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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초 만에 결심이 선 그가, 다시 몸을 돌려서 아케이드 쪽으로 향하려는 바로 그때.
“오, 여기 계셨구만?”
누군가가 조나의 앞을 막아선다. 이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조나는 들은 적이 있고, 알고 있다. 며칠 전 그가 큰 굴욕을 당했을 때, 그때도 있었다. 테르미니 퍼스트의 크루 중 하나, 바리오가 아닌가. 그리고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은, 현실이 되고 있다. 어느 정도 충돌은 예상했지만.
“그때 감기에 걸리고서 지금은 다 나았나 봐?”
“닥쳐라, 이레시아인. 네가 지금 내가 가는 길을 막고 있다고.”
조나는 기선 제압을 시도하지만 쉽지 않다. 눈을 치켜뜨려고 해도, 키가 더 큰 바리오의 목덜미 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는다.
“태양석을 가지러 여기 왔나 보군?”
“아, 정확히 아네. 우리 단장이 신신당부했어. 너희 같은 녀석들에게 절대 태양석을 넘겨 주면 안 된다고.”
“아, 그래? 그런데 어쩌지? 너희 단장이라는 녀석은 지금 어디서 꾸물거리고 있는 거냐? 어디 놀러라도 갔냐? 그 김수민인가 뭔가 하는 녀석은.”
바리오가 조나의 성질을 돋우자, 조나는 금세 얼굴이 붉어진다.
“너... 너 이 자식, 말 다 했냐!”
사실 바리오도 모르는 건 아니다. 수민이 파디샤라는 남자와 싸우다가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은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전해졌다. 조나보다 빠르지는 않더라도, 테르미니 퍼스트의 크루들은 곳곳에 있는 정보통들을 통해 수민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비단 그것뿐만이 아니라도, 이 도시의 업자들의 연결망은 생각보다 촘촘하다. 따라서, 바리오가 지금 조나에게 하는 말은 조나의 관심을 태양석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기 위함이다.?
“네가 뭐라고... 우리 단장은 태양석 때문에 가족을 잃었고 끝내는 자기 목숨까지 바쳤어. 너 따위와는 살아온 결이 차원이 다르단 말이야. 그런 단장이 살아온 길을 네가 감히 모욕이라도 하겠다는 거냐.”
“왜? 그래서 어쩌라고? 결국에는 얻지 못했잖아?”
“그래서 내게 부탁한 거다. 내가 결국에는 태양석을 가져갈 거라고. 네 녀석이나 저기 파디샤라는 녀석 같은 방해자들을 모두 제치고.”
그렇게 말하며 조나는 또다시 은근히 바리오를 도발해 보려고 한다. 자세도 고치고 입도 꽉 다문다. 목도 빳빳이 펴고 보란 듯이 고개를 든다. 평소에는 해 보지도 않았던, 누군가를 지그시 노려보는 것도 할 때는 해야 한다. 뭔가 없던 힘이 마구 솟구쳐 오르는 듯도 하다. 예전이라면 소심하게 사람들의 눈치를 피해 가며, 동료들에게도 무시를 당하던 그였건만, 왜인지 모르게 오늘은 좀 다르다. 자신감이 붙는다. 이상하게도. 거기에 대응하여, 바리오의 몸에서 점점 초능력의 기운이 올라오는 듯하다. 조나는 오히려 그걸 노린다. 바리오가 벌레를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 능력을 조나에게 쓰게끔 유도해서, 피드백을 가한다. 성공한다면 벌레들은 죄다 바리오에게 달려들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방해꾼을 하나 치우고, 사건이 벌어지는 현장으로 간다. 그것이 조나가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후, 너도 어쩔 수 없군.”
점점 바리오에게서 퍼져 나오는 기운이 그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이건 분명히, 벌레를 불러오는 것이다. 그것도, 수 없는 떼로 말이다. 벌레들이 조나에게 향하게 한다고 해봤자, 피드백을 시키면 그만이다...
“조나 피츠조지라고 했나?”
“......”
“너, 앞의 나를 신경 쓰느라 더 중요한 건 신경 쓰지 못하나 봐?”
“더 중요한 것이라니.”
“초능력을 쓰면 너한테만 쓰는 줄 알았냐?”
“뭐...?”
“하긴, 피해의식 때문에 누가 조금만 튀는 행동을 보여도 너는 곧바로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지. 네 능력도 그래서 생긴 능력 아닌가?”
“뭐...?”
어렵게 억누르고 있던 그의 열등감이 다시 그의 얼굴을 비집고 나오기 시작한다. 어찌어찌 억눌렀는데 말이다. 하지만 바리오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조나는 지난 수년간 도피 생활을 하면서 자신감이 많이 위축되었다. 도피 생활을 청산한 이후에도 한동안 대인기피증에 시달릴 정도였고, 그래서인지 사람들을 만나면 눈을 좀처럼 마주치지 못했다. 수민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도 수민에게서 발산되는 강력한 기운 때문에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곁눈질로 겨우겨우 봤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슈뢰딩거 그룹에 끼지 못할 뻔했지만, 그의 능력을 알아본 수민 덕분에 그들 사이에 낄 수 있었다. 하지만 좀처럼 남들 속에 끼어들지 못하는 조나의 성격 때문에 동료들에게도 무시당하는 게 꽤나 자주 있었다. 특히 아즈탄이나 나오미는 조나가 매표원 일을 하고 사무실로 돌아오면 마치 조나를 외부인처럼 무시하는 게 거의 일상에 가까웠다. 그래서 위축되었고, 제10호 사원에서 테르미니 퍼스트를 저지하는 데 실패하면서 더더욱 위축되었다. 하지만 수민은 실패하고 돌아온 조나를 질책하거나 하지 않았고, 오히려 자신감을 실어 주었다. 그 덕분에 모처럼 자신감을 되찾고 자세조차도 달라졌던 조나였다. 하지만 지금 모처럼 찾은 자신감에 위기가 닥쳤다...
“바로 어제였지. 솔직히 네가 아니었으면 그 질라니라는 여자를 막을 수 없었어. 그때만큼은 고마움이라도 표하고 싶었어. 그런데 우리 크루들과 마주치자마자 네가 바로 한 게 뭐였지? 도망갔지. 눈도 안 마주치고서.”
“그랬지...”
“바로 그거야. 그 두려움 때문에, 너는 큰 그림을 못 본다고.”
“뭐, 좋아...”
조나는 당장 끓어오르는 감정을 누르고, 옆으로 비킨다. 그러면서도 무슨 생각을 했는지, 바리오를 향해 은근히 독기 오른 말을 한다.
“지금 네 녀석이 뭘 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태양석이 결국 너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것만은 내가 장담할 수 있지. 너희가 태양석에 목숨이라도 바쳐 봤나?”
“그래서? 손에 살짝 스치기라도 해 보긴 했고?”
“......”
조나는 잠시 말이 없다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어느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이윽고 조나의 눈에도 보인다. 수없이 많은 벌레떼가 어딘가에서 바리오의 앞으로 날아오더니, 곧바로 앞쪽 방향으로 다들 방향을 트는 모습이. 틀림없이 바리오가 소환한 벌레들일 것이다. 특정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벌레들이 향하는 방향은, 과연 어디인가?
“이 상황에 벌레들을 특정 방향으로 보내는 것이라면...!”
조나는 그게 태양석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어쩌다가 직원 통로의 구석으로 날아가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애타게 찾는 것이라면 그것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그것이, 저쪽에 있는 건가!”
“어, 엇...”
주먹이, 곧장 현애를 향해 날아온다. 그것도 그냥 주먹이 아니다. 남자의 모든 힘을 주먹 안에 담아서 내지르는 게 확실하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 현애의 바로 앞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공간의 왜곡이 보일 일이 없을 테니.
피할 방법이 없다, 이건. 한번 맞고 반격을 노릴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건 반격을 노리기에는 너무 센 한 방이다. 맞고 목숨이 붙어 있다면 그것이 기적에 가까울 정도로 말이다.
“이것이, 주제도 모르고 내게 대항한 자의 결말이다.”
남자의 입이 움직임을 마치자마자, 그의 주먹이 곧바로 정면을 향한다. 현애는 눈을 질끈 감는다. 눈을 다시 뜨면 뭐가 눈앞에 보일지 짐작조차 되지 못한다. 밑도 끝도 없는 공포감이란 게 이런 건가 보다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바로 그때...
퍽-
의외로, 부드러운 촉감이다. 아까 전의 살의가 느껴지는 주먹의 느낌은 아니다, 확실히. 어떻게 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주위를 둘러싼 공기는 분명히 죽어서 가는 사후 세계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격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분명히 복통이 일어날 정도의 통증이지만, 복부가 뚫렸다든가 아니면 심한 멍이 들었다든가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엄청난 이질감마저 들 정도의 감촉이 느껴지고 있다. 이건 마치, 타격이 가해진 부위가 가느다란 실로 해체되어 그 부위로부터 일부러 밀려난 것 같은 느낌. 그렇다면...
“간발의 차야... 순간적인 판단이 없었으면...”
옆에서 들리는 건 발레리오의 목소리. 그렇다면, 이건...
“바... 발레리오 씨?”
“그래. 하... 잘 싸워 줬어. 우리 형제가 해야 했던 일이었는데...”
“괜찮으세요? 아까 전에 싸우느라 몸이 말이 아닐 텐데...”
“하, 그것참 눈물 없이 보기 힘든 풍경이군. 용케 내 공격을 피했는데 저렇게 여유롭게 서로를 챙겨 주다니.”
남자가 조소하며 다시 이쪽으로 오고 있다.
“이번에는 그냥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라.”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의 시간 동안, 남자는 어느새, 조금 전보다 더욱 강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현애와 발레리오, 그리고 비토리오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순간’은 알아차리지 못한 새에 찾아오기 마련이지. 지금도 그렇다!”
남자에게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없다. 현애는 아직 반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고, 발레리오 역시 이제 막 상황을 파악했기에 움직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이다. 비토리오 역시 마찬가지다.
“후회해도 이미 늦은 시간이다. 이것으로 너희의 운명은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 살의에 넘치는 에너지가 세 사람을 곧바로 향하고 있다. 찰나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남자가 세 사람을 한 방에 없애 버리기까지는!
하지만, 그러려던 찰나, 남자의 움직임이 둔해진다. 어떤 힘이 남자를 사방에서 붙들어 매려는 듯한 느낌. 거기에다가 마치 빙하 한가운데 서기라도 한 것처럼 확 추워진 주위의 공기.
“아... 아뿔싸!”
큰일이다. 점점 얼어 가고 있다. 남자의 정장 상의와 하의, 그리고 머리 등에 묻은 분수대의 물이 점점 얼어 가면서, 남자를 점점 짓누른다. 이를 맞부딪칠 정도의 추위도 추위거니와, 둔해지는 움직임 때문에 그의 능력 사용에도 제약이 가해진다!
“무슨 짓을 한 거냐!”
“뭘 했기는, 조금 전 분수대에서 상자를 꺼내려고 그렇게 안간힘을 쓰던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혼자 여기까지 튀어오고, 거기에다가 여기서 혼자 난리를 피우고 한 것까지, 모두 네 녀석이 한 거지, 나는 그냥 살짝 내 힘을 얹어 줬을 뿐이야.”
“하, 하하하...”
남자는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네 녀석, 제법이야.”
남자가 그렇게 말한 그 순간, 어느새, 남자를 덮어 가던 얼음은 다 사라져 버렸고, 춥다는 내색도 하지 않는다. 뭔가 뒤틀려 버린 듯한 불길한 느낌은 덤이다. 분명히 남자의 온몸에 묻은 물을 이용해 확실하게 얼리는 데 성공했는데, 어떻게 된 일인가?
언젠가는 사랑받는 작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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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댓글
마드리갈
2022-02-13 21:55:28
가장 중요한 순간에는 의외로 하찮아 보이는 요소가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고 하죠.
저 상황에서의 도발이라든지, 조롱이라든지...
뭔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라면 저도 겪어본 적이 있어요.
요즘에는 겪지 않지만 전에는 의식을 잃고 쓰러지거나 전신이 마비되는 일이 드물게 있었는데 지금의 저의 상태를 알 수 없는데 뭔가 어딘가 딴 세상에 있는 것 같다가 갑자기 현실로 돌아와 있는...
그때의 공포가 다시 생각나다 보니, 파디샤가 결코 유리한 입장에 있는 게 아니라는 게 여실히 보이네요.
시어하트어택
2022-02-13 22:42:57
그래서 중요한 순간에는 늘 긴장되는데, 그걸 흩뜨릴 수 있는 요소가 생기면 자신도 모르게 거기에 신경이 쏠리게 되죠. 멀리 갈 것도 없이 저 역시 그런 중요한 순간마다 겪어온 일들입니다. 그럴 때는 항상 왜인지 모르게 감정적이게 되었고요...
SiteOwner
2022-03-26 16:28:53
역린을 건드리게 되면 누구든지 절대로 아무일도 없을 수가 없겠지요.
김수민의 죽음을 알면서도 그를 언급한다든지 그의 낮은 자존심을 건드려 일부러 조나를 도발하는 바리오에 대해 조나가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겠지만, 문제는 조나가 바리오를 확실히 제압할만한 능력이 있는지 그게 문제입니다.
현애의 냉기 능력은 정말 잘 운용되어 왔고 성공적이라는 게 입증되었지만, 과거의 운용기록이 미래의 수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지요. 이런 게 진짜 위기입니다.
시어하트어택
2022-03-27 21:03:54
정말 한치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저런 상황에서 순간적인 감정에 일희일비하게 된다면 더 큰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그 판단에 대한 대가는 그 자신이 오롯이 받기 마련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