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점심 무렵에 러브레터 재개봉판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영화관 안은 텅텅 비어있더라구요. 한편으론 영화를 세번쯤 보고 나서야 이와이 슌지 감독이 얼마나 등장인물들의 감정선을 절묘하게 깔아놨는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느낌. 사소한 대사나 소품이 알고보면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었죠.
동성동명이라 입학식 때부터 좋든 싫든 사사껀껀 얽힐수 밖에 없었던 후지이 이츠키(이하 남은 후지이, 여는 이츠키).
반 친구들의 장난으로 도서부원을 담당하게 된 이츠키는 후지이의 취미가 아무도 읽지 않을법한 책들의 도서카드에 자기 이름을 적어넣는거라는걸 알게돼죠. 한편, 과거편들의 장면을 맞춰보면 내심 이츠키에게 관심을 가지고있지만 표현하는 방법이 서툴렀던 후지이와 역시 체육대회날 무심코 카메라로 후지이만을 쳐다보던 이츠키처럼 둘 사이에선 연심이 깃들게 되죠.
이 이야기를 들은 와타나베 히로코의 답신부터가 "헌데 거기 적혀있던 "후지이 이츠키"란 이름이?정말로?그의 이름이었을까요?".
정황상 후지이는 결국 이츠키를 짝사랑하게 되고, 자기 취미를 이용해 도서카드에 이츠키의 이름을 적어넣는걸로 서툰 사랑표현을 하게된거죠. 어차피 동성동명이니 들키지 않을테니까요.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급하게 전학을 가게 된 후지이는 이츠키의 집에 들러 책을 반납해달란 명목으로 책 하나를 건내주고 떠나는데, 말은 귀찮은 일을 떠넘기는 듯이 보여도 마지막 장면을 생각하면서 이 장면을 다시 보면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진심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후지이 나름대로의 서툰 고백이었던거죠. 하지만 하필 신학기가 겹치는 타이밍에 후지이는 전학준비로, 이츠키는 아버지의 장례로 학교에 나가지 못해 서로의 상황을 몰랐고, 서로 그러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멋쩍은 사이였기에 서로의 진심은 결국 상대방에게 닿지 못한채 끊어지게 되죠.
한편, 이츠키의 정체를 캐기위해 홋카이도 오타루에 가게 된 와타나베 히로코와 아키바 시게루는 좀 전에 이츠키를 내려주고 돌아온 택시기사한테서 "아까 전에 내렸던 손님과 똑닮았다"는 말을 듣습니다. 캐스팅이 "나카야마 미호: 와타나베 히로코=후지이 이츠키(여)"라서 1인2역인걸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배우개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택시기사의 이 별것 아닌 사소한 잡담야말로 후지이가 히로코를 사랑했던 이유 그 자체였죠.
오타루에 가기 전 카페에서 아키바와 히로코는 편지와 후지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후지이가 히로코한테 첫눈에 반했다고 했던 것도 실은 히로코가 짝사랑인 이츠키와 똑닮았기 때문이었으니까요.
결말에서 이츠키와 펜팔을 나누며 자신이 몰랐던 후지이의 모습과 추억을 나눠받고 설산에서 자신의 마음을 어느정도 정리할 수 있게 된 히로코와, 히로코와의 펜팔을 계기로 잊고 있었던 후지이와의 추억을 떠올리게된 이츠키의 마음은 도서부원 후배들이 대단한걸 찾았다면서 가져온, 과거 후지이가 대출 반납을 명목으로 고백하기위해 가져왔던 책으로 암시되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la recherche du temps perdu In Search of Lost Time)".
자신에게 다시 한번 되돌아온 책에 잠들어 있던 도서카드. 그리고 그 카드의 뒷면에 그려져 있던건 과거에 후지이가 그렸던 이츠키 자신의 모습. 어린 시절의 이츠키에게 전해졌어야 할 고백이 결국은 시간을 넘어 어른이 된 이츠키 앞에 이제야 도착한거죠. 그제서야 이츠키는 과거 후지이가 자신을 짝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후배들 앞에서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얼버무리려다 실패하고 멋쩍어하는 이츠키의 표정과 몸짓 또한 백미.
모든걸 알고 다시 되돌아보면 결국 러브레터의 이야기는 전학가기 직전 짝사랑하는 이츠키에게 고백했다 실패한 후지이는 어른이 된 훗날 이츠키와 똑닮은 히로코를 보고 한눈에 반해 다시 사랑을 시작해보려 했다는게 되고, 이츠키와의 펜팔을 통해 히로코는 후지이와의 추억을 정리하게 되지만, 반대로 이츠키는 잊고있던 후지이와의 추억, 그리고 그 날 자신에게 전해졌어야 했던 후지이의 진심을 뒤늦게 알게되는 이야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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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SiteOwner
2020-12-25 14:08:36
누군가를 만나고, 좋아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것은 정말 작은 계기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가치와 소중함을 늦게 깨달아 버리는 것에서 큰 회한을 늦게서야 느끼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러브레터의 이야기에 마음 한구석에 어떻게 표현하기 힘든 게 남게 됩니다. 사실 읽으면서 눈물도 나오는데, 이걸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 탓을 할 수도 없겠습니다.
대학생 때 주고 받았던 편지를 다시금 읽어보고 싶습니다.
지금도 몇 편이 남아있는데, 그때의 저는 누군가의 무엇에 그렇게 설레었는지, 그리고 20년도 지난 지금에 무슨 메시지를 남겼는지. 일부는 이제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니긴 하지만...
그리고 러브레터 영화를 보게 되면 더욱 깊이 느끼는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재상영된 러브레터의 감상평을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마키
2020-12-25 23:08:06
영화를 다시 보면 볼수록 와타나베 히로코가 후지이 이츠키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절절하게 느껴지더라구요...
그와는 별개로 요새 유튜브에서 보는 채널들이 대부분 칸사이 지방 사람들인지 칸사이벤을 쓰는 탓에 이전엔 몰랐지만 이번에 재개봉을 보러 갔을때는 히로코 파트에서 칸사이벤이 들리는게 어쩐지 친근감이 느껴질 정도였네요.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재개봉하면 또 다시 보러 갈 생각이에요.
마드리갈
2020-12-27 17:01:05
러브레터를 처음 봤을 때는 발단이 묘하게 작위적인 것 같았는데, 끊어질 듯 이어지려다 끊어지고 나중에 들어서야 의미를 깨닫게 되는 그 과정과 회상이 정말 아름답다는 데에서 감명을 느끼고 있어요. 아직 오래 살아온 건 아니고 가족 이외의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 본 경험도 없는 저이지만, 러브레터에서 묘사된 사건이 현실의 저에게도 있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고 있기도 해요.
역시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게 되는 건가요.
단지 지나가서만은 아닐 거예요. 시간과 함께 쌓여가는 소중한 기억과 마음이 있기에.
마키
2020-12-30 21:14:46
되돌릴 수 없는, 되돌아갈 수 없는, 인생에 단 한번뿐인 순간이기에.
희노애락과 함께 쌓여가는 추억들이 뒤돌아보면 아름답게 빛나는거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