될까 마냥 검색하고 있습니다. 중국어는 일단 문자부터 외우고, 영어는 문법을 다시금 다듬어야겠지 생각합니다만, 구체적인 학습 계획을 짜는 건 제겐 아직 어렵네요.
5. 에필로그
옛부터 내려오는 글 중에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으면 만남이 있나니' 란 글귀가 있었던가요. 저는 한용운 선생님의 시에서 처음 본 글귀라고 기억합니다만, 최근 들어 그 말을 여러가지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팠던 기억은 이건 이런 경험이었으니 좋았다고, 좋았던 기억은 엄청나게 잘 풀리는 미래를 덧그리면서 마음을 다스리는 중입니다. 물론 지금도 미끄러지고 (늦잠으로 중간고사 하나를 놓쳤습니다 OTL) 넘어지고 있습니다만, 이것도 웃으면서 "이 땐 이랬어!" 하고 이야기할 날이 올 거라 믿으니까요.
아침 저녁으로 공기가 차가워지고 있는 가을입니다.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몸조심하시고, 무사한 하루를 보내시길 기원합니다. 덧붙여 이런 글을 적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시는 포럼에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ps. 중간고사 대체 과제로 소설을 적어야 하는 일이 있는지라, 훈련을 겸해 이전의 글과 다르게 부제를 붙여봤습니다. 약간 졸린 상태에서 쓴거라 횡설수설 쓴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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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14-10-24 22:52:51
오랜만에 포럼에 와 주셔서 반가와요!!
그리고 아스타네스님에게는 지난 여름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군요!! 잔잔하면서 동시에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향이 느껴지는 글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만남이라는 것이 있으면 헤어짐도 반드시 있는 게 인간사라지만, 이런 것들은 반복한다고 해서 학습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리고 지금까지 상처를 많이 입은 저로서는 새로운 인간관계를 만드는 게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스스로 설정해 놓은 한계를 많이 넓히긴 해 왔지만 그래도 가이드라인이 엄격하게 준수되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보니, 지난 여름 동안 여러 종류의 인간관계를 통해 한층 성숙해지신 아스타네스님을 보면서 참 멋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어요.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성취하고 발전하는 모습을 보게 되어서 정말 기뻐요. 그리고 오늘은 어제보다, 그리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아름다울 것이라는 것도 믿어요.
필요한 것이 있다면, 포럼에서 많이 얻어가시길 바래요. 언제든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아스타네스
2014-11-03 23:14:48
글에 후한 평가를 남겨주신 것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저는 만남과 헤어짐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질 않았다가 이제서야 조금씩 그 의미를 되새기는 해가 된 것 같습니다. 인간관계에서 무슨 짓을 해도 상처만 늘어난다면 (피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버리겠어!' 하고 최대한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했던 결과가 아닐까 해요.
개인적으로는 정말 발전하고 있는건지 의뭉스러울 때가 많습니다만, 그럴 때마다 마음을 다듬을 수 있는 일들이 생기기에 어떻게든 발전해가고 있을거라 느긋하게 있는 중입니다.
날이 추워져가는 나날 속에서도 가슴 한 구석을 따뜻하게 할 수 있는 건 모두 포럼의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영해주심에 항상 감사드립니다.
SiteOwner
2014-11-08 13:16:17
읽으면서 이렇게 잔잔하고 아름다운 감동을 받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깊은 차향이 잘 우러나는 것같은 근황 이야기에, 이렇게 설레게 되고 또한 미소짓게 되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전에 없었던 힘도 나고, 게다가 같은 세상이 더욱 아름답게 보이는 법입니다. 오래전 일입니다만, 고백하고 나서 그 고백이 받아들여지자 펑펑 울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하늘이 무척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게다가 가시적인 성과가 나는 일을 하면 정말 기분좋습니다. 그 성취감은 겪어본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아스타네스님도 그것을 겪어보셨으니 정말 잘 되었습니다.
오늘도 더욱 성장하시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그리고 역시 또 반갑게 맞이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스타네스
2014-12-04 01:07:29
이전에는 사랑을 한다는 것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창작을 할 때마다 저걸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어물거리곤 했는데, 직접 경험해보니 '아, 이래서 사랑을 주제로 그토록 많은 작품들이 나왔구나' 하게 되었습니다. 연말에 다시금 회상해보니 정말 이런저런 일들이 많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과의 즐거움은 분명 굉장한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한층 더 위의 성과를 목표로 하고 달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구나 싶지요. 지금은 '최고로 잘하지 않으면 무쓸모하다' 는 왜곡된 완벽주의에서 겨우 벗어나 약간 의기소침해져버린 상태입니다만, 다시금 추스르고 일어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항상 환영해주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