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그때그때 빌려보던 책들 중에 '슈퍼 히어로-미국을 말하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코믹스를 넘어 영화와 게임으로 발전하는 상업적 성공보다는 각 히어로의 탄생 배경과 행동의 동기에 초점을 맞춘 책인데요. 그러다 보니 소설이든 만화든 작품을 접할 때 생각치 않았던 질문 - "얘네는 왜 이럴까?"라는 질문을 자주 던집니다. 첫 장부터 가장 유명한 슈퍼 히어로인 슈퍼맨의 탄생을 다루면서 "슈퍼맨이 남들을 돕는 이유는 뭘까?"라는 슈퍼 히어로물의 가장 근본을 다루고요. 그래서 이 책은 (아래의 질문과는 별개로) 창작이나 히어로물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어쨌든 저 책의 영향도 있고, 최근에 저를 가장 괴롭히는 의문 중의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범죄물에도 주인공이나 캐릭터들의 행동에 대해 대의명분을 넣어야 할까? 혹은 어떤 동기를 넣어야 할까?" 입니다. 대의명분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범죄미화물이 되기 쉬우니 '동기'로 바꾸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만들려는 범죄물은 어느 정도 히어로물같은 부분이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이 핵심 스토리와 관계가 있든 없든 남들을 도와주기 좋아하거든요. 물론 그 과정에서 다소 불법적인 행동을 벌이기는 하지만요.
그런데 문제는, 현재 더블 주인공 체제로 가고 있기 때문에 반(半)합법적 활동은 레스터 리에게, 불법적 활동은 존 휘태커에게 맡겼습니다. 그래서 일단 처음에 걱정했던 주인공의 도덕성 문제는 해결하긴 했는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 - 레스터는 왜 손을 더럽히면서까지 사람들을 도우려 할까? - 에 대해선 아직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대개 이 동기는 캐릭터의 탄생 배경(이 경우 레스터가 범죄계에 몸을 담게 된 사건)에서 탄생하는 경우가 많지만, 저는 현재 그 탄생 배경에 대해 확신이 들지 않아서 보류한 상태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설을 쓰려고 해도 캐릭터가 공허하게 움직일까봐 못 쓰고 있고요. 사실은 게을러서 그런 거지만...
현재 최대한 완성한 초안으로는 "리넷 블랙번(과거에 로망오크님이 올리셨던 '삼촌과 조카'의 만화에 나오는 소녀(?) 캐릭터입니다)을 포함한 지인들과 다른 사람들이 자신처럼 함부로 범죄에 빠지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 정도입니다. 어찌 보면 위선일 수도 있고, 아니 위선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남을 챙긴다면서 다른 남에게 해를 입히고 있으니). 과연 이 정도의 동기라면 충분한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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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과는 별개로, 이미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시겠지만 '레스터'는 사실 저를 작품 속에 등장시킨 모습입니다(이전에 이를 통해 글쓰기에 관한 문제를 해결했다고 글을 썼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 자체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사건 구성도 좀 더 쉬워졌습니다. 제 입장이라면 어떻게 판단할지를 그대로 쓰면 되니까요. 문제는 역설적으로 이 해결책이 그대로 독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저를 투영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범죄 활동을 벌이는 인간으로 만드는 게 두려워진거죠.
더 웃긴 점은,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무렵(그러니까 고등학교 2~3학년)에는 제 세계관이 아닌 GTA - 그러니까 범죄가 일상이고 가치관이 되는 세상 - 를 바탕으로 해서 그런지 제 캐릭터(그 때도 저를 투영했습니다)가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이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도덕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네요. 그런데 지금은 GTA와 결별하고 제 자신의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그런 '가치관'이 사라져서 그런지 몸을 사리게 됩니다. 그리고 위에 썼던 '동기'로 돌아가는 거죠.
연말인데 뭐하고 있는 건지 저도 참 혼란스럽네요;;; 도와줘요, 졸프 J. 킴블리!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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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SiteOwner
2017-11-28 19:30:56
말씀하신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생각해 보시면 되겠네요.
관점에 따라, 범죄의 동기가 필요한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주인공이 작중에서 범죄자인 경우는 필요한 경우가 확실히 많겠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겠지요. 이전에 읽었지만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 추리소설에 나오는 경우인데, 영어교사인 주인공은 프랑스 모처를 여행중 해변풍경사진을 카메라로 찍었는데 이것을 이유로 범죄자로 낙인찍힙니다. 프랑스 경찰이 그의 카메라를 압수하여 필름을 현상해 보니, 군사시설인 해안 포대가 찍혀 있었고, 그래서 간첩 혐의로 체포된 뒤 프랑스에서 군사재판을 받을 위기에 처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무혐의를 입증하기 위해서 추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같은 혐의로 체포된 다른 사람들 중에 진짜 범인이 있다는 것을 모종의 계기로 알게 됩니다. 범의가 전혀 없는 주인공이 결과적으로는 범죄자로 간주되어 버린 이런 상황같은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마련입니다.
반면에, 주인공이 아닌 다른 등장인물이 범죄자인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자신이 범죄피해를 당해 큰 피해를 입거나 가족, 연인 등이 희생된 경우가 그렇습니다. 이 경우 범죄자의 의도가 전면에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도 있고, 주인공이 파헤치는 과정으로 인위적으로 드러날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염두에 둘만한 것은, 이야기를 얼마나 풀어 나갈 것인가의 문제.
3인칭 시점의 단편인 경우 동기가 없어도 무방한 경우는 있습니다. 폭주족들끼리 시비가 붙었다가 사망사고가 나고, 그 결과 누군가가 도피의 길에 올라야 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하는 범죄물 단편을 써 본다면 어떻겠습니까? 처음에 폭주족들의 폭주 동기를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사망사고 이후 발생하는 문제에도 집중해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장편이고, 범죄행각이 어느 정도의 경향성을 띠게 된다면 개연성이 보다 강하게 요구됩니다. 이 경우 그 개연성을 높여주는 장치가 바로 동기입니다. 즉 길게, 일관되게 풀어나가야 할 이야기라면 동기의 중요성은 단편에서보다 더욱 커지게 됩니다.
Papillon
2017-11-28 23:34:07
마키
2017-11-29 00:20:25
사실 요새는 정말로 순수하게 악행이 하고싶어서(이것도 파피용님 말씀대로 개개의인의 가치관에 따라 그 자체가 이유가 되겠지만) 악당인 캐릭터는 의외로 드물더군요.
스파이더맨: 홈 커밍의 빌런 벌처의 동기는 정당하게 시로부터 계약을 맺고 하는 일을 대미지 컨트롤 측에서 강제적으로 빼앗고 실직시킨 탓에 먹고살기위해서 빌런이 된, 소위 말하는 대기업의 갑질에 밀린 중소기업 실직 범죄자와 같은 느낌.
파피용님 말씀이나 위의 벌처 처럼 범죄를 저지르는 동기를 독자들에게 얘는 그럴만하다고 납득시키는게 중요하죠.?
마드리갈
2017-11-30 15:02:18
일단 제목의 질문부터 답하자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본능 중의 하나가, 자신의 상태, 행동 등에 대한 자기합리화니까요. 설령 그것들이 주류사회 내에서 용인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쉽게 버리지 않는 경향이 크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예요. 게다가 이런 것들은 여러 사회에서 갖가지 속담으로 표출되기도 하죠. 핑계 없는 무덤 없다 등으로...
범죄물로 시각을 좁혀서 생각해 본다면, 범죄의 착수와 실행에 동기가 없다고 하면 아무래도 전제 자체가 무너지기 마련이죠. 위에서 오빠가 예시로 든 추리소설의 경우는, 영어강사에게 범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찍은 사진에 군사시설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누명을 썼다 보니 범죄에 동기가 없는 것이겠지만, 이런 것을 제외한다면 동기는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어요.
이미 상정하신, 타인의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손을 더럽힌다는 것은 아주 좋은 동기가 아닐까요?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합리화와 그로 발생하는 모순의 큰 괴리를 묘사하기에 더없이 좋아 보여요. 최소한 제 시각은 그러해요.
대왕고래
2017-12-02 00:24:30
정말 미쳐서 아무 이유없이 범죄를 저지르는 캐릭터도 가상설정들 중에 한 둘은 있겠죠. 근데 오히려 그게 더 특이케이스일 거 같아요.
왜냐면 사람은 누구든간에 무슨 이유를 갖고 어떤 행동을 하기 때문이니까요.
범죄자도, 무슨 이유를 갖고 범죄를 저지르겠죠. 단순히 "돈을 벌고 싶다"가 목적이거나, 분노나 복수가 목적인 경우도 있겠고, 찾아보면 어떤 이유든 분명 있을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