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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대사는 국산영화 "공공의 적"에서 이성재가 연기한 악역 조규환의 명대사입니다. 재미있게도 몇몇 재난물이나 생존물에서는 (종종 사이가 안 좋았던) 캐릭터들이 서로를 구하면서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데엔 이유가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할까요? 추측컨대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람을 구하는 데엔 이유가 필요하지 않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엔 '이유가 합당하다면 죽인다'와 '이유가 합당해도 안 된다'로 나뉘겠죠. 흔히 말하는 사형제 찬성/반대 논쟁에 가깝습니다.


갑자기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제 소설에서 범죄 에피소드를 연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하다가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전에 이미 말씀드린 것 같지만 주인공이 (살인을 포함한) 불법적 활동에 대해 망설이고 있다면, 역발상으로 그 대상을 '그런 짓을 당해도 싸도록' 바꿔버리는 거죠. 대다수의 정통&안티 히어로물에서 초반에는 주인공보다 악당의 행적에 집중하는 것은 그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형사재판처럼 악당의 소행을 낱낱이 보여준 뒤에 그에 걸맞는 '징계'를 내리는 거죠.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재판은 배심원제(독자)라서, 악당에게 동정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면 무죄로 기울어지기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뭐 십중팔구는 배심원장(작가)에 의해 유죄(응징)가 되겠지만요.


그래서 에피소드 구상의 방향을 약간 바꿨습니다. 예전 글에서 참고문헌이랍시고 이것저것 긁어모았다가 포기했는데, 차라리 저런 범죄물의 몇몇 사건들을 가져다가 '히어로 주인공이 응징하는 쪽으로 재해석하면 어떨까' 했더니 쓸만한 게 제법 많더군요. 해당 작품들은 주인공들이 범죄자라서 내막부터 결말까지 자세히 나와 있거니와, 제 방식으로 재해석하면 원작과는 또 다른 전개가 되면서 겹칠 일도 없으니까요. 물론 원작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고유명사같은 건 전부 바꿔야겠지만 그 정도는 간단하고.


이렇게 방향을 바꾸게 된 계기는 또 있습니다. 기존에는 범죄 주동자들만 죽이면 나머지 부분은 자연히 해소되는 대다수의 범죄물 게임들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팬픽이다 보니, 게임처럼 쳐들어가서 캐릭터만 죽이면 그대로 에피소드가 종료되는 구성을 띠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저런 독서와 자료수집을 하고 팬픽에서 벗어나 제 세계관을 꾸리게 되자 목적 의식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대강 "담당자가 죽었을 뿐 범죄사업 자체는 계속 유지되고 있지 않는가? 그렇다면 괴물 '히드라'처럼 다른 범죄자가 그 자리를 차지하며 계속되지 않겠는가?"하고 말이죠. 실제로 몇몇 안티 히어로물은 이를 주제로 잡고서 '범죄가 끊이지 않기 때문에 똑같이 불법적인 수단으로 맞서는 영웅'을 그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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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소설의 경우 레스터는 일단 명백한 범죄자인 존을 돕고 있으니 공범은 공범이지만 살인은 저지르지 않습니다(뭐 전개가 바뀔 수도 있지만요). 그렇다보니 암살 등 대부분의 실질적인 '작업'은 존이 맡게 될 예정입니다. 이유는 윗 문단과 같죠. 레스터는 비록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대신, 범죄자들의 '사업'을 전반적으로 파악하고 무너뜨리는 작전을 세우는 쪽으로 흘러갈 듯합니다. 물론 존도 경험이 있으니 굳이 레스터의 손을 빌리지 않아도 되겠지만, 빌려야'만' 하는 이유를 좀 더 다듬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현재로서는 '존의 계획에 레스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라고 적어놓긴 했는데, 스포일러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적어놔서 그런지 와닿지가 않더군요. 목적 위주의 관계라서 냉랭해 보이기도 하고. 뭔가 감정적인 이유가 있으면 좋겠는데 특별히 생각나는 게 없어서 고민입니다. "중립적 사고(?)를 지닌 평범한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나도 사람이라는 걸 자각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이것도 이기적인 목적일까요?


한편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건 안 되지만 쏘는 건 괜찮다(?)'는 쪽으로 노선을 잡아볼까 생각중입니다. 과거를 되새겨보니 저는 8~90년대 작품, 자주 언급했던 시티헌터나 건 스미스 캣츠 혹은 홍콩 느와르를 좋아했는데, 자유롭고 활기찬 분위기도 좋지만 악당들을 유쾌 통쾌하게 쳐잡는 내용이 더 좋지 않았나 싶습니다. 요즘 액션 영화를 비롯한 범죄물도 괜찮긴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진지한 느낌이 강해져서 그런지 옛날만큼 통쾌하진 않더라고요. 옛날이었으면 '날 쐈으니 나도 쏜다, 악당이니까 죽어도 괜찮아' 같은 단순무식한 논리가 있었고 실제로 통하기도 했으니. 그래서 중반 이후의 시티헌터처럼 악당들을 지지고 볶고 하면서 어물쩍 넘어가면 괜찮겠다 싶으면서도, 막상 소설의 시점은 2000년대 이후라서 그런지 '시대착오적인 연출이 아닌가' 하는 걱정도 많습니다. 과거의 향수일지도 모르죠. 비록 유쾌한 분위기는 없더라도 레스터가 엄호사격 내지 제압사격(?)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가능하다면 과거 8~90년대의 단순무식한 연출까지 해 보고 싶습니다. 범죄자 걱정이니 사람을 죽인다는 죄책감이니 하고 고뇌할 것 없이, 그냥 머리 비우고 쓰고 읽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Lester

그거 알아? 혼자 있고 싶어하는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고독을 즐겨서 그러는 게 아니야. 사람들한테 계속 실망해서 먼저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는 거야. - 조디 피코

4 댓글

SiteOwner

2020-01-10 21:00:35

말씀하신 역발상, 정말 좋군요.

사실, 그렇게 리버스 엔지니어링을 거치다 보면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탁월한 솔루션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게다가, 문학이란 각종 재판에서처럼 실정법 및 기존 판례에 엄격하게 구속되는 것도 아니고, 작은 부조리한 소재나 상황을 통해서 독자들이 잊고 있거나 간과하기 쉬운 것들, 이를테면 큰 부조리에 눈감고 있다든지 하는 현실을 깨달을 수 있도록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키는 기능을 합니다. 물론 그 파문을 일으킨 물체가 오물이나 독극물이어서는 안되지만, 파문 자체가 금기시되어야 할 이유 또한 없어서 그렇습니다.


죽이지만은 않는다는 방침, 그것도 개연성을 크게 높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철저히 전술 차원에서 보자면, 안 죽이는 편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죽이게 되면 죽인 쪽에서는 일을 쓸데없이 키우는 형국을 연출할 뿐이고, 죽음을 당한 쪽에서는 같은 편의 사람이 죽으면 분노와 슬픔 속에 결집하게 됩니다. 하지만, 적당히 다치게 하면 법적으로도 문제될 일이 적어질 뿐만 아니라, 다친 쪽에서는 다친 사람을 돌봐야 하기에 전력이 분산되는데다 얕은 공포가 넓게 확산되어 결집의 동인이 상대적으로 부족하게 됩니다. 즉 그만큼 집중이 안되다 보니 전투력을 상실시키는 쪽이 더 효과적이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도달합니다. 발목지뢰같은 무기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Lester

2020-01-14 20:54:48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사회비판적으로 묘사하는 게 적잖이 어렵다는 거죠. 가장 무난한 게 안티 히어로 주인공이 '그래 나도 똑같은 악당이다, 그러니 나를 욕해'라고 뻔뻔하게 나가는 건데, 제 주인공(레스터)은 그렇다기보단 소시민 상이라서요. 물론 이 입장을 고수하면 작품이 진행되지 않으니 약간의 안전장치 격으로 안티 히어로 주인공(존)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도 있습니다.


"네 손에 피를 묻히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괴로워해? 네가 놈들의 죽음에 관여했다고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그렇게 괴로워하면 누가 이해하고 용서해 준대? 그런 놈들일수록 죄인인 척 하면서 내심 '나는 착하다'고 자신을 위로하지. 그런 놈들을 보통 '위선자'라고 하지 않나? 막상 자기가 당하면 눈 까뒤집고 달려들 녀석들이 말이야."


--------------


말씀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배트맨'이네요. 철저하게 응징할지언정 살려는 드리는 불살 배트맨 선생. 다만 이쪽은 직접 개발한 하이테크 병기의 힘을 빌리는 거라 그럴듯한데, 제 쪽은 나름대로 현실적으로 한답시고 총기가 등장하는데 죽지 않게 해를 입히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경찰들이 정확한 제압을 위해 사격훈련을 한다던데 약골 레스터도 그런 장면을 넣으면 되나 싶고. 아니면 철저하게 폭력과 배제하고 일상물과 두뇌전으로만 밀어넣어야죠. 총은 못 쏘는데 피하는 건 잘 한다면 괴상하니까. 존도 배트맨식 불살주의로 가는 방안은 불가능해요. 범죄자들끼리의 진흙탕 싸움에선 누군가가 죽어야 이야기가 진전되니...

마드리갈

2020-01-12 22:09:59

글쎄요, 제 해석이 상당히 좁을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이 좀 다른데요.

사람이 사람을 구하는 것도, 죽이는 것도, 뜻하지 않은 행위의 결과로 예의 사안이 발생하지 않은 한은 이유가 없다고 단언할 근거는 없는 것 같은데요. 이를테면, 무대에서 칼춤이 공연되는 도중 관객이 난입하다가 무용수가 든 칼에 찔리거나 베여 죽었을 경우에 그 무용수에 살인의 죄책을 물을 수는 없지만, 일면식 없는 사람이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보고 일부러 떠밀었다면 비록 그 행위가 그 사람의 죽음까지는 미치지 않더라도 미필적 고의가 인정되기에 살인의 미수범으로서는 기소가 가능하겠죠.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과정, 확실히 좋아요.

그리고, 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Lester

2020-01-14 20:58:30

사람을 죽이는 데에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진 않은 것 같은데요. 편의를 위해 정리하자면 "구하는 데엔 이유가 없어도 해치는 데엔 이유가 있다"고 했습니다. 본문에 없는 추가설명을 하자면 사람을 구하는 것은 같은 생명체로서 일종의 원초적인 반응이지만, 해친다는 것은 정신이상 등의 특수 사례를 제외하면 이런저런 동기가 쌓이고 쌓여서 분출된 거라 생각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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