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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은 숨이 턱에 차 오르도록 달렸다. 달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둑해진 밤인데도 여전히 교복을 입은 소녀는 기이하게도 학원가의 조명이 드문드문해지는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어둠보다도 무서운 것이 뒤에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이 소녀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것도 잠시, 힘차게 뻗던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녀가 잠시 멈춰서는가 싶더니, 뒤를 돌아 아무것도 없을 허공을 향해 냅다 외쳤다.
"저리 꺼져!"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희미한 웃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하영에게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는 위협적으로 허공을 휘저으며 어금니를 꽉 깨문 뒤, 다시 앞을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끈질긴 놈을 하필?'?
평소대로라면 절대 겪지 않았을 일이었다. 몸을 차지하려 드는 귀신들을 만난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 빈도는 하영의 평생동안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하영은 언제나 부적을 가지고 다녔기에, 그런 귀신들은 잠시 주변을 맴돌다 혀를 차는 소리를 내며 사라지곤 했다.?
그러던 오늘 낮, 학교에서 부적이 망가졌다. 처음에는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낮에는 귀신이 잘 안 나오니, 집에 돌아간 뒤 여분을 꺼내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집에 귀가해보니, 어째서인지 부적이 들어있는 상자를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학원 갈 시간이 촉박해지자 하영은?
생각했다. 하필 부적이 없는 단 하루, 잠깐 밖에 나온 사이에 사람 몸을 노리는 영의 눈에 들어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안타깝게도 확률과 통계는 하영의 장기가 아니었다.
신이 있다면 멱살을 잡고 따지고 싶었지만, 달리느라 지쳐서 그럴 힘이 있을 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영의 발걸음이 점점 느려지는가 싶더니, 걷는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자, 잠깐?"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하영이 천천히 뒷걸음질 치다, 등이 벽에 닿는 느낌에 몸서리를 쳤다. "나 집에 가야 돼. 지금 집에 가면 열 시가 넘어. 과제도 해야 되고."
웃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면서, 음산한 기운이 몸을 스쳤다.
"뭐? 뭐가 필요한지 말을 좀 해봐!"
웃음 소리는 조금도 잦아들지 않았다. 하영은 단념한 채 자신에게 닥칠 결과를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듯이, 눈을 꽉 감은 채 양 팔로 몸을 감쌌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의 한 점을 시작으로 팔다리 끝까지 점점 퍼져 나갔다. 하영은 소름 끼치는 감각에 다리가 풀려 주저앉았다. 웃음 소리가 점점 커지며 사방을 둘러싸더니, 곧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이제야 몸을 얻다니. 이 날 만을 기다렸어.’ 상기된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낭랑히 울려퍼졌다.
‘그것도 요즘 같은 때에 이렇게나 귀여운 그릇이 부적도 없이 다니다니! 참 운도 좋지. 어디 보자, 넌 누구니…’
웅웅거리는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바닥을 짚고 있는 데도 불구하고 시야가 빙빙 돌았다. 하영은 뱃 속 깊은 곳에서 울렁이는 느낌이 식도를 타고 역류하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팍의 명찰이 뒤집힌 채 흐릿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정…하…영. 이름까지 맘에 쏙 들어. 그러면 이제 슬슬 움직여 보실까.”
머릿속에서 울리던 목소리가 고요해졌다. 하영은 고개를 숙인 채 그대로 있었다.
“뭐지…? 왜 몸이 안 움직여…?”
목소리는 짐짓 침착한 듯했지만, 아까보다 조금 더 떨리고 있었다. 어색한 침묵이 얼마간 더 이어졌다.
“이게 뭐야…? 왜 이러는 거지? 무슨 일이야?”?
하영은 천천히 고개를 든 뒤, 배에 힘을 단단히 준 채 벽을 짚고 일어섰다. 메스꺼움을 최대한 견뎌보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문 채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 뭐야, 왜 몸이 내 맘대로 안 움직여? 분명 제대로 들어왔는데!”
“나가.” 하영의 나직한 말에 분노가 묻어나왔다.
“대체 무슨 일이-“
“당장 내 몸에서 나가!” 하영이 이를 갈며 주먹을 꽉 쥔 채 뒤의 벽을 힘껏 내리치자, 머릿속에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벽의 요철에 손가락 관절이 쓸려 피가 배어 나왔다. 속이 뒤틀리는 듯한 느낌에 하영의 숨이 가빠졌다.?
비명소리가 몸 속을 날뛰며 장기를 하나하나 쥐어짰다. 하영이 아랫입술을 깨물며 한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었다. 피가 거꾸로 솟아 정수리로 모여 이글거려 터지기 직전, 감싸쥔 손에 있는 대로 힘을 주었다.
정신이 멍해지는 듯한 괴성이 머리에서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영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듯했으나, 고통에 겨운 신음 소리만이 조용히 귓가에서 맴돌 뿐이었다.
하영은 소리가 들리는 위치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리… 꺼져.”
신음소리가 천천히 멀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조용해졌다. 하영은 아까 벽에 부딪힌 손을 들어 상처를 살폈다. 상처의 피가 굳어 피가 맺힌 채로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손가락이 상처에 닿자 쓰라림으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아오.”
하영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널브러진 가방을 주워들어 먼지를 턴 뒤 자신이 온 길을 되짚어 걸어갔다. 평소보다 집까지 가는 길이 훨씬 멀게 느껴졌다.
***
현관문에 달린 작은 풍경이 울렸다.
“다녀왔습니다.”
“좀 늦었구나.”
불필요한 요소는 티끌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 가구 배치가 눈에 들어오는 가운데, 새치가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하는 머리를 가진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었다. 텔레비전이 틀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세상 심각하게 찌푸린 미간으로 회색 바탕 위의 활자에만 관심이 가 있는 듯 했다.
인기척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하영도 마찬가지로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방으로 직행했다. 깔끔함의 극치인 거실과는 달리, 하영의 방 책상 위에는 가방 안에 있던 교과서와 공책 더미가 흐트러져 쌓여 있었고, 서랍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은 채 내부의 혼돈을 보여주고 있었다. 학원에 가기 전에 바쁘게 무언가를 찾은 흔적이 역력했다. 하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서랍 안의 학용품을 원래 위치로 정돈했다. 학용품이 하나하나 자리를 찾아가자, 아까 전보다 네모난 공간이 뚜렷이 드러났다. 물건을 정리하던 하영의 손길이 빈 자리 위에서 문득 멈췄다.
설마, 아니겠지. 하영의 턱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하영의 아버지는 미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언제나 불편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언젠가 한 번 하영이 부적을 챙기는 것을 보고 그런 물건을 들고 다니지 말라고 꾸짖기도 했었다.?
될 수 있는 한 표정을 차분히 유지한 채로, 하영은 방문을 열고 아버지를 불렀다.
"아빠, 혹시, 음. 제 책상 서랍에 있던 조그만 상자 보셨나요?”
"버렸다." 아버지는 여전히 신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여서, 순간 하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네?"?
"우리 집에 그런 괴력난신은 필요 없다." 당연한 걸 묻기라도 했다는 듯, 아버지는 낯빛조차 변하지 않았다.
"하영아. 그런 미신 따위에 휘둘리지 마라. 그냥 쓸 데 없는 잡동사니일 뿐이야."
머릿 속 깊은 곳에서 표정을 유지할 인내심이 점점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하영이 따졌다.?
"그런 이유로 제 방에서 제 물건을 저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버리시는건?"
"네 방이 워낙 난잡했어야지."
“갖고 있다고 누가 다치는 것도 아니잖아요.”
살짝 정곡을 찔린 듯, 하영의 목소리 끝이 조금 잦아들었다. 확실히 그녀는 아버지에 비해선 방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아버지와 같이 살게 된 이래로, 그녀는 몇 번이고 방 안 물건 정리로 잔소리를 수도 없이 들었다. 특히 부적은 미신을 싫어하는 아버지에게는 그야말로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평소에도 몇 번이고 방을 정리하지 않으면 물건을 버리겠다는 협박을 몇 번이고 들어왔지만, 그걸 실행으로 옮긴 날이 하필 오늘이었을 줄이야.
문득 하영의 생각이 상자 옆에 있던 목걸이에 미쳤다. 상자와 함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물건이었다. 설마?
“혹시 목걸이도 버리셨나요?”
"부적은 다 버렸다."
"그건 어머니 유품이었다고요! 어떻게 제 방 물건을 물어보지도 않고 막 갖다 버릴 수가?"
"그 망할 여편네 얘기는 꺼내지도 마!"??
하영이 그대로 얼어붙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하영아 미안하다. 내가?"
"말 걸지 마세요."
하영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은 뒤, 그대로 침대에 널브러졌다. 멍하니 천장을 보며 자신의 분노를 삭이려 해봤지만, 오히려 속에 울화만 치밀어 올랐다. 하영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메시지 앱을 켰다. 당장 이야기를 털어놓을 만한 상대가 필요했다. 연락처 목록에서 잠시 고민하던 손가락이 이내 한 이름 위에 멈췄다. 하윤성. 하영의 소꿉친구이자, 자신과 같은 그릇이었다. 당장 내일 필요한 부적 하나쯤은 빌릴 수 있겠지. 하영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움직이더니, 전송 버튼을 눌렀다.
‘지금 바빠?’
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울렸다.
‘아니. 왜?’
‘잠시 얘기할 시간 되나 해서. 아빠가 내 부적을 다 버렸어’
잠깐의 정적 뒤에,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방 안에 있다가 내가 연락하면 1층으로 내려와.’
***
아파트 단지 앞 놀이터 정자에서 하영과 윤성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난 아빠가 정말 다 버릴 줄은 몰랐어. 엄마 목걸이도 있었는데." 하영의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가벼운 눈물기가 섞여있었다.
"설마 오늘 학원도 부적 없이 간 거야?"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성의 눈이 놀라움으로 크게 뜨였다.
"세상에. 별 일 없었어?"
"있었어."
"오, 이런…"
"돌아오는 길에. 도망치려고 해봤는데… 내가 숨이 차서. 잡혔지 뭐야."
“그 뒤로 뭐라도 먹었어?”
“어, 음, 아니.”?
하영이 하교 뒤에 먹은 거라곤 학원 시작하기 직전에 편의점에서 사 먹은 삼각김밥 하나뿐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채자마자, 허기가 일순간에 몰려 왔다. 윤성이 초콜릿 바를 건넸다.
“자. 이거라도 먹어. 아까 산거야. 나 먹으려고 산거긴 한데, 별로 안 고파서.”?
“…고마워.”?
하영은 초콜릿 바 포장을 뜯은 뒤에, 한입 크게 베어물었다. 평소에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한 입 한 입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엔 단 걸 좀 먹어줘야 돼. 에너지 소모가 장난 아니야.”
하영이 초콜릿 바를 우물거리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더니, 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이 시간에 멀쩡히 있는 걸 보니, 귀신들이 딱히 과한 걸 원하진 않은 모양이네. 다친 데도 없어 보이니 다행이야.” 윤성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영은 초콜릿 바를 우물거리며 윤성을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영에게 몸을 노려진 건 분명 상당히 불쾌한 경험이 맞았으나, 윤성은 하영이 훨씬 과한 일을 당했다고 단정지은 듯하였다. 두 눈에 걱정이 가득한 채로, 윤성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빼앗긴 거야? 별 일 없었으면 좋겠네.”?
“아, 그렇게 걱정할 필요도 없어.” 하영이 웃었다. “길어봤자 몇 분이었어. 내가 쫓아냈거든.”
하영의 말을 듣자마자, 윤성의 표정에 드러난 걱정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뭐, 정말? 어떻게?”
“’어떻게’라니, 무슨 소리야? 꺼지라고 하니까 바로 튀어 나가던데.”
“우와.” 윤성은 입이 벌어진 채로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너 진짜 뭐가 있나 봐.”
하영은 당혹한 기색이 역력한 채로 되물었다. “응? 별 일 아니잖아. 너도 할 수 있지 않아? 오히려 네가 더 잘할 걸?”?
“난 못해. 아니, 살면서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뭐? 잠깐, 네 어머니도? 어머니는 이 쪽 프로시잖아.”
윤성의 어머니는 상당히 영험한 무당이었다. 윤성의 영감도 있지만, 그가 하영을 어렸을 적부터 도와줄 수 있던 건 어머니가 가르쳐 준 영적 관련 지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하영은 윤성을 통해 주워들은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그런 하영이 할 수 있는 걸 윤성의 어머니가 못 하신다니,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었다. 하영은 갸우뚱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윤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굿을 할 때 쓰이는 무구가 괜히 있는 게 아니야. 물론 신과 영을 불러모으고 시선을 끌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귀신에게 완전히 몸을 빼앗기지 않은 채로 있으면서 원하는 걸 해내는 거거든. 너처럼 호통만으로 쫓아낼 수만 있다면 무구의 8할은 필요 없을 걸.”
“진짜? 8할이나?”
“솔직히 8할은 좀 너무 부풀리긴 했어.” 윤성이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나중에 시간이 된다면 어떻게 한 건지 알려줘. 너만 괜찮다면.”
“당연하지!”
“몇 년간의 가르침 끝에 드디어 나도 뭔가 받을 게 생겼네.”
“흥. 이제까지 사줬던 간식은 맛있게도 먹어놓고선.”?
하영이 입을 비죽거리며 눈을 가늘게 뜬 채 윤성을 흘겨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윤성이 가볍게 웃었다. 하영은 짐짓 토라진 체하다가, 무엇인가 생각난 듯 표정을 원래대로 되돌렸다.
“잠깐만… 그럼 너 부적 없인 어떻게 밖에 나가는거야?”
“안 해. 해본 적 없어.”
예상치 못한 윤성의 단호함에 하영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어, 만약 부적이 없는데 학교를 가야 한다 거나, 하면?”
“그럼 결석하고 방에만 하루종일 있어. 예외는 없어.”
“그치만?”
“일단 완전히 빙의 당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뭐 하겠다고 밖에 나가봤자 내 몸을 빼앗기면 그게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평소에 귀신들이 많이 없잖아… 그렇지 않나?”
“너 오늘 학원 끝나고 나오자마자 바로 쫓기기 시작했지? 부적만 없으면 바로 눈치채. 몸을 얻을 수만 있다면 뭐라도 할 놈들이고.”
“알았어. 어휴. 여분으로 쟁여 둔 거마저 상자 째로 아빠가 던져버렸는걸. 어떻게 등교할 수 있을지 나도 모르겠다. 으.”
“그럴 줄 알았지. 자. 하나 가져왔어.”
윤성이 주머니에서 무언가 꺼내더니, 하영의 손에 쥐어 주었다. 하영이 손을 펴자 안에 유리로 만들어진 동그랗고 파란 펜던트가 있었다. 파란색 바탕 가운데에 있는 하얗고 파란 동심원이 마치 눈동자를 연상하게 했다.
“이게 부적이야? 좀 특이한 목걸이처럼 보이는데.”
“그치? 네 아버지도 똑같이 생각하실 거 같아서. 그럼 버리거나 하시지 않을 거 아냐.”
“감쪽같이 속으실 거 같은데. 적어도 한국서 비슷한 건 본 적 없어. 이게 뭐야?”
“나자르라고, 터키어로 “악마의 눈”이라는 뜻이래. 그 지역의 호신부적이야. 다른 부적만큼의 보호 효과는 있더라.”
하영이 잠시 손가락으로 나자르를 집은 뒤 이리저리 돌려 보다가, 다시 윤성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예쁘다. 이런 걸 어디서 얻은 거야?”
“예전에 어머니 친구분께서 선물로 주셨어. 터키 여행 중에 기념품 가게에서 사셨대.”
“그런 걸 나한테 막 줘도 돼?”
“난 부적 많으니까 괜찮아.”
“그런 뜻으로 물어본 게 아니잖아.” 탓하는 듯한 목소리와는 달리, 하영은 미소짓고 있었다.
“고마워. 신경써줘서.”
“부적은 그릇에겐 필수야. 꼭 챙기고 다녀.”
하영이 고개를 끄덕인 뒤, 나자르를 목에 걸었다. 유리의 묵직함이 끈으로 전해져왔다. 하영은 기지개를 켜며 마루에 등을 대고 누웠다. 유리 펜던트가 교복 블라우스의 누름돌이 되었다.
“아우, 빨리 독립하고 싶다. 이런 걱정 안 하게.”
“그래도 대학 보내주신다 하셨잖아. 합격하면 바로 자취방 구해서 나와.”
“걱정 마. 붙기만 하면 코 앞이어도 바로 짐 싸서 나갈 거니까.”
윤성이 가볍게 웃었다.
“나도 가려고. 대학.”
하영이 놀란 듯, 벌떡 일어나 앉았다. 어렸을 적부터 윤성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가업을 이을 거라고, 자신도 그릇인 데다가 어머니가 무당이니, 어머니의 신을 이어 모시는 건 자신의 팔자라고 늘 말하곤 했다. 그런 윤성이 대학에 가다니, 그녀에겐 내심 놀라우면서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진짜? 너 전에 안 갈 거라고 했잖아. 엄마 따라 무당 될 거라면서.”
“엄마가 신병 앓기 전에 하고 싶은 건 다 해보라셔. 무당 되면 밖에 돌아다닐 시간도 없다고.”
“잘 생각했어. 12년을 공부로 고생했는데 대학교는 가 봐야지! 학교 캠퍼스 잔디밭에 뒹굴어 보기도 하고, MT랑 축제도 가보고.”
“무슨 대학교가 놀러 가는 곳인 줄 알아?”
“적어도 입시보단 낫겠지. 근데 뭐 전공 할거야?”
윤성이 잠시 생각하는 듯 턱을 짚었다.
“글쎄, 민속학과… 라는 데가 있던데. 괜찮아 보이더라. 근데 있는 대학이 몇 군데 없더라.”
무당인 어머니와 같이 살게 되면서 보고 들은 것 때문인지, 아니면 귀신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서인지, 어느 쪽이든 윤성이 흥미를 가질 만한 요소였다.
“너 답다. 흠. 국문학과나 사학과도 괜찮을 거 같은데.”
“그것도… 나쁘지 않네. 넌 어디로 갈거야?”
“나? 글쎄.”
하영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딱 잘라 말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게도, 이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도, 자신에게도 궁금한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귀신들과 함께 살아서 인가, 죽음이 무슨 의미인지, 어째서 어떤 귀신들은 세상에 남아 있는건지, 삶이 무엇인지? 만물에서 비롯된 궁금증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 하영은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네.”
“아직 시간은 많으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그러지 뭐.”
하영이 팔짱을 낀 채 팔을 문질렀다. 시원한 밤공기가 조금 차갑게 느껴졌다.
“슬슬 추워지는데, 그만 들어가봐. ”
“그래. 고마워. 이 시간까지 얘기 들어줘서. 부적도.”
윤성이 가볍게 미소지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봐.”
“학교서 보자.”
***
하영이 집에 돌아왔을 때 거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게 조심하면서, 하영은 방문을 천천히 열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책상 위의 책 더미가 눈에 들어왔다. 하영은 한숨을 쉬면서 책상으로 다가가다, 무언가 반짝이는 걸 눈치채고 시선을 옮겼다. 한쪽 면에 용이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열 수 있도록 버튼이 있는 은빛 목걸이였다. 하영이 급하게 목걸이를 잡자, 목걸이 밑의 종이가 팔랑거리며 떨어져 나왔다. 재빨리 다른 손으로 종이를 잡아들었다. 정갈한 글씨체로 ‘미안하다’가 적혀 있었다. 하영은 종이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뒤, 버튼을 눌러 로켓을 열었다. 로켓 안에서 어머니가 미소짓고 있었다.
하영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동안 보다가, 다시 목걸이를 닫은 후 서랍 안에 집어넣은 뒤,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오늘은 꿈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선명할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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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올렸던 소설 설정을 기반으로 작성한 소설입니다. 글 쓰는거... 어렵네요. 아무리 고쳐도 꼭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매일 나오는거 같아요. 특히 소설 시작을 어떻게 할지 정말 헤맸는데, 이렇게라도 시작을 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제목은 가제입니다. 괜찮은 제목이 생각나면 좋겠네요. 연재 형식으로 올리긴 합니다만, 한 권으로 묶는 장편을 목표로 하고 쓴거라 호흡이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재밌게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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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대체 무슨 일이죠...? 언급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만 이건 좀 무섭네요. 외부 링크라도 있나... 혹시 게시물 내에 이상이 있거나 하면 수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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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댓글
SiteOwner
2022-06-11 23:01:02
안녕하십니까, YANA님, 오랜만에 잘 오셨습니다.
새로운 소설의 출범을 축하드립니다. 여러모로 기대됩니다.
신영인이라는 가제에 혹시 어떤 한자를 쓰는지 알 수 있는지요? 이것도 꽤 좋은 제목같습니다. 그래서 한자가 궁금해지고 있습니다. 어떤 한자를 쓰는가에 따라 정말 크게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해서는 별도로 코멘트하겠습니다.
YANA
2022-06-11 23:24:10
댓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제일 쓰기 어려운 부분이었던 만큼, 다른 부분은 좀더 신속하게 써졌으면 좋겠네요. 빠르게 완성이 되진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남은 양을 보면 조금 막막하게 느껴집니다.
신영인은.... 이야기에 신과 영혼과 인간이 등장하니까 신+영+인이라고 하자! 라고 해서, 神靈人으로 했습니다. (영과 귀신을 제가 혼용하여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엄밀히 말해 다른 거라고 알고는 있습니다만... 특정 장면에선 귀신이라고 부르는 게 더 맞아 보이고, 다른 장면에선 영이라고 부르는게 어감이 맞아서 골치아프네요.) 정작 스토리는 주인공인 하영이가 겪는 에피소드 중심으로 돌아가서, 다소 생각해보면 살짝 어긋난 제목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여담이지만, 처음으로 적은 글인만큼 혹시 지적이나 조언을 주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아낌없이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취미로 시작한 거긴 합니다만, 기왕 적는거 좀더 나은 글을 적고 싶은 욕심이 생기네요.
SiteOwner
2022-06-13 20:41:33
한자가 그렇게 되는군요.
신과 영혼과 인간으로 신영인(神靈人)...확실히 바로 이해되는군요.
한 가지 제안입니다만, 발음을 그대로 두고 한자를 바꿔 보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신영인을 새로이 新影印으로 바꾸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이 겪은 것, 그림자같은 존재, 그리고 운명이라는 거대한 여정 끝에 찍는 종지부. 이렇게도 제안해 보겠습니다.
조회수 급증에 대해서는 이미 문의에 개별적으로 답변을 드렸습니다만 다른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을 옮겨 놓겠습니다.
예의 현상은 다른 게시물에서도 간간이 보이는 현상으로, 2017년에 리빌딩한 사이트 이전의 포럼의 게시물의 구 주소가 웹상에 캐싱되어 있어서 당시 게시물의 주소가 요즘의 신규게시물의 주소와 같을 경우에 간혹 이런 일이 발생하는 듯합니다.
YANA님의 게시물에는 어떠한 문제도 없습니다.
그럼 잠시후에 내용에 대해 별도로 코멘트하겠습니다.
SiteOwner
2022-06-13 20:59:16
그러면 이번에는 내용에 대해서.
처음부터 확실히 무섭다는 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무서움의 근원이 알 수 없는 존재의 근접이라는 게 더더욱.
15년 전의 투병생활을 종료하고 재활을 시작한 직후에 꾸었던 꿈도 저런 성격의 것이었다 보니 그때의 공포감이 다시 느껴집니다. 게다가 하영의 아버지가 물건을 막 버리고 험한 말까지 막 던져버린 데에 대해서는 갑자기 슬퍼지는 것도 있습니다. 오래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도 같이 생각나지만, 그때를 원망해서 뭐하겠냐는 생각도 같이 들고 해서 여러모로 복잡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하영에게는 윤성이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런 이해자가 어디에 있어야 할지에 대해 정답은 없습니다만, 적어도 지금의 하영에게는 윤성의 존재가 더없이 반가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중학생 때와 고등학생 때에 영적인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기도 했습니다. 이전에 언급한 조선의 귀신이라든지, 그리스-로마신화, 그리고 당시 크게 화제가 되었던 "숨겨진 성서" 로 불리던 사해문서의 해독판, 풍수지리 등 이것저것. 역시 입시라는 큰 부담을 눈에 앞두고 있어 모든 것이 불안한 수험생에게는 영적인 것의 영향을 받을 확률이 높고 특히 "그릇" 속성의 인물은 그 확률이 더욱 큰 게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이야기 자체로도 지난날의 경험과 대조해 가면서도 잘 읽을 수 있었습니다.
묘하게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그래도 읽어서 좋았다는 것은 절대로 숨길 수 없겠지만요.마드리갈
2022-06-14 22:33:20
이제 소설을 시작하셨군요. 출범을 축하드려요!!
상당히 무서운 시작이네요. 예전보다는 내성이 많이 늘긴 했지만 역시 저런 이상한 존재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끔찍하기 짝없는 일이죠. 게다가 그것에 대한 이해자가 가족에 없다는 것은 정말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위기상황이 있었고 그때 오빠가 좋은 이해자로서 활약해 준 게 있었다 보니 제가 하영의 입장에 있다면 과연 이겨낼 수 있었을지가 의심되면서 무서워지고 있어요.
나자르가 프롤로그에서부터 등장하네요. 이국의 문물이지만, 그것은 하영과 윤성의 마음을 이어주는 도구이기도 하겠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불가의 영역인 문제에의 솔루션이자...
무서운 시작이었지만 끝에서는 역시 미소지을 수 있었어요!!
제목은 원안 그대로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