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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가겠다고?”
발레리오가 뒤에 선 메이링을 돌아본다. 평소에는 볼 수 없던, 매우 불안하고도 감정이 북받친 듯한 얼굴이다.
“안돼, 절대 안 돼! 자네 아래에 내려갔다가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 같아?”
“알죠. 하지만 안 가보면 안될 것 같아요. 제가 다 불안하기도 하고...”
“절대 안 돼.”
“저기, 발레리오 씨,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상황이 시급한데...”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뭘 하려는 건지.”
발레리오가 조금 목소리를 가라앉히는 듯 하자, 메이링이 바로 입을 연다.
“제 능력 있잖아요. 저 바이러스들은 다 초능력으로 만들어진 거죠. 그거면 무력화가 어느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안돼.”
발레리오는 더욱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는 프리모를 그렇게 잃었어. 그 외에도 그렇게 내 곁을 떠난 사람들이 많았지. 지금의 예감도 틀리지 않아. 그러니, 안돼. 지금 나가면, 자네를 잃을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쩔 수 없죠...”
메이링은 심란한 표정이다. 그러면서도, 발레리오의 말에는 바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고 방에서 물러난다.
“이해해 주게. 내 오랜 경험에서 나온 결론이야. 그러니까... ”
“하지만, 밑의 상황은 어떡하고요. 보고만 있으실 건가요, 발레리오 씨? 방독면 보내고, 바이러스 제거제 뿌린다고 해서 될 일인가요?”
메이링은 상당히 얼굴을 붉힌다. 발레리오에게 지금까지 이런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다. 발레리오 역시 당혹스러웠는지 대답을 미룬다.
“대답하세요, 발레리오 씨! 그렇게 머뭇머뭇 피하지만 마시고! 발레리오 씨답지 않잖아요!”
“지적 고맙네...”
발레리오는 고심을 거듭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연다.
“그리고 미안하네. 잠시 예전의 아픈 기억이 생각나서,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쳤어. 사실, 아랫사람들만 계속 보내기에는 나도 면목이 안 서지.”
“알겠습니다...”
메이링은 특실을 나서려다가 한마디 더 한다.
“그러면, 발레리오 씨, 설마, 발레리오 씨가 직접 내려가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래. 해야 할 때는 해야 하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고 나서, 발레리오는 문을 열고 특실을 나선다. 그런데, 이미 메이링은 급히 어디론가 뛰어가고 있다.
“자... 잠깐, 메이링 양! 잠깐만...”
라자의 어린 시절은 최악이라고 할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불우했다. 그녀도 이 시절을 ‘암흑으로 가득 찼던 시절’로 기억한다. 또래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던 그녀가 원했던 건 자신을 공격하는 ‘악’들을 모두 제거하고 선으로 가득 찬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신에게 갈구하며 기도해 봐도 상황은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러던 중, 어떤 계기로 라자는 자신에게 바이러스로 시체를 조종한다든가 하는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것으로 바로 보복하고 나자, 자신이 어느 정도는 정의를 실현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던 그녀에게 홀연히 나타난 자가 있었다. 그는 이름을 ‘도미누스 우노’라고 하였고, 자신을 따르면 새로운 세계에 함께 하게 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새로운 정의를 추구하던 그녀는 곧장 그를 따라갔다. 도미누스는 곧바로 라자에게 선물을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베라네였다. 베라네는 그녀의 능력을 강화해 주었고,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힘까지 주었다. 그녀의 능력은 폭발적으로 향상되었다. 그 이전에는 한 마을 정도에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면, 베라네를 사용한 이후에는 한 행성 전체를 사정권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라자가 능력을 100%로 사용해 본 적은 지금까지 딱 한 번, 도미누스에게 반대하는 인구 200만 정도의 한 행성을 바이러스로 통째로 좀비로 만들어 버렸고, 지금까지도 그 행성은 죽음의 행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도미누스 역시 그 능력의 위력을 어느 정도는 예상하였기에, 그가 지정한 때에만 능력을 100%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그 중 첫 번째가 죽음의 행성 사건이었고, 두 번째가 바로 지금, 테르미니에서다. 두 번째로 그녀의 능력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자, 그녀는 이전보다 더한 확신이 들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녀의 정의를 실현할 때라고 생각했다.
“흐, 흐흐흐... 남궁현애였나? 그 얼굴, 이대로 좀비로 만들기에는 아까운데?”
조악하게 만들어진 방독면이 찢기고, 그 사이로 드러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현애의 얼굴을 보자마자, 라자는 완전히 몸을 일으킨다.
“나는 말이야, 이럴 때 왠지 모르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거든. 정의를 참칭하는 녀석들이 자기도 모르게 절망의 신호를 보낼 때 말이지!”
“으... 으...”
라자가 수신호를 보내자,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좀비가 현애의 양팔을 다시 우악스럽게 붙든다. 마치 범죄자를 끌고 가는 형사들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좀비는 얼마 못 가 온몸이 얼어 버리더니, 땅바닥으로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오, 제법 하는군. 하지만 이걸 알아야겠지? 어떻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네 그 조악한 방독면은 이미 갈가리 찢긴 지 오래지. 그리고 네 그 알량한 자존심도 땅바닥에 처박히기 일보 직전이고. 하지만, 너는 왜 지금까지 무사히 숨을 쉬고 있는 걸까?”
라자의 말을 들어보니 그렇다. 현애의 방독면은 이미 찢겨 버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멀쩡히 숨을 쉬고 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듯한 전조증상도 없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그 답을 지금 주도록 하지. 왜, 이런 생각 해 본 적 없나? 거대한 악의 무리 속에서 홀로 정의를 지키는 건 얼마나 고독한지 모를 일이지. 네가 정의가 아님을 알았을 때, 그 고독함은 배신감으로 바뀔 것이고.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아. 그 정의의 길에 동참할 친구들이 함께하니까!”
어느새, 현애의 주위에 둘러싸고 있는 것들은, 바로 좀비들. 그것도 다들 거구에 험상궂어 보이는 인상의 좀비들이다. 경찰 복장, 그리고 불량배들의 복장까지!
“이딴 수작에 당할 것 같냐아아아아!”
몰려오는 좀비들을 돌아본 현애는, 생각하고 뭐고 할 필요도 없이, 양손을 맨 앞에 선 좀비들의 이마에 하나식 짚고 냉기를 주입한다. 맨 앞에 선 좀비로부터, 그 뒤에 줄줄이 늘어선 좀비들이 마치 꼬치에 꿰이는 것처럼 하나둘씩 얼어 버린다. 잠시 후, 편의점의 입구 앞에 늘어섰던 수백 명이나 되는 좀비들은 언제 거기에 서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하얗게 얼어 버린다.
“후... 하...”
바이러스가 들어올 것 같아서, 숨도 제대로 못 돌리고, 다시 앞을 돌아보려는데...
“흐, 흐흐흐...”
어느새, 라자가 현애의 바로 앞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는 되었나?”
한편 그 시간, 고속화도로.
“자, 자라 아티크, 네 표정은 과연 어떻게 변해 있을까?”
도르보는 그렇게 말하며, 승합차에서 허겁지겁 내리는 자라에게서 눈을 뗴지 않는다. 이윽고, 도르보의 예상대로 자라가 승합차에서 내리자...
“이봐, 너 누구냐?”
자라는 예상대로 도르보에게 다가오며 기분이 언짢은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묻고 싶었던 질문이다, 까까머리.”
“뭐야, 너! 말 다 했냐!”
도르보의 예상대로, 자라가 성큼성큼 이쪽으로 다가온다. 자라에 맞춰서, 도르보도 움직인다. 마치 자라보고 대놓고 보라는 듯.
그리고, 자라의 표정이 일순간 바뀐다.
“어...? 어...”
이상하다. 그에게 그동안 느껴지던 초능력의 느낌도 들지 않고, 거기에다가 그가 원하는 대로도 되지 않는다.
“뭐야... 저 녀석, 왜 멈추지를 않아!”
자라의 두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린다.
“분명히, 분명히 내가 저 녀석을 멈추려고 한 건데... 왜 안 멈춰지는 거지?”
“좀 놀랐나 보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자라에게, 도르보가 말한다.
“좀 전에 허공에 고정된 스쿠터를 보고 의심이 들지 않았겠지. 하지만 저 스쿠터를 고정해 놓은 시점이었기에, 내가 네게 의심받지 않고 이렇게 능력을 가져올 수 있게 되었지. 좀 주변을 잘 살피시지 그랬나?”
순간 자라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하나 있다.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 경쟁하는 업체의 직원 중 한 명과 시비가 붙었는데, 그와 비슷한 사물 고정 능력을 사용했다. 알고 보니 그의 능력을 복사해서 그를 골탕 먹이려던 것이었고, 다행히 간파가 빨랐던 자라는 그 경쟁업체 직원을 따돌리고 의뢰를 무사히 완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느낌이 다르다. 손안에 항상 있던 불이 꺼진 것 같은 좋지 않은 느낌. 도대체, 뭐란 말인가...?
“뭐냐, 네 녀석 도대체 무슨 수작을 꾸미는 거냐!”
“음, 그걸 내가 굳이 말해 줘야 하나?”
도르보는 일부러 앞에 선 자라를 도발하려는 듯 말한다.
“네가 직접 알아보는 편이 더 좋을 텐데. 그리고 너는 이미 그걸 느꼈을 것이고.”
그렇게 말하며 도르보는 일부러 자라가 보라는 듯 큰 동작으로 자라를 향해 걸어온다.
“이 자식, 멈춰...”
하지만.
자라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도르보는 멈추기는커녕, 자라가 보라는 듯 계속 걸어온다. 당황했는지, 자라는 땅바닥에 짚이는 무엇이든 주워서 도르보를 막아 보려고 한다.
“그렇게 해봤자 소용없어. 네 능력은, 내게 온전히 넘어왔으니까!”
“뭐... 뭐...?”
그렇다. 자라의 손바닥에서 불꽃이 켜지지 않는 듯한 느낌도 그것이었다. 뭘 하려고 해도, 자라는 고정 능력을 사용할 수가 없다!
“내게 참 유용한 능력을 줬군, 자라 아티크. 안 그런가?”
“이 자식...”
“네가 준 이 능력, 이럴 때 써야지. 네 녀석들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라!”
그리고 그 시간, 호텔 아래 번화가의 편의점.
“그래... 그렇게 몸부림을 쳐 봤자 돌아오는 건 뭐지? 지금 네 앞에 있는 네가 좀비가 되는 운명, 바로 그것이지.”
바로 현애의 등 뒤에 붙은 라자의 목소리가, 마치 지옥의 불길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나는 좀 더 특별하게 해주고 싶은데? 지금 이 도시에 걸린 내 능력을 전부 거두어들여도, 네가 지금 한번 좀비가 되면, 영속적으로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거지. 어때, 멋지지 않나? 응?”
“......”
자신을 돌아보지도 않고 말이 없는 현애를 보고, 라자는 다시 한번 말한다.
“어차피 방독면도 없어졌겠다, 좀비가 되는 건 시간문제야. 그리고 이미 바이러스는 네 주위에 살포했다고!”
가만 생각해 보니 그렇다. 몇 초 전부터, 발끝의 감각부터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눈이 흔들리려는 듯한 현애를 보고는, 라자가 어깨에 손을 얹는다.
“길어야 5분이지. 그 안에 네가 뭘 할 수나 있으려나?”
“5... 5분이라고?”
“그래. 내 충실한 종이 되기까지 걸리는 시간, 단 5분!”
등뒤에서 들려오는 라자의 목소리가, 그렇게 스산하게 들려올 수 없다.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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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SiteOwner
2021-12-29 19:51:53
발레리오도 메이링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고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직감하고 있지만 행동의 구체적인 양식은 다르군요. 두 사람의 각기 다른 복안이 모두 적중해야 할텐데, 과연 그 복안이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라자에게 손길을 내민 도미누스 우노(Dominus Uno)...하나의 주인이라는 의미의 라틴어군요. 그리고 그 도미누스 우노의 힘의 원천이 베라네였고 그 베라네를 통해 행성 하나를 아예 지옥으로 만든 일도...끔찍합니다. 이제는 그의 힘과 뜻을 이어받은 라자가 이전부터 체득한 능력을 조합하여 정의를 실현한다...글쎄요, 이런 행위가 어떻게 정의일 수 있는지는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자와 현애가, 그리고 자라와 도르보가...
두 싸움에서 각각 누군가는 살아남고 누군가는 죽어야겠지만, 죽어야 할 사람에 현애가 포함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시어하트어택
2021-12-31 19:00:59
라자 나름대로는 정의겠지만, 그것은 비뚤어진 정의죠. 어쩌면 자신에게 반하는 모든 것들을 악으로 여기고 그것들을 제거하는 것이 곧 정의의 실현이라고 여겼을지도요.
사실 도미누스 우노라는 이름은 그냥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깊게 생각하고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그 정체는... 머지 않아 드러날 겁니다.
마드리갈
2021-12-30 12:08:34
혼란 그 자체네요. 그리고 발레리오도 메이링도 대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모르겠네요.
생각한 바가 있으니 그렇게 행동을 시작한 것이겠지만, 그래도 밖에서 보는 입장에서는 예측이 되지 않고 있어요.
사람을 좀비화시키는 바이러스도 효력이 있는 듯 없는 듯 있는 듯...현애가 바로 좀비화되지는 않았지만 몸이 이상해지고 있기도 하고...
베라네의 위력은 정말 엄청나네요. 그리고 나쁜 방향으로 상황을 몰고 가는 것도 규모가 행성급이고...
왜 비인부전이라는 말이 있는지가 제대로 실감났어요.시어하트어택
2021-12-31 19:03:15
처음에 좀비를 대량양산한 행성보다 더한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라자는 멈추지 않겠지요. 그녀의 수령이 말했듯 그들에게 반하는 자들은 설 땅이 없어지게 되고, 그것이 천국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