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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 제일주의의 역설

마드리갈, 2021-09-15 15:38:08

조회 수
182

국내 언론매체들이 보여준 중국어 제일주의는 조선시대의 양반계층이 그렇게도 갈망했던 소중화(小中華) 그 자체이자 동국정운(東国正韻)이 지향하던 그 자체일까요. 그래서 중국어 표현을 그대로 들여온 것이 이제는 거명하지 않아도 될만큼 흔하디 흔해졌어요. 덕분에 중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저조차도 링링허우(零零後, 2000년대생)니 솽스이(双十一, 11월 11일)니 하는 중국의 유행어도 알고 있을만큼 국내 언론매체에 중국어가 범람하네요.
그런데, 그와는 참 대조적으로, 중국어를 할 수 있는 인재는 얼마 없는데다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고 예측할 수 있는 중국 전문가는 더더욱 보기 힘들어요. 이런 현상은 중국어 제일주의의 역설이라고 불러야 할까요?

저는 중국어 구사능력이 없어요.
중국어를 표기하는 간체자 자체가 쓰다 만 글자같은데다 흉해서 한자다운 품격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아서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아요. 게다가 배운다고 한들 딱히 필요가 없어요. 그나마 고전한문 구사능력이 있다 보니 대만에서 나온 출판물은 읽을 수 있는데다 중화권에서 발행한 자료라도 정말 유용한 것은 대체로 영어로 되어 있으니까요. 중화권 관련의 업무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죠. 만일 중화권 관련의 업무를 한다면, 고전한문 구사능력 덕분에 배우는 것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월등히 빨리 할 수 있겠지만 현재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이고...
게다가 한가지 더. 중국어 표현을 안 갖다 쓰면 어디서 삼대 구족이 맞아 죽는다고 협박하는 건지는 몰라도 국내 언론매체들이 날이 바뀌기가 무섭게 열심히도 중국어 표현을 퍼나르잖아요? 국내 언론매체 덕분에, 중국어 구사능력이 없는 제가 중국어에 익숙해져 가고 있을 정도니까 그 이상 말하면 잔소리겠죠.

조선일보에 이런 칼럼이 있네요.
[기자의 시각] 中 미워도 중국어 배워야, 2021년 9월 15일 조선일보 기사

왜 중국어에 대한 인기가 확 떨어졌는지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던 걸까요.
수요의 증가와 감소는 정치상황이나 경제상황이 크게 좌우하는 것은 맞아요. 하지만 그 이전에 정말 필요한 게 하나 있어요. 학습희망자에게 동기가 부여되었는가. 이게 없으면 행동 자체가 발생하지 않아요.

간단하게 생각해 보죠.
국내의 대표적인 고소득 직종 하면 변호사, 변리사, 의사 등의 전문직이 먼저 생각나겠죠. 그것 이외에도 연예인, 운동선수, 패션모델이나 유튜버 등도 꽤 포진해 있어요. 하지만 누구나 그 분야에 뛰어들려 하지 않죠. 과연 그걸 몰라서 뛰어들지 않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걸까요? 그건 아니예요. 그걸 왜 해야 하는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으면 시작되지 않아요. 개인의 관심분야나 적성, 능력 등이 모두 다르니까요. 연소득 세계 열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경영자가 올림픽 메달리스트가 아니라고 그의 커리어가 비하되거나 부정당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외국어인재에 대한 중용의 문제. 이건 저의 경험담도 반영되어 있어요.
외국어 네이티브가 아니라서 취업전선에서 실패를 거듭한 적이 있었어요. 어학관련 공인성적도 충분히 좋고, 실제 응용력도 현지인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단 하나, 네이티브가 아니라서 거부당한 적도 있었거든요. 이것이 정상일까요?
예의 칼럼에서도 중국어 관련의 직업문제가 언급되네요. 저렇게 수요 자체가 격감하면서 아예 고용의 풀 자체가 고갈되어 가는 실정인데, 이걸 그냥 반중 정서에 중국어를 배우지 않으니 문제라고 말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중국어 네이티브를 고용한다는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에는 틀림없어요.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한국어 네이티브라고 할 수는 없어요. 즉 한국어를 제2언어로서 배운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말. 우리나라가 우리의 일을 하는 데에 중국어 네이티브가 고용되어서는 안된다고는 말할 수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한국인이 주가 되어야 하는 점에서는 의문의 여지도 없을 뿐더러 부정되어서도 안될 거예요. 한국인이 객으로 전락해 버리면, 외국어 인재가 육성되지 않는다고 한탄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필요한 외국어의 네이티브를 고용하면 되고, 저 칼럼의 의미도 자연히 부정되는 거니까요.

국내의 외국어인재를 제대로 중용하지도 않고 현재 상황이 이러니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 운운해봤자 공허해요. 배울 사람에게도, 그리고 사용할 사람에게도 어떠한 동기부여도 되지 못하니까. 그럼 조선일보는 국내의 외국어인재를 얼마나 등용했길래라는 반문을 해주고 싶기도 하네요.

중국어를 남용하는 언론매체가 현재의 상황을 초래했다면 지나친 생각일까요.
최소한, 완전히 무관하다고는 단언할 수 없어요. 무분별하게 외국어 어휘를 국어에 혼용한다고 해봤자 이도저도 안되는데, 국내 언론매체는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는데다 오히려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양산해 왔어요. 이렇게 10여년 넘게 중국어를 남용해 온 덕분에 중국어를 굳이 공부할 필요를 못 느끼는 시류도 정착해 버린 게 아닐까 싶은데, 현직 언론계 종사자들의 생각은 과연 어떨지가 묻고 싶어져요.

마침 저 기사도 "유커(遊客)" 라고 써놓고 관광객이라고 중언부언해 놨네요. 처음부터 "중국인 관광객" 만 썼으면 한글 2자, 한자 2자 및 문장부호 3개를 안 써도 되었을 것인데 글이 쓸데없이 난삽해졌어요. 이런 불경제도 중국어 제일주의만 지킬 수 있으면 감내할 것인지.
마드리갈

Co-founder and administrator of Polyphonic World

5 댓글

대왕고래

2021-09-23 00:21:13

당장 영어가 있는데, 중국어를 쓸 이유가 없죠.

한 때 중국어 붐이 일었을 때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어차피 영어를 쓰면 되는데, 중국이 급부상한다는 이유로 굳이 중국어를 또 배운다?

제 2 외국어로 배운다면 차라리 가까이 있는 나라의 언어인 일본어를 배우는게 차라리 낫죠. 아니면 일본에서도 그냥 영어로 밀어붙히던지.

마드리갈

2021-09-23 13:09:31

그렇죠. 외국어학습의 동기가 여러가지 있는데 그게 발현될 여지가 적다면 역시 선택지에서 빠질 확률이 줄어드는 것이죠. 특히나, 학술자료같은 것은 좋은 정보는 대체로 영어로 되어 있고, 특정분야의 경우 독일어, 프랑스어, 일본어 등의 언어로 되었다든지, 국내에서 한국어로 출판된 자료도 양질의 것이 아주 많아요. 게다가 전근대의 동아시아 역사자료는 현대중국어가 아닌 고전한문으로 되어 있고. 그러니 의미가 별로 없는 것이죠.


각종 문화컨텐츠에서도 그러하죠. 더 언급을 말아야 할 정도로...

그러니 저 기사에서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설득력은 확보되지 못해요. 마치 중국어 학습을 국민의 의무에 준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해요.

Lester

2021-09-23 01:22:43

해당 기사를 읽어봤는데 굉장히 황당하네요. '중국어를 계속 공부하는 이유'가 마지막 두 문단에 나오는데, 실질적으로 이유로 볼 만한 건 그저 '최대 교역국이다' 하나뿐이고 나머지는 맥락에 맞지도 않는 말들입니다.


중국인이 언어유희를 좋아한다느니 필자에게 테스트로 자치통감을 주며 해석해 보라고 했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중국어 공부를 싫어하게 되는 이유'가 될 수는 있지만 '중국어가 중요한 이유'로 보기는 힘들죠. 툭하면 모를 수도 있는 고사성어나 한시를 들먹이는게, 대화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인가요? 그것도 국제사회에서?


그리고 애초에 청나라는 삼배구고두(통칭 삼전도의 굴욕) 이래 조선에게 특별히 득된 일이 없고 국권피탈에 앞장선 적국들 중 하나였을 뿐인데 만주어를 배운들 소용이 있었을까요? 그렇게 치면 일본어를 제법 공부하고 건너가서 활동했던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이 한 번이라도 조선이 명백히 유리하게 일을 처리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러나 저러나 조선보다 군사 및 여러 면에서 상대적으로 월등히 우위였던 청일 양국에게 이용당했을 뿐인데 말이죠. 결정적으로 청나라가 아편전쟁을 필두로 서구 열강에게 뜯어먹혔고 말입니다. 미래를 위해서 과거를 돌아볼 필요는 분명 있지만, 이건 결론을 미리 내놓고 이유를 끼워맞추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했는데, 평생을 두고 후회하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이모 중에 한 명이 중국 관련 일을 하느라 중국어 할 줄 안다고 들어서요. 아주 순진한 짓이었죠. 차라리 일본어를 선택했다면 지금 영어 번역만이 아니라 일본어 번역도 가능했을 텐데. 특히나 만화 애니 게임 등 소프트파워가 중국보다 훨씬 풍성하여 언어의 '가치'가 굉장히 높고, 그로 인한 인기와 수요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발전시키는 선순환이 이루어지고 있고 말입니다. 뭐만 하면 검열과 탄압으로 스스로 가치를 깎아먹는 중국과는 정반대죠.

마드리갈

2021-09-23 13:26:06

기사에 나온 논조가 전형적인 아전인수라고 할 수 있어요.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는데 올바른 근거가 없으니 상황논리에 기대는. 저런 헛소리도 기자가 쓰니까 평론의 영역에 편입되네요. 저 논리에 따르면 전광용(全光鏞, 1919-1988)의 1962년작 소설 꺼삐딴 리의 주인공인 이인국 박사야말로 현명한 처세를 한 사람으로서 칭송되어야 해요. 일본의 지배하에 있으니 일본어를 익히고, 지배자가 소련으로 바뀌니 러시아어를 익히고, 미국이 대세가 되니까 영어를 배우고, 지금은 중국이 최대 교역국이니까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아주 멋지게 연결되어요. 이 꺼삐딴 리를 기회주의자라고 욕했던 독자들은 이제부터는 반성하고 현실의 대세를 따라야 한다는 결론이 나면서.


지적해 주신 점에 동의해요. 역사에 반례가 수두룩하게 있는데...

그리고 중국어도 중국어지만, 중국 자체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죠. 조선일보에는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학 교수가 연재하는 송재윤의 슬픈 중국같은 깊이있는 양질의 컨텐츠도 있는데 저 기자의 눈에는 저런 건 보이지도 않는 건지...


현재 중국은 제2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전부터 지속된 공산당의 심기를 거스를 만한 요소에 대한 자의적인 금지, 호모포비아, 연예인에 대한 충성맹세 강요, 기록말살형, 미형의 남자연예인 출연금지 등. 안그래도 미약하기 짝없었던 중국의 소프트파워는 앞으로도 퇴보만을 계속하겠죠. 그나마 규제가 덜했던 게 사극, 무협 등의 분야였는데 앞으로는 그런 것도 못 만들 거예요. 난릉왕같이 미장부 캐릭터가 나오는 것도 꽤 있으니까요.

Lester

2021-09-23 15:44:44

소개해주신 송재윤 교수님의 칼럼은 정말 소름끼치네요. 그 중에 하나인 "세계적인 반중 감정... 6.25 전쟁과 문혁 때부터 시작됐다"의 경우 과거에 대한 내용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만 현재 오늘날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정확한 해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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