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럼에서 간간히 공개했던 제 10대 시절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 좋은 학교였습니다.
여기서 "어떤 의미" 라고 한정한 것에 주목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양보라는 미명으로 여러 권리를 제한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학과성적이 학급 및 학년에서 가장 좋으니까 다른 학생의 공부에 대해서도 돌봐줘라, 그리고 남학생 대표답게 다른 남학생들이 허튼짓을 하는 일이 있거든 좀 막아달라 등등의 요구 등이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
그런데 그렇게 말하던 교사들이 저에게 뭔가를 해준 적은 구체적인 사례는 물론이고 막연한 말조차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 요구에 응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저에게 학생을 대표하는 지위가 주어진 적도 없었습니다. 32년 전의 "똥먹고 방구뀌자" 소동 때에는 아예 저에게 주어진 공식적인 지위 따위는 전혀 없었는데다, 그나마 병원에서 생각났던 1988년 6월과 9월의 어느 날에서는 서기 직책이 있었기는 했습니다만 병원측에서 가로막아서 들어가지 못한 것에 대해 교사든 다른 학생이든 아무도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았는데다 별로 인기없는 사람이다 보니 혼자 이상한 상황에 빠져 버리기까지 하는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특권 따위는 더더욱 누려 본 적이 없습니다. 양보해야 한다고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마저 제한당하는 상황에 특권을 기대하느니 차라리 중동 현지인들이 추천하는 족발집을 찾는 게 빠르겠습니다.
중학생 때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학, 제도, 공작 등의 각종 경시대회에서 호실적을 연속으로 기록했던 저는, 공부를 잘하니까 경시대회 상품도 하위입상한 학생에게 양보해 줬으면 좋겠다는 학교측의 방침을 전달받았습니다. 어차피 좋은 상품이야 나중에 또 다른 대회에 나가서 또 타면 될 거라고.
그리고 전 다른 학생과 바꿔치기당한 경시대회 상품을 버렸습니다. 그 당시로서는 고가품이었지만 그게 없어도 생활에 지장없는 건 아니기에. 그게 당시에 제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저항이었기에.
덕분에, 그 시기에 제대로 배운 게 있습니다. 세계는 온갖 부조리에 가득차 있고, 그 부조리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서 제대로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실력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그래서 전 그 시기를 어떤 의미에서는 참 좋은 학교였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학교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건 저의 사례로 충분할 뿐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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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시어하트어택
2018-09-09 22:50:29
참... 오너님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금 빨리(?) 세상의 쓴맛을 아셨네요.
지금 보면 오너님이 말씀하신 게 어떤 건 개선된 것도 있지만, 또 어떤 건 개선되기는커녕 더 이상한 형태로 이어지고 있는 걸 보니 씁쓸합니다.
SiteOwner
2018-09-10 21:11:57
그렇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학교였을지도 모를 것이라 생각되면서, 이런 사례를 겪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양보하는 사람은 계속 양보만 해야 하고, 특권을 누리는 사람은 계속 특권을 누리도록 보장받고, 최소한 저는 확실히 후자인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영남권 출신, 남성, 명문대 출신이라고 갑자기 특권층으로 간주되어 버렸고, 적폐세력이 되기까지 했습니다.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언제 특권을 주고 그런 소리를 해 보던가 하고 받아치고 싶습니다.
앨매리
2018-09-14 09:19:10
정말 훌륭한 학교네요. 반면교사적으로 훌륭한 학교군요. 나중에 그 사람들이 제대로 된 쓴맛을 좀 봤으면 좋을 정도네요...
오너님이 겪으신 일을 보니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이 경우에는 살짝 다르게, 양보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아는 거겠죠.
SiteOwner
2018-09-15 17:04:24
정말이지,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게 이렇게도 어렵다는 것을 어릴 때 배우지 못했다면 성인이 된 뒤에 전방위로 밀려오는 부당한 대우의 파상공세를 견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시절의 경험은 반면교사적으로 훌륭한 학교였을 것입니다.
지금 밀크티를 마시는데 그때 생각을 하니까 밀크티에서 쓴맛이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