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생각해 보니 저는 도시에 대한 애착이 강한 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도시에 살았는지의 여부를 떠나서, 뭔가 '도시니까 모든 게 가능하다'라는 막연한 기대 같은 걸까요? 이러한 생각의 근원을 쭉 따라가보니 일단은 역시 어렸을 적 게임의 영향이 지대한 것 같습니다. 그 당시의 게임 + 도시라면 역시 그것밖에 없죠. 심시티. 가장 처음 보기만 했던 것은 양호실 컴퓨터에 깔려 있던 심시티 2000이었고, 실제로 처음 플레이해본 것은 SNES 버전 심시티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시뮬레이터는 저에게 어려운 분야라서 결국 파괴만 일삼다가 끝났지만요.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역시 만화 '시티헌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인물이라서(...) 스캔본으로 본 건 차치하고, 장르가 아닌 내용상 어반 판타지(?)를 최대한 구현한 물건이라 넋놓고 봤던 기억이 납니다. 마법이나 드래곤이 나오진 않지만 어쨌든 모험 활극이고, 스토리와 관계없이 화려한 도시의 일상이나 풍경을 감상하는 재미도 있었으니까요. 나중에 위키 등의 해외 정보통을 접하고 나서야 거품경제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낸, 다른 의미로 '판타지'라는 사실을 알고 좀 충격도 먹었지만요. 그래서인지 후속작 엔젤하트는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이, 화끈함보다는 가족애가 두드러지는데 이 역시 도시의 또 다른 단면이기에 재밌게 읽었습니다.
(나중에 생각나서 적습니다만) 그 밖에 월리를 찾아라 시리즈처럼 도시를 배경으로 삼으면서 이것저것 재미난 요소들을 넣어둔 작품도 제 성향에 큰 영향을 줬더군요. 실제로 그것 비슷하게 연습장에 비슷한 그림들을 그렸으니까요. 그것도 언제부턴가 한계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1장에 200명, 400명, 600명 하는 식으로 숫자 늘리기에 급급했지만(...). 어쨌든 옴니버스물과 자잘한 요소를 좋아하는 성격은 여기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론, GTA2를 필두로 도시를 배경으로 삼은 '범죄' 액션 게임들을 플레이하며 관련 정보들을 번역해서 그런지 도시에 대한 생각이 다른 쪽으로 구체화되고 말았습니다. (어쨌든 번역가라는 부업에 도움이 됐지만, 그건 나중에 얘기할게요) GTA를 '연구'한답시고 고전작 신작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플레이해본 기억이 납니다. GTA 시리즈 중에서도 바이스 시티(마이애미의 화려함), 트루 크라임 LA, 리걸 크라임, 크라임 파이터즈... 게임 이름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때부터 도시 그 자체보다는 범죄로 초점이 돌아가 버렸습니다.
장르적인 연구(주로 조직범죄 등의 묘사)엔 제법 도움이 되었다곤 생각하는데, 처음에 가졌던 도시에 대한 '환상'과는 거리가 멀어져버린 거죠. 그러니까, 판타지(시티헌터)와 리얼리티(GTA 시리즈)라는 대립적 요소에서 후자를 택해버렸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남아 있는 GTA 팬카페에 쓴 팬픽들을 시간순으로 정렬해 보면, 초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작품 내 분위기와 사실적 묘사가 반비례하는 게 확연히 느껴지더군요. 초기엔 시티헌터를 그대로 베낀 듯한 GTA:Cheonju(天州, 그러니까 제가 사는 전주의 패러디입니다. 어유, 부끄러워라!) 같은 물건도 나왔는데 뒤로 갈수록 GTA 시리즈의 설정을 기반으로 치밀하게 흘러가는 대신 원작에 '물들어서' 많이 '가라앉게' 되었습니다.
한편으론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서 도시가 오히려 무서운 곳으로 변모해버린 영향도 있겠죠. 거기에 힘입어 네오 누아르 같은 장르도 활발해졌고요. 근래 들어 제가 사이버펑크나 신스웨이브 같은 물건에 심취한 것(예전 글 참고)도 그 까닭인가 봅니다. 아마 지금 쓰고 있는 코스모폴리턴이 계속 오락가락하는 것은 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머리는 계속 과거의 판타지(시티헌터)를 추구하는데, 몸과 손은 이미 물들어버린 리얼리티(GTA 시리즈)를 따라가고 있으니...
이렇게 머릿속에선 판타지냐 리얼리티냐에 대한 고민이 끝이 없고, 그러다보니 글은 안 써지고, 설정은 설정대로 양쪽 분야 모두 폭주하고 있으니... 총체적 난국입니다. 솔직히 지금 소설을 쓰는 것도 누구 재밌으라고 쓰는 건지 이제 알지도 못하겠습니다. 나름 웃음 포인트라고 넣어봤는데 반응은 시큰둥하고, 연재 텀이 길어지면서 저부터가 무슨 의도로 이 전개를 생각했는지 기억도 안 나니... 현재 연재분을 그대로 이어가야 하는지 아니면 또 리부트를 해야 하는지 굉장히 고민됩니다. 이미 에피소드 2개만에 리부트하고 연재하는 거라 가급적이면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그야말로 지옥길이네요.
뭐 아무튼, 너무 범죄물에만 물들어버린 장르 편향성을 최대한 중립적으로 만들기 위해 반대되는 성향의 작품들을 계속 보고 있는 편입니다. ARIA 같은 치유물, Q.E.D.같은 소프트한 추리물 등으로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브레이크와 과부하가 걸려서 미쳐버릴 것 같으니까요. 현재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꼭 범죄물이 아니라도 스토리를 써낼 수 있다는 것. 지금은 이 명제를 최대한 연구하고 관련 에피소드를 써내서 증명(?)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입니다.
다시 원래 주제로 돌아가서... 현재 잘 풀리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도시 관련 작품을 접하면서 이것저것 끌어다 쓰는 데에 급급했습니다. GTA 팬픽들이 그랬고, 그나마 지금 쓰는 작품들은 자체 배경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구역이 도시의 어느 쪽에 있고 무엇으로 유명하다' 정도지 체계적으로 잡힌 건 아닙니다. 심시티급으로 막 산업간의 연계성 등을 따질 필요까진 없으니까요. 하지만 대략적인 지형과 그에 따른 도시의 발전 방향 정도는 연구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런 지형이었으니까 이 쪽엔 무슨 산업이나 건물이 많고 도로가 어떻게 되어 있다' 등이요. 이것들을 손쉽게 알아보려면 어떤 걸 참고하는 게 좋을까요?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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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댓글
마드리갈
2019-06-08 11:14:26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그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건설하여 모여사는 도시는 인간 문명의 집결지, 그래서 아무래도 도시는 매력적이겠죠. 순기능, 역기능 두 측면에서 모두. 그래서 도시에 대한 동경은 최소한 자연스럽거나 인간의 본능 차원에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닌가 싶어요. 간혹 케이블 채널에서 나오는 산 속에서 은둔하는 사람들의 생활상 같은 것도, 일반적인 성향과는 정반대이니까 그만큼 주목받기 쉬운 게 아닐까 싶네요.
말씀하신 질문에 대해서는 이런 것들을 참고하시면 좋아요.
서울대학교 김인 명예교수의 저서 도시지리학, 세계도시론 등은 각 책이 200페이지 이내라서 분량이 적어 단시간 내에 검토하기 좋을 거예요. 그 이외에도 김인 명예교수가 공저자 중의 1명인 도시해석, 전남대학교출판부의 창조도시의 이해, 카플란-할로웨이-휠러 3인공저 도시지리학, 이희연 한국지리학회 이사의 저서 경제지리학, 박종화-윤대식-이종일 3인공저 지역개발론 등의 것들. 이것들을 레퍼런스로 하여 주요 도시들의 지도를 분석하는 방법을 추천드려요. 제 경우는 철도, 항공 등을 중심으로 한 교통문제에 관심이 있다 보니까 교통 위주로 분석하는 습관을 들여 데이터를 축적해 두고 있어요.
Lester
2019-06-09 22:52:26
어떻게 보면 '호기심' 때문일 수도 있겠죠. 막연하게 어떠할 거라는 환상이 아니라, 말씀하신 문명의 결집으로 인해 현실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그 자체에 대한 호기심. 뭐 요새는 그런 호기심도 이래저래 사회가 각박해져서 많이 무뎌졌고, 필수불가결한 요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무르는 실정이지만요.
그나저나 추천하신 책들은 저한테는 너무 어려울 것 같네요;;;
마드리갈
2019-06-10 13:51:28
추천해 드린 책은 일단 전문서적이다 보니 난이도가 좀 높긴 하죠.
그래도 세계도시론 정도는 읽어보셔도 그리 무리가 없을 것 같아요. 복잡한 수식 없이 도시의 구조 관련으로 개략적인 것들이 소개되어 있거든요. 게다가 분량이 적다 보니 입문 레벨에서도 큰 부담이 걸리지 않아요. 공공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는 있어요. 시중에서 구하기에는 절판되어서 중고서적을 찾는 이외에는 수급상황을 보장할 수 없지만...
Lester
2019-06-10 18:01:45
그렇다면 시립도서관에 들러서 찾아보고, 없으면 그냥 도시 테마로 된 책 찾아서 읽어야겠네요. 어쨌든 감사합니다.
앨매리
2019-06-08 18:06:47
글을 읽으니 문득 도시를 동경하는 시골 사람이라는 소재가 생각나네요. 저 역시 도시 하면 멋지고 세련되어 보이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뭐든지 다 있을 것 같은 만능이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도시를 그러한 이미지로 그리는 창작물을 접한 영향인지 도시 태생인데도 종종 그렇게 느끼게 됩니다.
Lester
2019-06-09 22:55:19
그런가 하면 소도시 사람이 대도시 사람을 동경할 수도 있는 법이죠. 대도시 사람은 대국(大國) 사람을 동경할 테고. 그 대국 사람은 일상의 소박함을 그리워하며 시골 사람을 그리워... 하려나요? 보통 창작물에선 이런 무한순환이 이루어지긴 하는데 현실에서도 그럴지는...
SiteOwner
2019-06-09 13:23:14
저는 태어난 이래로 청소년기의 끝까지를 농촌에서 보냈고 이후 도시생활을 계속해 온 경우입니다. 이런 제 입장에서는 도시는 같은 하늘 아래에 펼쳐진 별세계같은 느낌이 강했습니다. 지금도 그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만, 그래도 예전만큼은 아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도시생활의 명암을 여실히 느껴서 그런 것일까요? 그래서, 성장배경은 다르지만 Lester님께서 느끼시는 것을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있습니다.
참조할만한 레퍼런스는, 동생이 집에 있는 지리학 관련 서적을 다 소개해서 저는 딱히 추가로 소개할 게 없습니다만...
꼭 어떤 요소가 없더라도 작품은 쓸 수 있다는 발상과 시도, 아주 좋습니다.
연애물도 좋습니다만 연애요소가 없어도 좋은 작품은 얼마든지 나올 수 있습니다. 실사드라마에는 긴급취조실, 변두리로켓, 하나사키 마이가 잠자코 있지 않아, 집단좌천 등이, 영화에서는 콰이강의 다리, 탈주특급, 황야의 7인, 혹성탈출, 압솔롬탈출, 천국의 아이들, 책상서랍속의 동화 등이, 애니에서는 바라카몬, 나만이 없는 거리 등이 해당됩니다.
Lester
2019-06-09 23:04:11
도시에 살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생각을 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다 새로운 곳에 대해 동경하다 체험해보길 원하고, 체험하고 나서 깨닫는 거죠. 자신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저는 뭐... 문명의 이기(利器)에 너무 적응해버려서 시골에선 못 살 것 같지만요;;;
가끔 요즘 창작물의 트렌드는 '장르가 없는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캐릭터만 튼튼하다면 무슨 이야기를 던져놔도 성립이 되니까요. 보통 이런 얘기를 하면 대부분 스즈미야 하루히같은 캐릭터 소설을 떠올리더군요. 저는 서양 쪽이 취향이라 그런지 심슨가족 같은 걸 좋아합니다. 그때그때 바뀌는 설정으로 정신이 없긴 하지만 어느 정도 원안을 유지하면서 온갖 이야기를 풀어내는 다양성이 좋더군요. 지나친 사회풍자는 질색입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